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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신을 쫓고 복을 부른다

  • 조회수 968
  • 행사기간 2021.01.14 - 2021.01.14
  • 등록일 2021.01.14

기획특집

행복을 불러오는 그림 민화, 긍정의 예술특집 1역신을 쫓고 복을 부른다

이름 없는 화가들이 보는 이의 행복을 기원하며 그렸던 민화는 고된 삶 속에서도 건강하고 긍정적이었던 민중의 심성이 반영된 그림이었다. 본래의 주술적 의미는 쇠퇴했을지 모르나, 민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준다.

먼 옛날에도 감염병은 큰 재해였다. 바이러스가 전염병의 원인이라는 과학적 상식이 없었던 시대에는 귀신이 병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정월 초하루가 되면 집집마다 대문에 설화 속 용왕의 아들인 처용(處容) 그림을 붙여서 역신을 쫒아내려는 풍속이 생겼다.

이 풍속은 역사상 최초로 한반도에 단일 국가를 이루었던 통일신라시대(676-935)에서도 가장 태평성대를 누렸다는 헌강왕(재위 875∼886)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헌강왕이 동해안 울산의 개운포에 놀러갔는데, 대낮인데도 갑자기 하늘에 구름과 안개가 드리워지면서 어두워졌다. 상황을 심상치 않게 여긴 왕이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이는 용왕의 조화니, 용왕을 달래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왕이 용왕을 위해 절을 짓겠다고 약속하자, 바로 하늘의 조화가 사라졌다.

용왕은 보답으로 자신의 아들인 처용을 보냈고, 왕은 처용을 혼인시킨 후 벼슬을 내렸다. 그런데 처용 부인의 미모가 문제였다. 역신마저 그녀를 흠모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것이다. 어느 달 밝은 밤에 처용이 밤늦도록 놀다 귀가했을 때 사건이 벌어졌다. 역신과 자신의 부인이 잠자리에 든 장면을 목격한 처용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은 것을 어찌하리오”라며 용서했다. 처용의 관용에 감동한 역신은 이후 대문 앞에 그림만 붙여놓아도 얼씬도 하지 않았다.

최초의 민화
이 설화는 두 가지 점에서 우리에게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첫째,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퍼졌다는 점에서 처용문배는 기록상 최초로 확인되는 민화라는 점이다. 민화의 시작을 선사 시대 바위 그림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만, 기록상으로는 처용문배가 처음이다. 둘째, 처용이 역신을 쫓는 방식이다. 무섭거나 괴기스러운 모습으로 공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너그러운 아량으로 귀신을 감동시켜 쫓아냈다. 신라인의 역설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시대(1392~1910)에는 처용문배와 더불어 용호문배도(龍虎門排圖)의 풍속이 유행했다. 정월 초하루에 대문 한쪽에는 용을, 다른 한쪽에는 호랑이를 그려 붙이는 이 세시풍속은 벽사 기능만 하던 처용문배에 길상의 기능을 추가한 것이다. 인간에게 해로운 귀신은 호랑이가 쫒아내고, 인간에게 이로운 귀신은 용이 들여보낸다. 즉 호랑이 그림은 벽사 기능을 하고, 용 그림은 길상 기능을 한다. 이 둘은 같은 목적을 위한 다른 표현이다. 둘 다 가정의 평안과 행복을 유지하기 위한 주술적 수단이다.

상징적 이미지
상업의 발달과 함께 그림의 수요도 사회 여러 계층으로 확산되었던 19세기에 민화는 다양하게 발전했다. 모티프가 대폭 늘어나고 그 표현도 다채로워졌다. 무엇보다도 이미지를 통해 행복을 기원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일본 동지사대학의 기시 후미가츠(岸文和) 교수가 한국의 민화를 ‘행복화’로 부르자고 제안한 것도 그런 특징에 주목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 민화만 행복을 염원하지는 않았다. 중국을 비롯한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그림들 모두 행복을 추구했다. 복을 부르고, 출세를 기원하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미지 속에 담겨 있다. 이를 테면 모란• 연꽃•용•봉황•박쥐 등은 행복을 상징하고, 수박•석류•포도•연밥 등은 다남자(多男子)를 의미한다. 맨드라미•공작 꼬리•책•잉어 등에는 출세의 염원이 투영되어 있으며, 대나무•학•해•달•거북•사슴•불로초 등은 장수를 나타낸다. 이런 특색은 행복은 물론이거니와 사랑, 공포, 죽음 등 모든 정서를 포괄하는 서양화와 차별된다.

모란꽃이 부귀한 사람을 상징하게 된 것은 북송 시대 성리학자 주돈이(周敦頤)가 쓴 「애연설(愛蓮說)」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 글에서 모란을 부귀한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한편 국화는 은자(隱者), 연꽃은 군자(君子)에 비유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모란의 이런 상징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조선의 선비들이 숭앙했던 공자가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베더라도 낙은 또한 그 가운데 있으니, 의롭지 않은 부귀함은 나에게 있어서 뜬구름과 같으니라”(『논어』 ‘술이’ 편 With coarse rice to eat, with water to drink, and my bended arm for a pillow; I have still joy in the midst of these things. Riches and honors acquired by unrighteousness are to me as a floating cloud.)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선비들은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운운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행복을 염원하는 한국 민화는 밝은 색채와 해학이 넘치는 명랑한 정서로 표현됐다. 그림에 담긴 뜻뿐만 아니라 밝고 가벼운 이미지 자체가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유교적 덕목
19세기에는 상황이 뒤바뀌었다. 모란도가 가장 인기를 끄는 꽃그림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집 안에 모란도 병풍을 세워 가정을 행복의 공간으로 꾸몄고, 잔치 때에도 모란도 병풍을 둘러 그 행사를 빛냈다. 이는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 네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선비들의 인식이 현실적으로 바뀐 탓이라고 보인다. 근엄한 유교의 덕목을 중시하고 철학적인 논쟁에 집착하던 이들이 현실적인 욕망에 눈뜨게 되었다. 뒤늦게 ‘행복의 잔치'에 참여한 조선 사회는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보다 더욱 강렬하게 행복을 염원하게 됐다.

하지만 민화가 유교 이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교 윤리의 테두리 속에서 행복을 염원하는 양상을 보였다. 민화를 통해서 추구했던 길상적 욕망조차 유교의 형식에 기대어 풀어가는 이중성을 띠었다. 대표적인 예가 문자도다. 동아시아 다른 국가들에서는 행복, 출세, 장수를 의미하는 문자를 내세운 길상 문자도가 유행했지만, 조선에서만 유독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라는 유교 이념을 계속 중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문자 안에 담은 유교적 이상은 점차 약화되었고, 대신 꽃과 새의 도상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외형은 관습적 이념을 지향하는 듯했으나, 내면에는 행복을 염원하는 이미지들이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기묘한 현상이 벌어진 셈이다. 이에 따라 유교 문자도는 윤리가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가 아니라 행복의 욕망을 푸는 토대 역할을 하는 매우 독특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명랑한 정서
행복을 염원하는 한국 민화는 밝은 색채와 해학이 넘치는 명랑한 정서로 표현됐다. 그림에 담긴 뜻뿐만 아니라 밝고 가벼운 이미지 자체가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19세기 후반 조선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로 접어들었다.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이 한반도를 넘보면서 조선은 점차 망국의 길을 걸었고, 급기야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민화에서도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명랑하고 쾌활하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암울한 역사 속의 명랑한 그림’이었다.

놀랍게도 요즘 조선 시대 민화가 복고풍을 타고 다시 유행하고 있다. 주부들의 취미생활로 시작된 민화 그리기는 이제 어엿한 현대 미술의 한 장르로 발돋움하고 있다. 민화 작가들이 급증하고 현대 민화가 다양하게 발전하면서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런 붐을 일으킨 계기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민화가 우리에게 행복을 준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물론 주술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밝고 명랑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건강한 에너지를 전해준다. 늘 우리에게 긍정의 힘을 제공하는 것 – 이것이 민화가 지닌 가장 아름다운 덕목이다.

건축가 조자용의 민화 운동

민화와 함께 기억되는 이름이 있다. 조자용(Zo Za-yong 趙子庸 1926∼2000) – ‘Mr. Tiger’로도 불렸던 그는 최초로 한국의 민화를 본격적으로 모으고 연구하고 세상에 알린 사람이다.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건축과 토목공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그의 인생이 어느 날 인사동 골동품 가게에서 만난 호랑이 그림 한 장으로 인해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길로 들어섰다.

정병모(Chung Byung-mo 鄭炳模)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초빙교수

 

조자용의 학력이나 이력을 보면, 그가 어떻게 민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갸우뚱해진다. 그는 1947년 미국 유학을 떠나 밴더빌트대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했고,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건축공학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 건축학도였다.

1954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 돌아온 그는 유엔한국재건단(UNKRA)이 추진하던 문경 시멘트공장 건설에 참여하는 등 여러 건축 사업을 벌이면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 범어사 일주문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었는데, 네 개의 돌기둥을 한 줄로 세워서 무거운 지붕을 안정적으로 지탱하는 구조에 놀란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틈틈이 한국의 전통 건축을 찾아서 전국을 답사했고, 전통 건축의 부재인 기와 수집에도 열중했다.

까치호랑이
1967년 우연히 인사동 골동품상에서 떡살을 구입했는데, 이때 물건을 포장했던 종이 한 장이 그의 운명을 뒤바꿨다. 이 포장지에 인쇄된 민화 <까치호랑이>의 매력에 푹 빠져 민화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피카소의 그림을 연상케 할 만큼 현대적인 데다가 맹수인 호랑이를 친근하고 바보스럽게 표현한 점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늘날 이 그림은 한국 민화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의 모태가 되었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서 산신도의 호랑이에 주목하게 되고, 다시 그 그림이 민간신앙과 관련됨을 깨닫게 되었다.

<까치호랑이> 다음으로 그에게 충격을 준 민화는 <금강산도>다. 그는 이 그림에서 한민족의 우주관과 독창적인 한국화의 양식을 발견했다.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주력하지 않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일만 이천 봉우리들을 표현한 이 그림이 우주 창조의 형상을 담았다고 보았다. 실경 너머의 민화 정신과 애니미즘을 통찰한 것이다.

실용 회화
이후 그는 민화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활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국내 17회, 국외 12회의 민화 전시회를 기획하고 열었다. 특히 미국 유학의 경험을 살려 미국과 일본에서 전시회를 열고 강연한 일은 주목할 만하다. <금강산에서 온 보물들>(1976, 하와이대학 동서문화센터), (1980, 시애틀 와싱톤대학시립박물관), (1981, 오클랜드시립미술관), (1980, LA La Jolla 민예관), (1982, LA 민예관) 등 전시회 제목들을 보면 그가 우리 민화의 어떤 점을 해외에 널리 알리려고 했는지 드러난다. 아울러 그는 관련 저서와 도록 발간에도 힘썼으며, 국문뿐만 아니라 영문과 일문으로도 발간했다.

조자용은 민화를 인간 본연의 존재를 다룬 그림으로 보았다. 사회구조적인 개념의 틀로 규정되는 것이 아닌 인간 본래의 삶과 심성에 관련된 그림이란 넓은 의미로 보았던 것이다. 아울러 그가 설정한 민화의 범주에는 장식, 기록, 의례 등 실용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궁중 회화, 불화와 무속화와 같은 종교화까지 포함돼 있다. 그가 규정한 민화의 개념은 영국의 공예가 윌리엄 모리스의 ‘The Art of People’이나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화 개념과는 다른데, 순수 회화의 상대적 개념인 실용 회화를 가리킨다. 그는 민화의 의미를 확장함으로써 민화의 위상을 세우고 높이는 데 힘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요층에 따라 민화와 궁중 회화를 구분해서 보는 한국미술사학계의 의견과 개념상 일치하지 않아 논란의 여지를 남기기도 했다.

삼신사상
<까치호랑이>에서 시작된 민화에 대한 그의 관심과 사랑은 민화 전체로 확대되고 민화의 정신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졌다. 그는 민화를 통해서 한국 미술의 원류를 탐색했고, 기층 문화에 흐르고 있는 한국적 정신 세계의 바탕을 찾았는데 궁극적으로 그것은 샤머니즘인 삼신사상(三神思想)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한국 문화의 원형을 찾아가는 역정(歷程)을 그는 이렇게 정리했다.

“도깨비를 찾고, 호랑이를 찾고, 산신령을 찾고, 거북이를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희미하게나마 내 생부모 문화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로 별명으로 불러야 할 민문화(民文化) 속에서 내 민족 문화의 모태를 찾게 된 것이다. … 이를 찾노라 쉼 없이 고적을 찾아다니고, 자료를 수집하고, 박물관을 세우고, 해외 홍보에 나서고, 마침내는 삼신사(三神詞)를 세우고, 잃어버린 마을 문화 보호 운동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해프닝을 한데 모았다.”- 조자용, 『우리 문화의 모태를 찾아서』, 2000, 안그라픽스그는 2000년 대전 엑스포에서 오랫동안 꿈에 그리던 <어린이를 위한 왕도깨비, 용, 호랑이전>을 열었다. 하지만 지병인 심장병이 도지면서 전시장에서 민화에 둘러싸여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013년,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이들이 조자용기념사업회를 만들었고, 이듬해부터 매년 연초에 서울 인사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대갈문화축제’를 벌이고 있다. 민화를 통해서 기층 문화의 원류를 탐색하고 민화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힘쓴 조자용의 탁월한 발자취는 우리가 그를 길이 기억해야 할 이유이다.

정병모(Chung Byung-mo 鄭炳模)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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