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화장품 방문 판매원의 대명사인 ‘에이본 레이디(Avon lady)’가 있다면 한국에는 유산균 발효유를 가정과 직장에 배달하는 ‘야쿠르트 아줌마’가 있다. 1971년 처음 모습을 보인 야쿠르트 아줌마는 특정 기업 제품의 판매원이라기보다는 마치 친근하고 믿음직스러운 이웃처럼 인식되고 있다.
‘야쿠르트 아줌마’강미숙 씨는 새벽 5시에 집을 나와 매일 1만 보 거리를 걷는 고단한 일상에도 불구하고 모든 고객들을 항상 따뜻한 웃음으로 대한다. 19년 동안 한 동네에서 일해 온 그에게 주민들은 고객이자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이웃이다.
원피스를 입었을 때와 청바지를 입었을 때 걸음걸이가 같은 여성은 없다. 옷은 사람의 행동을 규정한다. 그 많은 옷 중에서도 유니폼은 가장 부자유한 옷이다. 입는 사람이 누구든 특정한 역할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그런 유니폼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군인, 경찰, 학생, 스님, 신부, 수녀, 환경미화원에서 야쿠르트 아줌마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강미숙(Kang Mi-suk 姜美淑) 씨는 유독 자신의 유니폼을 좋아하는 부류에 속한다.
“몸이 심하게 아픈 날도 저를 기다리는 고객들을 생각해서 나와요. 막상 일하러 와서 유니폼을 입으면 힘이 나니 참 희한해요. 전에 함께 일하던 친구가 ‘유니폼은 요술옷’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아요.”
1999년 4월부터 지금까지 만 19년을 야쿠르트 아줌마로 살았지만, 결근 한 번 한 적이 없는 미숙 씨의 말이다. 미숙 씨와 같은 유니폼을 입은 전국 1만 3,000여 명의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유산균 발효유 전문 업체 한국야쿠르트의 방문 판매인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들은 특정 업체의 직원이라기보다 친근하고 신뢰할 수 있는 방문 판매 사원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처럼 인식된 지 오래다. 하긴 이들이 전국을 누비기 시작한 것이 1971년 봄부터이니 그 역사가 거의 50년에 가깝다.
미숙 씨가 ‘요술옷’을 입고 야쿠르트 아줌마로 일한 지난 시간 동안 참 많은 것이 변했다. 유니폼 디자인이 여러 번 바뀌었으며, 판매하는 제품의 가짓수도 크게 늘었다. 제품을 나르던 손수레는 탑승이 가능한 냉장차로 발전해, 매일 1만 보 이상 걷던 수고를 어느 정도 줄여 주었다. 그러나 그의 일과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매일 아침 4시 반에 기상해서 5시면 집을 나서요. 집이 있는 파주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잠들면 1시간 반 후에 동자동 사무실에 도착하죠. 사무실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면서 ‘자, 또 하루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구나’ 하고 생각해요.”
19년간 맺은 인연들
강미숙 씨의 일터는 서울역이 있는 용산구 동자동이다. 서울역은 대도시 서울의 교통 대동맥이다. 시민들의 발인 지하철과 버스는 물론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기차와 광역버스가 쉼 없이 오간다. 그러나 서울역 앞 광장을 걷다 보면 햇살 쏟아지는 아침부터 술 냄새를 풍기며 거리에 쓰러져 자거나 비틀거리는 노숙인들과도 마주치게 된다. 또 고층 건물들 바로 뒤에는 실핏줄처럼 가느다란 골목들과 무너질 듯 서 있는 낡은 집들, 남루한 모습으로 그 집 앞을 서성이거나 어두운 방안에서 신음하는 독거노인들도 있다.
미숙 씨는 매일 발효유와 우유, 간편 식품 등이 200ℓ가량 실린 냉장차를 몰고 마치 밤과 낮처럼 다른 얼굴을 가진 동자동을 누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도 한참 올라가야 하는 사무실에서는 넥타이를 맨 고객들을, 승용차 한 대도 들어가기 힘든 골목에 납작 엎드린 단칸방에서는 독거노인들을 만난다. 그가 찾아가는 사람들은 냉장차 속 제품들보다 다양하지만, 그의 눈에는 결코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 똑같아요. 회사 안에서 아무리 높은 사람도 길에 나가면 다 보통 사람이잖아요? 저는 길에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제겐 다 같은 사람인 거죠.”
미숙 씨를 따라다니다 보면 그가 동자동 사람 모두를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요. 그래서 제 고객이 아니어도 저하고 친한 분들이 많아요. 회사원 고객을 찾아갔을 때 고객이 자리에 안 계시면 평소 저하고 친하게 지내던 옆자리 직원이 설명을 해 줘요. 무슨 일로 결근을 했다든가 무슨 일로 나갔으니 얼마 있으면 올 거라고요. 그렇게 친하게 지내다가 나중에 고객이 된 분들도 있죠. 영원한 고객도 없지만, 영원히 고객이 아닌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 누구에게 제품을 사라고 권하기보다는 그저 모두와 친하게 지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국의 야쿠르트 아줌마들을 대상으로 한 선발 대회에서 그가 ‘친절대상’을 받은 이유일 것이다.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야쿠르트 아줌마’들의 운송 수단은 어깨에 메고 다니는 가방에서 끌고 다니는 손수레로, 지금은 탑승 가능한 냉장차 코코(Coco)로 바뀌었다. 취급하는 제품들도 유제품에서 간편식, 커피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많았지만 강미숙 씨의 정성은 한결같이 변함이 없다.
비로소 세상을 배우다
미숙 씨가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활동하는 지역구는 동자동이다. 한 지역을 계속 맡기는 회사의 방침 때문에 평균 근속 기간이 9.6년인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동네의 사정을 그곳 주민들만큼 잘 알게 된다. 그렇게 한 동네에서만 오랜 시간을 보낸 미숙 씨의 고정 고객은 그에게 직접 돈을 지불하고 제품을 사 먹는 약 300가구의 일반 고객과 복지재단이나 정부의 지원으로 그의 방문을 받는 70가구의 독거노인들이다.
“동자동에 ‘서울역 쪽방상담소’가 있어서 그런지 동자동으로 지원이 몰린다고 해요. 그러다 보니 독거노인들도 이곳으로 모이시는 것 같고요. 제가 방문하는 70가구 중에 몸이 아주 안 좋은 분들이 한 열 분 정도 돼요. 아무리 바빠도 그분들은 매일 찾아뵈려고 하죠.”
말쑥한 차림의 직장인 고객을 대할 때나 독거노인 또는 노숙인들을 대할 때나 미숙 씨의 태도는 한결같다. 그는 결코 남의 삶을 평가하지 않고, 자신이 모두에게 도움이 되기만을 바란다.
“주변에서 노숙인들이 무섭지 않느냐고 묻곤 하지만 전혀 무섭지 않아요. 겉으로는 무서워 보여도 술 때문이지, 처음부터 악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미숙 씨는 동자동에서 보낸 세월 동안 그들로부터 어떤 봉변도 당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유니폼 덕분인 것 같아요. 언젠가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어떤 노숙인이 자기 멋대로 제 물건을 남들에게 나눠 준 적이 있어요. 그때도 화가 나진 않았어요. 그저 속으로 ‘그래, 먹고 배부르고 건강해라’ 하고 생각했죠.”
미숙 씨의 이런 긍정적 태도는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의 인생관을 반영한다. 언젠가는 상담심리사가 되어 남들의 고민을 풀어 주고 싶은 생각에 2002년엔 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에 입학하기도 했다.
“주부로만 살 땐 세상을 참 몰랐어요. 살림하고 아들, 딸 키우는 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아이들 얘기에 귀기울이기보다는 제 말을 거스르지 못하게 키웠어요. 이제 와 생각하면 미안해요. 야쿠르트 아줌마로 살게 되면서 세상을 배웠어요. 주부로만 살 때보다 시야가 넓어졌다고 할까요? 보는 게 많으니까 생각도 많아지더라고요.”
“매일 아침 4시 반에 기상해서 5시면 집을 나서요. 집이 있는 파주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잠들면 1시간 반 후에 동자동 사무실에 도착하죠. 사무실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면서 ‘자, 또 하루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구나’ 하고 생각해요.”
강미숙 씨의 담당 지역인 서울역 주변에는 고층 빌딩들이 늘어선 큰 길 뒤쪽에 일반 주택가가 있다. 냉장차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은 걸어서 배달을 해야 한다. 무지개 색깔로 칠한 이 가파른 계단도 그가 매일 다니는 길이다.
70세까지 입고 싶은 유니폼
미숙 씨는 워킹홀리데이로 외국에 나가 있는 딸이 만약 야쿠르트 아줌마를 하겠다고 하면 흔쾌히 하라고 할 생각이란다. 그 정도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가진 그가 이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은 1997년의 IMF 경제 위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인해 광고 식자 사업을 하던 남편은 졸지에 건설 노동자가 돼야 했고, 책 좋아하는 주부였던 미숙 씨는 생활비를 벌 요량으로 도서 대여점을 열었다. 책은 좋아해도 세상일엔 까막눈이어서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 문화비 지출부터 줄인다는 상식도 몰라 벌인 사업이었다.
“그때 도서 대여점을 하지 말고 바로 이 일을 했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뭘 몰랐던 거지요.”
도서 대여점은 곧 문을 닫았고, 그는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했다. 아이들에게 야쿠르트를 사먹이며 만났던 야쿠르트 아줌마의 모습이 좋아 보였던 데다가 아무런 자본 없이 시작할 수 있어서 마음이 끌렸다. 게다가 회사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제품을 판매하고 수수료를 받는 개인 사업자란 점도 좋았다. 그렇게 야쿠르트 아줌마가 된 미숙 씨는 매사에 긍정적이어서 ‘긍정 여왕’이란 별명으로 불린다.
“옛날엔 제품을 외상으로 먹고 갚지 않는 사람이 10%쯤 됐는데 지금은 1~2%밖에 안 돼요. 신용카드 덕에 외상으로 살 필요가 없어지기도 했지만, 그만큼 시민의식이 높아진 거죠. 착한 젊은 고객들을 만나면서 나라의 미래가 밝다는 걸 알게 되었고, 노숙인들과 독거노인들을 보면서 나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나중에 자식에게 짐 되지 않게 노후 준비를 잘하고 싶어요. 건강만 허락하면 70세까지는 이대로 배달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그다음에는 그때 하고 싶은 일을 할 거예요. 지금 휴학 중인 방통대 공부도 그때 계속할지 모르죠.”
동자동의 미숙 씨를 지켜 주고 키워 주는 게 유니폼과 고객이라면 동자동 밖의 미숙 씨를 지켜주는 건 종교다. 토요일과 일요일엔 주로 성당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의 세례명은 베르나데트(Bernadette)다. 베르나데트는 1844년에 태어나 열네 살에 프랑스 루르드에서 성모의 발현을 본 뒤 1933년 성인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런 세례명 때문인지 19년 동안 동자동에서 성모 대신 이웃의 수많은 얼굴을 봐 온 그의 유니폼이 구도자의 제복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