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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이후를 사는 이들의 윤리적 시차

  • 조회수 421
  • 행사기간 2019.07.05 - 2019.07.05
  • 등록일 2019.07.05

문학 산책

평론 상실 이후를 사는 이들의 윤리적 시차

2002년 스물둘의 나이에 등단한 김애란(Kim Ae-ran 金愛爛)은 이후 줄곧 경쾌하고 따뜻한 작품 세계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최근작에 이르러서는 특유의 명랑함 대신 담담한 어조로 상실과 헤어짐, 그리움 등을 조망하고 있다.

김애란은 동년배 작가들보다 짧게는 5~6년, 길게는 10여 년 앞서 출발했으며 80년대생 작가들의 소설을 특징짓는 어떤 흐름을 선도했다. 등단 이듬해 발표한 단편 「나는 편의점에 간다」를 비롯해 그의 초기 소설들에 등장하는 편의점, 고시원, 반지하방, 독서실, 옥탑방, 여인숙 등 좁고 허름한 공간들과 그것이 상징하는 21세기 청춘의 고단하고 암울한 현실은 그 흐름의 일부이다.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2005)에는 아홉 단편이 묶였는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에 ‘아버지’가 주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이 작품들에서 아버지는 부재하거나 무능력하거나, 그도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존재감이 희미한 상태로 등장한다. 표제작에서는 만삭인 아내를 버려둔 채 집을 나가 그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사랑의 인사」에서도 십수 년 전에 사라진 아버지는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에서 “집을 망하게 한 장본인”인 아버지는 불면증이 있는 딸의 자취방에 기숙하면서 심야의 텔레비전 시청으로 딸의 불면증을 더욱 부채질한다. 그나마 능력 있고 정상에 가까운 쪽이 「스카이 콩콩」의 아버지다. 그러나 전파상을 하는 이 아버지는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집을 나간 장남이 돌아오는 꿈을 꾼 날 고장 난 가로등을 고치겠노라며 가로등 기둥에 올랐다가 손이 시리다며 그냥 내려오고 마는 싱거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는 시사적이다. 소설 주인공인 아이는 어느 날 아버지에게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느냐고 묻는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질문에 여러 가지로 답하지만,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진실로 믿을 만하지는 않다. 결국 아이는 아버지 대신 스스로 제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기로 한다. 작품에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이제 아이는 스스로 이야기하려 한다”고 표현된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사라진 자리에서 아이가 이야기꾼으로 재탄생하는 것인데, 이는 ‘작가 김애란’의 탄생 설화로 읽을 법한 대목이자 그의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의 테마로 이어지는 설정이어서 의미심장하다.

© Gwon Hyeok-jae

김애란:“필요한 말은 무얼까 고민하다가 말보다 다른 것을 요하는 시간과 마주한 뒤 멈춰 서는 때가 잦다”

두 번째 소설집 『침이 고인다』(2007)에서 주목되는 것은 객관적으로 불리하고 불우한 상황을 주관적 심미화로 극복하려는 태도이다. 예컨대 장맛비에 물이 차오르는 반지하방에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장면이 나오는 「도도한 생활」이 대표적이다. 그런가 하면 표제작의 제목은 어린 시절 껌 한 통을 쥐여 주고는 사라져 버린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생리 현상으로 치환한 것이다. 「칼자국」에는 평생 국수를 팔아 자식들을 건사한 엄마가 등장하는데, 이는 김애란 자신의 자전적 배경과도 일치한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어려운 처지에서도 도도한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은 어머니라는 든든한 뒷배 덕분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김애란이 등단 10년째에 내놓은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2011)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등 일종의 ‘김애란 현상’을 낳았다. 조로증에 걸려 일찍 늙어 죽게 된 열일곱 살 소년이, 어린 나이에 자신을 낳은 부모의 만남과 사랑을 이야기로 만들어 부모에게 선물한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김애란 소설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를 극대화시켰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즉, 슬픔과 고통을 유머로 극복하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첫 장편 이후 묶어 낸 두 소설집 『비행운』(2012)과 『바깥은 여름』(2017)에서 ‘김애란 식 유머’는 거의 자취를 감춘다. 까닭은 크게 두 가지일 것으로 짐작된다. 우선 작가 나이 서른을 넘어서면서 젊음 특유의 경쾌함과 발랄함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 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사건들이다. 2009년, 서울시 용산 재개발 보상 대책에 반발하던 철거민들과 경찰이 대치하던 중 화재로 사상자가 발생한 ‘용산참사’와 2014년의 세월호 침몰 같은 사회적 아픔이 유머 충동을 억눌렀기 때문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김애란은 한 인터뷰에서 “농담을 할 수 없는 상황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 바 있다. 최근작 『바깥은 여름』 말미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의 말’에서 그는 “필요한 말은 무얼까 고민하다가 말보다 다른 것을 요하는 시간과 마주한 뒤 멈춰 서는 때가 잦다”고 밝히고 있는데, 작가의 마음이 만져진다.

재개발을 위한 철거의 어두운 그늘을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으로 그린 『비행운』 속 두 단편 「벌레들」과 「물속 골리앗」, 그리고 세월호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강력하게 그 비극을 환기시키는 『바깥은 여름』 속 두 단편 「입동」과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바로 그런 ‘상황’을 다룬다.

「풍경의 쓸모」는 가장 최근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의 표제작에 해당한다. 이 소설집에는 책 제목과 같은 단편이 들어 있지 않은데, 「풍경의 쓸모」에서 태국 여행 중인 주인공이 스노볼을 쥔 느낌을 묘사하는 문장에서 책 제목이 비롯되었다. “유리볼 안에선 하얀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이란 구절에서 드러나는, 유리볼 속 풍경과 바깥 계절 사이의 시차(時差)는 소설집 전체의 주제와도 연결된다. 이 소설집은 죽음과 상실 이후, 작가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절벽 이후’를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풍경의 쓸모」는 일찍이 불륜을 저지르고 이혼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거리감을 넘어 적대감을 지닌 채 어른이 된 아들의 이야기다. 자식의 처지에서 가정을 버린 아버지에게 호의적일 수 없음은 당연하다 하겠는데, 작가는 아들이 주장하는 윤리적 우위가 과연 정당한가를 묻는다.

‘나는 공짜를 바란 적이 없다’고 중얼거리는 그를 향해 누군가 “더블폴트”라 외치는 환청을 듣는 게 소설의 결말인데, 그 외침이 테니스 심판을 했던 아버지의 목소리임은 물론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평생 윤리적으로 단죄하고 심판해 왔지만, 소설 말미에서 정작 심판을 받는 것은 아버지가 아닌 아들이다. 이것을 ‘윤리적 시차’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최재봉(Choi Jae-bong 崔在鳳) 한겨레신문 기자(Reporter, The Hankyor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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