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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부는 한류의 뜨거운 바람

인도의 한류는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훨씬 더 먼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방식과 범위는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달랐다. 처음 인도인이 한국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자와할랄 네루가 3.1운동이라고 알려진 한국의 봉기에서 한국인, 특히 젊은이들이 보여준 용기에 찬사를 보내면서 일제로부터 자유를 얻기위해 한국인이 펼친 용맹스러운 투쟁에 대해 언급하면서부터다. 한국에서 이 대규모의 애국적 봉기가 잔인하게 진압되고 있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인도에서는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암리차르 학살)이 일어났다.2 이로 인해 양 국민 사이에는 친족과도 같은 친밀한 느낌이 형성되었다. 한국사에서 중요했던 바로 이 시기에 인도의 라빈드라 나트 타고르는 한국을 ‘동방의 등불(Lamp-bearer of the East)’로 묘사한 그 유명한시를 짓기도 했다. 한국의 대의에 대한 지지가 커감에 따라 인도국민회의는 1942년 연례회의 기간 중 한국민들의 영웅적인 독립 투쟁과의 연대에 대해 발표했다. 3



질곡의 역사와 함께해온 한류
일제로부터 해방한 직후 전쟁이 발발하고 이어진 한국의 분단은 한국인만큼이나 인도인의 마음에도 커다란 아픔을 안겨줬다. 영국 통치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직전 나라가 무참히 분단되는 고통을 당한 인도인만큼 한국인의 절망과 슬픔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이들도 없었다. 인도가 유엔한국 임시위원단(1947. 11. 14 설치) 의장국으로서, 38선이 국가간 경계선으로 바뀌기 전에 이를 없애버리려고 최선을 다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도는 “위원단의 관심 사항은 오직 한국의 독립과 통일을 용이하게 하여 미국 체제와 러시아 체제 중 자신에게 맞는 것을 택하여 고유의 전통 및 문화와 조화를 이루는 자신만의 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게 하는 데 있다”라고 진심으로 호소했다.
해방자로서 한국에 온 점령국들은 불행히도 이런 인도의 촉구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인도 일반 대중사이에 한국 문제에 대해 더 큰 이해와 우려를 낳았던 것은 1950~1953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이었다. 인도는 “북한군의 즉각적 전투 중지와 38선으로의 퇴각”을 요구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1950년 6월 25일자 결의안과 유엔 회원국들에게 “무력 공격을 물리치고 이 지역의 국제 평화와 안보 회복에 필요한 대한민국에 대한 원조 제공”을 요청한 6월 27일자 결의안을 지지했다.5 그러나 인도는 같은 아시아인 사이의 내분 유혈 사태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 병력을 보내는 것은 삼갔다. 대신 유엔군으로 참전하기 위해 의료 부대를 한국에 파견했다. “인도의 밤색 베레모는 도처에서 친절의 상징이 되었다. 그들의 손길은 기운을 북돋아주는 강장제 같았다. 부상당한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한국 군인들 모두 똑같이 인간적인 치료를 받았다. 심지어 적군 포로들도 인도인의 친절과 정중함에 감탄했다.”6 또한 인도는 복잡한 전쟁포로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함으로써 결국 휴전에 이르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한국 땅에서 인도 군의 존재 자체를 반대하던 이승만 대통령까지 인도 군이 떠날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토록 많은 일을 해낸 포로송환감시단의 인도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을 정도다. 이 모든 일들은 인도의 정치인 및 교육받은 엘리트들 사이에 한국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인도에서 정치적•학술적 형태의 한류를 일으킨 것이다.

학술 부문에서 이뤄진 한류
인도 학계에서 한국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을 고려하여 인도국제학대학(Indian School of International Studies: 1955년 인도국제문제위원회[Indian Council of World Affairs]8 후원으로 설립)은 학생들에게 주요 연구 분야로 한국학을 선택할 기회를 주기 시작했다. 몇몇 학생들은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문화와 문명에 대한 지식을 직접 체득하기 위해 한국에 유학했다. 그중 일부는 학술 분야 한류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류가 진정으로 거세지기 시작한 것은 1969년 뉴델리에 있는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언어•문학•문화학 대학에 완전한 한국어과를 설치하면서부터다. 1970년 6월에는 인도 국제학대학이 자와할랄 네루대학교에 통합되어 국제학대학(School of International Studies)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 대학에 독자적인 한국학과를 포함하는 동아시아학 센터를 설치하면서 인도학자들 사이에서 한류가 더욱 큰 힘을 받기 시작했다. 1977년 내가 이 대학에 연구원으로 합류한 후 연구 자료를 찾아 대학 도서관에 갔을 때 도서관 직원이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모두들 한국학을 찾으시네요.” 한국어과와 한국학과 모두 매년 인도 전역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그중 많은 이들이 두 가지 분야를 모두 전공했고, 그 후 인도 내 한국학 확산의 선봉에 섰다.
1980년대에 이르러 한국 관련 세미나와 회의가 거의 매년 뉴델리의 인도 국제센터에서 개최되었다. 나 역시 뉴델리 한국대사관 문정관의 제안으로 1995년 1월 괄리오르 시(델리에서 남쪽으로 3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에서 인도-한국회의(Indo-Korean Dialogue)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회의는 이런 종류로는 인도 중부의 마드햐프라데시라는 주에서 개최한 최초의 행사였다. 개막 세션에는 마드햐프라데시 각지에서 온 500명 이상의 교육자들이 참석했다. 이는 인도 핵심에 속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당시 한류의 영향을 점점 더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2001년에는 한국학 분야에 관심 있는 학생과 학자들의 커져가는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델리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 한국학 부문(Korean Studies Division)이 만들어졌다.
21세기가 시작될 즈음 학술 한류는 인도 남부까지 펴져갔다. 이런 동향을 보여준 것이 마드라스대학교의 한국어과 설치였다. 2007년 12월에는 인도 타밀나두의 주도인 첸나이(옛 마드라스)에서 한국의 예술과 문화에 관한 워크숍이 아주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나는 이 워크숍에 참석하면서 인도 남부의 몇몇 젊은 학자들이 꽤 열정적으로 한국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심지어 “대인도반도(Great Indian Peninsula)”9 의 남쪽에 위치한 탄자부르대학교에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세미나를 조직하는 데 나의 도움과 조언을 요청하기도 했다. 한류가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기까지 인도 전역의 학계를 휩쓸고 있는 것 같다.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경제 한류
인도의 또 다른 한류는 경제적인 것이다. 1980년대가 시작되면서 한국이 ‘아시아의 용’ 중 하나로 부상한다는 뉴스가 인도의 대중을 사로잡았다. “움직이는 한국(Korea on the Move)”10, “한국: 오늘과 내일(Korea: Today and Tomorrow)”11 같은 제목의 기사가 전국 일간지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인도인이 빈곤을 떨쳐내고 생활수준을 높이기 위해 여전히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한강의 기적’에 관한 소식은 그들의 상상을 자극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인도가 한국의 개발 모델을 본받아야 한다고 느꼈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농업 사회 중 하나를 중•상위의 소득을 올리며 급속도로 산업화하는 나라”12로 바꿔놓은 한국의 새마을운동이 거둔 성공을 자주 언급했다. 인도의 일부 사회 과학자들은 이 운동을 “경제개발과 개인의 전체적 인성 증진의 결합”이라며 칭찬했다.13 이런 식으로 인도 기업인들 사이에 한국 업체와 협력하려는 아우성이 커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인도 정부가 그때까지 추구했던 ‘할당-허가 체제’의 제한적 제도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주의적 양식을 포기하면서 시작된 경제 개방과 함께 기회가 찾아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양국 간에는 엄청나게 급속도로 발전하는 상업 및 산업 거래가 시작되었다. 럭키골드스타, 삼성, 현대 같은 한국의 대기업들이 인도에서 왕성하게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산 전자제품, 자동차, 직물은 인도 가정의 자랑스러운 소장품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경제 한류는 인도에서 전례 없는 규모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문화 한류의 새로운 바람
인도 방방곡곡에서 한국 제품의 교역과 전시가 성황을 이뤘음에도 인도 일반인에게 이런 제품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아시아 두 고대 문명 민족 사이의 이 역설적 틈을 좁혀야 할 필요성이 오랫동안 대두되었다. 요즈음 이를 위한 노력이 다양하게 행해지고 있다. 한국의 몇몇 문화 단체들의 방문과 공연이 인도 관객들 사이에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인적 교류와 접촉 외에 전국적인 방송 채널(두르다르산 방송)을 통해 <해신>, <대장금> 같은 한국 드라마가 높은 인기 속에 방영되기도 했다.
특히 한국 드라마는 외진 시골 지역은 물론 도시에 사는 수 백만 인도 시청자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와 문명을 소개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그중 <대장금>은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인도 시청자들 사이에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한국의 방송사가, 한국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벌인 투쟁과 최근 한국 사회의 변화를 묘사하는 드라마를 더 많이 제작하여 해외에 보급할 것을 제안한다. 이런 드라마는 전통에서 근대로 전환하면서 한국과 인도 사회가 겪은 상황과 혼란의 유사성 때문에 인도 시청자들 사이에서 더 많은 인기를 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루나(Karuna)> 같은 한국의 불교 관련 영화는 그 주제가 인도 사회에 깊숙하게 자리 잡은 정신과 일치하므로 인도 대중이 매우 좋아할 것이다. 또한 한국 불교의 다양한 측면을 다룬 방송물도 인도와 한국 사회 사이의 정신적 친근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인도는 그 자체가 다양한 문화와 문명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인도아대륙에는 서로 다른 기후와 지리적 조건을 지닌 많은 지역을 아우르는 너무나 다양한 음식과 옷과 미술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새로운 다양성이라도 인도관객의 호기심을 그리 많이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인도 사회는 여전히 분열되어 있고, 기로에 서 있으며, 너무나도 많은 차이가 나는 다양한 의견과 열망이 존재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인도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바로 목적과 발전에 대한 분명한 비전의 결합이다. 따라서 한국인이 일치된 행동으로 그들의 운명을 바꾸는 모습은 인도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인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은자의 나라 한국이 활기차고 번영된 나라로 탈바꿈하고 빠른 속도로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인도에서 한류가 만들어내는 주요한 자극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