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Arts & Culture

새로운 K-코미디의 흐름

Arts & Culture 2024 SPRING

새로운 K-코미디의 흐름 최근 한국의 코미디, 이른바 K-코미디에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다. 레거시 미디어에서 탈피해 유튜브 같은 뉴미디어로 주 무대가 바뀌면서 형식도 내용도 변화했다. < 피식대학(Psick University) > 은 그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피식대학의 인기 콘텐츠인 피식쇼에 가수 전소미가 게스트로 출연한 모습이다. 국내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캐나다 싱어송라이터 다니엘 시저, 미국 아티스트 미스치프 등 국내외 명사들이 게스트로 출연한다. 지난해 2023 백상예술대상에서 유튜브 채널로서는 최초로 TV 부분 예능 작품상을 받았다. ⓒ 메타코미디 “제 생각에는 코미디와 예술은 정말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시대가 변하게 되면 새로운 예술가들이 탄생하기 마련이죠. 이를테면 후기 인상주의처럼요. 우리는 유튜브의 반 고흐, 폴 고갱 그리고 폴 세잔입니다.” 유튜브 채널 < 피식대학 > 에 2021년 11월 업로드 된 콘텐츠 ‘더 토크’에서 “코미디는 뭐라고 생각하느냐”라는 MC의 질문에 개그맨 이용주가 답한 말이다. 그는 함께 < 피식대학 > 을 이끄는 김민수, 정재형 그리고 자신을 각각 ‘유튜브의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폴 세잔’이라 칭했다. < 피식대학 > 이 던지는 출사표 인터뷰 형식의 ‘더 토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코미디다. 유튜브라는 글로벌 플랫폼에 걸맞게 글로벌 토크쇼를 표방하고 있다. 그래서 외국 여성이 MC를 맡아 영어로 인터뷰를 진행한다. 물론 중간중간 콩글리시와 한국어가 사용되지만, 이들의 태도는 마치 미국의 유명 토크쇼에 출연한 것처럼 자신만만하다. 과도한 자신감으로 시작부터 자신들을 ‘세계에서 제일가는 최고의 코미디 그룹’이라고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유발한다. 하지만 이건 코미디면서 동시에 이들의 새로운 출사표처럼 여겨진다. 달라진 시대에 달라진 예술가가 나오듯, 자신들 역시 새로운 코미디를 열어가겠다는 것이다. 이 다소 황당해 보이는 토크쇼는 ‘더 피식 쇼(The PISIC SHOW)’라는 이름으로 < 피식대학 > 의 대표 콘텐츠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채널 구독자 수 293만 명(2024년 3월 기준)에 달하는 < 피식대학 > 은 한때 주말 저녁만 되면 온 가족을 TV 앞으로 모이게 했던 공개 코미디의 시대가 저물면서 급부상했다. KBS < 개그콘서트 > , SBS < 웃찾사 > , MBC < 개그야 > 까지 한동안 스타 개그맨들이 탄생했던 코미디 프로그램들은 한 때 공개 코미디의 전성시대를 구가했지만,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프로그램이 하나둘 폐지됐다. 급기야 지난 2020년 6월, 끝까지 버텨왔던 < 개그콘서트 > 마저 폐지되면서 공개 코미디 시대가 끝을 맺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23년 11월 < 개그콘서트 > 가 부활했지만 그 힘이 예전 같지는 않다. 그저 KBS라는 공영방송으로서 코미디의 명맥을 잇는다는 명분에 머무는 정도다. 공개 코미디의 시대가 저무는 사이, 여기서 빠져나온 개그맨들은 유튜브에 둥지를 틀고 새 길을 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개 코미디가 갖는 ‘서바이벌 구조’ 때문에 역량을 마음껏 펼치지 못했던 개그맨들이 유튜브에 개인 채널을 꾸리는 방식으로 시작됐다. 이후 유튜브에 적응된 코미디 콘텐츠들이 생겨나 인기를 끌면서 점점 채널 자체가 브랜드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한사랑산악회’나 ‘05학번이즈백’, ‘B대면데이트’ 같은 히트 코너를 만든 < 피식대학 > 이나 ‘장기연애’ 같은 하이퍼 리얼리즘의 성격을 가진 스케치 코미디를 만든 < 숏박스 > 가 대표적이다. 피식대학 콘텐츠 ‘05학번 이즈 백’에서 파생된 ‘05학번 이즈 히어’는 2005년 캠퍼스를 주름잡던 이들이 중년이 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20년대 한국의 30대가 당면한 사회상과 신도시 기혼 부부의 일상을 섬세하게 모사하여 시청자들의 공감과 인기를 얻었다. ⓒ 메타코미디 산악회에 소속되어 있는 중년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그린 피식대학의 ‘한사랑 산악회’는 주변에 정말 있을 법한 아저씨들의 모습을 다양한 캐릭터와 디테일을 살려 보는 재미를 더했다. ⓒ 메타코미디 달라진 미디어 플랫폼, 달라진 코미디 형식 달라진 미디어 플랫폼은 그 위에 얹어지는 코미디에도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공개 코미디는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펼치는 콩트 코미디에 머물러 있었다면, 유튜브 같은 새로운 미디어에서의 코미디는 배경부터 일상으로 옮겨졌다. 초창기에는 일상에서 펼쳐지는 몰래카메라가 인기를 끌더니 이후에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하이퍼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스케치 코미디가 전성시대를 구가하는 중이다. 또 개그맨 곽범, 이창호가 이끄는 < 빵송국 > 에서는 보정카메라를 이용해 탄과 제이호라는 2인조 보이 그룹 매드몬스터를 만들었다. 부캐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이 만들어지면서 이른바 ‘세계관 코미디’라는 장르가 생겨났다. 세계관이 갖는 과몰입은 그 가상 설정이 마치 진짜인 듯 몰입해 주는 팬들에 의해 실제 현실에서의 커머셜로 이어지기도 했다. 매드몬스터를 캐릭터로 한 굿즈 상품 같은 것들이 이벤트로 판매되기도 했던 것. 이처럼 레거시 미디어에 머물러 무대를 벗어나지 못했던 코미디들은 유튜브라는 열린 세계를 만나 그 소재나 형식 또한 다양해졌다. < 피식대학 > 의 ‘피식쇼’ 같은 코너는 유튜브라는 글로벌 플랫폼 덕분에 가능한 인기 토크쇼가 되었다. BTS RM에서부터 박재범, 손석구 등 국내의 내로라하는 스타들은 물론이고 글로벌 스타나 명사들도 출연할 정도로 인기다. 그래서 영화 <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의 배우 크리스 프랫이나 영화감독 제임스 프랜시스 건 주니어에게 세계 최고의 쇼에 출연한 기분을 묻고, 소설 「개미」의 저자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개미투자자의 미래를 묻는 식의 토크 코미디의 세계가 열렸다. 또 각각의 채널을 운영하면서도 이미 개그맨 선후배들로 연결된 이들의 관계는 다양한 협업을 통한 세계관의 또 다른 결합을 가능하게 했다. 일종의 유튜브를 플랫폼으로 하는 코미디 유니버스가 열린 것이다. 이후 유튜브에서 이미 확고한 브랜드를 갖고 있는 채널들이 모여 하나의 코미디 레이블인 메타 코미디가 설립되기도 했다. 유튜브를 기반으로 하는 코미디 레이블이 의미 있는 건, 그간 개인 채널로 산재해 있던 유튜브 코미디를 하나로 연합함으로써 실질적인 비즈니스가 가능하게 됐다는 점과 이로써 레거시 미디어의 코미디와는 다른 새로운 시대의 코미디를 선언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매드몬스터’는 빵송국의 구독자 수를 폭발적으로 높인 대표 콘텐츠다. 스마트폰 카메라 앱의 뷰티 필터 효과를 이용해 2인조 보이 그룹을 컨셉으로 활동했다. ⓒ 메타코미디 K-코미디, 글로벌 반향 가능할까 우리가 영국의 코미디언이자 배우였던 찰스 스펜서 채플린 주니어의 연기나 영국의 대표 시트콤 중 하나인 < 미스터 빈 > 을 보며 웃고 즐겼던 것처럼 코미디에 그 시대나 국가, 언어의 장벽이 있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이들 코미디가 언어보다 보다는 원초적인 몸의 언어를 활용하고 있는 특징을 보면 언어적, 문화적 장벽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웃음에는 그 문화권만이 갖는 독특한 정서 같은 것들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튜브 같은 글로벌 플랫폼은 오히려 이러한 정서적 장벽들을 허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피식쇼가 미국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로 활동하는 월터 홍을 만났을 때, 그는 이 쇼에서 어설픈 영어를 하는 개그맨들을 콕 짚어 “영어가 구리다”고 말하면서 언어유희를 하는 대목이 그렇다. 이용주가 ‘소개’라는 단어를 ‘Cow Dog’라고 표현하자, 월터 홍도 맞장구를 치며 ‘Cow Crab’이라고 하는 과정에서 한국어와 영어의 언어 장벽을 웃음이라는 코드로 승화시키기 때문이다. 웃음의 기원 중에는 낯선 이들이 야생에서 만났을 때 서로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즉 웃음에서 서로 다른 문화나 정서, 언어 같은 건 애초 넘지 못할 장벽이 아니라 넘어서야 하는 장벽으로서 존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 피식대학 > 같은 자칭 ‘세계에서 제일가는 최고의 코미디 그룹’이 앞으로 이 유튜브 같은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어떤 행보를 그려갈 것인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건 K-코미디가 글로벌을 향해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웃음을 매개로 그간 장벽으로 여겨졌던 것들을 허물어가는 길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정덕현(Jung Duk-hyun 鄭德賢) 대중문화 평론가

짭짤하고 구수한 바다의 맛

Arts & Culture 2024 SPRING

짭짤하고 구수한 바다의 맛 미역과 간장, 참기름을 메인 식재료로 끓이는 미역국은 싱싱한 미역이 주는 식감과 구수하면서도 감칠맛이 있는 국물이 만나 바다의 풍미를 자아낸다. 미역국은 오직 한국에만 존재하는, 태생부터 한국요리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생일을 맞은 사람이나 출산한 산모의 상차림에 빠지지 않고 올라가는 미역국은 한국인의 출생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음식이다. 한국에서 음식의 맛을 표현할 때 짭짤하다는 말은 대부분 맛깔스러운 감칠맛을 설명할 때 쓴다. 짠맛의 정도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적절한 수준을 잘 맞췄을 때 한국 음식은 감칠맛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적절한 짠맛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한 한국의 국물 요리 중 하나가 바로 미역국이다. 친근하고 특별한 음식 한국인에게 미역국은 친근하고 다정한 음식이다. 메인 식사로, 때로는 술안주나 다이어트식으로도 즐겨 먹는 대중 음식이기도 하지만, 미역국이 친근하고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다. 한국에서는 산모가 출산하면 식사로 미역국을 챙겼다. 왜 하필 미역국이었을까? 미역은 단백질과 당질, 섬유질, 칼슘, 비타민 A, 칼륨, 셀레늄 등을 비롯해 다양한 비타민과 미네랄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미역의 철분과 요오드 성분은 몸속 혈액의 원활한 흐름을 돕고 높은 철분 함유량으로 빈혈 예방에 탁월하다.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산모가 출산하면 반드시 챙겨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 통했다. 이것이 시초가 되어 한국 사람들을 생일이 되면 태어난 날을 기념하며 미역국을 끓여 먹는다. 생일날 온 가족이 모여 미역국을 나누어 먹으며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 한국의 풍습이기도 하다. 반대로 미역국 먹기를 꺼리는 날도 있다. 시험을 보는 날과 면접을 보는 날이다. 시험이나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뜻으로 쓰이는‘미역국 먹다’라는 말이 국어사전에도 있을 정도로, 이 두 날에 미역국을 먹으면 미끈거리는 미역국 때문에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떨어진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조리법 미역국의 레시피는 비교적 간단한 편이다. 재료는 마른미역과 소고기, 조선간장, 참기름, 그리고 소금 정도만 있으면 된다. 마른미역은 물에 넣고 충분히 불린 다음 물기를 짜고 4~5cm의 길이로 자른다. 소고기는 메인 재료라기보다 고소한 풍미를 살려주는 토핑 개념으로, 가로세로 1~2cm 크기로 작게 자른다. 냄비에 참기름을 두른 후 준비한 소고기와 미역을 넣어 겉면이 익을 때까지 볶는다. 이때 미역과 소고기에서 나오는 감칠맛이 고소한 참기름과 어우러지면서 맛깔스러운 향을 뿜어낸다. 뽀얀 국물이 우러나면 여기에 물을 추가로 넣은 다음 조선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30분 이상 끓여주면 완성이다. 물은 생수를 넣어도 되지만 더욱 진한 맛을 내려면 멸치로 우려낸 육수나 쌀뜨물, 또는 사골국물(소뼈를 장시간 우려 만든 국물로 묵직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을 넣으면 된다. 미역국에 다진 마늘을 조금 넣으면 풍미가 더 살아나는데 미역과 소고기 본연의 맛에 집중하고 싶다면 생략해도 좋다. 미역국의 가장 기본 형태는 미역과 소고기를 재료로 만든 것이며, 지역 환경이나 특산물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오래 끓일수록 깊어지는 맛 미역 특유의 오독오독하면서도 미끌미끌한 식감과 짭짤한 국물, 고소한 소고기와 만나면 그 감칠맛이 배가된다. 미역은 해초의 일종인데 바닷속에 살면서 바다 향을 가득 품고 있기 때문에 그냥 먹으면 바다의 짠맛과 비릿한 맛이 강하게 난다. 그러나 깨끗하게 씻은 후 물에 불리는 과정을 통해 짠맛이 어느 정도 씻겨 내려가 은은한 바다의 맛과 향만 남는다. 미역을 소고기와 함께 참기름에 볶고 또 물에 끓이는 동안 각 재료의 맛이 우러나기 때문에 미역국은 오래 끓이면 끓일수록 감칠맛이 더욱 살아난다. 끓인 후 바로 먹을 때보다 두 번째, 세 번째 먹을 때 훨씬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뜨끈한 미역국에 달게 지은 흰 쌀밥을 말아 맛있게 담가 푹 익힌 김치를 올려 먹으면 그 자체로 한 끼 보약이 된다. 뜨겁고 묵직한 감칠맛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면서 또 가장 익숙한 맛이다. 미역국처럼 미역이 메인 재료가 되는 국물 요리는 한국에만 있는 전통음식이다. 다른 나라에선 구경조차 어렵다. 간혹 일본에서 미소된장국에 미역을 넣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매우 소량인 데다 어디까지나 된장이 메인이지, 미역이 주인공인 메뉴는 아니다. 그렇기에 한국의 미역국은 외국에선 다소 생소한 음식으로 통한다. 서울 종로구에서 한식 레스토랑 두레유를 운영 중인 토니 유 셰프는 이탈리아 유학 시절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미역국을 끓여준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해외 각국의 유학생들 모두 미역국을 보곤 “이 시커멓고 미끄덩거리는 이상한 물체는 무엇이냐?”라며 질색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 번 맛을 본 후로는 “앙코르 미역국”을 요청했다. 그들에게 미역국은 생소하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중독성 있는 맛있는 미역 스튜였던 것이다. 산모 미역이라 불리는 미역은 바다에서 갓 채취해 해풍과 햇볕으로 말린 것을 말하며, 억세지 않고 진한 국물을 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지역별로 특색 있는 미역국 한국의 국물 요리는 그 종류가 무엇이 됐든 대체로 지역마다, 가정마다 먹는 형태나 들어가는 재료가 조금씩 다르다. 이는 지역별 특산물이 다르고 집마다 즐겨 먹는 재료 또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미역국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미역과 소고기를 넣는 것이지만 소고기 대신 바지락이나 동죽, 홍합과 같은 조개류를 넣기도 하고 가자미나 꽁치, 갈치 등의 생선 종류를 넣기도 한다. 그야말로 육해공을 어우르는 국물 요리인 셈이다. 꽁치 요리를 즐기는 울릉도에서는 소고기 대신 꽁치를 넣은 꽁치 미역국을 먹는다. 이때 꽁치는 살만 발라내 녹말가루, 달걀물 등의 재료와 함께 반죽한 후 작은 볼 형태로 만들어 국물에 넣는 것이 특징이다. 꽁치는 다른 생선에 비해 지방이 많지 않고 고소해 미역국에 넣었을 때도 전혀 비리지 않고 오히려 담백한 매력이 있다. 경상도의 일부 지역에선 새알 미역국을 먹는다. 새알은 찹쌀가루를 동그랗게 말아 반죽한 것으로 쫀득거리는 새알의 식감과 미역의 오독오독한 식감이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자아낸다. 제주도 지역으로 가면 성게알을 넣고 끓인 성게알 미역국이 있다. 자연산 성게알은 한국에서 매우 귀한 재료로 통하는데, 마치 푸딩을 먹는 것처럼 크리미하면서 특유의 신선하고 짭짤한 바다의 향이 가득해 제주도의 성게알 미역국은 일반 미역국과 다르게 고급 음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밖에 북어(생선 명태를 말린 것)를 넣은 북어 미역국, 닭가슴살을 잘게 찢어 넣은 닭고기 미역국, 갈치를 넣은 갈치 미역국, 새우를 넣은 새우 미역국 등 한국에서 먹는 미역국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다양한 변주 미역국의 종류가 다양하고 한국인이 오랫동안 즐겨 먹은 것에 비해 한국에 미역국 전문식당이 많지 않은 건 아이러니하다. 아무래도 미역국은 가정에서 쉽게 끓여 먹는 지극히 일상적인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해 외식 아이템으로서는 비교적 인기가 없었던 이유가 크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는 미역국 맛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일반적인 소고기 미역국 대신 특별한 재료를 넣은 미역국을 선보인다. 그중 가자미 생선을 통째로 넣어 압도적인 비주얼을 살린 가자미 미역국, 고급 재료인 전복을 넣은 전복 미역국, 소고기 중에서도 매우 귀하고 비싼 부위로 통하는 차돌박이를 가득 담아낸 차돌박이 미역국 등이 인기다. 미역국에 들어가는 물도 일반 생수 대신 다양한 조개류와 육류를 넣고 오랜 시간 끓인 육수를 사용해 맛이 훨씬 풍부하고 진하다. 평범한 미역국이지만 색다른 재료와 특별한 육수를 조합하니, 또 하나의 새로운 요리로 탄생한 것이다. 혹시나 한국에 방문하게 된다면 반드시 미역국을 맛보길 바란다. 시커멓고 미끄덩한 미역의 모양새가 낯설게 느낄 수 있을지 모르나, 뜨거운 미역국에 갓 지은 찰진 밥을 말아 한 그릇 든든하게 비우고 나면 이만큼 귀한 음식이 없다고 여길 것이다. 황해원(Hwang Hae-won 黃海嫄) 월간외식경영 편집장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꽃을 만들어 피우다

Arts & Culture 2024 SPRING

꽃을 만들어 피우다 궁중채화(Royal Silk Flower, 宮中綵花)는 궁중 연희나 의례 목적에 맞게 비단이나 모시 등으로 제작한 꽃을 말한다. 명맥이 끊어진 조선(1392~1910) 왕실의 채화를 되살린 황수로(Hwang Suro, 黃水路) 장인은 2013년 국가무형문화재 궁중채화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황 장인의 아들 최성우(Choi Sung-woo, 崔盛宇)가 어머니의 뒤를 이어 궁중채화 제작과 연구에 힘쓰고 있다. 궁중채화는 염색, 다듬이질, 마름질, 인두질 등 숱한 손놀림을 거쳐야 비로소 꽃 한 송이가 완성된다. 궁중채화 이수자 최성우는 정교한 수작업 덕분에 자연 그대로의 꽃을 구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통의동(通義洞) 길은 경복궁 서문(西門)인 영추문(迎秋門)을 마주 보고 있다. 이곳을 걷다 보면 현대식 건물 사이로 2층짜리 낡은 건물이 눈에 띈다. 옛날 형식 그대로인 간판에는 ‘보안여관’이라는 상호가 적혀 있다. 1936년 생긴 이 숙박업소는 2004년까지 운영되다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이후에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통의동 주변 일대는 도시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낡은 건물이 부수어지고 새것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보안여관도 사라질 운명에 처했지만, 이곳을 인수한 최성우 대표는 더 이상 사람이 머물 수 없는 공간을 문화예술이 숨 쉬는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도심 한복판에서 옛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남은 건물의 울림은 의외로 컸다. 보안여관은 과거를 현재로 소환해 새로운 가치를 보여 주었고,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었다. 최 대표가 오늘날 통의동을 비롯한 서촌 일대의 부흥을 견인한 문화 기획자로 인정받는 이유다. 궁중채화의 복원 국가무형문화재 궁중채화 이수자인 최 대표의 작업실은 보안여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신관 4층에 자리한다. 그의 어머니는 전승이 끊어지다시피 했던 궁중채화를 되살려 낸 황수로 장인이다. 한 개인의 집념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자칫 사라질 뻔했던 문화유산을 되살려 냈다. 2013년 궁중채화가 국가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채택될 때 황 장인이 첫 번째 기능보유자가 된 이유다. 채화는 비단이나 모시 등으로 만든 꽃을 말하며, 궁중에서 왕실 연회나 주요 행사에 사용되던 것을 궁중채화라 한다. 궁궐에서는 항아리에 꽂아 어좌를 장식하는 준화(樽花), 연회 참석자들의 머리에 꽂는 잠화(簪花), 잔칫상에 올리는 상화(床花) 등으로 구분하여 사용했다. 조선 시대 각종 행사를 정리해 기록한 의궤(儀軌)에 보면, 왕의 어좌 좌우로 홍벽도화준(紅碧桃花樽) 한 쌍과 꽃으로 꾸민 무대인 지당판(池塘板) 등이 그려져 있고, 연회에 참가한 이들은 모두 왕이 하사한 홍도화(紅桃花)를 머리에 꽂고 있다. 문헌에는 꽃의 종류와 크기, 만드는 과정, 개수, 비용 등이 낱낱이 기록돼 있다. 정조(재위 1776~1799)는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8일 동안 성대한 잔치를 열었는데, 이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채화 1만 1,919송이가 사용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채화가 유물로 전하는 것은 없지만, 황 장인은 이러한 문헌들을 교과서 삼아 복원에 성공할 수 있었다. 채화는 염색과 조립, 설치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우선 꽃으로 만들기에 적합한 비단을 홍화(紅花), 치자(梔子) 등 자연에서 채취한 염료로 염색하여 풀을 먹인다. 그런 다음 홍두깨로 두드려 윤기와 탄력을 더한다. 그러고 나서 꽃잎을 마름질한 다음 불에 달군 인두에 밀랍을 묻혀, 꽃이 피어 있는 모양새대로 하나씩 다려서 형태를 만든다. 여기에 송홧가루를 묻힌 꽃술을 끼워 고정한다. 준비한 가지에 완성한 꽃들을 잎, 꽃봉오리와 함께 설치하면 끝이다. 채화는 염색부터 마무리까지 손으로만 작업하기 때문에 한 종류의 꽃이라 하더라도 똑같은 빛깔과 형태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이 시중에서 판매하는,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 내 만든 조화(造花)와 다른 점이다. 홍벽도화준(紅碧桃花樽)은 궁중 의례 시 정전(正殿)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용도로 쓰였는데, 붉은색과 흰색의 복숭아꽃을 어좌 좌우에 각각 하나씩 배치했다. 높이가 3m에 이르러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준다. 한국궁중꽃박물관 제공 황수로 장인이 1829년 창경궁에서 열렸던 잔치에 쓰인 지당판(池塘板)을 재현한 작품이다. 지당판은 궁중 무용이 펼쳐지는 무대를 꾸몄던 도구로, 받침대 위로 좌우에 연꽃을 놓고 그 주변에 모란 화병 7개를 배치했다. 한국궁중꽃박물관 제공   어머니의 제자가 되다 최 대표는 1960년 황수로 장인의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외가인 부산 초량동(草梁洞) 적산가옥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냈다. 그의 외조부는 국내 최초로 코르덴이라는 직물을 생산한 태창(泰昌)기업 창업자 황래성(Hwang Rae-sung, 黃來性) 회장이고, 아버지는 도쿄대 출신의 농학자로 외조부의 뒤를 이어 회장을 지낸 최위경(Choi Wee-kyung, 崔胃卿)이다. "어머니가 무남독녀라 저는 거의 외조부모님 손에서 자라다시피 했어요. 깐깐하기로 소문난 제 어머니도 꼼짝하지 못할 만큼 엄했던 외할아버지였지만, 제겐 자상한 분이셨죠. 제가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문화 경영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1980년대 초, 그는 연극과 마당극 등을 통해 현실 참여 활동을 하며 대학 생활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다가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파리 제1대학교에서 미술사로 박사 과정을 마치고, 프랑스 문화부 연구 단원으로 뽑혀 2년간 연수 기회를 가졌다. "13개국에서 한 명씩 뽑아 유럽 최고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게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었죠. 일반인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박물관 수장고와 시스템들을 원하는 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유럽의 여러 축제들을 비롯해 문화 기관들을 방문하고 연구해 볼 기회도 가졌습니다. 이때 전통적 가치를 동시대인의 삶에 융합하는 문화 경영에 눈을 뜨게 됐죠.” 1993년 그는 7년 반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집안 사정으로 가업을 떠맡게 됐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지 10여 년 만에 그는 보안여관으로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고, 이 무렵 눈에 들어온 것이 궁중채화였다. "2007년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한국공예대전에 어머니를 도와 처음으로 화준(花樽, 꽃항아리)을 출품했을 때였어요.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겠다고 저희 쪽으로 일제히 몰려드는 거예요. 꽃은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인류 공통의 언어였던 거죠.” 궁중채화에 대한 열렬한 반응은 2013년 밀라노 한국공예대전에서도 이어졌다. 어려서부터 보고 자라서 채화가 익숙하긴 했지만, 그에게 계승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어머니에게 채화를 배우러 온 사람들이 이수자가 되어도 수요가 거의 없으니, 결국에는 모두 떠나곤 했죠. 그래서 제가 전수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왜 내가 해야 하지?’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2014년 < 아름다운 궁중채화전(Beautiful Royal Silk Flower)>을 준비하면서 그제야 채화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됐죠.”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렸던 이 전시는 순조(재위 1800~1834)의 40세 생일과 등극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829년 창경궁에서 열렸던 당시의 잔치를 재현해 화제가 됐다. 이후 그는 염색부터 시작해 황 장인에게 본격적으로 전수를 받았고, 2019년 이수자로 인정받았다. 황 장인이 사재를 털어 경상남도 양산(梁山)시에 건립 중이던 한국궁중꽃박물관이 같은 해 완공돼 문을 열었다. 그는 이듬해 궁중채화의 교육과 발전을 위해 ‘궁중채화서울랩’을 열었고, 현재 어머니의 뒤를 이어 한국궁중꽃박물관장을 겸하고 있다. "궁중꽃박물관이 변하지 않아야 할 전통적 가치를 보존한다면, 궁중채화서울랩은 현대적 확장을 모색하고 실험하기 위한 연구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궁중채화서울랩(Royal Silk Flower Seoul Lab)에서 채화 제작을 가르치고 있는 최성우 이수자. 그는 궁중채화의 전통적 가치가 동시대에 공명(共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확장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일환으로 궁중채화서울랩을 창설했다. ⓒ 한정현 현대적 조형물 최 대표는 2023년 9월부터 11월까지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진행된 < 공예 다이얼로그 > 전시에서 전통적인 홍벽도화준과 함께 채화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해석한 작품도 보여 주었다. "궁중채화의 조형적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자연이 선사하는 아날로그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채화의 전통적 가치가 오늘날에도 이어지기 위해서는 동시대의 기법, 수단, 방법이 활용돼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언어로 표현된 창조적 조형물이 궁중채화의 전통성과 함께 구현되어야 하죠." 채화가 우리 시대에 어떻게 쓰일 것인가의 문제는 이수자이자 문화 기획자로서 그가 풀어가야 할 과제이다. 2023년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진행된 < 공예 다이얼로그 > 전시 모습. 최 이수자와 궁중채화서울랩 작가들이 함께 제작했으며, 궁중채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한국궁중꽃박물관 제공 이기숙(Lee Gi-sook, 李基淑) 작가

인플루언서가 된 한국의 캐릭터들

Arts & Culture 2024 SPRING

인플루언서가 된 한국의 캐릭터들 국내 캐릭터 콘텐츠 산업은 캐릭터의 세계관을 확장하고 다양한 형식을 활용하는 전략을 통해 지식재산권 산업의 핵심으로 부상 중이다. 기존에는 아이들과 키덜트에 한정되었던 캐릭터 소비문화가 전 세대로 확산되고 있으며, 한국산 캐릭터들의 인기가 국내를 넘어 세계로 향하고 있다. 2022년 5월, 경기도 의왕시에 위치한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 타임빌라스(Time Villas)에서 15m 크기의 초대형 벨리곰을 구경하고 있는 방문객들. 벨리곰은 롯데홈쇼핑이 2018년 제작한 캐릭터로, 기업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캐릭터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 ⓒ 벨리곰 휴대전화 메신저의 이모티콘 서비스는 이제는 남녀노소 누구나 사용할 정도로 일상화되었다. 또한 집 앞 편의점에서 캐릭터 인형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요즘은 캐릭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국내에서 캐릭터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가리키는 용어에 불과했다 캐릭터 시장의 발전 캐릭터 개념이 확장된 시기는 국내 팬시 용품 산업이 발달하면서 캐릭터 시장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1980~90년대이다. 특히 만화가 김수정(Kim Soo-jung, 金水正)의 (1983~1993)는 만화 잡지 『보물섬(Bomulseom)』에 10년간 연재되었는데, 독특한 캐릭터들과 감칠맛 나는 대사가 큰 인기를 끌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완구, 문구를 비롯해 의류, 전자 제품, 바닥재 등 다양한 상품으로 개발되었다. 그런가 하면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은 초고속 인터넷망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던 시기로, 당시 등장했던 인터넷 기반의 플래시 애니메이션들은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들을 대거 선보이면서 캐릭터 향유층을 넓히는 데 한몫했다. 그중 김재인(Kim Jae-in, 金在仁) 작가의 주인공인 마시마로(Mashimaro)는 ‘엽기 토끼’로 불리며 폭발적 인기를 누렸고, 미국과 일본에 진출했다. 같은 시기, 캐릭터 디자인 기업 부즈클럽(VOOZCLUB)이 제작한 뿌까(Pucca)는 유럽에 진출해 성공을 거두었다. 마시마로와 뿌까는 그동안 해외 캐릭터들 위주로 소비되었던 국내 시장에서 국산 캐릭터의 점유율을 높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한편 2010년대에 들어 스마트폰 도입은 캐릭터 산업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KakaoTalk)은 자체 개발한 이모티콘 캐릭터 카카오 프렌즈(Kakao Friends)를 2012년부터 서비스했는데, 큰 인기에 힘입어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조사한 캐릭터 선호도 조사에서 2017년 1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소통의 도구였던 카카오 프렌즈는 사용자들이 캐릭터들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존 캐릭터들과는 다른 차별성을 지니며, 국내 캐릭터 산업에 새로운 전환기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된다. 팬덤 형성 현재 한국의 캐릭터 콘텐츠는 소비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최근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기업에서 자체 캐릭터를 개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2024년 1월 서울 성수동(聖水洞)에 자리한 플래그십 스토어 ‘GS25 도어 투 성수(DOOR to seongsu)’ 앞은 팝업 스토어 기간 동안 무무씨(MOOMOOSSI)를 보러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무무씨가 그려진 입간판 앞에는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늘어섰다. 무무씨는 편의점 브랜드 GS25를 운영하는 GS리테일이 티베트 여우를 의인화해 2022년 론칭한 캐릭터로, 인스타그램에서 2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확보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GS리테일은 무무씨 굿즈의 1년 누적 판매량이 100만 개가 넘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밝혔다. 2018년 롯데홈쇼핑이 사내 벤처를 통해 제작한 캐릭터 벨리곰(Bellygom)은 기업에서 만든 자체 캐릭터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 캐릭터는 유튜브에서 몰래카메라 콘텐츠를 통해 인지도를 확보하며 팬덤을 모았으며, 2022년에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하는 대한민국콘텐츠대상에서 캐릭터 부문 대통령상을 받았다. 최근 벨리곰의 인기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는 모양새다. 이에 따라 롯데홈쇼핑은 벨리곰 IP의 해외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다. 무무씨와 벨리곰은 이제 캐릭터가 전면에서 소비자를 모으고 팬덤을 형성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공공 영역에서도 캐릭터를 활용한 소통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추세다. 지자체가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캐릭터를 활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 중반으로 당시에는 마스코트 이상의 효과를 얻지 못했다. 이후 경기도 고양특례시가 시 홍보를 위해 2011년 개발한 ‘고양고양이’가 성공하면서 캐릭터를 통한 지역 발전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는 경기도 용인특례시의 대표 캐릭터 ‘조아용’이 주목받고 있다. 2016년 첫선을 보인 이 캐릭터는 유튜브와 이모티콘 등 콘텐츠를 다변화하고, 신규 디자인을 꾸준히 개발한 점이 인기 유지 요인으로 꼽힌다. 최근 에버랜드와 협력하여 제작한 상품은 출시 2주 만에 4천 개가 넘게 팔려 공공 기관의 캐릭터도 상품성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GS리테일이 2022년 론칭한 무무씨는 인스타그램에서 2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확보하며 인지도를 높였고, 50종에 달하는 관련 굿즈도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 GS리테일 서브 캐릭터의 등장 서브 캐릭터가 주목받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잔망 루피(Zanmang Loopy)가 대표적이다. 이 캐릭터는 유아용 TV 애니메이션 의 등장인물 중 하나다. 2003년 EBS에서 첫 방송을 시작한 이 작품은 주인공 뽀로로를 ‘아이들의 대통령’이라고 부를 정도로 흥행했다. 뽀로로 캐릭터 상품도 불티나게 팔려 국산 캐릭터가 수입 캐릭터 점유율을 처음으로 앞지르게 되었고, 이로써 한국 캐릭터 산업의 역사를 바꾼 주역으로 평가되었다. 한편 원작에서 뽀로로의 친구로 등장하는 비버 캐릭터 루피(Loopy)가 인터넷 밈을 통해 화제가 되고, 2020년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도 출시되었다. 원작의 뽀로로가 유아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데 반해 잔망 루피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이 캐릭터는 젊은 세대에게 각광받는다. ‘잔망(孱妄)’은 행동이 얄밉고 맹랑하다는 뜻이지만, 속시원하게 할 말을 하는 야무지고 귀여운 캐릭터로 인식되면서 젊은 층에게 큰 공감을 얻고 있다. 이 캐릭터는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불가리의 앰버서더로 활동하거나 『보그 코리아』 화보 모델이 되는 등 캐릭터 컬레버래이션의 범위를 크게 확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잔망 루피의 인기가 중국에까지 확산되는 중이다. 2023년 5월 중국 SNS 플랫폼인 샤오훙수(Xiaohongshu, 小紅書)에 개설된 공식 계정은 7개월 만에 팔로워 수가 440만 명을 넘어섰다. 최근 20~30대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잔망 루피는 2003년 EBS에서 첫 방송을 시작한 TV 애니메이션 의 등장인물 중 하나다. 인터넷 밈을 통해 화제가 되면서 인기 캐릭터로 부상했고, 국내외 유명 브랜드들의 앰버서더나 모델로 다양하게 활동 중이다. 2023년에는 생수 브랜드 제주삼다수와 컬래버레이션하여 친환경 메시지를 전했다. ⓒ I/O/E/SKB 다양한 플랫폼 캐릭터 산업은 이제 단순한 굿즈 판매를 넘어선다. 캐릭터가 팬덤을 형성하는가 하면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플루언서로 활동한다. 이는 캐릭터 향유층의 세대 변화가 주요한 원인이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와 게임을 통해 캐릭터 소비가 익숙했던 세대가 어른이 되면서 캐릭터 산업의 주요 소비층이 된 것이다. 아이들이나 일부 키덜트의 문화로 여겼던 캐릭터 소비가 어른들의 문화로 확장되었다는 뜻이다. 더불어 각자의 취향과 취미를 존중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깊이 파고드는 젊은 세대의 성향은 캐릭터 콘텐츠가 다른 영역으로 확장될 때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토대가 된다. 캐릭터의 세계관을 확장하며 시대에 부응하는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것도 또 다른 요인이다. 예전에는 캐릭터 콘텐츠 소비가 TV 같은 전통적 매체에서 주로 이루어졌지만, 최근에는 자체적으로 구축한 채널을 비롯해 유튜브, 틱톡, SNS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다각적으로 유통된다. 이에 따라 콘텐츠 표현과 제작 방식이 더욱 자유로워졌고, 젊은 세대의 감성을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존에는 캐릭터로 어떤 파생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지만, 이제는 캐릭터를 통해 어떤 경험을 제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다양한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의하면 국내 캐릭터 IP 시장은 매년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며, 2025년에는 16조 2천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까지 일본과 미국 중심이었던 캐릭터 콘텐츠의 패러다임이 한국으로 이동하면서 K-캐릭터도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몰랑이(Molang)는 일러스트레이터 윤혜지(Yoon Hye-ji, 尹憓智)가 2010년 온라인을 통해 발표한 캐릭터로, 프랑스 애니메이션 제작사 밀리마주(Millimages)가 2015년부터 TV 시리즈로 제작하고 있으며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큰 인기에 힘입어 여러 브랜드들과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서울 연남동에 자리한 갤러리 몰랑(Gallery Molang)의 내부. ⓒ 하얀오리(Hayanori)

살기 좋은 마을의 비결

Arts & Culture 2024 SPRING

살기 좋은 마을의 비결 경상북도 예천(醴泉)은 산악 오지인 동시에 낙동강이 휘돌아나가는 물의 고장이다. 또 조선시대 사회의 난리를 피해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10여 곳의 피난처를 꼽은 ‘십승지지(十勝之地)’ 마을도 있다. 자연환경에서 비롯되는 풍요로움과 공동체 결속을 위한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예천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이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 한국관광공사 예천의 지리적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가볼 곳이 있다. 회룡포(回龍浦) 전망대이다. 장안사(長安寺)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언덕길을 10분 정도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강인 낙동강(洛東江)의 지류, 내성천(乃城川)을 조망할 수 있다. 동쪽에서 흘러온 물길이 180도 휘어지더니 다시 180도를 돌아 나가는데, 유장하게 흘러가는 그 모습이 마치 비상하는 용의 몸짓을 닮았다. 회룡포라는 이름을 얻은 까닭이다. 강들이 만나는 물류망의 핵심   회룡포에서 직선거리로 2킬로미터 남짓한 곳에 삼강주막(三江酒幕)이 있다. 세 개의 물길, 즉 회룡포를 지나 흘러온 내성천과 북서쪽에서 내려온 금천(錦川), 그리고 동쪽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주막이다. 지금이야 고속도로와 철도, 항공로가 주요한 물류 루트지만, 지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물류는 주로 물길로 이어졌다. 수레나 등짐보다 평평한 나룻배나 뗏목을 이용하면 그 어떤 교통수단보다 많고 무거운 물량을 상대적으로 쉽게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룻배나 뗏목이 못 갈 정도로 얕다면 그때부터는 완만한 하천 주변 길을 이용하면 되었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역사가 깊은 도시들의 이름은 ‘주(州)’ 자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巛 또는 川)과 그 사이의 하중도(河中島)를 본뜬 상형자로서, 이후에는 마을을 거쳐 도시를 상징하는 어휘로 확장되었다. 여러 나라들이 그러했듯 한반도 역시 옛 도시들은 거의 모두 하천을 끼고 탄생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 예천도 마찬가지였다. 삼강주막이 그 상징이다. 지난 1900년까지만 하더라도 나룻배들이 하루에 서른 번 넘게 왕래했던 발 디딜 틈 없이 바쁜 물류의 중심이자 휴게소, 그리고 식당과 숙소였다. 다만 1934년 대홍수로 근방의 건물들이 모두 사라졌고, 지금은 삼강주막과 그 옆에 있는 수령 500여 년의 회나무 한 그루만이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다행히 그 시절 나그네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을 배추전과 막걸리를 옛 삼강주막 바로 옆에 새로 지은 주막에서 맛볼 수 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삼강주막. 과거 삼강나루를 왕래하는 사람들과 보부상, 사공에게 식사를 해주거나 숙식을 제공하던 건물이다. ⓒ 예천군 예천의 대표 축제로 자리잡은 삼강주막 나루터 축제에서 전통놀이를 즐기고 있는 모습 ⓒ 예천군   살기 좋은 마을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을 담아 살기 좋은 곳으로 꼽은 십승지지(十勝之地)는 대개 골 깊은 내륙 오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옥토가 펼쳐져 있고 물류망도 잘 갖춰져 있어 예부터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경상북도 예천에도 십승지지 중 한 마을이 있다. 삼강주막에서 자동차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금당실(金塘室)마을이 십승지지 중 한 곳이다. 마을 안팎에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산재해 있을 만큼 이미 오래전부터 거주지로서 주목을 받아온 금당실마을은 현재 수십 채의 고풍스러운 한옥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한옥들은 약 7킬로미터에 달하는 돌담길로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유유히 마을을 걷다 보면 이내 왜 이곳이 십승지지 중 한 곳으로 일컬어지는지 알 수 있다. 북쪽은 높은 소백산맥(小白山脈)으로 막혀 있고, 마을 주변에는 논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또한 물류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도, 주요 도시 간의 이동로에서는 빗겨나 있어 군사상의 중요성은 작아 보이는 위치다. 순탄하고 풍요롭게 살아가기에 더없이 훌륭한 지리적 장점을 갖고 있다. 마을 북서쪽 끝에 있는 송림(松林)에서는 안전한 마을을 만들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도 엿볼 수 있다. 이 송림에는 900여 그루의 소나무가 800미터에 걸쳐 자라고 있다. 마을 앞을 흘러가는 금당천(金塘川)이 종종 범람하자, 주민들이 수해(水害) 방지를 위해 힘을 합쳐 조림한 숲이다. 수령이 100~200년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그 오랜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풍광도 뛰어나고 역사성도 있어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그리고 요즈음 같은 봄에는 송림도 송림이지만, 송림 근처 용문사(龍門寺)까지 7킬로미터 남짓한 구간을 수놓는 벚꽃길도 일품이다. 금당실마을에 들를 예정이라면 시간을 충분히 잡아야 하는 이유다. 한옥에서 숙박하며 송림 산책을 하고, 이어 벚꽃길도 걸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주민들이 이 마을에서 그저 안빈낙도(安貧樂道)에 안주하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점이다. 송림의 경우에서처럼 범람과 같은 자연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아가 십승지지 특유의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문화도 발전시켜 왔다. 그 예를 살펴보기 위해 벚꽃길 중간쯤에 있는 초간정(草澗亭)으로 가보자. 조선시대 전통가옥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금당실마을. 청동기 시대 고인돌과 고택 각종 문화재가 산재해 있으며, 미로 같이 이어진 돌담길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송림도 마을의 볼거리다. ⓒ 예천군 풍요를 바탕으로 꽃피운 문화 초간정은 16세기 조선의 문신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 1534~ 1591)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심신 수양을 위해 세운 정자이다. 계곡 한쪽의 수직 암반 위에 지어 올렸는데, 그 모습이 원래부터 그곳에 있던 것처럼 모나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일교차가 큰 봄에 물안개까지 피어오르면 신비로움이 배가 되는데, 이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사는 십승지지를 넘어 마치 신선이 노니는 상상 속 이상향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초간정이 겉모습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곳은 권문해가 한반도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일컬어지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편찬한 서재이기도 하다. 이 사전은 고대부터 15세기까지 한반도의 역사와 지리, 인물, 동식물, 설화 등을 총망라한 것으로, 모두 20권(卷) 20책(冊)으로 이뤄져 있다. 옛 책을 헤아릴 때 쓰는 단위 중 ‘권’은 내용 분류에 따른 장(章, chapter)의 개념이고, ‘책’은 오늘날 쓰는 낱개 수량을 뜻한다. 즉 『대동운부군옥』은 20가지의 주제를 20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말이다. 권문해의 아들 권별(權虌 1589~1671)이 『대동운부군옥』에서 벼슬을 지낸 이들의 이야기만을 선별해 만든 인물사전식 문헌설화집인 『해동잡록(海東雜錄)』을 저술한 곳도 초간정이었다. 19세기 중반에는 배상현(裴象鉉 1814~1884)이 형법과 논밭과 관련한 여러 제도와 지리 등을 정리한 『동국십지(東國十志)』를, 박주종(朴周鍾 1813~1887)은 조선의 전통문화를 14개의 유형으로 나누어 정리한 『동국통지(東國通志)』 등을 잇달아 편찬했다. 그런 면에서 예천은 백과사전의 보고(寶庫)와도 같다. 예천의 사대부들은 풍요로움을 향유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것을 바탕으로 지식과 노하우를 타인, 나아가 후세대에 전수하기 위해 애썼고, 실제 이루어냈다. 인공적으로 만든 원림과 조화를 이루며 조선시대 정자 문화를 잘 보여주는 초간정(草澗亭)의 모습. ⓒ 예천군 공동체의 결속을 위한 지혜 공동체의 안녕과 결속을 위한 절묘한 지혜들도 놀랍다. 예천에는 무려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나무가 두 그루나 있다. 퍼진 가지의 너비가 동서 23미터, 남북 30미터에 달하는 ‘석송령(石松靈)’이라는 거대한 소나무와 그에 준하는 ‘황목근(黃木根)’이라는 팽나무다. 수령 600년이 넘는 석송령이 한국 최초의 재산을 소유한 나무가 된 연유는 이렇다. 이수목(李秀睦)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에겐 자식이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1927년 본인의 토지 6,600㎡를 이 소나무에 상속 등기한 뒤, ‘영험한 소나무’라는 뜻에서 석송령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자식이 없어도 그렇지, 토지를 일가친척이나 친한 이웃 등에게 상속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비밀의 실마리는 나무가 소유한 토지를 임대해 사용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가 꼬박꼬박 임대료를 내고 있으며, 그 임대료로 마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이수목은 특정 개인에게 상속함으로써 마을에 분란의 소지를 만드는 것보다는 이웃들이 나무와 토지를 공동으로 관리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으로는 공공의 번영을 위해 쓰이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뜻이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주민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석송령을 보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행여 아래로 쳐진 석송령의 가지가 부러지지 않게 돌로 가지를 받치고, 겨울이면 가지에 눈이 무겁게 쌓이기 전에 쓸어낸다. 벼락이라도 맞을까 봐 피뢰침도 설치해 두었다. 그동안 석송령의 장학금으로 학업을 마친 학생이 수십 명에 달하기 때문이며, 지금도 혜택을 받는 청소년들이 있어서이다. 석송령에서 자동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황목근도 비슷한 경우다. 매년 5월이면 나무 전체에서 노란 꽃을 피워 황목근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팽나무는 보유 토지의 면적이 석송령의 두 배가 넘는 13,620㎡나 된다. 다만 특정 개인에 의한 상속의 결과는 아니다. 마을의 공동재산이던 토지를 1939년 황목근 앞으로 이전등기(移轉登記)하면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당연히 황목근 소유의 토지에서도 임대료가 발생하는데, 마을의 중학생들에게 매년 30만 원 정도씩 장학금으로 전달된다고 한다. 사실 황목근이 있는 금원(琴原) 마을에서는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각 가정마다 밥을 짓기 전에 쌀을 한 수저씩 떠 모아 공동 재산을 형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1903년의 ‘금원계안(琴原契案) 회의록’과 1925년의 ‘저축구조계안(貯蓄救助契案) 임원록’ 등이 그것이다. 마을 공동체 구성원 가운데 누구에게라도 어려운 일이 닥칠 때를 대비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주는 나무인 석송령. 나무의 키에 비해 가지의 길이가 무려 세 배에 달하는 기이한 모습이다. 옆으로 길게 뻗은 가지를 지탱하기 위해 돌기둥을 받쳐두었다. ⓒ 권기봉(權奇鳯) 진정한 십승지지의 요건 공동체의 결속과 평화를 위해 서로를 배려하는 지혜는 예천의 남쪽에서 절정에 달한다. 거기에 ‘말무덤(言塚)’이라는 것이 있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언덕 같아 보이지만, 인공적으로 바위와 흙을 돋워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만든 구조물이다. 오랜 옛날 주민들 사이에 크고 작은 다툼이 그치지 않자, 말(言)을 묻어 버리자며 무덤(塚)을 만든 것이다. 본디 모든 싸움의 씨앗은 말이기 때문이다. 고즈넉하면서도 들이 넓고 물류망이 잘 갖춰져 있어 예부터 십승지지로 이름 높았던 금당실마을과 예천의 곳곳…. 그러나 십승지지는 자연과 지리적 요건이 갖춰졌다고 해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공감,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관심과 배려가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십승지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경북 예천을 여행하다 보면 비록 정답은 아닐지언정 그와 관련한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마을 주민들 간 싸움이 잦자 싸움의 시작이 되는 말(言)을 묻자는 것에서 시작된 말(言)무덤. 이곳에는 무덤과 함께 말조심을 표현하는 각종 문구가 돌에 새겨져 있다. ⓒ 신중식(申中植) 권기봉(KWON Ki-bong 權奇鳯) 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애환과 낭만의 음식, 빈대떡

Arts & Culture 2023 WINTER

애환과 낭만의 음식, 빈대떡 녹두 가루에 물과 각종 채소, 고기를 넣고 걸쭉하게 만든 반죽을 뜨겁게 예열한 프라이팬에 올려 노릇노릇하게 부쳐 먹는 빈대떡은 바삭바삭하면서도 고소한 풍미가 독보적인 한국의 전통 음식이다. 밀가루를 사용하는 부침개와 달리 녹두를 사용하는 빈대떡은 한국의 대표적인‘겉바속촉’ 요리다. 한국에서 음식 맛을 설명하는 단어 중 ‘겉바속촉’이라는 표현이 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는 문장을 줄인 말로, 주로 뜨겁고 바삭한 식감의 튀김이나 부침개 종류의 음식의 맛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이러한 ‘겉바속촉’의 맛을 지닌 대표적인 음식 중 하나가 빈대떡이다. 바삭한 맛이 일품 빈대떡은 큰 의미에서는 ‘부침개’ 또는 ‘전’으로 불리는 한국식 부침 요리의 한 종류이다. 부침개는 바닥이 평평하고 넓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각종 채소나 육류, 생선 등의 재료에 밀가루나 달걀물을 입혀 기름에 부쳐내는 음식으로 한국의 명절이나 잔칫날에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요리다. 빈대떡이 일반 부침개와 다른 점은 밀가루 대신 맷돌에 간 녹두를 이용해 부쳐 만든 음식이라는 것이다. 갈은 녹두에 나물, 고기 등을 넣고 반죽한 후 기름을 넉넉히 두른 묵직한 팬에다 두툼하게 반죽을 편 다음 튀기듯 부쳐낸다. 센 불에서 익힌 빈대떡은 부침개보다 겉면이 좀 더 바삭바삭하고 힘이 있는 편인데, 이는 녹두의 질감이 밀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일반 부침개가 가늘고 부드러운 식감에 가깝다면, 빈대떡은 묵직하고 단단한 식감이 특징이다. 기름에 튀겨지듯 부쳐낸 빈대떡을 한입 베어 물면 입에 착 감기는 고소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녹두가 지닌 특유의 풋내는 다른 재료들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감칠맛이 배가 된다. 빈대떡에 들어가는 재료는 고사리나 숙주, 대파, 김치, 고추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같은 빈대떡이라고 해도 집마다 재료의 사정은 달랐다. 재료가 풍족한 집은 각종 나물과 김치에 간 돼지고기까지 넣고 부쳐 먹었지만 그렇지 못한 집은 녹두 반죽만 기름에 부쳐 먹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는 빈대떡만큼 값싼 재료로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었다. 빈대떡의 유래 300도가 넘는 뜨거운 불판에 기름을 넉넉히 두른 후 돼지고기와 각종 채소가 들어간 녹두 반죽을 튀기듯 부쳐내어 바삭바삭하면서도 고소한 풍미가 일품이다. 빈대떡의 유래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교자상에 기름에 지진 고기를 높이 쌓을 때 제기(祭器) 밑받침용으로 이 빈대떡을 작게 만들어 썼는데, 그 뒤 가난한 사람을 위한 요리가 되면서 크기도 먹음직스럽게 크게 바뀌고 이름도 ‘빈자(貧者)’ 떡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 밖에 손님을 대접한다는 뜻의 ‘빈대(賓對)’를 넣어 빈대떡으로 불렀다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당시의 세도가에서 빈대떡을 만들어 남대문 밖에 모인 유랑민들에게 “어느 집의 적선이오” 하면서 던져주었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빈대떡을 즐겨 먹었던 곳이 북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이라는 사실이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실향민들이 남한으로 넘어오면서 한국의 빈대떡의 역사도 함께 시작됐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의 많은 공공기관과 가정집들이 무너졌는데 폐허가 된 집과 상가에서 실향민들은 터를 잡고 국밥이나 부침개, 막걸리 등을 팔기 시작했다. 당시 빈대떡은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은 많은 이들의 설움과 배고픔을 달래주는 애환의 음식이자, 값싼 가격에 배를 불렸던 서민의 음식이었다. 만인이 사랑하는 음식 서울 중구 을지로나 광장시장에는 40~50년은 거뜬히 넘긴 오래된 빈대떡집들이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빈대떡을 제대로 요리하려면 ‘라드’라고 부르는 돼지기름을 사용해야 한다. 식용유나 참기름(참깨를 짜서 만든 한국식 오일)을 사용할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고소한 감칠맛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300도가 넘는 뜨거운 불판에 돼지기름을 넉넉히 두른 후 돼지고기와 각종 채소가 들어간 녹두 반죽을 튀기듯 부쳐내면 흔히 말하는 ‘겉바속촉’ 식감에 고소한 돼지기름이 속속들이 베어들어 제대로 된 빈대떡의 맛이 구현된다. 서울 중구 을지로나 광장시장에는 40~50년은 거뜬히 넘긴 오래된 빈대떡집들이 아직도 성업 중이다. 3대째 운영 중인 박가네 빈대떡은 빈대떡을 전통 방식으로 두툼하게 부쳐내는 곳으로 빈대떡에 편육(삶은 육류를 틀에 넣고 누른 다음 차게 식혀 얇게 썰어 먹는 음식)과 어리굴젓(생굴로 담근 젓갈)을 올려 먹는 ‘삼합’ 요리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빈대떡에 쫄깃한 편육과 매콤한 어리굴젓이 제법 잘 어울린다. 박가네 빈대떡 외에도 광장시장을 비롯한 서울 각지에는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오래된 빈대떡집들이 꽤 있다. 대부분 묵직하고 넓적한 불판에 종일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빈대떡과 부침개를 부치고 있는 모습을 통 창문으로 볼 수 있도록 개방형 주방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나가는 이들은 빈대떡의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오게 되고, 빈대떡을 열심히 부치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퍼포먼스가 되기도 한다.   다양하게 즐기는 맛 빈대떡은 다양한 토핑 재료를 활용할 수 있어 여러 가지 메뉴로 변신이 가능하다. 또 속까지 완전히 익히는 음식이기 때문에 육류나 채소, 해산물 등 어떠한 재료를 넣어도 잘 어우러진다. 40년이 넘도록 프랜차이즈 사업을 탄탄하게 전개해 나가고 있는 빈대떡 브랜드 JBD 종로빈대떡은 김치 빈대떡과 낙지 빈대떡, 굴 빈대떡, 해물 빈대떡 등 다양한 종류의 빈대떡 메뉴를 선보인다. 고소한 녹두의 맛이 기본으로 받쳐주니 어떠한 토핑을 올려도 매력적인 맛으로 융화된다. 특히 굴을 잔뜩 올린 후 바삭하게 부쳐낸 굴 빈대떡은 특유의 굴 향과 고소한 녹두의 맛이 잘 어우러져 외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메뉴다. 빈대떡은 막걸리와도 궁합이 좋아 한때 막걸리와 빈대떡을 메인으로 내세운 브랜드들이 시장에 대거 생겨났다. 현대적인 인테리어, 세련된 플레이팅의 빈대떡 한 상 차림을 구현하거나 옛 감성을 살린 복고풍 매장까지 콘셉트도 매우 다양하다. 최근에는 다양하게 변주된 빈대떡 메뉴에 전국각지에서 생산되는 수십 가지의 전통주를 페어링하여 선보이는 한식주점도 인기를 끌고 있다.   건강식으로도 인기 빈대떡은 한국전쟁 이후 대중화되기 시작한 길거리 음식, 추억과 애환이 묻어있는 서민 음식이라는 인상 때문에 그러한 역사적 스토리텔링을 등에 업고 현재까지도 ‘국민 안주’, ‘국민 간식’으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여기에 ‘건강식’ 키워드까지 더해 현재는 웰빙식품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빈대떡의 주재료인 녹두가 해독과 해열 기능뿐 아니라 피부질환이나 신장 기능 강화에도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녹두 빈대떡을 레토르트나 HMR 상품으로 출시하는 곳도 늘고 있다. 기름을 넉넉하게 두른 프라이팬에 냉동 상태의 빈대떡을 별도의 해동 과정 없이 그대로 올려 굽기만 하면 되므로 가정에서도 간편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게다가 가격도 합리적이고 식당에서 먹는 것만큼 맛의 완성도도 높아 꾸준히 잘 팔리고 있다.   황해원(Hwang Hae-won 黃海嫄) 월간외식경영 편집장

250이 만든 뽕의 새로운 세계

Arts & Culture 2023 WINTER

250이 만든 뽕의 새로운 세계 250은 가장 한국적인 음악이지만 모두가 외면하고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 뽕짝이라는 장르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탄생시켰다. 그의 확고한 음악 세계가 담긴 앨범 (2022)은 한국 대중음악계를 넘어 세계가 집중했으며, 지금도 그 영역을 계속해서 넓히고 있다. 가수이자 DJ, 작곡가, 그리고 프로듀서인 250은 2023년 한국 대중음악에서 단연 돋보이는 주인공이다. 한국인의 고유 정서인‘뽕’이라는 장르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여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만들었다. ⓒ 비스츠앤드네이티브스 매콤한 국물과 꼬불꼬불한 뜨거운 면을 호호 불어먹는 매력이 있는 라면. 당신이 한국의 라면을 끓이는 데 처음 도전했다고 생각해 보자. 적정량의 물을 끓이고, 건더기스프와 면을 넣고…. 그런데 아뿔싸, 라면 맛의 핵심인 빨간 분말스프 가루를 넣는다는 걸 완전히 잊었다. 그것을 한국식 라면이라 부를 수 있을까? 라면에서 가장 중요한 분말스프를 빼놓고는 라면의 맛을 논할 수 없는 것처럼,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한국 대중음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있다. 바로 뮤지션이자 프로듀서인 250이다. 이견이 없는 올해의 음악인 그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맵고 뜨거운 인물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250은 지난해 발표한 정규 1집< 뽕 > 으로 한국의 그래미상으로 불리는 제20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고 영예인 ‘올해의 앨범’과 ‘올해의 음악인’, ‘최우수 일렉트로닉 앨범’, ‘최우수 일렉트로로닉 노래’ 등 네 개 부문을 석권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둘째, 그는 데뷔 1년 만에 한국 음악계를 뒤집어 놓은 신인 케이팝 그룹 ‘뉴진스’의 여러 곡에 참여한 프로듀서다. 250은 한국에서 구시대적이라고 폄훼하는 음악 장르인 ‘뽕짝’을 베이스로 일렉트로닉 음악이나 힙합 요소를 더하여 완전히 독창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250은 특유의 진지한 표정으로 앨프리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1899~1980) 감독의 영화< 이창(Rear Window 裏窓) > (1954)을 보았는지를 기자에게 물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영화< 이창 > 에서부터였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저는 수년 동안 뽕짝의 본질을 탐구하고 저의 음악과 접목해 보려고 했지만, 그 답을 찾는 것이 순탄치 않았어요. 답을 찾던 중 영화< 이창 > 에서 영감을 받았고< 이창 > (2018년 싱글 앨범)이란 곡을 쓰게 되었죠. 어떤 투명한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뽕’과 ‘비(非)뽕’이 서로 마주 보는 느낌이랄까요.” 뽕과 비(非)뽕, 과거와 현재, 세련됨과 촌스러움 따위가 멀리서 대면하는…. 그 형이상학적인 ‘창’은 250의 음악 세계를 설명하는 키워드다. “‘뽕’은 오묘한 단어입니다. 여러 면에서 한국인에게 특별한 감흥을 주죠. 트로트를 속되게 이르는 말인 ‘뽕짝’은 사실 북소리를 표현하는 의성어 ‘쿵짝’에서 비롯되었어요. 영어로 하면 ‘Boom Clap’ 같은 거죠. 하지만 ‘쿵짝’은 다른 장르에서도 통용될 수 있으니, 뭔가 더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쿵’이라는 말을 ‘뽕’으로 바꾼 겁니다. 자기비하적 측면이죠. ‘뽕’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이미지도 있어요. 1986년 상영된 성인 영화< 뽕(Mulberry) > 이요. 당시 크게 흥행하여 다양한 후속작이 나오기도 했죠. 그리고 한국에서 마약을 뜻하는 은어이기도 하고요. 우스꽝스럽거나 낯간지럽거나 어둡거나….이렇게 다층적이면서 복합적인 상징과 느낌들이 ‘뽕’, 이 단 한 음절에 축약된 겁니다.” 애수와 낭만, 즐거움이 담긴 음인 뽕짝은 한국에서 사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문화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애초에 ‘뽕’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로 담고 있으며, 일상에서 거의 쓰이지 않은 단어인 것처럼 말이다. 250은 음지에서 저평가받고 있는 뽕짝을 대중음악 세계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새로운 음악의 성취를 거둔 셈이다. 250이 탐구한 음악 세계 250은 한서대학교에서 영상 음악 제작을 전공했다. 20대부터 한국 공중파 TV 드라마의 음악을 만들었고,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전자음악 성지(聖地)인 클럽 케잌샵(cakeshop)에서 DJ로도 활약했다. 그때부터 “유별난 음악을 트는 이가 등장했다”라는 입소문이 클러버들 사이에 돌기 시작하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이후 SM엔터테인먼트의 의뢰를 받아 NCT127, BoA, f(x) 같은 메이저 케이팝 가수의 원곡에 대한 정식 리믹스 음원을 발표했다. 또 힙합 팬들이 열광하는 래퍼 이센스의< Everywhere > 와< 비행 >등을 프로듀스 했다. 그러다 그가 2018년부터 저예산 다큐멘터리 시리즈< 뽕을 찾아서 > 를 내놓기 시작했을 때만해도 음악업계에서는 “비트만 잘 만드는 줄 알았더니 코미디도 제법이다”라는 식의 가벼운 반응들이 다수였다. 2018년 싱글< 이창 > , 2021년 싱글< Bang Bus > 가 조용히 회자되더니 마침내 2022년 3월, 정규 1집 앨범< 뽕 > 이 발매되자마자 음악 팬과 평단은 그의 독창적인 음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기 시작했다. 250은 미국 뉴욕의 할렘에 힙합이 흐르거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파벨라 펑크(favela funk) 장르가 울려 퍼지듯 뽕짝은 마치 한국이란 문화권의 배경음악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부연했다. 청각적으로도 ‘게토(ghetto 특정 민족이 사회의 주류 민족과 고립되어 살아가는 것)화’한 요소들이야말로 힙합 프로듀서이자 클럽 DJ 출신인 250이 뜻밖에 발견한 뽕짝의 매력이다. “대단한 연주자 또는 50인조 오케스트라가 오래전에 녹음해 둔 샘플을 후대에 조악한 장비로 구현해 낸 힙합곡들…. 거기서 풍기는 특유의 멋이란 게 있잖아요. 뽕짝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뽕짝을 탐구하면서 느낀 또 한 가지는 뽕짝이 한국의 식문화와도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뜨거워야 잘 먹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김치찌개나 전골처럼 맵고 뜨거워야 ‘잘 먹었다’라고 느끼는 것처럼요. 저 역시 얼마 전에 벨기에에 일주일 정도 다녀왔는데, 귀국하자마자 매니저와 김치찌개를 먹으러 기사식당에 갔어요. 한국인에게는 어정쩡한 것보다는 화끈한 것이 통하는 것처럼 ‘뽕짝’도 그런 점이 있어 통하는 것 같아요. 저는 뽕짝이 확실하게 슬픈 곡조, 그리고 확실하게 신나는 그 무언가가 투박하게 결합된 매력적인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250이 ‘뽕’의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2013년경부터다. 케잌샵 DJ 시절, 동료들과 단합대회를 다녀오는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뽕짝 음악이 담긴 리믹스 테이프를 샀다. 서울로 돌아가 이 음악을 리믹스 해보자며 장난처럼 의기투합한 게 시작이었다. 그 장난 같은 시작이 250을 장난이 아닌 뽕짝의 경지까지 끌고 온 셈이다.   익숙한 뽕짝의 맛 250이 만든 익숙한데 낯설고 촌스럽지만 신묘하며 힙하기 이를 데 없는 ‘뽕’의 세계에 가장 열성적인 관객은 10~20대의 젊은 세대다. 뽕짝이 한국인의 일상 가까이 녹아 있던 20세기와는 오히려 가장 거리가 먼 세대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고 예쁘게 깎여 있는 시대에 살고 있죠. 그래서 도심의 반듯한 계단보다는 서울 변두리에 오래전 지어진 건물의 울퉁불퉁한 계단에 열광하며 필름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최근 빌보드 차트에서도 컨트리 장르가 득세하고 있죠. 한국 음원 차트에 트로트가 최근 몇 년 사이 인기를 끈 것과 비슷한 현상일 수 있죠.” 250이 요즘 음악 말고 빠져 있는 것도 일종의 ‘구닥다리’다. 1970~1980년대 상영된 홍콩 영화인< 소권괴초(笑拳怪招, The Fearless Hyena) > (1979년)를 비롯한 성룡(成龍 Jackie Chan)의 초기작에 나오는 비논리적 액션 장면들에 푹 빠져 있다고 했다. “언젠가는 영화음악에도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A Quiet Place) > (2018)처럼 사람들이 소리에 극도로 집중해야 하는 영화,< 인셉션(Inception) > (2010)처럼 스케일이 큰 영화, 작곡가이자 음악감독인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 1928~2020)가 참여한 작품처럼 선율로 승부하는 영화 등 모두 욕심이 나네요.” 마침 그의 저예산 다큐< 뽕을 찾아서 > 는 2023년 여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큰 스크린에서 공식 상영됐다. “제게 특별한 롤모델이란 없습니다만, 그저 음악 프로듀서인 퀸시 존스(Quincy Jones)나 작곡가이자 뮤지션인 류이치 사카모토(さかもとりゅういち Ryuichi Sakamoto, 1952~2023) 같은 분들처럼 이런 음악, 저런 작업 등 음악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50의 다음 프로젝트는 한국 성인영화 시리즈물의 속편 제목처럼< 뽕 2 > 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벌써 계획하고 있는 차기작의 제목은< 아메리카 > 이다. “ < 뽕 > 으로 한국 음악을 제대로 해봤으니까 이제 미국 음악을 해봐야죠. 제가 학창 시절에 동경했던 미국, 그리고 즐겨 듣던 미국 음악에 대한 환상을 담은 앨범이 될 수도 있겠어요.” 7년여간 탐구한 뽕에 대한 정의는 250의 안에서도 계속 변해왔다. 지금, 이 시점에 그가 내리는 뽕의 정의는 이렇다. “뽕짝이란 마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한국의 라면스프의 맛 같은 걸지도 모르죠. 김치찌개를 끓이다가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 싶으면 라면스프를 조금 넣잖아요. 그럼 ‘아는 맛’ 나오잖아요. 라면스프가 고급스러운 레시피도 아니고 정답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익숙한 맛이고 입에 감기는 어떤 만족스러운 맛이라는 점은 확실하죠. 뭔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한국인이 공통으로 찾는 마지막 한 조각이랄까요.” 250이라는 이름은 그의 본명인 이호영과 비슷하게 불리길 바라며 ‘이오영’이라 썼는데, 모두가 ‘이오공’이라 부르면서 250이 되었다. ⓒ 세종문화회관 그는 첫 앨범< 뽕 > 으로 한국대중음악상에서 4관왕을 차지했다. 특히 최우수 일렉트로닉 앨범과 최우수 일렉트로로닉 노래 부분 수상은 ‘뽕’이 일렉트로니카 뮤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뜻깊다고 전한다. ⓒ 비스츠앤드네이티브스 임희윤 (Lim Hee-yun, 林熙潤) 음악평론가

빨리빨리 이면(裏面)의 한국, 무주

Arts & Culture 2023 WINTER

빨리빨리 이면(裏面)의 한국, 무주 한국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는가? 오랜 기간 ‘빨리빨리’가 한국의 주요 이미지였던 적이 있었다. 사실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전쟁 이후 새로운 도약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내재화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방편이었다. 이 겨울, 당신이 한반도 남쪽의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무주군(茂朱郡)을 여행한다면 단편적인 빨리빨리 이미지 너머에 존재하는 진짜 한국의 숨겨진 단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한국관광공사 덕유산은 남한에서 내로라하는 명산이다. 특히 겨울이면 눈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상고대를 만드는데, 그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 이재형(李在烱) 덕유산(德裕山)은 ‘덕(德)이 넉넉하다’는뜻을 품고 있다. 해발고도 1,614미터의 향적봉(香積峯)을 중심으로 장대한 능선이 남북 방향으로 30킬로미터 넘게 이어져 있다. 그 속에는 해발고도 1,300미터 안팎의 봉우리들만이 아니라 20여 개의 크고 작은 폭포, 13개의 이름난 대(臺), 수십 개에 달하는 못(潭)들이 안겨져 있다. 특히 물돌이가 9천 개에 이를 정도로 굽이굽이 흐른다고 하여 구천동(九千洞)이라 부르는 계곡은 경치가 빼어나 사시사철 여행자들을 불러 모은다. 그 중 인상적인 곳을 추려 ‘구천동 33경(景)’이라 한다. 한국 최고의 겨울 산 등산뿐만 아니라 스키장으로도 유명한 덕유산은 곤돌라를 이용하면 정상인 향적봉까지 20분이면 오를 수 있다. 겨울스포츠와 눈꽃 산행을 즐기려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곤돌라 예약은 필수다. ⓒ 한국관광공사   산의 매력은 두 발로 걸어야 제맛이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눈이 낮엔 햇빛에 살짝 녹는 듯하다가 기온이 내려가면 다시 얼어붙는데, 이렇게 녹았다 얼기를 반복하면 나뭇가지 전체가 마치 유리로 코팅한 듯 투명한 얼음으로 둘러싸이게 된다. ‘상고대’라 부르는 자연현상이다. 그런데 덕유산의 상고대는 다른 곳의 상고대와 달리 훨씬 두껍고 투명하다. 고도가 1,000미터 이상인 데다 습도와 풍량까지 알맞기 때문이다. 상고대가 뒤덮은 나무를 밀치며 걸을 때면 가지끼리 서로 맞부딪치며 소리를 내는데, 직접 들어보지 않고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덕유산은 한국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다. 평소 등산이 익숙하지 않아 산행이 힘들다면, 곤돌라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발고도 1,520미터 지점까지 단 20분 만에 오른다. 곤돌라를 타고 상부 승강장에서 내린 후 향적봉까지 가기 위해서는 완만한 계단 600미터만 걸으면 된다. 등산 채비가 되지 않았다면, 승강장 휴게소에서 아이젠과 스패츠, 등산 스틱 등의 겨울 산행용품을 대여할 수 있다. 덕유산을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스키가 있다. 한국 유일의 국립공원 내 스키장이자, 슬로프 면적이 가장 넓은 스키장인 동시에 제일 큰 표고 차를 보이는 스키장이다. 여러모로 압도적이다. 하이킹을 하든 스키를 타든 왜 덕유산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겨울 산이라 불리는지, 어렵지 않게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절경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자연환경도 어느 곳보다 청정한 곳이 덕유산, 나아가 무주다. 예컨대 무주에서는 1997년 이래 코로나19가 유행한 2020년과 2021년을 제외하면 매년 여름마다 무주반딧불축제가 열리고 있다. 반딧불이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곳에서만 서식하기 때문에 환경지표종으로도 알려져 있다. 덕유산의 북쪽을 휘돌아 흐르는 남대천(南大川) 일대에 특히 반딧불이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무주 일원 반딧불이와 그 먹이 서식지는 1982년부터 천연기념물 32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빼어난 자연환경 반딧불이 탐사와 생태환경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되는 무주반딧불축제는 청정환경지표인 반딧불이를 소재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삶의 가치를 공유하는 무주군의 대표 축제이다. ⓒ 한국관광공사 한반도에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화된 것은 지난 1960년대부터다. 1963년 재건국민운동본부는 정부에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했다. 이어 1964년 덕유산 남쪽에 있는 지리산(智異山) 근방 구례군민들이 지리산국립공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십시일반 기금을 마련하는 등의 자발적 움직임 끝에 지리산은 1967년 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1975년, 덕유산 일대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한국의 10번째 국립공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덕유산 해발고도 1,300미터 지점에는 낯익은 나무가 보인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빼놓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되는 구상나무이다. 야외용 크리스마스트리로는 키가 큰 독일가문비나무나 전나무를 많이 사용하지만, 실내용으로는 아담한 구상나무를 사용한다. 크기도 크기지만, 가지 사이사이에 여백이 있어 장식물을 달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트리용 구상나무는 20세기 초반에 ‘한반도 고유종’으로서의 구상나무를 개량한 것으로, ‘한반도 고유종’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한반도가 원산지다. 그런데 이 친숙한 나무를 언젠가는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2013년 국제자연보전연맹에서 이 나무를 ‘위기종’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한반도 고유종’이라는 말은 한반도에서 사라지면 멸종된다는 뜻과도 같다. 자칫하다간 크리스마스트리의 원형이 멸종돼 지구상에서 영영 자취를 감출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구상나무의 멸종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응책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4년부터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라는 이름으로 산림조성 및 숲가꾸기 사업을 펼쳐오고 있는 (주)유한킴벌리(Yuhan-Kimberly, Ltd.)가 국립백두대간수목원과 함께 2021년부터 구상나무 보존 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실제로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온실에서 6,800여 본의 모종을 키우고 있으며, 그 수를 늘리기 위해 2022년에는 12만 개의 구상나무 씨앗을 수집했다. 덕유산을 비롯해 구상나무가 살기에 적합한 곳을 찾아 이식하기 위해서다. 마치 중요한 데이터를 잃지 않기 위해 백업 작업을 하듯 구상나무를 보존하기 위한 일종의 ‘노아의 방주’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무주 등나무운동장에서 열린 무주산골영화제. 등나무운동장은 등나무 넝쿨이 관중석 지붕에 올라타도록 500여 그루의 등나무를 심어 관중석에 나무 그늘이 만들어지도록 설계된 경기장이다. ⓒ 무주군 백업의 기원 그러고 보면 무주에는 실제 노아의 방주 역할을 해온 공간이 있다. 덕유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적상산(赤裳山)에 위치한 사고(史庫)가 그곳이다. 14세기 말~20세기 초 존재했던 조선왕조는 기록을 무척 소중히 여겼다. 기록을 남김으로써 절대 권력자인 왕의 전횡을 막고, 후대에는 노하우를 전수하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대표적인 기록물로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있다. 건국 이래 자그마치 472년 동안의 역사를 매일 같이 수록한 책이다.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 중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에 걸쳐 작성된 기록물로 꼽힌다. 심지어 왕조 시절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세계 유일의 사례다. 이러한 점을 높이 사 1973년에는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되었다. 기록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전쟁과 화재, 그리고 무수한 천재지변에도 불구하고 잘 보존되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바로 ‘백업’ 덕분이다. 조선은 『조선왕조실록』을 항상 4~5질씩 만들어, 한 질은 수도에 두고 나머지는 여러 지방에 분산해 보관했다. 그냥 보관만 한 것이 아니었다. 3년마다 한 번씩 꺼내 ‘포쇄(曝曬)’라 부르는 작업, 즉 습기 때문에 곰팡이가 슬거나 좀이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일을 반복했다.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순간도 있었다. 16세기 말에 벌어진 동아시아 3국 사이의 전쟁 도중이었다. 무주 남서쪽 약 50킬로미터 거리의 전주(全州) 사고에 있던 것을 제외한 모든 『조선왕조실록』이 불에 타 버린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그 유일한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백업하는 것이었다. 재차 5질로 복구해 전국에 분산 보관했는데, 그중 한 곳이 적상산 사고였다. 사고 주변이 절벽이다 보니 적군이 침입하기 어려웠고, 완만한 지대에는 이미 1,500여 년 전부터 있었던 적상산성(赤裳山城)을 고쳐 지어 보완했다. 다만 적상산 사고에 보관되어 온 조선왕조실록은 20세기 초에 서울로 옮겨졌는데, 한국전쟁 와중에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총 1,893권 888책으로 구성된 방대한 양의 『조선왕조실록』은 오늘, 이 순간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익히 이야기한 백업 덕분이다. 태권도원은 경기, 체험, 수련, 교육, 연구, 교류 등 태권도에 관련된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 유일의 태권도 전문 공간이다. 또 일반인을 대상으로 태권도를 즐길 수 있는 태권스테이도 운영하고 있다. ⓒ 무주군 무주 여행을 해야 하는 까닭 무주는 관광을 넘어 한국 사회가 자연과의 공존을 위해 들이는 노력의 깊이와 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곳이다. 읍내 남쪽에는 ‘등나무운동장’이라는 곳이 있다. 500여 그루의 등나무 넝쿨이 철제 뼈대를 타고 올라가 여름에는 관중석에 그늘을 만들어 주고 겨울에는 내리는 눈을 막아줄 수 있도록 설계한 운동장이다. 한때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건축물을 지향했던 모더니즘 건축이 놓친 것이 있었다. 바로 인간과 자연의 교감이다. 사실 모더니즘 건축은 자연 위에 군림하려는 듯 왕왕 위압적인 모습을 보였고, 자연도 조경(造景)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낸 인공적인 자연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장을 설계한 건축가 정기용(鄭奇鎔, 1945-2011)의 생각은 달랐다. 자연을 인위적으로 변형해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주인처럼 설 수 있도록 자연을 대하는 시각을 바꾼 것이다. 자연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매년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줄기를 뻗으며 잎이 돋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오면 앙상해진다. 건축가는 앙상한 가지조차 인상적인 등나무를 이용해 천연의 스타디움이 완성되도록 유도한 것이다. 관중석 가장 뒷줄에 올라서서 운동장 한 바퀴를 걸어본다면 세계에 단 하나뿐인 무주 등나무운동장의 매력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무주 여행은 한국의 겨울이 어떤 매력을 가졌는지 감탄하는 계기를 마련해줄지 모른다. 또 그 매력의 가장 큰 근원 가운데 하나인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여정이 될 것이다. 동시에 ‘빨리빨리’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돌보지 못했을 것 같은 한국 사회가 자연과 어떤 방식으로 교감하고 공존해 왔는지를 발견하는 여행이 될 수 있다. 무주에 겨울이 왔다. 당신도 어서 무주에 와야 할 이유다.         권기봉(KWON Ki-bong 權奇鳯) 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절제 속에서 빛나는 자연미

Arts & Culture 2023 WINTER

절제 속에서 빛나는 자연미 한국의 목가구는 화려한 채색이나 정교한 조각 대신 나뭇결을 활용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특성이 있다. 2010년 국가무형문화재 소목장 기능 보유자로 지정된 박명배 장인은 전통 목가구 기법을 계승하는 한편 철저한 도면 작업을 통해 비례미를 구현한다.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자신의 공방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박명배 소목장. 꼼꼼한 도면 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그의 작품들은 간결하고 기품 있는 전통 목가구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나무를 다루는 목수는 건축물을 짓는 대목(大木)과 가구나 각종 기물을 만드는 소목(小木)으로 구분한다. 전통 목공 기법으로 장롱, 문갑, 책상 등을 만드는 장인을 소목장(小木匠)이라고 한다. 기교가 화려했던 고려 시대(918~1392)와 달리 조선 시대(1392~1910)의 공예품은 유교적 영향으로 소박함과 절제미가 돋보인다. 소목장 박명배(Park Myung-bae, 朴明培)의 작품은 조선 시대 목가구의 전형을 나타내면서도 화장판(化粧板, 가구의 앞면)의 재질로 인해 수려한 느낌을 준다. 간결한 선과 판재의 역동적 무늬가 어우러진 그의 작품은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목수에게 용목(龍目)이 없으면 속 빈 강정이죠. 나뭇결은 인위적으로 만든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고, 자연 그대로이니 싫증이 나지 않아요. 전통 가구는 장식이나 조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뭇결 자체를 잘 살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박 장인이 마치 용이 뒤엉킨 것 같은 오래된 느티나무의 나뭇결을 좋아하는 이유다. 그의 말처럼 나무가 만들어 내는 무늬들은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기술력과 창의성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의 기능 보유자 문하에서 오랜 시간 수련하며 전수자, 이수자, 전승교육사의 과정을 거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박 장인은 이와 달리 전승 계보가 없다. 특정 소목장의 제자로 들어가 기술을 전수받지 않았다는 얘기다. 21세 때인 1971년 전국기능경기대회 목공예 부문 1위를 시작으로 스스로 능력을 입증해 인정받았다. 1989년에는 동아(東亞)일보사가 주최한 동아공예대전에 목리반(木理盤)을 출품해 대상을 받았고, 1992년에는 한국문화재재단이 주관하는 전승공예대전에서 의걸이장(欌)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도면 구성에만 1년이 걸린 이 작품은 판재로 사용한 소나무를 인두로 지져 독특한 색감을 냈다. 그가 고안해 낸 방법이다. “원래 이 기법은 오동나무를 써요. 오동나무판을 인두로 지져 태운 후 솔이나 짚으로 문지르면 무른 부분은 검게 패고 단단한 부분은 덜 파여 나뭇결대로 무늬가 생기죠. 그 무늬가 질박하고 품위가 있어 예로부터 사랑방(舍廊房) 가구에 많이 쓰였습니다. 이 기법을 소나무에 적용해 수려한 문양을 내 봤는데 큰 상을 받았죠.” 박 장인은 바티칸박물관 한국관에 들어가는 가구 일습을 비롯해 미국 LA와 워싱턴D.C., 독일 베를린, 폴란드 바르샤바, 일본 오사카 등 세계 주요 도시의 한국문화원에 들어간 사랑방 가구를 제작했다. 또 고종(高宗)황제(재위 1863~1907)가 태어난 저택인 서울 운현궁(雲峴宮)을 복원할 때 100여 점에 이르는 가구 제작을 총괄하기도 했다. 전통 목가구의 제작 기법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뛰어난 기량 덕분이었다. 한국의 전통 목가구는 못이나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부재에 홈을 파서 끼워 맞추는 결구법을 사용한다. 박 장인은 젊은 시절 내로라하는 목수들을 찾아다니며 70여 가지의 짜맞춤 방식을 배웠다.   특별한 인연 비록 계보는 없지만, 그에게도 스승이라 할 만한 특별한 인연이 있긴 했다. 1950년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태어난 그는 집안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 후 상급 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 됐다. 18세 때 서울로 올라와 목수인 친척 형의 소개로 당시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공예과 최회권(崔會權) 교수의 공방에 들어갔다. 상업적으로 제작해 파는 가구가 아니라 목공예 작품을 먼저 접한 것이다. “예전에는 교수나 전공자는 디자인만 하고 제작은 목공소에서 해 주는 경우가 많았어요. 최 교수님 공방에서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작품을 기획하고 완성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죠. 대학에서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교수님 공방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몇 년 후 최 교수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공방이 문을 닫자 그는 진로를 고민해야 했다. “현대 공예는 작가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저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장인 기질이 요구되는 우리 전통 가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죠.” 그는 이름난 목수들에게 못을 쓰지 않고 목재에 홈을 파서 짜맞추는 70여 가지 전통 짜맞춤[結構] 방식을 배웠다. 수년에 걸쳐 나무를 말리고 다스려서 숨통을 틔워 주는 결구법은 소목의 핵심 기법이다. 소목장이 갖춰야 할 기능적인 면을 두루 익힌 그는 30세가 되던 1980년에 독립했다. 최상의 도면 자신의 공방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최순우(崔淳雨, 1916~1984)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목공예 인생에 큰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최 관장은 한국 미술사학의 기초를 마련한 학계의 큰 스승으로 박 장인에게 전통 공예의 철학과 안목을 가르쳐 주었다. 박 장인은 최 관장을 통해 전통 가구의 비례미에 눈을 떴다. 우리 가구는 앞면을 테두리로 분할하고, 나뉜 면에 무늬 좋은 목재를 쓴다.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는 여름과 겨울의 온도 및 습도 차이가 크다. 그래서 판재를 통으로 쓰면 시간이 지나면서 뒤틀리기 때문에 면을 나눠야 한다. 기능적인 이유로 면을 분할하지만 이를 통해 아름다운 비례가 생기니, 어떤 비율로 면을 쪼개느냐가 관건이다. 1984년 그는 청와대에 전통 안방을 꾸미면서 판재 선별부터 디자인, 비례와 형식, 제작 공정에 이르기까지 최 관장의 세밀한 가르침을 받았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솜씨 좋은 목수를 불러들여 집 안 분위기에 맞는 가구를 합작으로 만들어 냈던 것처럼 그도 최 관장과 합심해서 조선 시대 가구의 원형을 되살려냈다. 최 관장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인연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지금도 최 관장과 작업할 때와 마찬가지로 일대일 도면 그리기를 고수한다. “가구 도면을 실물 크기 그대로 그려서 벽에 붙여 놓고 자꾸 들여다봅니다. 그러면 어제 안 보이던 것이 오늘 보이고, 어제는 괜찮아 보였는데 오늘은 고쳐야 할 게 눈에 들어오죠. 시간을 두고 수정하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해 최상의 도면을 완성합니다.” 뒤틀림 없이 깔끔한 비례미를 자랑하는 그의 작품은 이처럼 꼼꼼한 도면 작업을 거쳐 만들어진다. 재현은 하되 복제는 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진 그는 지금도 짬이 날 때마다 스케치하며 디자인을 구상한다. 두 딸을 비롯해 19명의 이수자들과 많은 교육생들을 배출한 그는 올해 18번째를 맞는 < 소목장 박명배와 그의 제자전 > 을 해마다 거르지 않는다. 전통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 아직도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결한 면 분할과 나뭇결로 인해 단아하면서도 화려함이 풍기는 사층 책장. 전통 가구는 목재의 수축 및 팽창으로 인한 변형과 파손을 막기 위해 가구 전면을 분할하는데, 이를 통해 아름다운 비례와 조형미가 생겨난다. 화장판의 나뭇결이 아름다운 박 장인의 머릿장. 머리맡에 두고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의 단층 장이다. 남성들은 중요한 문서를 보관하기 위해, 여성들은 간단한 옷가지를 수납하는 데 주로 사용했다. 반닫이는 앞면의 위쪽 절반을 아래로 젖혀서 여는 가구이다. 빈부에 상관없이 집집이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던 필수품이었고, 지역별로 다른 특징을 나타낸다. 사진은 앞면 중앙에 호리병 모양의 경첩 장식이 달려 있는 강화(江華) 반닫이.   이기숙(Lee Gi-sook, 李基淑)자유기고가

해외에서 돌아온 문화유산들

Arts & Culture 2023 WINTER

해외에서 돌아온 문화유산들 현재 해외에 소재한 한국의 문화재들은 22만 9천여 점(2023년 1월 기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설립 이후 지금까지 기증과 매입 등을 통해 환수한 문화재는 1,200여 건(2023년 8월 기준)이며, 그중 가치가 높은 유물들은 보물로 지정되고 있다. < 묘법연화경 권제6(妙法蓮華經 卷第6) > . 14세기 제작 추정. 감지에 금·은니 필사. 27.6 × 9.5 ㎝(접었을 때), 27.6 × 1,070 ㎝(펼쳤을 때), 두께 1.65 ㎝. < 묘법연화경 권제6 > 은 올해 3월 일본에서 환수한 고려 사경(寫經)으로, 경전의 주요 내용을 그린 변상도(變相圖)와 경문(經文)으로 구성돼 있다. 사경이란 불교 경전을 옮겨 적은 것을 말한다.< 묘법연화경 > 은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설파하는 경전으로, 한국의 불교 사상이 확립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 국립고궁박물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지난 7월 미국인 민티어 부부(Gary Edward Mintier & Mary Ann Mintier)에게 한국 근현대 미술품들과 직접 촬영한 사진 등 총 1,516점의 소장품을 기증받았다. 이 기증품들은 이들 부부가 1969년부터 1975년까지 서울과 부산에 거주하면서 한국 문화에 매료돼 수집하고 촬영했던 것들이다. 이 중에는 근대기 회화의 다양성을 살펴볼 수 있는 유물을 비롯해 희소 가치가 높은 자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1970년대 부산의 풍경과 생활사를 촬영한 사진들은 우리 현대사의 생생한 한 장면을 보여 주는 귀한 자료였다. 부산박물관은 이를 기념하여 한 달 동안< 1970년 부산, 평범한 일상 특별한 시선 > 이라는 제목의 특별 전시를 개최하기도 했다. < 대동여지도 > . 19세기. 30 × 20 cm(각 첩), 약 6.7 × 약 4 m(펼쳤을 때). < 대동여지도 > 는 조선의 지리학자인 김정호(金正浩)가 1861년 처음 제작하여 간행하고, 내용 일부를 수정해 3년 후 다시 발행한 22첩의 전국 지도이다. 이번에 환수된 지도는 1864년 판본에 김정호가 제작한 또 다른 전국 지도인< 동여도(東輿圖) > 의 내용이 추가되어 보다 상세한 지리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목록을 포함해 총 23첩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재청 제공 선의의 기증 2012년 설립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오래 기간에 걸쳐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해외에 유출된 국내 문화유산 실태를 조사하고, 현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유물이 더 잘 보존, 관리, 연구, 활용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한편 기증이나 매입 등의 방식으로 문화유산을 환수하는 일을 담당한다. 이 기관에 의하면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유산은 2023년 1월 기준으로 27개국 22만 9,655점에 이른다. 국가별로는 일본에 가장 많은 9만 5천여 점이 있고, 미국에도 6만 5천여 점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해외 소재의 문화유산을 환수하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 유물을 소유한 개인이나 기관, 국가가 돌려주기를 거부하면 방법이 극히 제한된다. 불법적으로 유출된 경우라 하더라도 현재의 국제법을 감안하면 환수가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환수는 주로 개인이나 기관·국가의 자발적 기증, 외교적 협의에 따른 반환, 경매나 개인적 거래를 통한 구입, 장기 임대 형식을 띤 사실상의 반환 등으로 이뤄진다. 그중 소장자의 선의에 따른 기증 형식의 환수가 가장 많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설립된 이후 지금까지 환수된 문화유산은 2023년 8월 기준 1,204건 2,482점이며 그중 상당수가 기증을 통해 돌아왔다. 자신의 돈과 시간, 노력을 들여 애써 수집한 재산을 공공 자산화한다는 것은 숭고하고 위대한 행위이다. 이렇게 기증받은 문화유산 중에는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문화재가 되는 경우들도 있다. 2018년 보물로 지정된 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 묘지(粉靑沙器 象嵌 ‘景泰5年銘’ 李先齊 墓誌)가 대표적이다. 이는 조선 시대 학문 연구 기관인 집현전에서 활동했던 학자 이선제의 묘지(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따위를 기록한 글)로, 당시 묘지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유물은 일본인 미술품 수집가인 남편 도도로키 다타시(等々力孝志) 타계 후 아내 도도로키 구니에(等々力邦枝)가 2017년 무상 기증의 뜻을 밝혀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 일영원구(日影圓球) > . 1890. 동, 철. 높이 23.8 cm, 구체 지름 11.2 cm. 조선 시대의 일반적인 해시계가 반구(半球) 형태인 것과 달리 일영원구는 꽃잎형 받침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원구를 올렸다. 당시 과학 기술의 발전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물이다. 2022년 3월 미국 경매를 통해 매입한 문화재이다. ⓒ 국립고궁박물관 희소성 높은 유물들 올해 돌아온 유산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조선(1392~1910) 후기에 제작된 한반도 지도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 와 고려 시대(918~1392) 유물인 『묘법연화경 권제6(妙法蓮華經 卷第6)』이다. 이번에 환수한< 대동여지도 > 는 기존에 국내 기관들이 소장하고 있던< 대동여지도 > 와 구성과 내용이 달라 더 의미가 깊었다. 조선 시대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인 김정호(金正浩, 1804 추정~1866 추정)가 1864년 목판에 지도를 새기고 이를 인쇄한 가로 3.3m, 세로 6.7m 크기의 지도이다. 일본인 소장자가 판매에 나서면서 그 존재가 확인됐고,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구입해 환수했다. 『묘법연화경 권제6』은 불교 경전인 『묘법연화경』 일부를 종이 위에 필사한 것이다. 경전을 정성스럽게 종이에 베껴 쓰고 또 고급스럽게 꾸민 유물을 사경(寫經)이라 한다. 이 사경은 한국의 전통 천연 염색 재료로 지금도 이용되는 쪽물을 닥종이에 물들인 후 그 위에 금가루와 은가루를 전통 접착제인 아교에 개어 글자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희귀한 이 유물은 일본인 소장자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매도 의사를 밝혀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난해인 2022년에는 모두 10점이 환수됐는데, 그 중에서 19세기 휴대용 해시계인 ‘일영원구(日影圓球)’가 크게 주목받았다. 이 유물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구형(球形) 휴대용 해시계로, 조선 시대 과학 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준다. 개인 소장자가 미국 경매에 내놓은 것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낙찰받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성공했다.   국가지정문화재 최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환수한 문화유산 중에서 16세기 작품인<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 > 와 『문조비 신정왕후 왕세자빈책봉 죽책(文祖妃 神貞王后 王世子嬪冊封 竹冊)』이 올해 보물로 지정되었다. ‘계회도’는 회합 장면을 그리고, 참석자들의 인적 사항도 적어 넣은 그림을 말한다. 지난해 미국에서 환수된< 독서당계회도 > 는 1531년에 당시 현직 관료들이 자신들의 모임을 기념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인 소장자가 미국 경매에 내놓은 것을 낙찰 받아 환수했다. 한편 『문조비 신정왕후 왕세자빈책봉 죽책』은 프랑스의 개인 소장자가 경매에 내놓은 것을 2018년 국내 한 기업이 매입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기증했다. 죽책이란 왕세자, 왕세자빈, 왕세손 등을 책봉할 때 그에 관한 글을 대나무쪽에 새겨서 수여하는 문서이다. 이 죽책은 헌종(憲宗, 재위 1834∼1849)의 어머니인 신정왕후(神貞王后) 가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책봉된 1819년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 왕실의 중요한 의례 상징물로 빼어난 예술성과 왕실 문화의 품격을 보여 준다. 특히 이 유물은 조선 왕실의 서적을 보관하던 강화도 외규장각(外奎章閣)에 있었던 것으로 1866년 병인양요 때 다른 서적들과 함께 불에 타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다가 다시 돌아와 주목을 받았다. 다양한 방식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문화유산들은 전문가들의 조사, 연구와 과학적 보존 처리를 거쳐 박물관, 미술관 같은 전문 기관에 소장된다. 이후 보존과 관리를 받으며 연구와 전시, 교육을 위한 소중한 역사적, 문화적 자료로 활용된다. < 문조비 신정왕후 왕세자빈책봉 죽책(文祖妃 神貞王后 王世子嬪冊封 竹冊) > . 1819. 대나무, 황동, 견. 25 × 102 cm. 신정왕후가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책봉된 해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 왕실의 전형적인 죽책 형식을 엿볼 수 있으며 공예품으로도 뛰어난 예술성을 지녔다. 책봉 대상자의 인적 사항을 비롯해 착한 일은 권하고 나쁜 일은 금하는 당부가 적혀 있다. ⓒ 국립고궁박물관

애니메이션, 웹툰 미디어 믹스의 또 다른 해법

Arts & Culture 2023 AUTUMN

애니메이션, 웹툰 미디어 믹스의 또 다른 해법 드라마나 영화로 미디어 믹스되던 웹툰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웹툰의 애니메이션화는 원작의 매력을 살리는 유효한 전략이면서 가상의 세계를 구현하는 데도 용이한 방식이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앞으로 더 많은 웹툰들이 애니메이션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독자들의 호응을 얻은 웹툰 원작의 애니메이션 포스터들. 위부터 < 외모지상주의 > (2022), < 기기괴괴: 성형수 > (2020), < 도깨비 언덕에 왜 왔니?(Dokkaebi Hill) > (2021~2022), <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My Daughter is a Zombie) > (2022). ⓒ 넷플릭스(Netflix) ⓒ 에스에스애니먼트(SS Animent Inc.), 스튜디오 애니멀(Studio Animal), SBA ⓒ 김용회(Kim Yong-hoe, 金龍會), 쏘울크리에이티브(Soul Creative), CJ ENM, KTH, SBA ⓒ EBS, 두루픽스(Durufix) 최근 인기 웹툰들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면서 미디어 믹스의 장르 스펙트럼이 확장되고 있다. 우선 2020년, SIU 작가의 < 신의 탑(Tower of God, 神之塔) > 과 박용제(Yongje Park, 朴溶濟) 작가의 < 갓 오브 하이스쿨(The God of High School, 高校之神) > 이 TV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전 세계 관객들과 만났다. 비슷한 시기에 외모 지상주의 사회를 풍자한 오성대(Sungdae Oh, 吳城垈) 작가의 웹툰 < 기기괴괴(Tales of the Unusual, 奇奇怪怪) > 가 < 기기괴괴: 성형수(Beauty Water, 奇奇怪怪: 整容液) > 라는 제목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2022년에는 넷플릭스가 박태준(Taejun Pak, 朴泰俊) 작가의 대표작 < 외모지상주의(Lookism, 看臉時代) > 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스트리밍했다. 이 외에도 많은 작품들의 애니메이션화가 거론되고 있으며, 특히 추공(Chugong) 작가의 웹소설을 기반으로 한 웹툰 < 나 혼자만 레벨업(Solo Leveling, 我独自升级) > 의 경우엔 해외 팬들의 적극적인 요청에 따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중이다. 그동안 시장 검증을 마친 웹툰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진 사례들은 많았지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는 경우는 드문 일이어서 이 같은 현상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효율적인 미디어 믹스 출판된 만화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사례는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을 4천 장의 종이에 그려 넣은 윈저 매케이(Winsor McCay)의 < 잠의 나라의 리틀 네모(Little Nemo in Slumberland) > (1911) 이래로 만화의 애니메이션화는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졌다. 특히 일본에서 1990년대에 3차 애니메이션 붐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제작위원회(製作委員會)’라 불리는 특유의 미디어 믹스 체계가 있었다. 잡지에 연재된 만화는 단행본 발간, 애니메이션 제작, 관련 상품 제작으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팬덤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이렇게 출판된 만화를 TV 시리즈나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자주 연계해 온 덕분에 만화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애니메이션의 시청자가 될 수 있었다. 반대로어린이 채널에서 방영되는 애니메이션을 먼저 접하고 나중에 원작 만화를 접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동시에 향유해 온 소비자층은 웹툰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구조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미지와 대사가 2차원 평면에 그려진 웹툰은 시각만으로 독해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웹툰은 가상 세계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정지된 이미지가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작화 스타일을 비롯해 의성어, 의태어, 효과선 같은 만화적 표현으로 장면에 생동감을 불어 넣는다. 이렇듯 웹툰에서 구현 불가능한 상상의 세계는 없어 보인다. 웹툰에서 그려진 가상 세계를 영상화하려면 드라마나 영화처럼 실사 영상으로 찍는 방법과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SF나 판타지 세계관의 스토리텔링을 드라마나 영화 같은 실사 영상으로 만들려면, 거대한 세트장에서 촬영을 하고 특수 효과 과정도 거쳐야 한다. 제작 공정도 복잡하고 막대한 비용이 투입된다. 이에 반해 웹툰의 애니메이션화는 제작 공정이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효율적이며, 원작 그대로의 매력을 십분 살릴 수 있는 강점이 있다. 특히 3D 애니메이션보다 2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것이 원작의 매력을 살리는 데 유효한 전략이다. 게다가 웹툰 독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감상하는 행위에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판타지 재현에 적합 2011년 4월부터 2022년 10월까지 네이버웹툰(NAVER WEBTOON)에 장기 연재된 박용제 작가의 < 갓 오브 하이스쿨 > 6화 장면. 네이버웹툰의 대표 히트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은 2020년 TV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한국과 일본에서 방영되었다. 우승하면 소원을 들어주는 격투기 대회에 저마다 사연을 지닌 인물들이 참가하여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 네이버웹툰, 박용제 근래 웹툰계에 나타나는 장르적 특성 중 하나가 판타지다. 주인공이 적대자들을 물리치며 최강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약속된 서스펜스를 보장하는 게임형 판타지나 로맨스 판타지는 실사 영상으로 미디어 믹스하는 것보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편이 원작을 제대로 구현하는 데 효과적이다. 주인공이 게임과 같은 가상의 판타지 세계로 이동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스토리텔링은 실재하지 않는 ‘가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판타지 세계에서 모험을 통해 성장하는 소년이 등장하는 웹툰 < 신의 탑 > 은 어린 시절부터 가족처럼 의지하던 소녀에게 버림받은 주인공이 소녀를 찾기 위해 신의 탑에 오르는 여정을 그린다. 2010년 네이버웹툰(NAVER WEBTOON)에 연재되기 시작돼 지금까지도 매주 업데이트 중인 이 작품이 만약 실사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었다면 여러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일단 실사 영화로 웹툰의 판타지 세계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지가 문제다. 디지털 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어 완성도 높은 특수 효과를 앞세운 영화들이 제작되고 있지만, 여전히 감당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제작 기간과 막대한 비용은 차치하고라도 손으로 그린 이미지는 과장과 생략을 통해 독자들이 이입할 여지를 주는 데 비해 실제 배우들이 등장해 연기하는 장면은 그렇게 되기 어렵다. 독자들이 저마다 상상하는 상(像)과 일치하지 않을 때 실망감이 클 수밖에 없다. 즉 실사 영상으로 웹툰의 세계와 캐릭터 구현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설득이 어렵다는 얘기다. 따라서 이러한 난관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것이다. 물론 애니메이션 제작에도 적지 않은 비용과 기간이 소요되지만, 원작이 가진 판타지 세계를 고스란히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은 큰 무기이다.   잠재 독자층 포섭 웹툰 산업은 웹툰의 영상화와 관련 상품 판매 시스템으로 이어지는 산업화 체계를 점차 갖춰 가는 중이다. IP(Intellectual Property)의 다각화를 통해 업계에서 글로벌 종합 콘텐츠 기업으로 확고한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기존 팬덤을 유지하는 한편 새로운 향유층을 확대해 나갈 필요가 있다. 장기 연재되는 웹툰의 장대한 스토리텔링은 여러 회차의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될 때 기존 웹툰 독자들의 만족도가 높아질 수 있다. 한편 애니메이션 채널의 주요 타깃층이 어린이라는 점에서 웹툰의 애니메이션화는 잠재적 웹툰 독자를 미리 포섭해 두는 포석이 될 수 있다. 아직 세로 스크롤, 스마트폰으로 읽는 형식의 웹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웹툰에도 호기심을 느끼도록 애니메이션을 먼저 향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잠재 독자층뿐 아니라 출판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향유해 온 기존 출판 만화 독자들에게도 웹툰의 애니메이션화 전략은 유효하다. IP를 어떤 장르로 제작해야 성공할 수 있는지는 확언하기 어렵다. 다만 콘텐츠 향유자들의 날로 다양해지는 취향과 원작 구현의 적합성을 고려했을 때 애니메이션화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김용회 작가의 < 도깨비 언덕에 왜 왔니?(Dokkaebi Hill) > 는 2013년 8월 카카오웹툰(Kakao Webtoon)에 첫 화를 공개한 후 현재까지 연재 중인 판타지 웹툰이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부모를 찾기 위해 주인공이 친구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쏘울크리에이티브와 CJ ENM이 TV 시리즈로 제작했고, 어린이∙청소년 대상 방송 채널인 투니버스(Tooniverse)에서 2021년 7월부터 2022년 2월까지 매주 방영되었다. ⓒ 김용회, 쏘울크리에이티브(Soul Creative), CJ ENM, KTH, SBA < 지구의 주인은 고양이다 > 는 2020년 3월 카카오페이지(Kakao Page)에 첫 연재를 시작해 이듬해 완결된 HON 작가의 웹툰으로, 지구 정복을 꿈꾸는 고양이와 주변 동물들의 일상을 담았다. 현재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중이며, 2024년 상반기 방영 예정이다. ⓒ Cats are Masters of The World Animation Partners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네이버웹툰에 연재된 이윤창(Lee Yun-chang, 昌) 작가의 <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My Daughter is a Zombie, 僵尸奶爸) > 은 좀비가 된 딸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좌충우돌 이야기다. 진중한 주제 의식과 유머 코드를 통해 독자들에게 진한 여운을 남겼다. 두루픽스와 EBS 방송이 TV 애니메이션으로 공동 제작하여 2022년 EBS 채널을 통해 방영되었다.ⓒ EBS, 두루픽스(Durufix) 홍난지(Hong Nan-ji, 洪蘭智)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목판에 새긴 글자의 힘

Arts & Culture 2023 AUTUMN

목판에 새긴 글자의 힘 목판에 글씨나 그림을 새기는 각자(刻字)는 목판 인쇄와 현판 제작의 핵심 기술로 서체의 특성과 글 내용을 온전히 이해한 뒤에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각자장의 기량은 각질의 흔적, 글자체의 균형도 등으로 평가된다. 김각한(Kim Gak-han, 金珏漢) 장인은 오랜 기간 작품 활동과 전승 활동을 펼친 노고를 인정받아 2013년 국가무형문화재 각자장 보유자가 되었다. 각자장 김각한(Kim Gak-han, 金珏漢) 씨가 각자 작업 중인 모습. 그는 책판용으로 조직이 치밀하면서 적당히 단단한 산벚나무를 애용한다. 각자는 목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일을 말한다. 목판 인쇄물은 물론이고 건축물에 내거는 현판(懸板)도 각자를 통해 제작됐으니 역사가 오랜 기술이다. 각자의 기능을 가진 장인을 각자장이라고 한다. 2013년 각자장 보유자로 인정된 김각한은 방화로 소실됐던 숭례문(崇禮門) 현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1377)의 목판본, 한국전쟁 때 불타 버린 『훈민정음 언해본(諺解本)』 등 굵직한 우리 문화재의 복원 작업에 참여했다. 목공에서 각자로 단단한 목판에 글씨를 정교하게 새기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도구가 필요하다. 그가 사용하는 도구는 망치, 칼, 끌 등 30여 가지에 이른다. 장인의 출발은 목공예였다. 그는 1957년 경상북도 김천(金泉)에서 농사짓는 부모의 5남 1녀 중 다섯째로 태어나 초등학교만 겨우 마쳤다. 6학년 때 부친이 사망하면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김천 시내 목공소에 다니며 소목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촌구석에 널린 게 나무였으니까요. 덕분에 일찌감치 나무를 다룰 줄 알았죠.” 학업에 대한 미련이 많았던 그는 낮엔 일하고 밤엔 공부하면서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군 제대 후에는 서울로 올라와 종로 탑골공원 근처 목공예학원에 다녔다. 그러던 중 1983년 동덕(同德)미술관에서 열린 오옥진(吳玉鎭)의 전시회는 그의 인생을 단번에 바꿔 놓았다. “그때 전통 각자를 처음 봤어요. 옛 서울의 지도 < 수선전도(首善全圖) > 를 복원한 것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렸죠. 곧바로 하던 일을 정리하고 선생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습니다.”그의 스승은 1996년 각자장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첫 번째 보유자가 된 인물이었다. 김각한은 2005년 전승교육사가 되었고, 이후 문화재 복원과 전승 활동을 인정받아 8년 후 스승의 뒤를 이어 2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스승과의 만남이 목공에 머물 뻔했던 장인을 각자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면, 서예가 박충식(朴忠植)은 그를 진정한 장인의 길로 이끌었다. “각자를 배운 지 2년쯤 되니까 한자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걸 절감하게 되더군요. 문자를 다루는 공예인 만큼 글과 글자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죠.” 그는 본격적으로 서예를 배우기로 하고 아예 선생의 서실이 있던 방배동 인근으로 이사를 했다. 이때 마련한 작은 공간이 지금의 공방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배움에 대한 갈증은 1992년 방송통신대학 중어중문학과 입학으로 이어졌다. 늦게 빠진 공부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었다. 일하며 공부하느라 6년 만에 졸업했지만 글공부는 지금도 놓지 않고 있다. 치목에서 인출까지 각자의 핵심은 새기는 일이지만, 그 시작과 끝은 나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적합한 나무를 구해 오랜 시간 건조시키며 삭이는 치목(治木) 과정이 중요하다. “현판은 용도에 따라 돌배나무, 소나무 등 다양한 수종을 씁니다. 하지만 책판용으로는 조직이 치밀하면서 적당히 단단한 산벚나무가 가장 적합하죠. 『팔만대장경』 목판의 수종을 분석해 보니 70% 이상이 산벚나무였습니다. 그러나 나무의 종류보다는 나무를 충분히 숙성시키는 작업이 더 중요합니다. 7~8년 이상 말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뭇결이 잘 삭아야 변형되지 않고 오래 보전할 수 있거든요.” 각자할 원고나 도안이 준비되면 나무를 적합한 크기로 잘라 대패질해서 다듬은 다음 풀칠을 하고 원고나 도안 종이를 붙인다. 인쇄를 목적으로 하는 목판은 좌우를 바꿔서 붙인다. 그런 다음 종이 두께의 절반가량을 손으로 비벼서 벗겨 내고 사포로 문질러 도안을 목판에 밀착시킨다. 그러고 나서 기름칠을 해 도안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하는데, 이를 배자(排字)라고 한다. “배자에 사용하는 기름은 어떤 종류든 상관없지만 볶지 않고 생으로 착즙한 것을 써야 합니다. 볶은 기름은 굳어 버려서 글자를 새길 수가 없거든요.” 각자는 글자나 문양의 특징을 고려해 작업에 적합한 칼과 끌, 망치 등을 사용한다. 목판본처럼 좌우를 바꿔서 새기는 것을 반서각(反書刻), 공공건물이나 사찰 등의 현판과 같이 보이는 그대로 새기는 것을 정서각(正書刻)이라고 한다. 각자 작업이 끝나면 목판본의 경우 양옆에 손잡이와 통풍 기능을 겸하는 마구리를 만들어 끼운다. 그리고 각자한 나무판에 알맞은 농도의 먹물을 고르게 칠한 다음 인출할 종이를 덮고 밀대로 문질러 찍어 낸다. 현판의 경우 각자 후 채색해 완성한다. 서체에 대한 이해 김 장인이 책판을 인출(印出)한 뒤 각자가 잘되었는지 점검하고 있다. 각자장은 대량 인출이 필요한 서적을 만들기 위해 책판에 글자와 그림을 새기는 기술을 지닌 장인이다. 각자의 기법은 크게 음각(陰刻)과 양각(陽刻)으로 구분한다. 음각은 글자 자체를 파내는 기법으로 문자를 바탕면보다 깊게 파낸다. 양각은 글자 주변을 깎아내 입체적으로 돌출시키는 기법이다. “각자의 기본은 음각인데 사실 그게 가장 어렵습니다. 그저 획을 따라서 새기면 무슨 글자인지 읽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서체를 보면 어떤 부분에는 힘이 들어가 있고 어디는 힘을 뺐는데, 그런 디테일을 각자로도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획에 힘이 들어간 곳은 더 깊고 넓게 파야 글자가 살죠. 완성했을 때 누구의 서체인지 알 수 있어야 하니까요. 한마디로 서체의 특징을 잘 알고 글의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많은 작품들에 둘러싸인 그에게도 전승에 대한 고민은 적지 않다. “이 일만으로 생활이 어렵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배우려고 하질 않아요. 대부분 취미로 배우는 은퇴자들이죠. 애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까 마음을 비우게 됩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작품만 생각하려고요.” 아직 대표작이 나오지 않았다며 겸손해하는 장인은 우리 각자의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낙관했다. 이기숙(Lee Gi-sook, 李基淑)자유기고가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