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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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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WINTER 300

겨울 바다의 선물, 청어 청어는 오랫동안 세계인의 주식이 되어온 생선이다. 요즘 한국에선 청어를 해풍에 말려 김과 미역, 마늘 등 채소와 함께 싸먹는 과메기가 대표적인 요리지만, 전통적으로 다양한 요리법이 전해 내려온다. 쫀득한 식감과 기름진 고소함이 겨울철 별미로 꼽혀 왔다. 청어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한 생선이다. 몸의 폭이 좁고 높이가 높은데, 등쪽은 암청색, 중앙부터 배쪽까지는 은백색인 등푸른 생선의 한 종류이다. 수온 2∼10℃, 수심 0∼150m의 한류가 흐르는 연안에서 무리를 이루어 서식한다. 한반도 연안의 청어 수확량은 매우 불규칙한데, 올 겨울에는 풍어를 기록하고 있다. “맛 좋기로는 청어, 많이 먹기로는 명태” 라는 말이 전해온다. 한국인의 밥상에 오르는 대표적인 생선 세 가지 — 대구, 명태, 청어 —중 맛으로는 청어가 으뜸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몸이 푸른 물고기’라는 뜻의 청어는 여러 종이 거대한 무리를 지어 바다 곳곳을 다닌다. 북유럽에서 즐겨 먹는 청어는 북대서양 청어(Clupea harengus)이고, 동북아시아와 북미에서는 태평양 청어(Clupea pallasii)를 잡는다. 흰 살 생선인 대구나 명태는 지방이 적지만 청어 살의 지방은 많게는 20퍼센트에 달할 만큼 기름지다. 냉수성 어종으로 겨울부터 봄이 산란기이고 늦가을부터 기름기가 차오른다. 그 밖에도 글리신, 알라닌처럼 단맛을 내는 유리 아미노산이 많이 들어있다. 1803년 김려(金鑢 1766~1821)가 쓴 한국 최초의 어보 (牛海異魚譜, Rare Fish in the Jinhae Sea)에는 청어의 맛이 “달고 연하며, 구워 먹으면 아주 맛있다”라고 했다. 요리사이자 작가인 박찬일(朴贊日 1965~)이 경험한 청어 맛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자신의 책 에서 속초 바닷가의 막횟집에서 친구와 먹은 청어구이에 대해 “바람이 사나운 겨울날 굵은 소금을 뿌려 숯불 위에 구운 청어 살은 부드럽고 달았다”고 회상했다. 요리법 청어를 먹는 방법은 다양하다. 주산지인 동해안에서는 날것 그대로 회나 회무침으로 먹는데, 때로는 끓인 청어살을 체로 걸러 멥쌀을 넣고 죽을 쑤기도 하고 밀가루와 달걀을 씌워 지진 뒤 장국에 끓여 찜으로 먹기도 한다. 동남 해안을 낀 경상도 지방에서는 찌개로 끓여 먹기도 한다. 서남쪽 전라도 지방에서는 많은 양의 청어를 조리할 때 가마에 물을 붓고 끓여 수증기로 쪄서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청어는 구워 먹을 때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굵은 소금을 뿌려 노릇하게 구우면 부드럽고 달며 고소하다. 박찬일 요리사는 “기름이 많은 생선이라 구우면 자글자글하게 기름이 배어 맛이 기가 막히다”고 설명했다. 바닷물고기에는 바닷물과 체내 염도의 균형을 유지해 주는 비단백질 질소 화합물인 트라이메틸아민옥사이드(TAMO: trimethylamine oxide)가 들어있다. 이 화합물이 미생물에 의해 트리메틸아민(TMA: trimethylamine)으로 분해되면 비린내를 풍긴다. 겨울철 기름기가 그득한 청어에는 다가불포화지방산(polyhydric fatty acid)이 많이 들어있어 쉽게 산패된다. 이로 인해 비린내가 더 강해지는데, 청어로 찌개를 끓일 때 된장을 풀거나 구울 때 된장을 바르면 비린내가 줄어든다. 된장 속 향기 물질이 비린내가 덜 느껴지도록 하고 된장의 주성분인 단백질이 비린내 성분과 결합하여 휘발을 막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청어의 다양한 조리법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실제로 1996년 1월 27일 동아일보에는 “청어 지짐이, 청어 조림, 청어젓, 청어백숙 같은 경기도식 요리를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다”는 기사가 실렸다. 다양한 청어 요리를 맛보기 어려워진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청어가 있다가 없다가 한다는 것이다. 청어 수확량은 오래 전부터 들쭉날쭉했다. 찬물을 따라 떼로 몰려다니는 청어는 잡힐 때는 최다 어획류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그러다가 잡히지 않을 때는 10여 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기도 했다. 임진왜란을 회고한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懲毖錄, A Record of Penitence and Warning)에는 전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일어난 기이한 일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해의 물고기가 서해에서 나고 점차 한강까지 이르렀으며, 원래 해주에서 나던 청어가 최근 10년이 넘도록 전혀 나지 않고 요동 바다(遼海)로 이동하여 나니 요동사람들이 이를 신어(新魚)라고 일컬었다.” 비슷한 시기인 1614년 이수광(李睟光 1563~1629)이 쓴 백과사전적 저서 (芝峰類說, Topical Discussions of Jibong)에도 비슷한 설명이 나온다. 봄철 서남해에서 항상 많이 잡히던 청어가 무려 40여 년 동안 전혀 산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의 (亂中日記, War Diary)에는 청어를 잡아 군량미와 바꾸었다는 기록이 나오기도 한다.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4)은 자신의 책 (星湖僿說, Miscellaneous Explanations of Seongho)에서 류성룡의 을 인용하면서 이후 상황을 설명한다. 유성룡이 을 쓴 당시에는 오직 황해도 해주에만 청어가 있었지만 이제는 조선 바다 전역에서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청어가 “해마다 가을철이 되면 함경도에서 생산”되고 “봄이 되면 차츰 전라도와 충청도로 옮겨 간다. 봄과 여름 사이에는 황해도에서 생산되는데, 차츰 서쪽으로 옮겨가면서 점점 잘아지고 흔해지기 때문에 사람마다 먹지 않는 이가 없다”고 기록했다. 청어를 겨울 바닷바람에 말린 과메기는 쫀득한 식감과 입 안 가득 퍼지는 어유(魚油)의 고소함이 일품으로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다. 잘 말린 청어를 잘게 잘라 마늘, 고추, 마늘쫑 등을 채 썰어 미역이나 김에 싸 먹는다. ©GETTY IMAGES 겨울로 접어들면 경북 영덕을 비롯한 동해연안의 해촌에선 청어를 말리느라 분주하다. 대가리를 잘라내고 겨울철 해풍에 얼렸다 녹혔다를 반복하면 비리지 않고 고소한 과메기가 된다. ©전재호 과메기 이익은 시대별로 어획량이 크게 변하고 잡히는 지역조차 달라진 것은 청어가 변화하는 풍토와 기후를 따라다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250여 년 전 이야기이지만 그의 추측은 옳았다. 국립수산과학원이 1970년부터 2019년 사이 한반도 연안의 청어 어획량을 분석한 결과 동해에서는 수온이 오를수록 어획량이 증가한 반면, 서해의 어획량은 수온이 오를수록 감소했다. 이 연구에 의하면 지난 50년 동안 청어의 어획량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5천 톤 내외로 잡히다가 중반 들어 1천 톤 밑으로 떨어졌다. 1980년대 말부터 다시 증가하면서 1999년에 정점으로 2만 톤을 찍고는 다시 2002년에 2천 톤 아래로 내려갔다. 2000년대 중반 다시 어획량이 급증해서 2008년에는 무려 4만 5천 톤이 잡혔다. 이듬해에도 청어 대풍은 이어졌다. 2009년 12월 20일 KBS 뉴스는 사라진 청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류성 어종인 청어가 동해뿐만 아니라 물이 따뜻한 동남해와 남해안 일대에서도 많이 잡히면서 경북 영덕에서 청어 과메기를 다시 만들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1960년대 이후 청어가 잘 잡히지 않으면서 주로 경북 해안 지방에서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게 되었지만 원래 과메기는 청어를 말려 만들었다. 어류학자 정문기(鄭文基 1898~1995)가 1939년 5월 9일 동아일보에 쓴 칼럼에 보면 “청어 다산지인 경상북도에서는 소건한 청어를 ‘과미기’라고 칭하고, 지방특산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수산물”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이처럼 1930년대만 해도 경상북도 해안은 청어의 주산지였다. 요즘에는 과메기를 배추 같은 채소나 김, 미역, 다시마 같은 해초로 쌈을 싸먹는 경우가 많지만 과거에는 불에 구워먹기도 했고 쑥국을 끓여 먹기도 했다. 과메기라는 말이 어디에서 왔는가는 분명치 않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 (徐有榘 1764~1845)는 자신의 책 (佃漁志, Record of Hunting and Fishing)에서 당시 조선의 건조 청어는 등을 갈라 열지 않고 통째로 볏짚 새끼줄로 엮어서 햇볕에 건조하여 만든다고 설명한다. 서유구는 두 눈이 투명하여 새끼줄로 관통해 꿸 수 있어 이를 ‘관목’이라 부른다고 주장했다. 이 말이 변하여 지금의 ‘과메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청어를 통째로 말리는 ‘통마리 방식’의 과메기는 소수이긴 하지만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주류는 배를 따고 반으로 갈라 내장과 뼈를 제거하여 해풍에 단기간 건조하는 ‘배지기 방식’이다. 통마리 방식으로 만드는 과메기는 건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게다가 청어는 꽁치보다 더 기름지고 몸통 너비도 커서 말리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꽁치 통마리가 보름이 걸린다면 청어 통마리는 한 달 이상 말려야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말린 만큼 맛이 더 진하고 한겨울 통마리 청어 과메기에는 알이 들어있어서 더욱 맛이 좋다. 청어는 구워 먹을 때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굵은 소금을 뿌려 노릇하게 구우면 부드럽고 달며 고소하다. 깨끗이 씻은 청어의 비늘을 벗겨낸 뒤 칼집을 넣고 소금을 뿌려 구우면 살이 노릇노릇해지며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된다. 기름진 청어는 구웠을 때 담백함이 증폭되면서도 살이 부드러워 입 안에서 녹는다. 반면 가시가 꽤 많아 번거롭기도 하다. ©SHUTTERSTOCK 돌아온 청어 청어가 다시 돌아왔다. 올해도 청어가 많이 잡히고 있다. 강원도 삼척에서는 청어 소비를 늘리기 위해 어묵, 조림, 튀김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공하는 방법도 고려 중이다. 국립수산과학원 연구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청어 어획량이 늘어난 것은 주로 동해의 수온이 따뜻하게 변화하여 청어의 개체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이런 연구 결과가 청어를 마구 잡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덧붙인다. 북대서양에서 남획으로 인해 청어의 어획량이 급감했던 전례를 볼 때 어린 청어를 잡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970년 노르웨이에서는 남획으로 청어 어획량이 0톤까지 급감했다가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되는 데 무려 20년이 걸렸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청어가 정확히 어떻게 무리지어 이동하는지에 대해서도 아직 모르는 게 많다. 청어가 동해로 돌아오긴 했지만 인근의 중국 황해와 일본 북해도에서는 여전히 잘 잡히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잘 모른다. 무분별한 포획보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청어를, 그리고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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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WINTER 147

이념을 넘어 지켜야 했던 것 영화 는 30년 전 소말리아 내전에서 함께 살아남은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의 실화를 생생하게 엮었다. 이념과 체제가 생존의 본능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류승완식 휴머니즘이 파헤친다. 2021년 7월 개봉한 는 1990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힘을 합쳐 혼란의 도시를 함께 탈출한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이다. “자동차 한 대가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사막을 질주하는 이미지에서 출발했다”는 류승완 감독의 말처럼 4대의 자동차에 나누어 탄 양측 외교관과 그 가족들의 긴박한 탈출 장면이 영화의 백미이다. 소말리아와 풍경이 비슷한 모로코 에사우이라에서 거의 모든 장면을 CG 없이 실제로 촬영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미라클 작전도 영화로 만들 준비를 해야 하나.” 얼마 전 ‘미라클 작전’을 지켜보다가 촬영이 한창이 류승완(Ryoo Seung-wan 柳昇完) 감독에게 관련 기사를 보냈더니 ‘미소’이모진을 덧붙여 돌아온 대답이다. 지난 8월 미군 철수와 탈레반의 재점령으로 아수라장이 된 카불에서 그 동안 한국 정부에 협력한 아프간 민간인과 그들의 가족을 탈출시킨 정부의 결정과 실행은 국제사회에서의 연대감과 책임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 작전을 지켜보면서 코로나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 속에서도 극장 관객 300만을 기록하며 장기 상영에 들어 간 류승완 감독의 영화 (逃出摩加迪休, Escape from Mogadishu; 2021)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운명 같은 인연 “자동차 한 대가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사막을 질주하는 이미지에서 출발했다.” 2년 전, 류 감독이 속한 제작사 외유내강(內柔外剛 Filmmaker R&K)이 제작한 재난 영화 (極限逃生, EXIT; 2019)의 시사회에서 잠깐 만났을 때 류 감독이 던진 말이다. 전작 (軍艦島, The Battleship Island; 2017) 이후 와신상담하던 그가 자신의 열한 번째 장편영화로 를 막 결정했던 즈음이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이라 그는 말을 아꼈지만 그 날의 짧은 대화에서 그가 어떤 배경과 분위기의 작품을 구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단서 두 가지를 얻었다. 그것은 실화를 재구성한다는 것과 남북한 인물들이 총알 세례를 뚫고 함께 사막을 질주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일까 무척 궁금했었고, 극장 객석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얻기까지 2년이 걸렸다. 의 배경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에 기반한다. 1990년 12월 30일 소말리아의 수도인 모가디슈에서 바레 장군의 장기 독재를 거부하는 시위가 쿠데타를 불러 일으키며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 당시 남북한 대사관이 동시에 주재하며 상호 비난과 공작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모가디슈에서 두 대사관 직원들이 힘을 모아 함께 혼란의 도시를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류 감독이 대한민국 외교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던 이 사건을 스크린에 펼쳐내야겠다고 판단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서로 대치 중이던 남북한의 외교관들이 제3국에서, 그것도 머나 먼 아프리카 대륙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나란히 분투한 사건에서 단순한 흥미 이상의 어떤 감동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류 감독은 어느 날 자신의 사무실에 놀러온 후배로부터 1991년 동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있었던 이 사건에 대해 우연히 듣게 되었다. (與神同行, Along with the Gods: The Two Worlds) 시리즈를 제작한 덱스터 스튜디오가 영화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辣手警探, Veteran; 2015)의 후반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로부터 두어 해가 지난 뒤 덱스터 스튜디오가 그에게 연출 제안을 해 왔다. 류 감독은 “실화가 궁금해 당시 언론 보도와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너무 극적인 이야기라 누가 됐든 잘 만들면 좋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감독과 영화는 그렇게 ‘운명처럼’ 만났다. 그가 이 사건에 매료된 건 무엇보다도 ‘함께 탈출한 남북한 외교관들이 특수 부대원이나 첩보 요원이 아닌 민간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극적인 상황을 겪으면서 발생하는 서스펜스가 흥미진진했고, 종전에 영화를 만들던 방식과 다른 시도를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것이 나를 움직인 원동력이었다”는 게 류 감독의 설명이다. 그는 실화를 다시 취재해 영화로 재구성했다. 모가디슈가 무장 군인과 반란군의 총격전으로 아수라장이 되기 전 남북한 외교관들은 각기 자국의 UN 가입에 소말리아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남한 대사 역의 김윤식(전면 왼쪽)과 북한 대사 역의 허준호가 긴장된 관계를 보여준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냉전 속 뜨거운 감동 영화는 1990년 12월 초부터 내전이 시작된 12월 30일을 거쳐 남과 북의 외교관들이 모가디슈를 벗어나는 1991년 1월 12일까지 약 한 달 남짓한 시간을 다룬다. 류 감독은 역사적 사실의 배경과 진전, 그리고 결말을 충실히 끌어오되 캐릭터와 사건의 디테일을 영화적으로 새롭게 구성했다. 그것은 그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작업이기도 하다. 류 감독은 “그 기간은 소말리아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급변하던 시기라 이 격동적 변화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대한한국 대사관 관저에서 12일을 함께 보냈는데 그 기간 그들이 어떻게 지냈는지를 채워넣는 게 관건”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영화에서는 크게 두 개의 전쟁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교차하며 전개된다. 장중한 아프리카풍 음악을 배경으로 바다에서 바라보는 모가디슈 풍경— 이제껏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오프닝 시퀀스에 이어지는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남북간의 외교전이 펼쳐진다. 남북한 대사들은 앞다퉈 대통령, 장관 등 소말리아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며 치열하게 로비를 벌인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고, 나라에 국격이 있듯이 외교에도 격조가 있다” 지만, 각기 유엔 가입을 위한 회원국의 표만 끌어올 수 있다면 아슬아슬한 공작도 서슴지 않는다. 당시 냉전 말기에 힘의 우위에 있었던 건 영화 속 북한 대사의 말처럼 “남조선보다 20년이나 앞서서 아프리카에 기반을 닦은”북한이다. 남한 대사는 북한 대사가 쳐놓은 덫에 걸려들어 번번이 허탕을 친다. 영화의 전반부는 주요 캐릭터들을 꼼꼼하게 구축하는 동시에 소말리아 내전이 진행되는 과정을 공들여 보여준다. 그 의도를 류 감독은 이렇게 설명했다. “관객이 인물에 몰입하고 그들과 함께 내전 상황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내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되는지 사실적으로 잘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지 조마조마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너무나 잘 알지만 관객에게는 그것이 첫 경험이다. 그러니 익숙하지 않은 역사적 배경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봐 걱정됐다. 다행스럽게도 관객이 영화 속 내전 상황을 무리 없이 잘 이해한 것 같다.” 북한으로 기울었던 균형추는 반군이 진짜 전쟁을 일으키는 중반부부터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어 나간다. 폭탄 테러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동요하며, 군부가 모가디슈로 진입해 국가를 장악하는 쿠데타 과정이 세세하게 그려진다. 그러면서 서사는 남과 북의 외교전에서 모가디슈 탈주극으로 전환된다. 긴박한 상황 속에 남한 대사가 “도와달라”고 손을 내민 북한 대사관 직원들을 받아들이면서 남과 북은 같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들에게는 남한으로의 전향이나 북한 사람과의 접촉으로 인한 국가보안법 위반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목표는 탈출해 살아남는 것,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다. 탈주극은 류 감독이 처음 시도한 장르가 아니다. 의 후반부에서 조선인 징용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탈주한다. 하지만 그 탈출 신이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판타지라면, 의 그것은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비슷한 시기의 소말리아를 배경으로 한 할리우드영화 (黑鷹計劃, Black Hawk Down; 2001)이나 미국 CIA 요원이 이란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주이란 미국 대사관 직원들을 탈출시키는 (逃离德黑兰, Argo; 2012) 역시 실화를 기반으로 한 탈주극이지만, 한 국가가 자국민을 구출하는 작전을 그려낸 앞의 두 영화와 달리 는 내전으로 인해 치안이 파괴되고 통신이 두절된 주재국 수도를 냉전 속에 대치 중인 적대국의 외교관들이 국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힘을 합쳐 탈출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긴박한 상황 속에 남한 대사가 “도와달라”고 손을 내민 북한 대사관 직원들을 받아들이면서 남과 북은 같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들에게는 남한으로의 전향이나 북한 사람과의 접촉으로 인한 국가보안법 위반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류승완 감독은 로 11월 10일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주는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같은 시상식에서 촬영상, 음악상, 남우조연상도 받아 4관왕의 영예를 누렸다. 또한 내년 3월 개최되는 제94회 아카데미영화상 국제장편영화 부문 출품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류승완식 휴머니즘 남북한 대사관 직원 20여명이 자동차 4대에 나눠 탄 채 화염병과 총알 세례를 뚫고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질주하는 후반부는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류승완식 휴머니즘이 고스란히 반영된 명장면이다. 포드 머스탱이 서울 명동 거리를 질주했던 류 감독의 전작 과 달리 이 영화 속 자동차들은 ‘모래주머니와 책을 매달아’ 속도를 내지 못해 아슬아슬한 묘미가 있다. 그런데도 서스펜스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건 관객이 함께 타고 있는 느낌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류 감독은 “진짜 같아야 한다는 원칙 안에서 신경 썼던 건 ‘스펙터클해서는 안된다’ 였다. 쏟아지는 총알과 화염병 속에 질주하는 인물들의 절박감이 전달되려면 스펙터클보다는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게 중요”했다며 “카메라가 자동차 외관보다는 차 내부 상황을 중점적으로 담아낸 것도 그래서다. 무엇보다 관객이 차 안에 타고 있는 것 같은 몰입감을 느끼게 하려면 사운드를 생생하게 구현하는 게 필요했다. 사운드팀이 녹음실에서 차 소리와 총격 소리를 사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자동차 4대가 사람을 가득 태워 느린 속도로 반군의 추격을 따돌리는 숨막히는 광경을 그 흔한 인물의 클로즈업숏이나 눈물샘을 자극하는 오케스트라 음악 없이 카메라에 담아낸 것이 인상적이다. 또한 소말리아를 탈출한 비행기 안에서 남북한 인물들이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장면도 정갈하고 담백하게 묘사되었다. 류 감독은 “비행기 안에서 그 장면을 찍을 때 배우들이 많이 울었다. 촬영 후반부라 감정적으로 고조된 상태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이 긴 시간 동안 얼마나 긴장된 상태로 함께 지냈겠나”라며 “그 장면이 과거에서 종결되는 이야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힘을 가지려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보다는 여운을 남기는 게 중요하다고 보았다. 모두가 그 상황이 어떤 감정과 의미를 담아야 하는지 다 알고 있었으니까”라고 말했다.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처음으로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영화의 중반부에서 남한 대사의 부인이 깻잎을 떼어내지 못하자 북한 대사의 부인이 자신의 젓가락으로 도와주는 장면이 뭉클했던 것도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연대를 보여준 덕분일 것이다. 아마 이 대목에서 박찬욱 감독의 (JSA安全地帶, Joint Security Area; 2000)에서 남북한 병사들이 초코파이 하나로 우정을 나누던 장면이 절로 떠오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삶의 의지, 또한 체제와 이념보다 인간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는 휴머니즘 — 류 감독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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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WINTER 284

공부의 새로운 방식 스터디 카페는 무료로 제공되는 음료나 간식을 먹으며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 혹은 여럿이 함께 이 곳에서 공부를 한다. 이런 장소들이 약 10년 전부터 생겨나기 시작했고 코로나 19로 더욱 성행 중이다. 스터디 카페는 어떤 사람들이 이용하거나 운영하고 있으며, 인기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약 10년 전부터 전국 대도시에 생기기 시작한 스터디 카페는 공부나 토론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상업시설이다. 대부분의 스터디 카페는 반투명한 가림막이 머리 높이까지 쳐져있어 고립된 느낌은 덜면서도 집중력을 높여주는 환경이다. 처음에는 중학생부터 대학생, 취업준비생까지 청년층이 주요 고객이었으나 점점 이용자의 연령층이 확대되고 있다. ©TRISYS 박정은 씨는 인천의 인하대학교에서 정치외교를 전공하는 4학년 학생이다. 박 씨는 학교 도서관 열람실을 자주 이용했는데, 멀리 갈 필요없이 자료를 찾기도 쉽고 학과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기도 좋았다. 하지만 코로나 19가 몰고 온 팬데믹으로 2020년부터 학교 도서관 열람실이 굳게 닫혔다. 이후 수업까지 온라인으로 대체되며 학교에 가는 날이 더욱 줄었다. 결국 공부 장소를 집 근처 스터디 카페로 옮겼지만, 조용한 독서실이나 도서관에 익숙했던 박 씨에게는 매우 낯선 분위기로 느껴졌다. 스터디 카페들은 대부분 무인 점포로 운영하고 각기 특징을 앞세워 경쟁력을 높이려 노력하는데, 음료와 디저트를 제공하는 스낵바 서비스가 잘 마련된 곳도 많이 있다. 또한 계절별로 자체 메뉴를 개발해 판매하기도 한다. © THENEWWAYS “처음엔 주변에서 들리는 작은 소음들이 낯설었어요. 일부러 소음을 만드는 백색 소음기나 자리를 오가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모습이 신기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행동의 제약이 적으면서도 공부하기에도 좋은 스터디 카페의 요소들에 적응했어요. 집중이 더 잘 돼서 요즘은 일부러 찾아와요. 코로나 19가 종식되고 학교 도서관 열람실을 다시 이용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좋겠지만, 그 때에도 친구들과 함께 올 것 같아요.” 서울 마포구에 사는 28세 이소미 씨는 외국계 회사의 콘텐츠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이 씨는 코로나 19 이후 재택 근무 시간이 확연히 늘어났는데, 가족과 함께 사는 집에서 일하는 것이 어색할 뿐만 아니라 공간이 좁아 효율도 늘지 않았다. 카페에서 몇 개월을 일하며 지내봤지만, 음료만 시켜 놓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눈치가 보일 뿐만 아니라 화상 회의가 있는 날에는 적당한 카페를 찾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던 이 씨에게 스터디 카페는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조용하게 일 할 수 있으면서도 화상 회의가 있을 때는 단독 사용이 가능한 룸에 들어가 마음 놓고 회의를 할 수 있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하루 단위로 결제할 수 있는 점도 출근이 불규칙적인 이 씨에게 장점으로 다가왔다. 급격한 증가 한국에는 요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도시 지역이라면 어디에나 편의점, 카페 그리고 스터디 카페가 있다. 스터디 카페가 처음 등장하던 시기에는 주로 중학생부터 대학생, 취업준비생까지 10~20대의 청년들이 이용했지만, 어딜가든 스터디 카페가 있는 요즘엔 이용자의 연령층도 넓어졌다. 특히 코로나 19로 인해 카페를 비롯한 상업시설들이 큰 타격을 입었지만, 공공 도서관과 대학 도서관 등이 문을 닫고 재택근무가 활성화되며 스터디 카페는 오히려 성행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공간의 제약이 심해지고 같은 공간에서 반복되는 일상이 사람들을 쉽게 지치게 하면서 그들을 스터디 카페로 불러들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스터디 카페는 무인 점포로 운영되며 키오스크를 통해 결제와 입, 퇴실 및 적립금 관리, 좌석 이동 등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 비대면 소비문화에도 부합한다. 입구에서 열체크와 입실 승인이 되면 자동으로 문이 열린다. 원하는 자리에서 결제한 시간만큼 이용할 수 있고 대부분 무료로 음료와 간식거리가 제공된다. 문서를 복사, 인쇄할 수 있는 복합기가 설치되어 있고 여러 사람이 모여 토론할 수 있는 공동 사용 공간 ‘스터디룸’이 있는 곳도 있다. 좌석의 대부분은 낮은 칸막이가 있는 개방적인 테이블에 마련돼 있다. 옆 사람의 책을 흘깃 쳐다보기는 어렵지만, 동시에 완전히 단절되지도 않은 형태다. 더러는 넓지 않은 테이블 하나를 혼자서 쓰도록 만들어 놓은 좌석도 있고, 카페의 창가처럼 폭이 좁은 테이블에 높은 의자가 놓인 좌석도 있는가 하면, 아예 사방이 벽으로 막혀 문을 닫고 혼자 공부할 수 있는 좌석도 있다. 노트북을 사용할 사람은 키보드 소음을 마음껏 내도 상관없는 ‘노트북 존’에 가면 된다. 이용 가격도 자유자재로 선정할 수 있어 편리하다. 적게는 2시간에서 최대 150시간까지 충전이 가능하고 한달 내내 이용할 수 있는 정액권도 있다. 수요가 급증하자 공급 역시 늘어났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기본스터디카페’를 운영하는 김신애 대표는 코로나가 한참이던 2021년 2월 개업했다. 당시만해도 동네에 스터디 카페는 김 대표의 점포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불과 반 년 사이에 5분 거리를 두고 우후죽순 생겨나 지금은 같은 동네에 열 개가 넘는 스터디 카페들이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 달에 최소한 하나씩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에요. 시장은 포화 상태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당분간 열풍은 계속될 것이라 예상해요. 심지어 팬데믹이 끝난다 하더라도 높은 이용률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공부하는 학생은 계속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스터디 카페는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니까요. 대신 앞으로는 점포마다 특성을 살려 경쟁력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김 대표는 서울시 마포구에서 16년 간 학원을 운영한 경험에 비추어 이같이 예측했다. 코로나 19가 터지고 학원 매출이 급격히 감소하며 폐업한 뒤, 심사숙고 끝에 시작한 스터디 카페는 주로 학생을 상대하고 공부하는 공간을 마련해준다는 면에서 학원과 비슷한 성격을 띄었다. “학원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운영해야 해서 정신적으로 힘들었다면, 스터디 카페는 육체적으로 힘들어요. 대신 대부분 고객 상대가 비대면으로 이뤄져서 스트레스가 훨씬 덜하죠. 10시 이후 영업금지가 되기 전까지는 24시간 운영이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나가서 청소를 하고 음료나 차를 비치하는 등 점포를 관리해요. 지금은 10시에 문을 닫아서 끝나고 바로 정리합니다. 요즘엔 위생이 화두인 만큼, 청결에도 신경을 많이 써야해요. 내부에서 이용자들이 엄격하게 개인 방역을 지키는지 CCTV를 통해 수시로 체크하죠. 아무리 무인으로 운영한다 하더라도, 관리자의 눈과 손이 얼만큼 가는지에 따라 점포의 질이 달라지니까요.” 비대면 시스템이 활성화되며 인건비가 적게 들고 관리가 편한 스터디 카페는 창업 시장의 새로운 아이템으로 급부상했다. ‘기본스터디카페’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회사 ‘트리시스’의 윤형준 대표는 “작년부터 업체 수에서 큰 증가폭을 보인 스터디 카페는 노동 강도가 낮고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는 데다, 수요가 꾸준히 유지돼 좋은 창업 아이템으로 꼽힌다. 특히 무인 운영 시스템을 적용한 결과 관리가 편리해 업주들 사이에 인기가 좋은 편이다”고 말했다.실제로 김신애 대표는 “지금은 10시에 문을 닫아서 매출이 많이 줄긴 했지만, 24시간 운영할 때와 비교하자면 학원 운영보다 매출이 좋았다. 업종을 바꾸길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스터디 카페는 무인 점포로 운영되며 키오스크를 통해 결제와 입, 퇴실 및 적립금 관리, 좌석 이동 등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 비대면 소비문화에도 부합한다. 입구에서 열체크와 입실 승인이 되면 자동으로 문이 열린다. 공부 문화의 변화 물론 스터디 카페가 성행하게 된 배경에 코로나 19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열풍은 오랜 세월을 두고 서서히 변화해 온 한국의 공부 문화와 함께 들여다보면 더욱 이해가 쉽다. 30대 이상의 한국사람이라면 학창시절 한 번쯤 다녀봤던 곳이 바로 독서실이다. 동네마다 있던 독서실이 개인이 운영하는 학습 공간이라면 도서관은 공공 학습 공간이다. 도서관의 열람실은 사설 독서실과 비슷하게 조용한 분위기여서 심지어 문 여닫는 소리마저 성가셔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2010년 전남대학교에서 12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학 내 도서관 열람실에서 발생하는 소음에 대한 반응을 살펴본 조사에 따르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한 사람은 전체의 1.7%에 불과했다. 3분의 1이 넘는 응답자들이 소음 때문에 혈압이 오르거나 소화불량, 수면장애까지 얻는다고 답했다. 이런 모습은 오랫동안 조용한 환경에서 암기 위주의 공부를 해 온 문화의 연장선이다. 조선시대(1392~1910)에는 젊은 선비들이 산 속 암자에 들어가 과거 급제를 위해 공부에 매진했고, 요즘에도 대학생, 공무원, 취업 준비생 등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장소를 찾아 공부를 한다. 소위 ‘고시촌’이라 불리는 동네로 주거지를 옮겨 공부에 집중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데 2010년대 들어 공부의 형태가 조금씩 변했다. 이를테면 대학에서는 중간·기말고사의 비중이 줄어들고 ‘조별과제’의 비중이 늘어났다. 단순히 문제를 읽고 푸는 것보다 과제를 설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조용한 곳에서 혼자 외우며 공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여럿이 어울려 이야기 나누고 토론하는 공부 공간이 필요해진 것이다. 학생들이 제약적인 분위기의 독서실이나 도서관에서 벗어나 소음과 자유가 허락된 스터디 카페로 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키오스크에서 대금 결제를 하고 입실하면 오픈 테이블이나 바 형식의 좌석 등을 자유롭게 선택하며 이용할 수 있다. 대부분의 테이블마다 콘센트가 내장돼 있어 태블릿 피씨나 노트북을 이용해 공부를 할 수도 있다. ©INGStroy Inc.   공부를 위한 최적의 장소 이런 흐름 속에 일반적인 카페도 성행했다. ‘카공족’ 뿐 아니라 카페에서 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코피스(coffee+office)’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그러나 매우 개방적인 분위기에 음료 판매 위주로 매상을 올리는 카페에 비해 스터디 카페는 일반 카페와 독서실 사이에서 적당히 균형을 이루는 장소다. 그런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백색소음기’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백색소음은 집중력을 높여 주면서도 자유로움을 부여하는 스터디 카페의 상징적인 장치다. 사실 스터디 카페는 청년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가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김신애 대표는 “물론 학생이나 직장인이 가장 많지만 나이 지긋한 분들도 많이 온다. 자기 계발에 집중하거나 여러 가지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하는 연령층이 다양해진 것 같다. 공부는 꼭 청년들이 한다는 예전의 인식도 스터디 카페를 운영하며 많이 버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체 개발한 메뉴를 판매하는 스터디 카페가 있는가 하면, 주 이용고객이 학생인 학교 근처에 위치한 스터디 카페에는 점주들이 무료 간식과 음료를 비치해 주는 경우도 많다. ©TRIS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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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WINTER 263

섞인 시간의 단맛 전라북도 군산은 주변에 드넓은 평야가 펼쳐 있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곡식을 실어 나르던 곳이다. 부흥과 약탈의 허브가 됐던 이 항구 도시에는 역사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수많은 사연들이 지금도 유효한 듯한 군산의 생경한 이미지는 쉽게 변하고 달라지는 현대 도시의 속도감에 뭉근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1900년대 개항초기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문물이 군산항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됐다. 때문에 군산에는 지금도 생동감 넘치는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도시지만, 요즘은 인기 높은 관광 명소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 든다. 우리는 뭔가 섞여 있는 걸 보면 흔히‘짬뽕 같다’라고 표현한다. 채소와 해산물, 육류 등을 잘 섞으며 볶다 육수와 함께 끓여낸 빨간 짬뽕 한 그릇에는 중국, 일본, 한국이 어우러져 있다. 짬뽕으로 유명한 군산에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도 짬뽕처럼 잘 어울려 섞여 있다. 군산으로 떠나는 길에 뜨끈한 짬뽕이 생각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고속열차를 타고 익산역에 내려 다시 군산행 완행열차로 갈아탔을 때 나는 묘한 냄새를 맡았다. 외관 도장이 벗겨질 만큼 오래된 기차였는데 마치 시간이 섞인 냄새라고 해야 할까. 삐걱거리고 덜컹거리며 달리는 객차 내부에선 상상했던 타임머신을 실제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1909년 일본인 승려가 창건한 동국사는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불교 사찰이다. 당시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가져다 지었는데, 현재까지 대웅전을 비롯해 건물마다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외관이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1908년부터 1993년까지 85년간 군산세관 본관으로 사용됐던 이 건물은 지금은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국내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국가 지정 ‘근대문화유산’이다. 시간여행 그래선지 군산에서는 경암동 철길마을에 가장 먼저 들르고 싶었다. 이젠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기찻길 주변으로 시간이 박제된 곳이다. 마을 한복판을 오가던 기차는 군산역에서 어느 제지공장까지 나무와 종이를 천천히 싣고 다녔다. 오래 전 운행이 멈추며 마을 곳곳엔 당시의 시간도 멈춰 있었다. 60~70년대식 학교 교복이며 과거의 군것질거리와 잡화들까지 여전히 남아있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져 한적한 분위기지만, 나는 과거 속으로 이토록 쉽게 빨려 들어가는 것이 신기해 철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휘발되는 시간의 냄새가 코끝을 찡하게 했다. 그것은 녹슨 철길에 남은 목재나 종이 냄새와 비슷했다. 철길마을에서 빠져나온 나는 본격적인 군산 탐닉에 앞서 짬뽕부터 먹으러 나섰다. 군산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짬뽕집이 여럿 있다. 내가 찾아간 짬뽕 가게는 ‘빈해원’이었다. 건물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칠십 년 전통을 가진 이곳의 ‘청탕면’은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사람에게도 부담 없는 짬뽕이다. 한입 맛을 보자 신선한 해물이 진득하게 우러난 국물 안에서 일종의 위로가 느껴졌다. 시간이 농축된 맛이란 이런 것이구나. 장소가 주는 예스러움이 분위기를 더하고 음식은 깊은 위로가 된다. 군산에서 느낀 켜켜이 쌓인 첫 시간의 냄새가 종이었다면, 두 번째는 짬뽕이다. 군산은 오래 전부터 전국에서 곡식이 가장 많이 생산되며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였다. 배가 든든해진 나는 근대 건축물들을 한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근대화 거리를 찾아가 그 에너지의 과거 버전을 체험해보기로 했다. 근대 건축관과 근대 미술관, 근대 역사박물관을 하나씩 둘러보며 나는 그 생기가 아직도 여전한 게 신기했고 역사와 세월이 남긴 것에는 고유한 작품성까지 깃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시간에 닳고 퇴색된 것들이 아직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근대 풍경을 현재가 공유하는 광경은 여러 개의 차원과 시간이 섞인 시공간의 모형과 같았다. 시간을 견딘 이 거리의 빈티지한 변화에선 일말의 건축미까지 읽을 수 있었다. 기능만을 중시하지 않고 미를 추구했던 흔적을 아스라이 엿보았다. 가장 아담한 건축미를 보이는 건 옛 군산세관 건물이었다. 군산에는 바다와 연결되는 금강이 흐르는데, 주변에는 배로 실어나를 곡식을 모아두던 ‘조창’이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조창은 식민지 시대에 들어서 그야말로 세곡 납부용 물류센터로 이용됐다. 당시 일제의 곡물 선적 전용 창구였을 이 건물 앞에 서자 마음이 복잡했다. 독일인이 설계하고 일본인이 건축했으며 벨기에산 붉은 벽돌을 썼고 창은 로마네스크식, 현관은 영국식인데 지붕은 일본식으로 덮었다. 과연 군산의 대표적인 짬뽕 스타일 건축물이다. 군산지역에서 포목점을 경영해 큰돈을 벌어들인 뒤 부의회 의원을 지낸 일본인 히로쓰 게이사부로가 살았던 집이다. 1920년대에 지은 전형적 일본식 무가의 가옥으로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커다란 정원과 웅장한 외관이 당시 부유한 일본 상류층의 생활상을 짐작하게 한다. 이질적 조화로움 근대화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동국사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절인데 현재는 한국 사찰로 사용된다. 한눈에 봐도 무척 일본풍인 이 조그만 절은 느낌이 낯설었다. 일본식 미니멀리즘이 반영된 듯 액세서리 없이 댄디한 대웅전의 옷차림에, 월명산 자락의 백 년 된 대나무숲 헤어스타일이 잘 어울려 패션 감각이 있어 보였다. 동시에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루며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절의 뜰에는 일제가 한국인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갔던 만행을 기억하기 위한 ‘소녀상’이 서 있었다. 당시 일본인 지주들은 쌀을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 군산의 소작농들을 착취했었다. 핍박당한 소작농들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항거하며 거세게 봉기했었다. 그러나 거친 역사를 통과해 온 종교시설의 호젓한 경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과거의 원한마저 부질없이 휘발되고 해탈에 이른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이 절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들이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조화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더 이상 기차가 지나다니지 않는 경암동 철길마을 주변에는 옛 추억에 잠길 수 있는 재미있는 먹거리와 놀거리가 많다. 요즘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에 나온 달고나의 인기가 군산에서도 폭발적이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마주했다. 부유한 일본인이 살던 가정집일 뿐이지만, 시간의 풍파를 견딘 매력적인 장소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정원과 넓은 창을 가진 안채들이 아름다움을 좇는 인간의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었다. 근처 월명동 골목의 오래된 벽들, 좁은 골목들, 녹슨 철제 대문들이 주는 느낌도 아스라했다. 역사의 격동기를 지나온 채 아직도 존재하는 흔적들을 보며 오랫동안 그대로 남는 것의 의미를 생각했다. 우주가 빛의 속도보다 빨리 팽창하며 변해가고 있는데 변하지 않는 것들의 묵묵함을 보는 건 참 안심되는 일이다. 시간여행의 현란함에 취한 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으로 향했다. 이 곳은 서구의 빵 맛을 먼저 본 일본인을 상대로 영업하던 빵집이었는데, 일제의 패망 이후 한국인이 명맥을 이어받아 현재의 빵집으로 운영 중이다. 이 가게에서 유명한 단팥빵과 야채빵을 직접 먹어보니 과거의 맛과 현재의 맛이 혓바닥 위에서 짬뽕되었다. 흔한 빵마저 시간여행의 매개물이 되는 곳이 군산이다. 빵을 즐기지 않는 나도 그 자리에서 몇 개나 먹어버렸다. 군산 구석구석에는 여러 층위의 시간이 섞여 있었다. 망해버린 나라와, 일제 식민지였던 시절과 독립 후의 근대, 그리고 산업화로 바빴던 현대. 그 시간의 흔적들이 오래된 옛 도시에 고스란히 섞여 있는 모습이 독특한 감명을 주고 있었다. 문학의 기록 “나라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거야? 나라가 내게 뭘 해준 게 있다고, 일본인이 내놓고 가는 내 땅을 쟤들이 왜 팔아먹으려고 해? 이게 나라냐?” “기다리면 나라에서 억울하지 않게 처리하겠죠.” “됐고, 난 오늘부터 도로 나라 없는 백성이야. 제길. 나라가 백성한테 고마운 짓을 해 줘야 백성도 믿고 마음을 붙이며 살지, 독립됐다면서 고작 백성의 땅 뺏어 팔아먹는 게 나라냐?” 채만식(蔡萬植 1902 ~ 1950)의 소설 (1946)의 마지막 장면을 현대어로 바꾼 것이다. 채만식 문학관 앞에서 작가의 많은 작품 중 이 구절이 문득 떠오른 것은 도착부터 나를 따라다닌 군산이 가진 특별한 역사성 때문이었다. 채만식 문학관에는 30여년 동안 소설, 희곡, 평론, 수필 등 그가 집필한 200여편의 많은 작품을 모아둬 작가의 작품세계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군산 출신인 채만식 작가는 해방 전후 세태를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스킬을 가졌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는 한반도가 조선 땅이었던 시절, 행정기관에서 주인공 집안에 동학운동(東學運動 1894)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씌워 ‘처벌 받을래? 아니면 논을 내놓을래?’ 했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선대의 피땀 흘린 노력으로 조금씩 사서 모은 자기 논을 절반 이상 빼앗긴 주인공은 상심이 컸다.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했을 때 소작농 생활로 어렵게 살다 지쳐 일본인에게 남은 땅을 팔게 된다. 어차피 일제가 망하면 다시 자기 땅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일제의 재산을 환수한 독립 정부가 땅을 다시 빼앗아 가 팔아치우면서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생애 내내 자기 것을 빼앗기기만 했던 운명으로 살아간 소설 속 주인공에게 독립의 기쁨은 없었다. 나라다운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이 인물을 통해 한 국가가 멸망할 무렵 과도기적 혼돈과 그 속에서 사는 사람이 느꼈을 억울함과 회의감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채만식 작가가 남긴 작품들이 군산의 또 다른 문화유산으로 남을 수 있는 점도 이처럼 뛰어난 작품성 때문이다. 또한 채만식 작가는 일제의 힘에 동조했던 문학가 중에서 제대로 ‘반성’을 한 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해방 후에 소설 (民族-罪人 1948~1949)을 발표하며 반성의 의지를 작품으로 극명히 보여줬다. 그런 일단락 때문에 그의 문학 작품은 군산의 근대유산들과 함께 버려지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일 수도 있다. 군산 구석구석에는 여러 층위의 시간이 섞여 있었다. 망해버린 나라와, 일제 식민지였던 시절과 독립 후의 근대, 그리고 산업화로 바빴던 현대. 그 시간의 흔적들이 오래된 옛 도시에 고스란히 섞여 있는 모습이 독특한 감명을 주고 있었다. 군산역으로 돌아가기 전 무려 칠십 년 동안 호떡을 팔고 있다는 중동호떡에 들렀다. 청나라에서 넘어온 호떡은 얇은 밀반죽 빵 속에 시럽을 넣어 구은 음식이다. 보통은 기름에 굽지만 여긴 화덕에 구운 것을 팔았다. 나는 호떡의 느끼하지 않은 단맛에 기분 좋게 취하며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철길이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역사 속에 남겨진 깔끔한 단맛. 그 맛이 꼭 군산 같았다. 과거와 현재가 철길을 따라 이어지는 광경은 쉽사리 현실감을 아련하게 흐려버린다. 약 2.5km의 철길 양쪽으로 낡은 집들과 옛 모습의 가게들이 즐비하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예전 학창 시절의 교복을 빌려 입고 철길을 따라 걸으며 추억을 되새긴다. 도시를 구경하다 보면 아름다운 색감의 서정적인 벽화와 종종 마주친다. 유명 관광지에 화려한 포토존을 이루고 있기도 하지만 좁은 골목길의 소박한 벽화도 많다. 20세기 전반 한국문학을 대표했던 작가 중 한 사람인 채만식의 삶과 작품 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채만식문학관에는 전시실, 자료실, 시청각실과 함께 문학 산책로, 공원도 갖추어져 있다. 2018년 국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빈해원은 짬뽕으로 유명한 중국음식점이다. 옛스러운 정취의 독특한 건물로 을 비롯한 영화 촬영 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기름에 지지지 않고 않고 오븐에 굽는 중동호떡에는 군산을 대표하는 흰찰쌀보리와 함께 검은콩, 검은쌀, 검은깨를 넣은 플랙푸드 선식이 시럽으로 들어가 고소하고 담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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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WINTER 275

영원히 지지 않는 꽃 한지를 천연염료로 염색해 만드는 지화(紙花)는 제작에 드는 비용과 시간 때문에 생화가 점차 그 용도를 대신하게 되면서, 오늘날 간신히 명맥을 이어 가고 있는 전승 공예 중 하나다. 1980년대 초 지화 공예에 입문한 석용(石龍) 스님은 불교 의식에 사용되었던 전통 지화를 복원하며 꾸준히 지화를 널리 알리는 데 힘써 왔다. 한지를 쑥으로 염색한 뒤 살접기 기법으로 만든 연꽃 봉오리들. 전통 지화는 한지를 천연 염료로 물들이고 적당한 습기를 먹인 다음 살접기, 접기, 말기, 끌기와 같은 4가지 기법으로 만든다. 이 중 예리한 칼을 사용해 정교하게 주름을 잡는 살접기가 가장 까다롭다. 지화는 불교 및 무속의 제반 의식에서 널리 활용되어 왔으며, 궁중 의례에서도 태평성대에 대한 바람을 담아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뿐만 아니라 민가에서도 혼례나 상례 같은 중요한 의례에 두루 사용되었다. 한겨울에도 비닐하우스에서 꽃을 대량 재배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과거 지화가 차지하던 자리를 생화가 대신하고 있지만, 불가에서는 대규모 의식에 여전히 지화를 사용한다. 이는 불교에서 꽃이 종교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석가모니는 연꽃 한 송이를 들어 가섭존자에게 불법을 전했고, 다수의 불교 경전들이 꽃을 깨달음의 경지로 비유하고 있다. 한국어 단어 ‘장엄(莊嚴)’은 웅장하고 엄숙하다는 의미인데, 불교에서는 이 단어가 부처를 공양하기 위해 도량을 꽃으로 장식하는 일을 가리킨다. 사찰에서 지화를 만들게 된 것도 꽃을 꺾는 것을 살생으로 여겼던 전통에서 기인한다. 이 ‘웅장하고 엄숙한’ 일을 40년 동안 수행 삼아 해 온 승려가 있다. 2008년 첫 전시회 이후 꾸준히 지화 공예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해 온 석용스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뛰어난 솜씨와 노력을 인정받아 2017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천연염색 지화를 처음 접한 이들의 입에서는 하나같이 탄성이 터져 나온다. 오묘한 색깔은 물론 섬세함이 예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사람의 손으로 그런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서는 고된 노동과 기나긴 인내가 필요하다. 석용 스님이 지화를 수행의 과정으로 여기는 것은 재료 준비부터 시작해 꽃 한 송이를 완성하는 데 1년이 걸릴 정도로 그 제작 과정이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지를 갖가지 천연염료로 물들인 후 꽃잎의 주름을 잡고 형태를 만든 뒤 대나무살로 꽃대를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석용(石龍) 스님이 살목단을 만들고 있다. 40년간 전통 지화 복원과 제작에 힘써 온 그는 뛰어난 솜씨와 노력을 인정받아 2017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접착할 때 사용하는 풀만 하더라도 만드는 데 6개월 이상이 걸린다. 통밀이나 찹쌀 같은 재료를 물에 담갔다가 거품이 끓어오르면 그 물을 버리고 새 물에 담그는 과정을 3~6개월 동안 반복해 곡류의 성분이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풀기만 남을 때까지 삭힌다. 이 과정을 다시 한 번 반복하여 얻게 된 풀을 사용해야 종이에 좀이 쓸지 않는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된 영산재는 보통 3~5일 동안 치러지는데, 저는 1년 반 전부터 지화를 준비합니다. 재를 지낸 후 소지되는 지화를 보면서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안 한다 마음을 먹지만 어느새 다음 재를 준비하게 되더군요.” 지화를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첫 작업은 염색이다. 꽃잎에 색을 내기 위해 스님은 한 해 전부터 원료를 채취해 건조시킨다. 파랑은 쪽, 빨강은 소목(蘇木), 노랑은 치자 열매, 녹색은 쑥, 그리고 보라색은 머루와 지초(芝草)에서 얻는다. 이 외에도 양파에서 옅은 노란색을, 홍화에서 선홍색을 추출해 쓴다. 손이 가장 많이 가는 재료는 쪽과 홍화이다. 쪽 염색은 별도로 중요무형문화재가 있을 만큼 쪽풀을 발효시켜 색을 얻는 과정이 복잡하고, 홍화 또한 다루기 어려운 재료다. 무엇을 사용하든 원하는 색감을 얻기 위해서는 염료에 종이를 담갔다가 꺼내 말리고 다시 적시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한다. 이러한 수고 끝에 생화처럼 보이는 지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 “다른 계절에도 필요에 따라 하긴 하지만, 염색 작업은 주로 봄철에 합니다. 3~4월에 종이가 아주 잘 마르거든요.” 습 먹이기와 살접기 지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스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꽃잎을 만들기 전 종이 상태를 조절하는 것이다. 종이가 건조하면 꽃잎의 주름이 금세 펴지고, 눅눅하면 주름 자체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스님이 ‘습(濕) 먹이기’라 부르는 이 과정은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손끝의 감각이 필요하다. 수건을 물에 적셔 꼭 짠 후 펼쳐 놓고 종이를 얹는다. 그 위에 다시 수건을 올리고 종이를 놓아 겹겹히 쌓은 후 비닐로 싸매 따뜻한 방에 한두 시간 정도 둔다. 그러고 나서 손으로 만져 보면 주름을 접어도 되는 상태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다. 이렇게 적절한 수분을 머금고 있는 종이로 꽃을 만들어야 10년이고 20년이고 세월이 지나도 형태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 “비 오는 날에는 꽃을 접지 못해요.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방에 불을 때 습도를 낮춰야 하지요. 더운 여름날에는 종이가 마를까 봐 선풍기도 함부로 틀지 못해요. 한지가 워낙 습도에 민감하기 때문이지요. 만졌을 때 약간 빠닥빠닥한 느낌이드는 것이 알맞은 상태입니다.” 그가 가장 많이 만드는 꽃은 불단을 장엄하는 모란, 작약, 국화, 연꽃이다. 민간에서 모란과 작약은 부귀영화를 뜻하지만 불교에서는 불심을 상징하며 이 꽃들은 상단에 놓인다. 중단에는 국화와 다리화를, 하단에는 주로 연꽃으로 장엄한다. 꽃잎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종이를 접어 주름을 잡아야 한다. 이때 살접기, 접기, 말기, 끌기 크게 4가지 기법이 쓰인다. 이 중 예리한 칼로 한지를 꾹꾹 눌러 정교한 주름을 만드는 살접기가 가장 어렵다. 손에 힘이 조금만 더 실려도 종이가 베어지기 때문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다. “한번은 전시회를 구경하던 관람객 한 분이 저렇게 주름 잡힌 종이는 어디에서 파는지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제가 편한 방법으로 작업하면 결코 자연 속 꽃의 느낌을 연출할 수 없어요. 살접기를 오래 하면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프지만, 수행하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공정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화 작업에 쓰이는 다양한 종류의 칼과 송곳, 망치들. 망치와 물고기 칼은 꽃대의 재료인 대나무와 싸리나무를 다듬을 때 사용하며, 송곳은 주로 국화를 만들 때 꽃잎을 고정하는 데 쓴다. 지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스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꽃잎을 만들기 전 종이 상태를 조절하는 것이다. 종이가 건조하면 꽃잎의 주름이 금세 펴지고, 눅눅하면 주름 자체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통 지화의 복원 보존된다면 천년이 간다고 하지만, 지화가 유물로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의식이 끝나면 사용한 지화는 태워버리기 때문에 전통 지화의 실물은 문헌과 그림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더군다나 제작 방법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1980년대 초반 석용 스님은 천태종 총본산인 충북 단양 구인사(救仁寺)에 계시던 춘광(春光) 스님으로부터 사찰을 통해 근근히 명맥이 유지되어 온 지화 몇 종류의 제작법을 사사받았다. 이렇게 지화 공예에 입문하게 된 스님은 사라진 전통 지화의 원형을 재현하고자 전국에 몇 명 남아 있지 않은 장인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의 사료에 나오는 지화들을 참고했다. 지화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그림은 불화로 그중 지옥에 떨어진 영혼의 극락왕생을 비는 감로탱화(甘露幀畵)에 비교적 잘 표현되어 있어 이를 토대로 한 지화를 여럿 복원했다. 그는 “전하는 이야기로 약 60종의 전통 지화가 있었다”며 지금까지 복원한 것이 25종 정도 되니 나머지를 찾아내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말했다. 100여 년 전의 시대상을 담은 책 한 권도 스님이 보물처럼 아끼는 귀한 자료다. 책에 실려 있는 한 장의 흑백 사진 때문이다. 불국토를 상징하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표현한 작품이다. 석용 스님은 연꽃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3박 4일에 걸쳐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을 관찰했다. . 220 × 180 ㎝. 부채난등은 지화를 장엄하는 형태 중 하나로 아래에서 위로 꽃송이가 점차 늘어나게 만든다. 꽃 모양이 부처의 머리처럼 곱슬곱슬한 불두화는 사찰에서 정원수로 많이 심는 꽃이다. “제가 2000년대 중반 덴마크 코펜하겐의 천태종 사찰 고광사 주지로 있을 때 스웨덴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그곳의 한 서점에서 우연히 아손 그렙스트(W. A:son Grebst) 기자가 쓴 조선 방문기 『I.KOREA』(Elanders Boktryckeri Aktiebolag 출판사, 1912)를 발견했는데, 사진 한 장에서 살모란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스님은 전통 지화를 해외에도 알리기 위해 덴마크, 캐나다, 일본, 벨기에,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특히 2014년 6월 미국 메릴랜드 찰스 카운티에서 열린 제22회 찰스 카운티 문화 축전에서는 제작 체험 부스를 운영해 현지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2017년 7월에는 한미문화예술재단이 주최하는 제12회 워싱턴 한미문화축전 행사에서 3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2미터 높이에 달하는 화려하고 웅장한 부채난등(부채 형태의 꽃꽂이)과 250여 송이 꽃으로 연출한 팽이난등(팽이 모양의 꽃꽂이)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한번에 사로잡았다. “그때 찰스 카운티의 피터 머피 커미셔너 의장이 저에게 다가와 감동적이었다고 하면서 자신의 옷깃에 꽂고 있던 카운티 배지를 제 도포에 꽂아 주었습니다. 행사장에 있던 기자들이 무척 놀라워했어요.” 현재 스님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한 건물을 임대해 작업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문화재 지정을 받은 덕분에 제자를 키워 낼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은 마련되었지만, 여전히 척박한 환경 속에 놓여 있다. 그는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지화 기법을 전수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이 마련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비쳤다. . 200 × 85 ㎝. 살접기 기법으로 만든 모란을 화병에 팽이 모양으로 꽃꽂이했다. 일본 효고현 약선사(藥仙寺 Yakusenji Temple) 소장 감로탱화 속 지화를 재현한 작품이다. 이 탱화는 조선 중기 1589년도에 제작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감로탱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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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WINTER 221

베일을 벗고 대중에게 공개된 이건희 컬렉션 삼성그룹 고 이건희(Lee Kun-hee 李健煕) 회장 타계 후 그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국보급 문화재들을 비롯해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 근현대 미술 작품들 2만 3천여 점이 사회에 환원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기증받은 작품들 중 일부를 선별하여 일반에 공개했으며, 이 특별전들은 대중적 관심 속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 정선(鄭敾 1676~1759). 1751. 종이에 먹. 79.2 × 138 ㎝. 비가 그친 후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서울 인왕산의 여름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조선 후기 화가 정선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인왕산 자락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이 산의 모습을 자신감 있는 필치로 담아냈다. 전통적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실제 경치를 직접 보고 그리는 실경 산수의 화풍을 크게 발전시켰던 그의 말기 작품이다. 2020년 10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코마 상태에 빠졌던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대중들은 그가 남긴 소장 미술품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창업주인 그의 부친 이병철(李秉喆) 회장 때부터 시작된 삼성가의 미술품 수집은 유명했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작품들에 더해 이건희 회장 부부가 그 규모를 획기적으로 늘린 컬렉션 중 일부는 그동안 삼성그룹의 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호암미술관이나 리움미술관을 통해 전시된 적이 있었지만, 전체 규모나 세부 목록은 공개된 바 없었기 때문에 늘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들은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이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들보다 문화적 가치가 더 높다고 평가하기도 했으며, 재산적 가치가 수조 원이 넘는다고 추정하는 시각도 있었다. 2021년 4월 삼성가는 이 회장의 개인 소장 문화재와 미술품 2만 3천여 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고미술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국내외 거장들의 미술 작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7월 21일부터 9월 26일까지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 -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 특별전을 개최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또한 7월 21일부터 내년 3월까지 ⟨MMCA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전을 열고 있다. (왼쪽). 14세기. 비단에 채색. 83.4 × 35.7 ㎝. ‘수월관음’은 관음보살의 또 다른 이름으로 하늘의 달이 여러 곳의 맑은 물에 비치듯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뜻을 지닌다. 관음보살이 걸친 투명한 옷 아래 비치는 문양과 은은한 색채의 조화에서 고려 불화 특유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오른쪽). 14세기. 비단에 채색. 93.8 × 51.2 ㎝. 천수관음보살은 무수히 많은 손과 눈으로 중생을 구원한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 불교는 천수관음보살 신앙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림으로 전하는 천수관음보살도는 이 작품이 유일하다. 이 그림의 천수관음보살은 11면의 얼굴과 44개의 손을 지닌 모습으로 각각의 손에 좋은 의미를 가진 물건을 들고 있다. 국보급 문화재 이건희 컬렉션은 국가 기증에 앞서 작품의 성격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의 미술관에도 일부 기증되었다. 예를 들어 전라남도 출신의 화가 김환기(1913~1974 金煥基)와 천경자(1924~2015 千鏡子)의 작품들은 전남도립미술관에, 경상북도 대구 출신의 화가 이인성(1912~1950 李仁星)과 서동진(1900~1970 徐東辰)의 작품들은 대구미술관에, 강원도 양구 출신인 박수근(1914~1965 朴壽根)의 작품은 양구 군립 박수근미술관에 각각 수십 점씩 전달되었다.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기증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간 유물들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작품들일 것이다. 국보급 문화재들을 비롯해 한국 미술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선사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토기, 도자기, 조각, 서화, 목가구 등 방대한 유물 2만 1,600여 점이 기증되었다. 이번 전시에는 그중 당대 최고의 미감과 빼어난 기술을 보여 주는 명품 77점이 선별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전시작 중 대표적인 것들로는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정선(1676~1759 鄭敾)이 1751년 그린 와 국보급 금동불상들, 그리고 미려(美麗)한 보살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린 고려 불화 를 들 수 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연코 이다. 이 작품은 경복궁 좌측에 자리 잡고 있는 인왕산에 비가 내린 직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시기적으로 유럽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는 그랜드 투어가 유행하면서 점차 관심을 끌게 된 풍경화들과 동시대에 제작되었다. 이 그림은 영국의 풍경화가 리차드 윌슨(Richard Wilson)이 1750년 이탈리아를 방문하면서 그렸던 작품들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먹과 유화 물감이라는 재료의 차이가 있지만, 윌슨의 작품이 사실적 색채 묘사에 입각하여 목가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충실하였다면, 는 붓의 다양한 놀림과 먹의 농담에 의해 생겨나는 미묘한 차이를 이용하여 비가 개인 직후 안개가 걷혀 가는 인왕산의 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했다는 점이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 김환기(Kim Whanki 金煥基 1913~1974).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281.5 × 567 ㎝. 그림에 등장하는 반라의 여인들과 백자 항아리, 학, 사슴 등은 김환기가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까지 즐겨 다루었던 모티브들이다. 대형 벽화 용도로 제작된 작품으로 파스텔 톤의 색면 배경 위에 양식화된 인물과 사물, 동물 등이 정면 또는 정측면으로 배열되어 고답적인 장식성을 띤다. © 환기재단·환기미술관(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미술사적 가치 국립현대미술관이 기증받은 이건희 컬렉션은 1,488점이다. 규모에서도 국립현대미술관 역사상 최대 기증이지만, 20세기 초의 희귀하고 중요한 작품들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이곳에서 현재 전시되고 있는 58점의 근현대 미술 작품들은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형성하는 작가들의 대표작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20세기 전반기에 식민 통치와 민족 분단에 이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혼란과 파괴의 시기를 겪었다. 이 때문에 이 시기를 전후로 한 미술품들의 상당수가 파괴되거나 분실되어 미술사 연구의 자료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따라서 고난과 결핍을 이겨내며 어렵게 제작된 작품들 중 적지 않은 수량이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오른쪽). 백남순(Baik Nam-soon 白南舜 1904~1994). 1936년경. 캔버스에 유채. 8폭 병풍. 173 × 372 ㎝. 도쿄와 파리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한국의 1세대 여류 화가 백남순의 대형 작품으로 서양의 아르카디아와 동양의 무릉도원이 동시에 연상되어 동서양의 이상향이 결합된 듯한 느낌을 준다. 동서양 회화의 소재와 기법을 어떻게 융합하고 변형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긴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화가였던 남편 임용련(任用璉 1901~?)이 한국전쟁 중 실종된 후 1964년 자녀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고, 그 이후의 작품 활동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장욱진(Chang Ucchin 張旭鎭 1917~1990). 1938. 캔버스에 유채. 65 × 80.5 ㎝.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장욱진은 집, 나무, 새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소재들을 단순화시켜 동화적으로 표현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 작품은 양정고보 재학 중 조선일보가 주최한 공모전에 출품하여 최고상을 받은 것으로 그의 대표적인 초기작이다. 세밀한 묘사는 생략되었지만 화면 구성이 잘 짜여 있다. 널리 알려진 그의 독특한 화풍이 시작되기 이전의 작품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출품작 가운데에는 백남순(1904~1994 白南舜)의 과 장욱진(1917~1990 張旭鎭)의 , 그리고 김환기의 등이 주목된다. 은 한국의 전통적 8폭 병풍 형식의 화면에 유화로 그린 작품으로 동서양 미술의 형식적 만남을 보여 주며, 현재까지 발견된 백남순 작가의 거의 유일한 대형 작품이다. 단순하고 천진한 작품을 주로 그렸던 장욱진이 20살에 신문사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상한 는 작가의 전성기 작품들과 달리 사실주의적인 풍속화 형식의 묘사를 보여 준 귀중한 초기작으로서 주목된다. 1963년부터 1974년 사망할 때까지 뉴욕에서 작업을 한 김환기가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973년에 제작한 점화(點畵) 은 최근 국내뿐 아니라 뉴욕과 홍콩 등의 경매에서도 수백만 달러의 낙찰가를 기록하면서 주목받고 있는 작가의 전성기 대작 가운데 하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기증받은 이건희 컬렉션은 1,488점이다. 규모에서도 국립현대미술관 역사상 최대 기증이지만, 20세기 초의 희귀하고 중요한 작품들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 이응노(Lee Ungno 李應魯 1904~1989). 1971. 천에 채색. 230 × 145 ㎝. 이응노는 장르와 소재를 넘나드는 끊임없는 실험으로 한국 미술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작가이다. 1960년대 초부터 제작한 ‘문자 추상’ 시리즈 또한 그의 조형적 실험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이 작품은 서정적 경향이 나타나는 초기작과 달리 문자가 더욱 입체적, 추상적으로 조합되어 있다. . 유영국(Yoo Young-kuk 劉永國 1916~2002). 1974. 캔버스에 유채. 136 × 136.5 ㎝. 유영국은 1960년대 초부터 일관되게 ‘산’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발표했다. 그에게 산은 자연의 신비와 숭고함을 담은 아름다움의 원형이었으며, 동시에 형태와 색감 같은 회화적 요소를 실험하기 위한 매개체였다. 그의 회화적 여정에서 전환점이 되는 시기에 그려진 이 그림은 기존의 절대 추상에서 형태와 색감이 보다 자유로운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전시 관람 열기 이건희 회장의 유족들이 기증한 이번 작품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두 전시에 대한 관람 열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최고 부자가 소유한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에 더하여 최근 국민 소득 증가에 따른 문화 소비의 활성화가 맞물려서 그야말로 예술계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평소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았던 일반 시민들, 특히 젊은 층들이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향했는데 여기에는 평소 전시장을 자주 찾는 것으로 알려진 그룹 BTS의 리더 RM뿐 아니라 젊은 층들에게 인기 있는 유명 연예인들의 행보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양 전시는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하여 사전 예약으로 제한된 인원만 관람이 가능한데, 그 때문에 입장권 예약 경쟁이 뜨거워지고 한때 암표가 등장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미술관 관람 문화는 유럽의 살롱전 형식과 유사한 조선미술전람회가 1922년 창설되면서 일반 관람이 시작되어 이제 겨우 한 세기를 지나고 있다. 그동안 전시 관람은 높은 문화적 소양을 요구하는 특별한 행위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최근 이러한 사회적 인식에 점차 변화가 생겨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전시 관람과 전시장에 인접한 편의시설에서 여가를 즐기는 것을 일상의 중요한 활동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때마침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들이 공개되면서 그 열기가 더욱 확산되어 가고 있다. . 천경자(Chun Kyung-ja 千鏡子 1924~2015). 1983. 종이에 채색. 96.7 × 76 ㎝. 꽃과 여인을 즐겨 그린 천경자는 동양의 전통 안료와 종이의 성질을 이용한 기법을 통해 화면에 몽환적인 느낌을 담아냈다. 자신의 큰며느리를 모델로 한 이 그림 역시 아름다운 색감과 문학적 서정을 토대로 독자적 양식을 완성한 그의 작품 세계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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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WINTER 155

평화를 꿈꾸다 1960년대 봄, 비무장지대 철책선에서 복무하던 나는 가끔 인적이 없는 근처 강가에 찾아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경치에 빠져들곤 했다. 절벽 끝에는 분홍색 진달래꽃이 만발했고, 전쟁 전 마을이 있었던 강가의 장방형 담장을 따라 잡초가 무성했으며, 여기저기 복숭아꽃과 살구꽃이 피었다. 그때의 대학생 병사가 노년으로 깊숙이 들어선 지금도 남북은 여전히 갈라져 대치 중인데, 적막에 싸인 그 강가에는 여전히 철 따라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릴 것이다. ⓒ 박종우 한국 전쟁 발발 3년 뒤인 1953년 7월 27일 발효된 정전 협정에 따라 양측은 동서 약 240km에 걸쳐 한반도의 허리를 둘로 갈라 가상의 군사분계선(MDL)을 긋고, 그로부터 남북으로 각각 2㎞ 범위에 군사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 지대를 두었다. 그것이 바로 한반도 비무장지대다. 총면적 약 907㎢인 이 지역의 남북 경계선에는 각기 높은 철책을 세우고 남북한 군대가 대치 중이다. 비무장으로 군사 활동이 금지되어 있다지만, 지뢰로 덮인 이곳은 지구상 유일하게 냉전 체제의 위험한 유산이 상존하는 살벌한 대치 공간이다. 군사분계선에는 남북한군과 유엔군이 공동 경비하는 반경 400m 원형 지역, 오늘날에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저 유명한 판문점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비무장 지역 밖 남북으로 10여㎞ 떨어진 지역에 다시 통제선 철책을 세우고 민간인의 출입을 금하였는데, 이 선이 바로 민통선이다. 역내(域內)에는 휴전 협정에 따라 남측의 대성동, 북측의 기정동 마을에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DMZ 일대는 포유류와 조류의 분포 면에서 국내 최대의 종 다양성을 지니고 있으며, 가장 많은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이 서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10월 초순에는 민통선 북쪽 철원평야에 수천 마리의 재두루미들이 시베리아의 추위를 피해 찾아와 들판에 떨어진 벼이삭을 줍는다. 또한 11월 초순이면 우리 민족이 가장 상서롭게 여기는 새인 두루미가 찾아온다. 날개가 없는 나는 이 남북한 접경 지역에 내려앉는 수천 마리의 철새 떼를 그저 사진으로만 바라보며 아직은 기약 없는 통일을, 철책선 안이 평화로운 생태공원으로 변할 그날을 꿈처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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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AUTUMN 1116

정신력과 열정으로 이룬 쾌거 정신력과 열정으로 이룬 쾌거 최근 여러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한국 음악인들의 수상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이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일찍 음악을 시작하고,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 속에서 성장하며 음악적 재능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김수연(Kim Su-yeon 金秀姢)은 올해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한국인 피아니스트로서는 처음으로 1위를 차지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최고 연주자 과정에 재학 중인 그는 이어 10월에 열리는 쇼팽 콩쿠르에도 도전할 예정이다. ⓒ Denise Tamara, 금호문화재단 제공 2020년부터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는 클래식 음악계도 얼어붙게 만들었다. 특히 지난해에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3년마다 개최되는 리스트 콩쿠르(International Franz Liszt Piano Competition)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5년에 한 번 열리는 쇼팽 콩쿠르(International Frederick Chopin Piano Competition)가 예정되어 있었다. 전자는 연기를 거쳐 결국 취소되었으며, 후자는 올해 가을로 연기되었다. 올해는 사정이 조금 나아져 각종 콩쿠르가 재개되었는데, 우수한 성적을 올린 한국인 연주자들의 소식이연이어 들려왔다. 이 외에도 바리톤 김기훈(Kim Gi-hoon 金基勳)이 영국 BBC 카디프 세계 성악가 콩쿠르(BBC Cardiff Singer of the World)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성악 콩쿠르로서 이 대회의 권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과거에 가곡 부문에서 한국인이 1위를 차지한 적은 있었지만, 본상 우승은 그가 처음이다. 퀸 엘리자베스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한국인들이 해마다 늘어나자, 2011년 벨기에 국영 RTBF 방송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집중 취재해‘한국 음악계의 미스터리’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한국 연주가들이 콩쿠르에 강한 이유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조기 교육과 치열한 경쟁을 꼽는다. 성악 분야를 제외하면 대개 어릴 때부터 음악을 시작해 일찌감치 재능을 찾아내고, 그런 과정을 통해 경험을 쌓아간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이 대표적인 영재 교육기관이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 입학 자격을 얻게 되는데 입학 후에도 1년마다 치러지는 오디션에서 탈락자가 생길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현재의 기량보다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고 선발한 학생들이 결국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런가 하면 한국인들의 강한 정신력도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된다. 또한 과거에 비하면 국제 콩쿠르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늘어나 재능을 발현할 기회가 많아진 것도 큰 변화이다. 피아니스트 김수연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Montreal International Musical Competition)는 만 33세 이하 젊은 음악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대회다. 성악, 바이올린, 피아노 부문이 한 해씩 돌아가면서 열린다. 바이올린과 성악 부문에서는 한국 연주자들이 그동안 수차례 수상한 전력이 있었지만, 피아노 부문에서는 올해 1위를 차지한 김수연(Kim Su-yeon 金秀姢)이 처음이다. 지난해 말 김수연은 2021년으로 연기된 콩쿠르가 결국 온라인으로 치러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별된 27명의 연주자들이 각각 다른 도시에서 녹음을 하고, 결과 발표 후 추가로 결선 무대를 촬영하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낯선 진행 방식이 다소 염려스럽기는 했지만, 담담하게 연습을 이어갔다. 첫 촬영은 4월 초, 자신이 살고 있는 잘츠부르크에서 조금 떨어진 빈에서 녹음을 마쳤다. 이후 4월 말 파이널리스트 결과가 발표됐고, 결선 연주는 일주일 후 브뤼셀에서 촬영됐다. 이때 그녀는 베토벤의 와 스크랴빈의 , 라벨의 를 연주했고 콩쿠르 위촉곡인 캐나다 작곡가 존 버지의 도 포함됐다. 그녀는 같은 시기 브뤼셀에서 진행된 퀸 엘리자베스 국제 음악 콩쿠르(Queen Elizabeth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에서도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준결선에 진출한 상태였다. 두 개의 콩쿠르를 동시에 준비하며 영상 촬영까지 해야 하는 과업이 주어졌다. 그녀는 “청중 앞에 서는 것이 아니어서 현장에서 느끼는 긴장감은 덜했지만, 온라인 연주를 위해 카메라와 녹음기 앞에서 연주하는 게 다소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마치 빈 벽을 상대방으로 여기고 감정을 담아서 연기해야 하는 배우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는 뜻이다. 김수연은 이번 대회를 통해 “주목할 만한 세련된 테크닉과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아티큘레이션, 미니어쳐 밸류를 가진” 연주자로 평가됐다. 그녀는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서 폭넓은 레퍼토리를 배우며 음악적 상상력을 키웠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최고 연주자 과정에 재학 중이다. 이번 대회는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치러졌지만, 실전 무대만큼 엄격했다. 김수연은 결선 무대에서 베토벤, 스크랴빈, 라벨, 그리고 캐나다 작곡가 존 버지의 작품을 연주했다. ⓒ 2021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 유튜브 영상 캡처 첼리스트 한재민과 피아니스트 박연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열리는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George Enescu International Competition)는 루마니아 출생의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 제오르제 에네스쿠를 기념하여 1958년 시작됐다. 창설 당시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부문을 대상으로 진행됐고, 이후 성악과 작곡 부문이 추가되어 1971년까지 3년 주기로 열렸다. 2009년부터는 첼로 부문이 추가되며, 2년 주기로 총 네 부문을 대상으로 열리고 있다. 동유럽권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열리는 제오르제 에네스쿠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진행된다. 한국인 수상자가 수차례 배출된 이 대회는 지난해 개최 예정이었다가 올해로 연기되었는데, 연도를 변경하지 않고 원래대로 ‘2020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로 표기했다. 지난 3월, 한경필하모닉 정기 연주회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을 연주하는 첼리스트 한재민(Han Jae-min 韓載慜)을 보고 깜짝 놀랐다. 14세 소년이 거침없이 성숙한 기교로 곡을 해석해 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2개월 뒤 그의 제오르제 에네스쿠 우승 소식을 접했을 때는 덜 놀랐다. 그는 이 대회 역사상 모든 부문을 통틀어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웠는데, 그럴 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재민은 그동안 다비드 포퍼 국제 첼로 콩쿠르(David Popper IX. International Cello Competition), 돗자우어 국제 콩쿠르(International Dotzauer Competition for Young Cellists)에서 1위를 수상했는데, 성인 대상 콩쿠르에 나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내 실력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싶었고, 경험 삼아 도전했다”고 말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피아노 반주자를 동반한 데 반해 그만이 주최 측에서 정해 준 루마니아 피아니스트와 함께 연주했다. 덕분에 세미 파이널에서 에네스쿠의 를 연주할 때 루마니아적인 정서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요즘 이슈트반 바르더이와 지안 왕의 연주를 즐겨 듣는다는 그는 “앞으로 나이 제한에 근접할 때까지 할 수 있는 한 많은 콩쿠르에 나가 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음악인 집안에서 태어난 한재민은 5세 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시작했고, 바이올린보다 큰 악기의 울림에 흥미를 느껴 첼로로 전공을 바꿨다.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는 바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최연소로 입학했다. 이 대회의 피아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박연민(Park Yeon-min 朴淵敏)은 서울대 음대와 하노버 국립 음대 석사 과정 졸업 후 최고 연주자 과정에 재학 중이다. 그녀는 지난해 열릴 예정이던 프란츠 리스트 국제 콩쿠르의 14명 준결선 진출자 중 하나였지만, 코로나19로 콩쿠르가 취소되고 말았다. 마음을 다잡고 참가한 이번 대회에서 어렵기로 유명한 라흐마니노프의 을 선택했는데, 압도적인 힘과 열정으로 연주한 끝에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올해 14세인 첼리스트 한재민(Han Jae-min 韓載慜)이 지난해 개최 예정이었다가 올해로 연기된 ‘2020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 첼로 부문에서 우승했다. 1958년에 시작한 이 대회 역사상 모든 부문을 통틀어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운 그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재학 중이다. ⓒ Andrei Gindac, George Enescu International Competition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개최된 2020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1등을 차지한 박연민(Park Yeon-min 朴淵敏)이 라흐마니노프의 을 연주하고 있다. 2014년 금호영아티스트 콘서트로 데뷔한 그는 현재 하노버 국립음대 최고연주자 과정에 재학 중이다. ⓒ Andrei Gindac, George Enescu International Competition test 한국 연주가들이 콩쿠르에 강한 이유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조기 교육과 치열한 경쟁을 꼽는다. 성악 분야를 제외하면 대개 어릴 때부터 음악을 시작해 일찌감치 재능을 찾아내고, 그런 과정을 통해 경험을 쌓아간다. 피아니스트 이동하와 아레테 스트링 콰르텟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콩쿠르(Prague Spring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는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과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멤버들이 1946년 창설했다. 만 30세 이하의 젊은 음악인들을 대상으로 두 부문씩 매년 번갈아가며 열린다. 올해는 피아노와 현악 4중주 부문에서 경연이 펼쳐졌고, 각각 이동하(Lee Dong-ha 한자)와 아레테 스트링 콰르텟(Arete String Quartet)이 1위에 올랐다. 이동하는 연세대 졸업 후 하노버 국립 음대 석사를 거쳐 뮌스터 국립 음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국제 콩쿠르에 처음 참여한 그는 이번 대회를 위해 평소 좋아하던 곡들을 선택했는데, 많은 연주자들이 연습하는 곡들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음악적 해석에 더 신중을 기했다고 한다. 지난 5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예정보다 한 달가량 앞당겨진 일정 때문에 여러모로 힘들었지만, 심사위원들로부터 자신의 연주에 대한 객관적이고 상세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던 점이 뜻깊었다고 말했다. 아레테 스트링 콰르텟은 바이올리니스트 전채안(Jeon Chae-ann 全彩顔)과 김동휘(Kim Dong-hwi 金東暉), 비올리스트 장윤선(Jang Yoon-sun 張允瑄), 첼리스트 박성현(Park Seong-hyeon 朴星昡)으로 구성됐으며 2019년 9월 창단했다. 2020년 금호 영체임버 콘서트를 통해 데뷔한 이들의 데뷔 실황 연주는 신예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KBS 라디오 클래식 FM에 소개되었다. 이들은 현재 노부스 콰르텟, 에스메 콰르텟의 뒤를 잇는 차세대 콰르텟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 이 팀은 무려 16년 만에 열린 현악 4중주 부문에서 우승 외에도 5개의 특별상을 차지했다. 피아니스트 이동하(Lee Dong-ha 李東夏)가 2021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연주하고 있다. 국제 콩쿠르에 처음 출전한 그는 1위라는 수상 결과보다 훌륭한 심사위원들로부터 조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더 값지다고 말했다. 연세대 졸업 후 하노버 국립 음대 석사를 거쳐 현재 뮌스터 국립 음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 Petra Hajská, Prague Spring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 2021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콩쿠르 현악사중주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아레테 스트링 콰르텟(Arete String Quartet)은 특별상까지 포함해 이번 대회에서 6관왕을 차지했다. 2019년 창단한 이 그룹은 국내 실내악 분야를 이끌어 갈 차세대 콰르텟으로 주목받고 있다. ⓒ Petra Hajská, Prague Spring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 류태형(Ryu Tae-hyung 柳泰衡)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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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AUTUMN 1632

식물이 주는 힘, 홈가드닝 식물이 주는 힘, 홈가드닝 한국인들은 급속한 경제개발과 도시화로 인해 마당에서 식물을 가꾸던 오랜 관습을 잃어버렸고, 젊은 세대일수록 땅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 세대의 정원문화는 이제 시간이 흘러 인테리어와 힐링이 결합하며 젊은 세대사이에 홈가드닝(interior gardening)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코로나 19로 인한 거리두기에 따라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며 실내에서 식물을 기르는 홈가드닝이 젊은 층에까지 확산되는 추세다. 온라인으로 들을 수 있는 식물 큐레이션 클래스도 다양하다. © CLASS 101 서울 마포구에 사는 직장인 박은진(36) 씨는 코로나 19 사태 이후 재택근무가 늘어나며 홈가드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무료한 집콕 생활에 작은 활력이 필요해 화분을 하나 샀던 것이, 이제는 베란다를 가득 초록 식물로 채웠다. 요즘 그는 식물들이 없던 집안에서 어떻게 생활했나 싶을 정도로 바뀐 분위기에 만족하고 있다. 그는 “코로나 19로 불안하고 우울했는데, 식물을 돌보며 마음이 편안해서 안정감이 든다”고 말한다. 서울 성동구의 워킹맘 김경선(39) 씨는 우연히 가드닝 원데이클래스를 듣고 식물에 빠졌다. 부모 세대가 정원에서 즐기던 가드닝만을 생각하던 그녀는 이토록 다양하고 트렌디한 실내 가드닝의 종류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고 한다. 집에서 함께 키우는 강아지와 고양이가 무작정 풀을 뜯어 씹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해한 식물들을 골라서 가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키울 수 있는 식물의 종류는 무척 많다. “요즘 주말 농장이나 유치원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베란다에서 작은 식물 키우기로 시작했는데 인테리어 효과에도 좋다”며 코로나가 끝나면 오프라인 클래스에 등록해서 본격적인 플랜테리어를 배울 예정이라고 한다. 10여 년 전 은퇴세대를 중심으로 불기 시작한 홈가드닝 붐이 점점 중장년층에서 젊은층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팜린이’라는 신조어도 이들을 일컫는 단어다. 농사를 뜻하는 영어‘farm’과 children의 한국어 ‘어린이’를 결합한 것으로 원래는 레알팜이라는 모바일 소셜 네트워크 게임의 입문자를 일컫는 용어였지만, 최근에는 홈가드닝을 시작하는 초보자를 뜻하는 애칭으로 더 널리 쓰이게 됐다. 국민 77.2%가 아파트를 포함한 공동주택에 사는 주거문화를 감안한다면, 마당 없는 콘크리트집에서 나고 자란 젊은 세대가 손에 흙을 묻히며 식물을 가꾸기 시작했다는 변화는 의미가 크다. 코로나블루를 겪는 많은 사람이 식물을 기르고 만지며 마음을 다스린다. 불안과 우울을 덜어주는 세로토닌 덕분이다. 최근 반려식물이 더욱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박희란 아이들은 집에서 화분을 돌보며 자연을 경험할 수 있다. 마당에 국한되던 정원의 개념이 주거 형식이 바뀌며 아파트 거실, 도심 속 옥상까지 확장됐다. ⓒ gettyimagekorea 보타닉 트렌드 2018년 10월 식물원과 공원을 결합한 서울 최초의 ‘보타닉 공원’ 서울식물원(Seoul Botanic Park)이 문을 열었고, 개장 2년반 만에 누적 관람객 1천만 명을 돌파했다. 코로나 시국을 감안하면 무척 높은 수치다. 나는 여기서 이 일대 상업시설들 명칭이 온통 ‘보타닉’ 일색이 된 현상에 주목했다. 인근의 아파트뿐 아니라, 호텔, 예식장, 식당, 커피숍, 복덕방, 당구장, 병원, 편의점까지 많은 시설들이 이 단어를 상호에 달고 있다. 올해 초 금융 중심가 여의도에는 서울에서 제일 큰 규모의 백화점 ‘더현대’가 문을 열었다. 이곳은 전체 영업면적 가운데 49%를 실내정원과 고객 휴식공간으로 채웠다. 상품이 빼곡한 진열대로 가득 찼던 기존의 백화점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백화점 인테리어의 새로운 경향을 제시했다. 실상은 롯데·신세계·현대가 각축을 벌이는 ‘빅3’ 백화점 업계가 몇 년 전부터 ‘가드닝 디스플레이’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해온 결과였다. 따라서 코로나 전부터 서서히 뿌리를 확장해온 보타닉 트렌드가 코로나와 만나 본격적인 홈가드닝 열풍을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 있다. 지난 1월, 국내 대형 쇼핑몰 롯데마트에 따르면 가드닝 상품군 매출은 코로나 시국에 따른 전체 매출의 급감에도 불구하고 2019년 17.6% 성장에 이어 2020년에도 18.7%로 상승세를 이어갔다. 특히 집콕 생활이 본격화된 2020년 한 해 동안 화분과 화병 매출은 각각 46.5%, 22.3% 증가했다. 온라인 쇼핑 플랫폼 인터파크에 따르면, 2020년 하반기 가드닝 관련 매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2% 신장했다. 이는 단순히 국내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의 설문조사기관 Advance Monthly Retail Trade Survey에 따르면 팬데믹 이후 미국 내 대부분의 소매판매 업종이 급격한 매출 감소세를 겪었으나, 홈가드닝 분야는 10% 가까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시장이 최근 몇 년간 5%내외의 증가율을 보였던 것에 비하면 눈에 띄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플랜테리어와 반려식물 홈가드닝 열기는 코로나 19가 낳은 또 다른 현상인 ‘플랜테리어’와도 연결된다. 플랜트(plant)와 인테리어(interior)의 합성어인 이 용어는 최근 인테리어 시장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고, 코로나 19와 맞물려 폭발적인 수요를 창출했다. 2020년 12월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農林水産食品敎育文化情報院, Korea Agency of Education, Promotion & Information Service in Food, Agriculture, Forestry & Fisheries)이 발표한 ‘화훼 소비 트렌드에 대한 빅데이터 분석 결과’를 보면 화훼산업 과 꽃 관련 온라인 관심도는 2019년 코로나 이전과 비교해 약 10.3% 증가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 이후 화훼 분야 소비 트렌드는 ‘반려식물 및 플랜테리어’로 나타났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지난 해 12월 카드 매출 데이터의 분석 결과를 담아 발표한‘코로나19가 가져온 소비 행태의 변화’ 보고서에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화원·화초의 2020년 1~2월 매출이 전년도에 견줘 각각 8%, 10% 줄었다가 3월부터 회복세로 돌아섰는데, 코로나의 위험성이 커지고 사회적 거리두기와 재택근무가 일상화되기 시작했던 시기와 맞물린다. 이후 매출은 4월부터 10월까지 매달 최소 4%에서 최대 30%까지 증가했다. 이 보고서는 말미에 “플랜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며 화원·화초의 매출이 늘었다”고 분석했다. 홈가드닝은 코로나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개인의 이슈와 맞물려 플랜테리어 문화를 본격적으로 확장시켰다. 이와 동시에 우리 삶에 익숙해진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반려식물’이다. BTS를 비롯한 여러 연예인들이 자신들이 기르는 식물을 SNS를 통해 공유하고 반려식물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대중의 관심도 증가했다. 이제는 단순히 1인 가구나 노령층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폭넓은 관심을 유발하고 있다. 관련 산업의 성장 해외에서도 여러 기업들이 기존에 없던 다양한 서비스와 제품들을 출시하며 적극적으로 홈가드닝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중국의 로봇 제조 스타트업인 빈크로스(Vincross)는 반려식물에 로봇 기술을 접목해 반려 동물처럼 움직이는 로봇 반려식물을 개발했다. 오스트리아의 스타트업인 하버트(Herbert)는 반려식물의 인테리어 기능을 강조한 수직공간에서 자라는 반려식물 시스템을 개발했는데, 포닉스 시스템(Ponix Systems)으로 불리는 이 방식은 액자와 같이 실내 벽면에서 수직으로 반려식물을 키울 수 있는 서비스다. 이 외에도 집을 비워야 할 때 반려식물을 맡길 수 있는 반려식물 전용 호텔 서비스나 반려식물을 치료해주는 병원이 등장했는가 하면, 반려식물의 각종 증상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도 있다. 국내에서는 집에서 직접 키워 먹을 수 있는 식물재배기 렌탈 사업이 호황이다. 발명진흥회 지식재산평가센터가 내놓은 '국내 식물재배기 시장 전망'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9년 100억원 수준이었던 식물재배기 시장 규모는 2023년 5000억원 규모로 확대될 전망이다. 관련 전시 산업도 활발하다. 올해 초 국립세종수목원에서는 특별전시회 ‘안녕, 나의 반려식물-Hello, My Houseplant’가 열렸고, 서울의 복합문화공간 피크닉의 전시장에서는 10월까지 ‘정원 만들기-Gardening’전시가 계속된다. 심리학자 스티븐 카플란(Stephen Kaplan)은 인간이 축적된 정식적 피로를 회복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자연을 찾는다는 ‘주의력 회복 이론(Attention Restoration Theory)’을 주장했다. 식물은 세로토닌을 분비해 불안과 우울감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다. 홈가드닝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은 식물이 주는 치유의 능력을 경험했다. 코로나 19사태가 끝난 후에도 홈가드닝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로 자리잡아 갈 것이라 예측된다. 홈가드닝은 코로나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개인의 이슈와 맞물려 플랜테리어 문화를 본격적으로 확장시켰다. 이와 동시에 우리 삶에 익숙해진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반려식물’이다. 온라인 홈가드닝 클래스는 단순히 화분에 흙을 넣고 식물을 심는 것에서 벗어나 벽걸이 액자 오브제 같은 트렌디한 작품을 손쉽게 배울 수 있는 것까지 다양한 과정이 있다. ⓒ CLASS 101 홈가드닝 클래스는 식물 큐레이션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식물을 화분에 심는 과정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 생활의 전반을 함께 고민하고 그동안 식물 생활에 실패한 이유, 식물로 공간을 꾸미는 방법 등을 알려준다. ⓒ CLASS 101 정대헌 (Jeong Dae-heon 鄭大憲) 사단법인 한국생활정원진흥회 회장 ( President, Korea Gardening Life Association), 월간 가드닝 기자(Reporter, Monthly Magazine Garde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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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AUTUMN 880

천년 수도의 아름다운 파동 오랜 역사와 문화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는 도시, 땅을 파면 문화재가 나오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된다는 고대 왕국의 수도. 경주는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 찬란했던 문명을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자리한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높이가 13.4m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감은사는 신라 30대 문무왕이 삼국 통일을 완성한 후 짓기 시작한 절로 지금은 지상에 이 탑들만 남아 경주의 동쪽 바다를 지키고 있다. 비트 세대 대표작가 잭 케루악(Jack Kerouac 1922~1969)— 그가 말년에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던 걸 상기하며, 한때 불교문화의 심장이었던 경주로 향하는 길에 두근거리는 맥동을 느꼈다. 그가 쓴 소설의 제목이 바로 이 칼럼의 이름 “On the Road” 였다. 경주를 요약하는 단어는 ‘천년 수도’다. 정확하게는 992년 동안 수도였으니 천년에서 8년 모자라지만 아름다운 도시니까 그냥 넘어가자. 기원 전 57년부터 936년까지 하나의 나라로 살았던 사람들, 그 나라의 이름은 신라였다. 천년간 지속된 국가는 몇 개 떠오르지 않는다. 비잔티움과 신성로마제국을 포함하며 오랜 역사성 부문에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로마제국 정도만 생각날 뿐. 아, 파라오 왕조도 상당했었지. 그런데 아시아 동쪽 끄트머리의 작은 땅에도 천 년 동안 지속하며 찬란한 문화를 남긴 국가가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경주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나 장안(시안), 바그다드 같은 화려하고 유명한 대도시와 같은 리그에서 뛴 선수였다고 볼 수 있다. 경주는 고대 실크로드를 통해 아라비아를 너머 유럽과 교류하던 중국과도 활발한 교류를 해서 신라인의 무덤에서 로만 글라스가 출토되기도 한다. 시야가 좁지 않고, 경기장을 넓게 쓰며 세계시민으로 존재감을 가진 나라였던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제국주의의 행패와 전쟁으로, 웬만한 건 다 무너졌던 이 나라에 아직도 신라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비도를 지나면 궁륭천장으로 짜인 원형공간의 주실이 나온다. 연꽃 모양의 돔으로 이루어진 천장과 본존불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부처와 보살, 수호신들이 고대의 건축술과 조형미를 보여준다. 현재는 보존 문제로 관람객이 주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며 유리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에서 지나가며 볼 수 있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한석홍 비밀스러운 아름다움 나는 배를 타고 온 이방인 탐험가처럼 동쪽 바다에서부터 경주로 들어가 문무 대왕(~681 文武大王)을 기리는 첫 유적지, 감은사지(感恩寺址)를 만났다. 이 절의 네이밍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왕의 은혜를 팔로우하고 틈만 나면 ‘좋아요’를 계속 누르겠다는 뜻이다. 감은사지의 느낌은 조금 특별하다. 관광명소 특유의 과도한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자칫 버려진 듯 보일 지경이다. 입장료도 없고 관리인도 보이지 않았다. 낡아버린 쌍탑만 달랑 남은 절터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이 쌍탑은 아주 오랫동안 이 자리에 우뚝 서 있다. 고대의 감은사 아래는 바닷물이 닿는 곳이었고, 절 아래로 용이 드나들 수 있는 수로가 설계되어 있었다. 두 개의 탑이 용이 된 왕을 지키는 중인지 용이 두 개의 탑을 지키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탑의 수수한 아름다움이 눈길을 오래 잡아끌어 시선을 돌리기 싫을 정도다. 이 탑을 해체하고 복원할 때 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舍利具)에는 신라의 정교한 금속 공예술이 가득 담겨 있다. 이 보물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아주 그냥 미친듯이 예쁘다. 탑의 겉모습인 수수한 아름다움과의 대비가 선명하다. 보이지도 않는 탑 속에 숨겨진 이 보물이 신라의 찬란한 문명을 만든 기본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하되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 아름다움은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스스로 빛난다는 걸 가르치는 것인가. 신라의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을 더 보고 싶어 경주 속으로 빨리 파고들었다. 곧 경주로 향하는 바닷바람을 막는 토함산이 나타났고, 산 깊은 곳에 있는 석굴암(石窟庵)이 등장했다. 경주의 아름다움을 담당하는 최전방 국가대표선수는 누가 뭐래도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 투톱이다. 불국사의 부속암자인 석굴암은 로마에 있는 판테온과 비슷한 구조로 설계되었는데 고대에 그런 상당한 건축 기술의 교류가 있었다는 놀라움도 있지만, 나는 당장 눈앞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도 충분히 바빴다. 석굴암은 불교국가였던 신라의 깊은 불심으로 만든 아름다운 인조 돌 동굴 속 불교미술이자 건축미의 절정이다. 빗물도 스며들지 않고 안에 이끼도 끼지 않는다고 한다. 돌을 뚫어 석굴을 만들자니 화강암이 너무 단단해서 조립식 건축 기법으로 이 인조 석굴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점이 중국이나 인도의 불교 석굴과 다른 점이고, 그래선지 상당히 유니크한 매력을 뿜어낸다. 내가 찾아간 날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 내내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석굴암의 내부 역시 문화재 보호를 위해 많이 가려져 있고, 줄 서서 지나가야 해서 자세히 볼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긴 시간 빤히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름다움은 가슴에 와락 안기는 종류였다. 조각 예술의 강렬한 미학이 파동처럼 번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 같은데, 잠깐 스쳐봤으나 망막에 본존불상의 표정이 배어버린 느낌이었다.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중턱에 있는 석굴암의 석가여래좌상은 불교미술사에서 두드러진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전실과 원실 사이, 비도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에 20여 년에 걸쳐 축조되었으며 고대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된 그리스 로마 건축양식에 불교미술이 접목된 화강암 석굴이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한석홍   빈티지 미학 탄력을 받은 나는 다음 차례의 아름다움을 찾아 불국사로 향했다. 대웅전(大雄殿) 앞 쌍탑을 보며 한 자리에 오래 남아있는 것의 빈티지 미학을 느꼈다. 신라가 멸망한 뒤, 다음 왕조들에서도 주요한 지방 거점의 역할을 하며 존재해 온 경주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빈티지일 것이다. 한때의 찬연했던 광휘와 오래 견뎌온 것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었다. 이 두 개의 탑이 얼마나 오래 이곳에서 시공간을 봐왔겠는가. 왕조의 흥망성쇠를 보았고, 그들의 삶이 이곳을 스쳐 지나가는 세월의 굴곡도 보았을 것이고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쌍탑을 비롯해 불국사의 구조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균형미를 갖고 있다. 불국사의 보물인 다보탑(多寶塔)에 조각된 네 마리 사자상 중 세 개는 유실되었다. 석가탑(釋迦塔)은 보수 공사 중에 떨어뜨리고, 탑 속의 사리함이 깨지는 등의 난리와 풍파도 겪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유물들은 번뇌를 초월한 듯 무덤덤해 보였다. 뭐든 견뎌낸 것들은 참 고혹적이다. 침략을 받고, 땅을 빼앗기고, 지진이 나고, 도굴당하고, 유물이 사라지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문화재를 지키려 노력해 온 이들의 마음이 찬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석가탑 안에선 당시의 목판 인쇄술을 보여주는 다라니경(陀羅尼經)도 발견되었다. 이 또한 신라의 자랑스러운 보물이다. 인쇄술이 인류문명 발전에 얼마나 큰 속도감을 부여했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니까. 빈티지 유물들이 보여주는 시공간의 크기와 깊이에 압도되다 불국사를 빠져나오니 문학관이 하나 보였다. 경주 출신인 김동리(1913~1995 金東里), 박목월(1915~1978 朴木月)두 작가를 함께 기념하는 시설이었다. 이들은 꽤 아름다운 글들을 썼다. 신라 문화와 한국 근대문학은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나는 하나의 연결점을 떠올렸다. 신라시대에 만든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라는 거대한 범종의 금석문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당시 사람들은 재물을 싫어하고 글재주를 사랑했다.” 내겐 이 글귀가 신라 사람들이 돈이나 탐하는 대신 문학을 사랑했다는 얘기로 해석됐다. 이렇게 아름다운 생각을 했던 나라였으니,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을 잔뜩 남긴 것 아닐까? 어릴 때부터 경주의 문물을 보고 자랐을 작가들이 부러웠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덕에 그들은 아름다움에 대해서라면 풍부한 시야를 자동으로 가졌을 것 같다. 그들을 상상하며 걷다 보니 문득 박목월 시인의 기념관에 흐르던 육성 시 낭독이 들려왔다.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 (William Wordsworth 1770~1850)처럼 광의의 낭만주의 시를 써온 시인의 서정에는 인생과 자연에 대한 통찰이 압축되어 있었다. 경주의 보물은 유물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작품 또한 오래도록 남아 계속 빛나고 있다. 나의 문학기행은 문학관에서 짧게 마무리했지만 더 깊은 탐구를 위해 두 작가의 생가와 주요 작품의 배경지들을 둘러보는 코스도 잘 마련되어 있다. 토함산 서쪽 중턱의 불국사는 석굴암과 함께 신라 불교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정교한 석축으로 조성된 터에 대웅전, 극락전 등 전각과 석가탑과 다보탑, 백운교와 연화교 등을 품고 있다. 석굴암과 더불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약 3만 8,000평의 평지에 23기의 원형 분묘가 솟아 있는 대릉원은 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군이다. 경주 시내 한가운데 황남동에 자리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비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죽음의 한복판에 삶의 한복판이 있다니. 삶과 죽음의 관계는 조화일까 부조화일까. 현대와 고대의 간극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까. 경주란 여러가지 선명한 대비만으로도 독특한 존재성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곳이다. 통일신라시대년에 주조된 성덕대왕신종은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cm, 무게 18.9톤에 이르는 범종으로 현존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종이다. 종의 맨 위에서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은 한국 동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며, 깊고 그윽한 여운이 오래 지속되는 신비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동리목월문학관은 경주 출신 소설가 김동리(1913-1995)와 시인 박목월(1915-1978)을 기리기 위해 2006년 토함산 자락에 건립되었다. 한국 현대문학에 큰 자취를 남긴 두 문인의 원고, 작품집, 동영상 등을 전시하고, 각기 생가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로 연결되는 투어도 제공한다. 동리문학관 안에 복원된 소설가 김동리의 창작실이다. 동리목월문학관은 동리문학관과 목월문학관으로 나뉘어져 각 작가의 유품, 동상을 전시하고 있다. 소설가 김동리의 육필 원고이다. 복원된 그의 창작실에는 생전에 사용하던 만년필, 안경, 책장, 집필노트 등 다양한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찬란한 종소리 문학관을 떠나 대릉원(大陵苑)에 다다른 나는 거대한 무덤들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의 그로테스크함에 감탄하다 시공간에서 내 좌표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 한 무덤 속으로 피신했다. 실내를 관람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천마총 내부였다. 발끝이 서늘했다. 경주 기행 내내 비가 많이 왔는데 발이 젖는 줄도 모르도록 경주는 계속 신선한 볼거리를 선사하는 곳이었다. 무덤 속은 무섭거나, 신비하거나, 칙칙하거나 할 것 같았지만, 아름다웠다. 사람이 죽어서 누워있던 자리는 몰락의 느낌 없이 편안해 보였고 그 정성 들인 장례에 동원된 품을 생각하니 옛날 사람들의 부지런함도 경이로웠다. 내 게으름을 반성하며 무덤에서 나오자 경주 시내 황남동 번화가가 나왔다. 나는 현대에 조성된 번화가와 고대 무덤가의 간극에 살짝 황당해졌다. 죽음의 한복판에 삶의 한복판이 있다니. 삶과 죽음의 관계는 조화일까 부조화일까. 현대와 고대의 간극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까. 경주란 여러가지 선명한 대비만으로도 독특한 존재성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곳이다. 짧은 여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앞서 언급했던 성덕대왕 신종 앞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경주를 찾은 내가 가장 다시 만나고 싶었던 신비였다. 이 종의 표면에 새겨진 반쯤 뭉개진 글자들, 그러니까 재물을 싫어하고 글재주를 사랑했다는, 그 아름다운 문장을 내 눈앞에 생생히 홀로그램으로 띄워주는 듯했다. 그리고 이 종의 독특한 공명을 가진 소리를 떠올렸다. 독자에게 종소리를 직접 들려줄 수 없어 아쉽지만, 이 거대한 범종이 퍼트리는 맥놀이 현상은 현대의 파동 역학을 잘 알고 만든 것 같은 소리라 소름이 돋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경주에 오면 이 웅혼한 종소리를 꼭 한 번 듣고 가면 좋겠다. 이 종소리가 지닌 파동은 경주의 빈티지 미학을 잘 보여주는 유물들과, 문학에 대한 이해의 경건함과, 세계와 교류하던 고대의 대도시를 지키는 용이 스스로의 찬란함에 감탄하며 내지르는 포효 세리머니와 같을지도 모른다. 간접적으로라도 그 파동을 부디 전달받을 수 있길 바라며. 아름다움에 경도되는 파동이 영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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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AUTUMN 510

밀리터리 콘텐츠의 새 풍경 분단된 한반도 상황에서 군대를 소재로 한 TV 프로그램이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최근 특수부대 출신 출연자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인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가 색다른 기획으로 화제를 만들어냈다. 한국에서 군대 소재 콘텐츠는 스테디셀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튜브 콘텐츠로 화제가 됐던 (虚假的男人, Fake Man; 2020)는 특수부대 훈련을 통해 불굴의 정신력을 기른다는 기획 의도 아래 지나치게 출연자들을 혹사시키는 장면들로 인해‘가학 논란’속에 방영이 중단되었다. 그러니 ‘군대’라는 소재 자체가 시청자들에게 불편함의 잔상을 남기고 있었던 상황에, 또 다른 밀리터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시작 전부터 우려 섞인 반응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올 3월부터 6월까지 케이블 TV 채널 A를 통해 방영된 는 여섯 개 특수 부대 예비역들이 출연한 서바이벌 밀리터리 예능이다. 각기 소속되었던 부대에 따라 특수 기술을 가진 출연자들이 극한의 대결을 펼쳐 최종 우승 부대를 가리는 방식이 시청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 채널 A 기대 밖의 열풍 하지만 올 3월 23일부터 6월 22일까지 3개월 동안 채널A가 매주 화요일 밤에 방영한 (钢铁部队, Steel Troops)는 시작과 함께 이런 우려들을 기대감으로 바꿔 놓았다. 특수부대 출신 예비역들로 팀을 꾸려, 최고의 부대를 가려낸다는 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애초에 훈련 과정이 불필요했다. 철저히 준비된 출연자들이 부대별로 대결을 벌인다는 점에서 가학 논란도 개입될 수 없는 구성이었다. 대신 자신이 속했던 부대의 명예를 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스포츠맨십이 더해졌다. 차가운 밤바다에 뛰어들어 인명을 구조하고, 250kg 무게의 타이어를 네 사람이 한 팀을 이루어 계속 뒤집어가며 300m를 이동하거나, 40kg 군장을 한 채 10km 산악행군을 하는 혹독한 미션들은 단지 승패만이 아니라 완주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미 탈락이 결정된 팀마저 끝까지 함께 미션을 완수한 것은 부대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의지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패자에게도 아낌없는 박수가 쏟아졌다. 여기에 남다른 체격에 잘 생긴 외모를 갖춘 출연자들이 벌이는 ‘대테러 작전’, ‘서울함 탈환작전’ 등은 마치 게임 같은 환상으로 여성 팬들까지 끌어 모았다. 레인보우식스나 배틀그라운드 같은 일인칭 슈팅 게임(FPS)을 실제 버전으로 보는 듯한 긴박감 넘치는 장면들이 열띤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압도적인 피지컬의 출연자들은 회차가 진행될수록 인기를 몰아갔다. 그 중 해군 특수전전단 UDT/SEAL 폭발물처리대대에서 하사로 전역한 육준서(陸俊書)는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출연자 중 한명이다. 그가 속한 UDT가 결국 우승팀이 됐다. © 채널 A 밀리터리 콘텐츠의 계보 이전에도 한국에는 다양한 밀리터리 콘텐츠들이 꾸준히 등장해왔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KBS 2TV 코미디 프로그램 의 한 코너로 방영되었던‘동작 그만’은 병영생활을 콩트 코미디 형식으로 다뤘다. 군대 경험에 대한 시청자들의 폭넓은 공감대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서열문화를 슬쩍 비튼 이 콩트 코미디는 한국인들이 군대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이중적인 감정을 잘 건드렸다. 즉 한창 나이인 20대에 병역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던 경험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힘겨움에 대한 불편한 감정과 그들만이 겪은 일들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감정의 복합적인 심리상태로 이어진다. ‘동작 그만’은 그 힘겨움과 자랑스러움에 대한 공감과 함께, 병영 내 서열 문화의 불편함을 살짝 곁들여 웃음으로 전해주며 큰 인기를 끌었다. 1989년부터 1997년까지 MBC TV가 방영했던 (友情的舞台)는 전형적인 군대 위문 공연 프로그램으로, 이후 2003년부터 2007년까지 KBS 1TV가 방영한 같은 유사한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만 해도 군대는 지금보다 훨씬 더 외부와 격리된 환경이었고, 따라서 이런 위문 공연 방식의 프로그램들은 군인들과 일반인들이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시간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의 마지막 코너였던 ‘그리운 어머니는 군부대를 찾아온 어머니와 아들이 만나는 장면이 늘 화제가 되었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 상황에서 군대는 외부에 공개되기가 쉽지 않은 공간이다. 하지만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시즌을 나눠 MBC TV에서 방영됐던 (真正的男人, Real Men)는 여러 부대에 연예인들이 단기 입소해 그 경험을 담는 파격을 선보였다. 당시 예능 프로그램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던 관찰카메라(일명 리얼리티쇼)가 군대 내무반까지 들어가 그 생생한 체험을 담았던 것이다. 물론 보안상의 이유로 어느 정도 ‘준비된 내무반’의 상황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지만 과거에 비해 한국의 군대가 훨씬 개방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였다. 2013년 공군이 영화 (悲惨世界, Les Miserables)을 패러디해 홍보영상으로 만든 (Les Militaribles)은 영화에서 자베르 경감 역할을 연기했던 러셀 크로우가 언급하면서 국제적인 화제가 되어 영국 BBC에서보도되기도 했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육군은 당시 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었던 싸이의 (绅士, Gentleman)을 패러디한 (GentleSoldier)을 내놓았다. 한국의 군대가 과거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고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3~4회에서 특수부대 예비역들이 IBS 침투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은밀한 해상 침투나 정찰 등의 목적에 사용되는 고무보트 IBS는 무게가 250kg에 달한다. ⓒ 채널 A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만나다 시대가 바뀌면서 대중들의 감수성도 바뀌었다. 를 패러디한 는 ‘진짜가 되려는 가짜들의 도전’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경쟁을 통해 선발된 일반인들이 해군 특수전전단 (MUSAT) 훈련을 받는 혹독한 과정들을 담았다. 상대적으로 표현이 자유로운 유튜브라는 플랫폼의 특징 때문에, 가혹할 정도로 강도가 높은 훈련과정들이 가감 없이 공개되었고, 이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튜브 콘텐츠는 주로 1인 크리에이터들의 방송이라 알려졌지만, 는 여러 유명 유튜버들이 모여 함께 만든 통합적인 방송으로 유튜브에도 블록버스터급 콘텐츠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특히 를 통해 대중에 알려진 일부 특수부대 출신 교관들은 방송이나 유튜브를 통해 유명인이 될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영국 Discovery Channel에서 2006년부터 2011년가지 방영된 (荒野求生, Man vs. Wild)의 베어 그릴스가 영국 육군 하사 출신 예비역으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이제 한국의 특수 부대 출신 예비역들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또한 지난 해 특전사 출신 여성 교관이 여성 연예인들의 유튜브 서바이벌 프로그램 (我還活著, I′m a Survivor)로 화제가 된 것은 이제 군대 소재 콘텐츠가 보다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으로 확장되고 있는 현상을 잘 보여준다. 는 바로 이 변화의 정점에서 이제까지의 군대 콘텐츠들과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정수를 성공적으로 엮어낸 경우다. 분단과 대치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군대는 폐쇄적인 곳일 수밖에 없었고, 민주화 이후에도 쉽게 개방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기성세대들이 뒤로 물러나고 새로운 세대들이 주역으로 등장하며 한국의 군대도 조금씩 변화를 겪고 있다. 꾸준히 대중의 관심을 받아온 밀리터리 콘텐츠들의 변화 과정은 그래서 실제 군대의 변화 과정과 맞닿아 있다. 고립되고 닫혀 있던 군대가 조금씩 속살을 드러내고 있고, 이제는 그 경험이 TV 프로그램을 통해 즐거움을 선사하고 더 나아가 일상의 생존을 위한 노하우로도 소비되고 있으니 말이다. 꾸준히 대중의 관심을 받아온 밀리터리 콘텐츠들의 변화 과정은 그래서 실제 군대의 변화 과정과 맞닿아 있다. 2회에서 최강대원 선발을 통한‘대진 결정권’을 두고 여섯 부대가 대결을 벌이고 있다. 메인 미션 사이에 베네핏을 건 서브 미션들이 함께 진행되었다. ⓒ 채널 A 정덕현(Jung Duk-hyun 鄭德賢)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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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AUTUMN 868

침묵이 흐르는 대학가 원룸촌 “원룸, 투룸, 자취방, 풀 옵션 방, 신축 원룸, 원룸 임대….” 대학가 골목 담벼락과 대로변 전신주, 가로수, 버스 정류장 쉘터에 붙여 놓은 전단들이 바람에 들썩거린다. 그러나 마스크를 쓴 채 지나가는 행인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 대학가 주변에는 침묵만 가득하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대학가 임대업계는 걱정이 많다.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되면서 대학촌에 학생들이 사라졌고, 덩달아 원룸을 찾는 수요가 줄거나 끊겼다. 중국 유학생들은 오래전에 돌아갔고, 기존에 방을 쓰던 지방 출신 학생들도 떠나기 시작했다. 대면 수업이 재개되어 학생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월세가 전반적으로 하락했다. 과거에는 타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학교 근처에서 대개 하숙을 했다. 방만 빌려 쓸 뿐 혼자 끼니를 만들어 먹고 살림을 해야 하는 자취 생활에 비해 하숙은 여러모로 이점이 많았다. 가족과 떨어져 객지에서 지내야 하는 학생들은 하숙집 아주머니가 만들어 주는 따뜻한 밥과 푸짐한 반찬들을 끼니때마다 먹을 수 있었고, 인심 좋은 아주머니들은 빨래와 청소까지 해 주기도 했다. 학생들은 그런 보살핌 속에서 외로움을 달래며 위안을 얻을 수 있었고, 함께 사는 다른 하숙생들과 마치 형제자매처럼 친밀하게 지내곤 했다. 하숙집 생활에는 농경 사회 대가족 체제의 공동체 정서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풍경들은 점차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대학과 대학생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한 지붕 아래에서 가족처럼 함께 사는 하숙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과거의 가족적 공동생활보다 개인의 사생활 보호가 더 우선시되는 사회 분위기와 더불어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대학촌에 전 세대 원룸들로 구성된 신축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로써 집주인과 학생들 사이의 끈끈한 인간적 관계는 임대인과 세입자 관계로 바뀌었다. 여기에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대학가 원룸촌에서 젊음을 비워 버렸다. 남향의 작은 베란다와 최소한의 규모만 갖춘 주방, 좁지만 그런대로 깔끔한 욕실, 붙박이장과 책상, 그리고 작은 침대 하나…. 젊은 날의 꿈과 고뇌와 열정으로 충만했던 원룸이 텅 빈 채 사나운 여름빛만 가득하다. 초가을 2학기가 시작되면 이 방에 희망을 품은 새 주인이 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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