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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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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WINTER 261

추억을 떠올리는 맛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맛과 재료가 조금씩 변화해왔지만 떡볶이가 한국인의 소울 푸드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서울 떡볶이 맛집’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이 가게는 시어머니의 손맛을 이어 40년째 수많은 고객에게 정겨운 추억을 만들어주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추억 한 조각에 떡볶이가 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골목에서 풍겨 나오는 맛있는 냄새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오늘날 흔히 먹는 고추장 떡볶이는 마복림(马福林, 1920~2011) 할머니가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전에는 가래떡을 먹기 좋게 적당한 크기로 잘라 여러 가지 채소를 넣고 간장으로 양념해 볶은 음식이었다. 조선 말기 19세기에 편찬된 저자 미상의 조리서 에 의하면, ‘흰 가래떡과 등심, 참기름, 간장, 파, 버섯 등을 함께 볶아 만든 궁중음식’으로 ‘떡찜’, 또는‘떡잡채’ 라고 했다. 고급 재료들로 만들던 귀한 음식이 어떻게 대중적인 음식으로 바뀌었을까? 한국전쟁 직후였던 1953년, 마 씨는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중국 음식점을 찾았다. 마침 개업 직후여서 주인이 자축하는 떡을 테이블마다 돌렸고, 마 씨는 실수로 짜장면 그릇에 그 떡을 빠뜨렸는데 그게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비싼 춘장 대신 고추장에 떡을 버무려 매콤한 떡볶이를 만들었다. 그는 고추장과 춘장을 섞은 소스로 만든 떡볶이를 파는 가게를 서울 중구 신당동에 열었고, 1970년대에 들어 이것이 전 국민의 간식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이 동네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분식집이 성행했는데, 그 중에는 DJ가 신청곡을 틀어주는 가게도 있었다. 하교 길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떡볶이를 나눠 먹는 것이 그 시절 청소년들의 오락이었다. 한 가족의 생계 김진숙(金眞淑) 씨의 시어머니는 1980년대,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있는 시장에서 떡볶이 장사를 시작했다. 간판도 없는 노점상이었다. “올해 아흔 두 살이신 어머님은 당시 사십 대 중반이었고, 제 남편은 열한 살이었어요. 주위에 여자고등학교가 세 개나 있어서 학생들이 많았대요. 학교 급식이 없던 시절이라, 점심시간엔 나와서 떡볶이를 먹는 아이들도 많았고요. 그 아이들이 졸업한 후에도 찾아오고, 그래서 늘 손님들이 북적거렸대요. 시댁에 식구가 많았는데, 어머님이 그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셨어요.” 김 씨는 1992년에 시어머니의 넷째 아들인 김완용(金完用) 씨와 결혼했다. 십 년 전 시어머니가 고관절 수술을 받은 후 혼자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온 가족이 시간을 쪼개 짬나는 대로 왔다. 남편도 하던 일을 그만두고 가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김 씨에게 ‘같이 한 번 가볼래?’라며 제안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작은아이가 마침 여름방학이어서 손이 좀 덜 갈 때였다. 그렇게 따라가서 일주일쯤 일을 거들었는데 지켜보던 시어머니가 계속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멋도 모르고 덥석 하겠다고 대답했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2015년, 도시 재개발로 인해 시장이 없어진 후 시장 자리가 있던 곳에 새로 차린 것이 지금의 가게이다. ‘갈현시장 할머니 떡볶이’라는 간판도 그때 처음 달았다. “그때 어머님은 이미 팔십 살이 넘으셨는데도 할머니라고 불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셨어요.” 김 씨가 웃으며 당시를 돌이켰다. “그때부터 남편이랑 저랑 둘이서 가게를 하게 됐어요. 메뉴는 어머님이 시장에서 팔던 그대로예요. 떡볶이, 순대, 만두 두 종류, 삶은 달걀, 김말이.” 기본적인 조리법은 시어머니의 방식을 이어가지만, 소스의 비율이 조금 달라졌다. 자극적인 맛을 줄이고 지금은 부드러운 맛을 강조한다. 덜 달고 덜 짜고 덜 매운 맛이다. 식재료도 건강과 위생을 고려하여 좋은 것으로 세심하게 골라 쓴다. 남편은 아침 7시에 가게에 나온다. 전날 씻어 둔 조리기구들을 세팅하고 물을 올리고 순대를 찌고 달걀을 삶고 기본적인 준비를 하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 “떡볶이용 밀가루 떡이 뭉쳐 있는데, 하나하나 떼는 게 고된 일이에요. 하나씩 떨어져 있는 떡도 있지만 그런 떡은 맛이 떨어져요. 우리 손이 한 번 더 가면 손님들이 더 맛있는 걸 드실 수 있어요. 떡 한 판에 낱개로 324개 나오는데 하루 열 판 정도 나가요.” 두 시간 동안의 준비가 끝나고 9시가 되면 가게 문을 연다. 김 씨는 10시쯤 가게에 나온다. 부부 사이에 특별한 역할 분담은 없다. 두 사람 모두 조리를 하고 손님을 받는다.“둘 중 한 명이 없어도 장사를 해야 하니까 둘 다 뭐든지 할 줄 알아야 해요.” 서울 갈현동에 있는 ‘갈현시장 할머니 떡볶이’주인 김진숙, 김완용 씨 부부는 어머니가 40여 년 전에 시작한 가게를 이어받아 옛 맛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다. 전에는 3명의 직원을 데리고 가게를 운영했으나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작년부터는 시간제 직원 한 명만 두고 부부가 모든 일을 하고 있다. 비법을 지킨다 갈현동 할머니 떡볶이 가게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맛으로 떡볶이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김진숙 씨는 시어머니 진양근씨가 1980년대 가게를 내면서 개발한 소스의 비법을 아직도 소중하게 지키고 있는데, 그 맛이 뛰어나서 동네 손님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종종 있다. 조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벌 끓이기’이다. 손으로 하나씩 떼어놓은 떡은 끓는 물에 넣어 잠시 끓인 다음 조리용 판으로 옮겨진다. 이 과정이 제대로 안 되면 떡이 퍼지거나 질겨진다. 매일 조금씩 다른 떡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해 온도와 시간을 맞추는 것이 관건이다. “사람들은 농담처럼 ‘회사 때려치우고 떡볶이 장사나 할까’라고 말하지만, 사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장사죠.” 손님이 끊이질 않는 맛있는 떡볶이를 만드는 비법은 소스를 만드는 재료의 비율, 불의 온도, 그리고 조리 시간이다.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비율이 안 맞고 온도와 시간이 안 맞으면 소용없다. 이 과정은 모두 시어머니에게 배운 비법이고 때문에 영업비밀이다. 고춧가루, 고추장, 물엿 등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을 포함하여 열 가지 남짓한 재료가 소스에 들어간다. 이렇게 만든 떡볶이는 1인분에 3,500원이다. 지난 4월, 3,000원 하던 가격을 500원 올렸다. “해마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그게 반영돼 모든 식자재값이 오르기 때문에 가격을 안 올릴 수가 없어요. 하지만 떡볶이는 한끼 식사가 아니라 간식으로 먹는 음식이라 값을 올리기 쉽지 않아요. 계속 고민하다가 6년 반 만에 500원을 올렸어요.” 1인분의 양은 ‘고무줄’이라고 김 씨는 말한다. 보통 17~18개의 떡에 어묵을 섞어 1인분으로 담지만 학생이나 노동자에게는 늘 덤을 얹어 주기 때문이다. 열 평이 채 못 되는 가게의 테이블은 요즘 모두 한쪽으로 치워져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홀 손님을 받지 않은 지 일 년이 지났다. 가게 한 구석에 작은 전기밥통과 인덕션이 있는데 부부가 짬을 내어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는 곳이다. 늦은 오후에 군것질로 대충 허기를 채우고 저녁 8시에 문을 닫는다. 정리와 청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밤 10시.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부부의 하루 일과이다. “일주일에 하루, 월요일에 쉬어요. 이 가게를 연 이후 그 밖에 쉰 날이 딱 사흘인데 제가 수술받은 다음날, 아들 입대한 날, 그리고 퇴소한 날이었어요. 가끔 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손님들과의 약속이니까요. 이 지역에 사는 손님만 오는 게 아니라 전국 팔도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는데, 헛걸음하면 미안하잖아요. 쉬는 날에도 다른 거 없어요. 밀린 집안 일하고, 손목터널증후군 고치러 병원에 가요. 직업병이죠.” 손님이 끊이질 않는 맛있는 떡볶이를 만드는 비법은 소스를 만드는 재료의 비율, 불의 온도, 그리고 시간이다.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비율이 안 맞고 온도와 시간이 안 맞으면 소용없다. 연령을 초월한 많은 한국 사람들의 소울푸드인 떡볶이는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흰떡을 여러 가지 야채, 어묵과 함께 고추장 소스에 넣고 뭉근하게 끓여 만든다. 국물 떡볶이, 즉석 떡볶이, 간장 떡볶이, 로제 떡볶이 등 다양한 종류의 떡볶이가 있는데 그 중 국물이 자작한 국물 떡볶이가 가장 대중적이다. 최선을 다하는 하루하루 시어머니를 도와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김 씨는 호된 경험을 했다. “제대로 된 포장용기가 없어서 비닐 봉지를 사용하던 시절이었어요. 떡볶이를 포장해간 손님이 조금 있다가 다시 왔어요. 국물이 새서 청바지에 묻었다면서 떡볶이가 든 봉지를 그대로 던졌어요. 놀라고 당황해서 덜덜 떨었어요.” 이처럼 가끔 부부를 힘들게 한 손님들이 있었다. 달걀 하나를 빠뜨렸다고 전화로 삼십 분 동안 항의한 손님도 있었다. 알아보니 다른 손님과 봉지가 바뀌었던 것인데 값을 물어주겠다고 해도 계속 화를 냈다. 자신이 원하는 만두가 아닌 다른 만두를 줬다고 접시를 던진 손님도 있었다. 가게에 와 있던 친척이 말리다가 싸움이 붙어 경찰까지 오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일을 겪고 부부는 ‘손님이 뭐라고 하면 무조건 인정하자’고 다짐했다. 물론 대부분의 손님들은 따뜻하고 다정하다. 더운 날 마시고 일하라며 음료를 사오기도 하고, 텃밭에서 딴 채소를 가져오는 이들도 있다. “어머님을 기억하는 분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도 하고, 초등학교 동창회하고 다같이 오시기도 해요. 그분들은 떡볶이가 아니라 추억을 먹으러 오는 거죠. 이런 손님들을 보며 따뜻한 마음과 베푸는 방법을 배워요. 이런 게 세상 사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김 씨는 언젠가 이 가게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쉽다. 앞으로 십 년만 더 하고 가게를 접을 계획이기 때문이다. 서운하긴 하지만, 이 힘든 일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도 않다. 아이들이 직장에도 다녀보고 원하는 것을 다 해보고도 떡볶이 장사를 하고 싶어 한다면 몰라도. 새벽부터 재료 하나하나를 정성껏 준비하여 뜨거운 불판 위에서 조리하고, 먼 길을 찾아온 손님에게 푸짐하게 담아주는 떡볶이는 허기뿐만 아니라 추억을 채워주고 마음을 데워주는 음식 이상의 무엇이다. 김 씨 부부는 그 옛날,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팔았던 추억의 맛을 이어가기 위해 고단하지만 날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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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WINTER 243

기적이 일군 삶 이탈리아 피아나소에서 태어난, 본명이 빈첸시오 보르도인 김하종 신부는 1990년에 한국에 왔고 이후 빈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해 왔다.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도 그가 운영하는 복지센터는 매일 수백 명의 배고픈 노숙자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나눠주고 있다. 김하종 신부는 30년째 매일 신부복 대신 앞치마를 입고 있다. 신부복보다 앞치마가 본인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성남시 안나의 집에 있는 그의 소박한 사무실에는 김수환 추기경(Stephen Cardinal Kim Sou-hwan, 金壽煥, 1922~2009)의 사진이 걸려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여전히 세상을 위협하고 있지만 김하종 신부는 조용히 다른 종류의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다. 그에게 ‘나눔’은 전염력 높은 행복감으로 사람들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다. 성남에서 그가 운영하는 사회복지센터 ‘안나의 집’에서 나눔은 여러 형태를 갖는다.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초 이래로 가장 눈에 띄는 나눔의 형태는 매일 가난한 노숙자들을 위해 수 백 개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는 일이다. 김 신부가 이 무료급식소를 연 건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기 오래 전이다. 팬데믹으로 실내 음식 섭취가 제한되자 대부분의 무료급식소는 문을 닫았지만 김 신부는 그렇게 하길 거부했다. “무료급식소를 문 닫을 수 없어요. 위장은 쉬지 않으니까요. 이곳을 찾는 70퍼센트의 사람들이 하루에 한 끼를 먹습니다. 우리가 급식을 하지 않으면 이들은 굶어야 해요.”라고 그는 말한다. 무료 점심 도시락 급식을 도시락으로 전환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는 다른 운영 체제를 요구했고 포장재 때문에 비용도 오르고 종사자들의 건강에 대한 위협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2020년 1월 이후 시 당국의 허가를 받아 안나의 집은 매일 650에서 750개의 도시락을 큰 문제없이 제공해오고 있다. 김 신부는 가난한 이들에게 매일 급식을 하는 게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언젠가 한번 쌀이 거의 다 떨어졌던 때를 떠올렸다. “매일 160킬로그램의 쌀이 필요해요. 근데 이틀 분밖에 남지 않았죠. 제가 걱정을 했더니 주방장이 ‘예수님이 보내주실 거예요’라고 하더군요. 다음날 쌀 100포대가 문밖에 놓여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음식과 돈, 옷과 마스크 등 여러 물품을 기부한다. 많은 이들은 시간을 내서 음식 준비, 포장, 청소, 도시락을 받기 위해 줄 선 사람들 안내하는 일 등을 돕는다. 자원봉사자들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찾아온다. 천주교인뿐 아니라 스님과 회교도도 포함하며 유명인사도 회사원과 학생들도 있다. 심지어 루이 뷔통이라는 이름의 개도 있어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빈민들은 성남의 곳곳에서 찾아오고 3시에 배급되는 도시락을 받으러 심지어 서울에서도 찾아온다. 김 신부와 자원봉사자들은 이들을 환영하며 “어서 오세요.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팬데믹 때문에 어려운 상황인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여기에서는 사랑과 나눔의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팬데믹의 또 다른 경험인데 정말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요.”라고 그는 말한다. 빈민을 위한 헌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미래의 김 신부가 될 빈첸시오 보르도는 이미 신부가 되기로 작정했다. 대학에서 동양 철학과 종교를 공부한 후 그는 빈민을 돕는 데 집중하는 오블리티 선교수도회에 가담했다. 아시아에 대한 관심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고 1990년 5월 한국에 도착하고 얼마 있지 않아 빈곤 가정을 돌보는 수녀님과 함께 일하기 시작한다. 2020년에 출간된 그의 책 에서 김 신부는 1992년 변곡점이 된 사건을 기억한다. 그는 곰팡이가 핀 지하방에서 어떤 날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기도 하면서 이웃이 가져다주는 음식에 의존하며 홀로 사는 50대 반신 불구의 남자를 만났다. 그와 얘길 나누고 방을 청소한 후 김 신부는 허락을 받고 그를 안아주는데 냄새가 너무나 고약해서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형용할 수 없는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복지체계 밖에 남겨진 걸 깨달은 김 신부는 다음 해 빈민을 위한 급식소를 시작한다. 그 당시 한국은 지금과는 달랐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사람들이 저에게 왜 노숙자를 돕느냐고 묻곤 했어요. 노숙자는 문제를 일으키는 알코올 중독자니 도와서는 안 된다고 했죠.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진 않아요. 한국 사회가 많이 변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여파로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노숙자가 되었다. 이듬해 김 신부는 어머니의 세례명이 ‘안나’인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무료급식소를 시작했고, 그렇게 ‘안나의 집’이 탄생했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모든 요일에 무료 급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무료급식소는 성남성당이 제공한 공간에서 운영되었다. 하지만 2018년에 그곳을 비워야 했다.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김 신부의 걱정이 커졌다. 성남시 직원들은 길 건너 그린벨트로 묶였던 땅이 해제될 테니 그곳에 새로운 공간을 지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실행가능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땅을 살 돈이 없었다. “이제 정말 끝인 걸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제 정말 이 일을 끝내고 퇴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라고 그는 말한다. 새로운 둥지 도움은 인터뷰 요청의 형태로 찾아왔다. 김 신부는 주저했지만 지역신문이라고 착각하고 인터뷰를 하기로 동의하고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인터뷰는 KBS방송과 하는 거였고, ‘인간극장’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김 신부에 대한 방송이 나가자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다.” 후원이 밀려들어왔고 빠르게 12억에 도달한 후원금은 땅을 사기에 충분했다. 김 신부는 오랜 기간 타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자신의 에너지를 ‘사랑’으로 꼽았다. 힘들고 포기할 뻔한 상황마다 누군가가 나타나 도움을 주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안나의 집을 꾸릴 수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사람들이 가진 사랑의 힘이라고 믿는다. 안나의 집은 2018년 새 건물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무료급식이 주된 업무이지만 김 신부의 노력으로 더 많은 일에 봉사를 하게 되었다. 현재 의료봉사, 재활, 법률 서비스, 인문학 강좌 등이 주 단위로 제공된다. 또한 노숙자와 노인들, 가출청소년들을 위한 쉼터, 젊은이를 위한 셰어하우스, 가출청소년과 도움이 필요한 젊은이들을 위한 모바일 봉사활동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코로나 이전에 봉사활동 프로그램 ‘아지트’(아이들을 지켜주는 트럭)는 매일 밤거리를 배회하는 수십 명의 소년 소녀들을 만났다. 팬데믹으로 인해 많은 활동이 중지되었지만 김신부는 여전히 지금은 소형차인 아지트를 끌고 거리로 나간다. 아지트는 한국어로 ‘집합소’ 혹은 ‘안전한 집’을 의미한다. “희망을 주려고 해요. 사람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는 거죠. 씨앗이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하고 또 실패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가능한 무엇이든 하도록 부름 받았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무료급식소를 문 닫을 수 없어요. 위장은 쉬지 않으니까요. 이곳을 찾는 70퍼센트의 사람들이 하루에 한 끼를 먹습니다. 우리가 급식을 하지 않으면 이들은 굶어야 해요.” 하느님의 종 지난 30년 동안 김 신부는 거의 매일 앞치마를 몸에 걸쳤다. 하지만 일요일에는 자전거를 타기 위한 채비를 하고 한강 둑을 따라 자전거를 타러 간다. 귀중한 휴식의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좋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긴 하지만 매일 같이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육체적으로 힘든 건 말할 것 없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뛰는 걸 알아차렸을 때 그는 의사를 찾아갔고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분간 그가 유일하게 지켜온 이탈리아 습관인 모닝 에스프레소를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힘들고 베푸는 삶에서 그가 보상으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빈민들을 위해 일하는 게 절 행복하게 합니다. 저에게는 일이 아니예요. 저의 사명이고 이곳에서 저의 삶은 이들을 환영하고 사랑하고 돕는 겁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 사명은 ‘하느님의 종’을 의미하는 그의 한국 이름 ‘하종’에 반영되어 있다. 김이라는 성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성직자였던 앤드류 김대건 (1821-1864)에 헌사하는 의미로 따왔다. 김대건은 천주교를 탄압한 조선왕조 시기에 처형당했고 1984년에 다른 한국인 순교자들과 함께 성인으로 공표되었다. 김 신부의 업적이 알려지면서 그는 2014년 명망 있는 호암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받았다. 어떤 상이 가장 의미가 크냐는 질문에 김 신부는 표정이 환해지면서 최근에 손때 묻은 천 원짜리 지폐를 모아 그에게 선물한 유치원 어린이들을 언급했다. 그를 특별히 행복하게 만든 또 다른 상은 2015년 대통령령으로 주어진 한국 국적 취득이다. 한국인으로 귀화하기 오래 전에 그는 한국에 영원히 머물 것을 결심했다. 심지어 사후 장기 기증 서약까지 해 놓았다.“저는 외국인이 아니고 한국 사람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자원봉사자들은 매일 1시부터 안나의 집 지하에 있는 식당에 모여 도시락을 준비한다. 밥, 반찬, 국, 빵, 통조림 캔 등을 일사불란하게 담고 포장하는 손놀림이 무척 능숙하다. 김 신부(맨 오른쪽)도 항상 이들과 함께 일한다. 김 신부는 매일 3시부터 안나의 집 앞에 있는 성남동 성당의 너른 공터에서 노숙자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준다. 700여 개의 도시락은 2시간 정도면 모두 소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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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WINTER 243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 남북한 주민의 가교 역할을 자처하는 ‘사부작’은 대학생들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이다. 익명으로 출연하는 라디오 방송이라는 매체의 특성이 탈북민 게스트들의 경계심을 낮추어 보다 솔직한 대화로 남한 사회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실 저는 북한에서 왔어요.”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이 이 말을 하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남한 사회에는 아직 대한 편견과 차별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북한이탈주민 신변보호제도 개선방안 실태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80% 이상이 ‘탈북민이라는 신분이 노출됐을 때 남한 주민이 경계심을 보이거나, 차별적으로 대하는 경험을 했다’고 답했다. ‘사부작’은 이런 편견과 차별을 깨기 위해 3년 전 남한의 대학생들이 모여 만든 인터넷 라디오 방송이다. 이 흔치 않은 방송 이름은 ‘사이좋게 북한친구와 함께 만드는 작은 수다’를 의미하는 한국어의 줄임말이다. 사부작에 출연하는 대부분의 게스트가 익명을 원하지만, 간혹 신분이나 얼굴을 공개하기도 한다. 통일코리아협동조합 박예영 이사장은 ‘김책 털게’라는 닉네임으로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3부로 나뉘어 출연했다. 왼쪽부터 사부작 스탭 박세아, 안혜수, 게스트 박예영 이사장. © 사부작 재미있는 닉네임 북한 출신 게스트를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는 이 팟캐스트 방송은 탈북민들의 삶을 ‘조미료 섞지 않고 담백하게’ 들려주는 것이 모토다. 솔직한 대화를 통해 탈북민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남북한 주민들 간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것이 목표다. “나 북한에서 왔어”라고 말하면 “그래? 난 대구에서 왔는데”라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이 방송은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 걱정 때문에 미디어 노출을 꺼리는 출연자들에게 별명을 만들어준다. 이를테면 ‘경성 송이버섯’, ‘혜산 감자밥’같은 이름인데, 전자는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 고향의 송이 버섯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감자밥을 즐겨 먹었던 양강도 혜산 출신이라는 뜻이다. 진행자 역시 ‘부산 돼지국밥’처럼 자신의 출신 지역과 좋아하는 음식의 이름을 붙여 만든 닉네임을 사용한다. 이는 게스트가 자신의 고향을 자연스럽게 밝히면서 보다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기 위해 고안한 장치다. 이 같은 배려는 게스트 섭외에도 도움이 된다. 탈북민들은 대부분 출연 전에는 자신의 고향을 밝히길 꺼리지만, 대화를 진행하는 동안 어느 덧 고향을 떠올리며 행복해한다. 뿐만 아니라 출연을 계기로 남한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자신감을 얻고, 이후 자연스럽게 출신 배경을 밝힐 수 있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녹음이 끝나면 게스트들이 ‘지금까지 북한에서의 기억을 잊고 부정하려는 노력을 해왔는데 오늘 이야기하며 그 시절의 나를 좀 더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씀하세요. 그럴 때면 우리 방송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해집니다.”스태프 박세아(朴細我) 씨의 말이다. 그는 연세대 교육학과 3학년 학생으로 고등학생 시절 탈북민 자녀를 멘토링한 이후 탈북민 문제에 관심을 가지다가 이 방송에 지원하게 됐다. 이 방송의 또 다른 목적은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게스트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다. 사회의 조명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더 나아가 북한 사회의 구성원들 역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려는 것이다. 대화의 주제는 정치적, 종교적 문제를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때때로 게스트가 원할 경우 가볍게 다루기도 한다. 이 방송을 처음 시작한 것은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이던 박병선(朴炳宣) 씨다. 그는 현재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으로 방송 활동을 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탈북민들의 얘기를 팟캐스트로 들려주면 남한 사람들이 이들을 친숙하게 대할 수 있게 되고 서로 거리를 느끼지 않고 어울려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고 있는 탈북민들이 차별과 편견을 받는 것을 알고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들의 얘기를 가감없이 진솔하게 들려주는 방송을 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사부작’은 인액터스(Enactus) 소속 연세대 동아리 프로젝트 ‘지음’(知音)이 다섯 달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18년 8월에 첫 방송을 내보냈다. 인액터스는 1975년 미국 리더십 연구소(National Leadership Institute)가 설립한 글로벌 비영리단체이고, ‘지음’은 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2020년 8월부터 참여 범위를 넓혀서 현재는 연세대뿐 아니라 가톨릭대, 서강대, 서울대, 성신여대, 이화여대, 중앙대생들이 함께하는 대학생 연합동아리로 운영한다. 이 팟캐스트 방송은 탈북민들의 삶을 ‘조미료 섞지 않고 담백하게’ 들려주는 것이 모토다. 솔직한 대화를 통해 탈북민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남북한 주민들 간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특별한 게스트들 현재 스태프는 총 9명으로 3명씩 팀을 이뤄 번갈아 방송을 진행한다. 팀원은 역할 구분 없이 섭외, MC, 편집, PD 업무 등을 두루 맡고, 녹음은 홍대 부근에 있는 ‘스튜디오 봄볕’에서 한다. 방학을 제외하고 거의 매주 한 명씩 게스트를 초청해서 팟캐스트를 제작하는데, 한 게스트의 얘기를 3회로 나눠 편집해 올린다. 첫날 방송에서는 고향 음식·북한에서의 삶, 둘째 날은 탈북 과정, 셋째 날은 남한 정착기와 생활 얘기를 듣는 방식이다. 초기에는 탈북민들의 ‘알려지지 않은 목소리’를 전하는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우리 공동체 이야기’를 전하고자 노력한다. 게스트가 정해지면 사전 인터뷰로 방송 흐름을 미리 설계하지만, 원고를 준비하지는 않는다.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위해 온라인 화상 채팅을 통해 게스트와 미리 친해지는 기간을 갖기도 한다. 초기 게스트는 주로 대학생들이었다. 제작진과 동년배로 섭외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게스트가 지인들에게 출연을 권하고 입소문도 나면서 다양한 연령층의 출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중 한 사업가 출연자가 스태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북한에서 15살 때부터 탈북 브로커 활동을 하다가 국가보위부의 전국수배를 받게 된 인물이었는데, 얼굴이 안 보이는 팟캐스트의 특성상 흥미로운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수 있었다. 또 다른 인상적인 게스트는 고등학생이던 ‘길주 완자’다. 풍계리 핵실험장이 있는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나고 자란 그는 14살 때인 2013년 북한을 탈출해 이듬해 한국에 들어왔다. 드물지만 실명을 밝히고 출연한 게스트들도 있었다. 북한 여군장교 출신 김정아(함경북도 청진 출신) 씨가 첫 번째 경우였다. 그는 양부모와의 갈등 끝에 꽃제비(일정한 거주지 없이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북한 어린아이를 지칭하는 말)로 지내다가 숨진 오빠 얘기를 하면서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 유럽에서 외화벌이 해외파견 근로자로 일하다가 한국에 입국한 나민희 씨도 드문 일화를 지닌 게스트였다. 그는 출신 성분이 아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풍요로운 생활을 했던 평양 상류층 자녀였다. 서울에 정착해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고 있는 주성하 씨가 출연한 적도 있다. ‘김책 털게’라는 별명과 함께 실명을 밝힌 박예영 통일코리아협동조합 대표도 특별한 게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제작진의 일원인 안혜수(安慧洙) 씨는 “박 대표가 남한 대학생들이 한민족과 통일에 관심을 갖고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것이 너무나 고맙다고 말해줘서 큰 힘이 됐다”고 회상했다. 할아버지가 북한 황해도 출신인 안 씨는 성신여대 법학부 4학년 학생으로 이 방송의 소문을 듣고 팀원으로 자원했다. 2019년 9월에 시작된 시즌 3부터는 탈북민 출신 학생들도 스태프로 참여하고 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재학중인 안성혁(安成奕) 씨와 서울대 체육교육학과 2학년 학생인 박범활(朴汎豁) 씨의 경우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살다가 부모님과 함께 탈북해 2011년 12월 한국에 들어온 안 씨는 현재 이 방송의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친구가 함께 활동하자고 제안하여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게스트들이 바쁜 일상 때문에 떠나온 고향 생각을 자주 못 하는데, 우리 방송에 출연해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고 말할 때 가장 뿌듯해요.” 대학생들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라디오 방송 사부작은 북한이탈주민들 각자의 삶에 담긴 특별한 이야기들을 자극적으로 과장하거나 획일화 시키지 않고 진솔하게 소개하려 노력한다. 주로 사전 녹음 방송을 하는데, 녹음은 홍대 부근의 ‘스튜디어 봄볕’에서 한다. 왼쪽부터 사부작 스탭 안성혁, 안혜수, 박세아. 생각의 변화를 위하여 2021년 8월부터는 시즌 7이 진행되고 있다. 시즌은 대학의 한 학기 기준이다. 우양재단, 남북통합문화센터, 연세대 고등교육혁신원 등의 기관으로부터 녹음실 대여비나 공개방송비용 등을 지원받고 있는데 그동안은 게스트에게 출연료를 주지 못했지만, 지원 덕분에 최근 들어 작은 액수의 사례비도 줄 수 있게 됐다. 탈북민들 사이에서 친숙하게 자리를 잡은 이 팟캐스트는 2021년 9월 기준으로 누적 조회 수가 20만 명에 이른다. 청취자들은 댓글로 피드백을 주기도 하고, 인스타그램으로 DM을 보내기도 한다. 많은 격려와 응원 덕분에 대가 없이 봉사하는 제작진이 열정과 용기를 얻는다. 이 팟캐스트 방송의 가장 중요한 소통 창구는 댓글이다. 인스타그램에는 매주 방송내용을 정리한 카드뉴스를 올리기도 한다. © 사부작 ‘사부작’은 지금까지 130여 명의 게스트와 이야기를 나눴다. 2021년 2월에는시즌 1과 시즌 2 게스트 중에서 12명의 이야기를 골라 담은 에세이집 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 책에는 탈북 계기, 탈북 이후 남한 정착 과정, 이후 어려웠던 이야기가 담겼다. 책을 통해 그동안 정형화되었던 북한에 대한 정보 외에도 북한사람들의 실제 정서, 문화와 먹거리, 탈북민들의 고민, 북한에서의 다양한 추억과 세시풍속, 한국과 비슷하면서 다른 점들을 보다 깊이 파악할 수 있다. ‘사부작’ 제작진은 게스트들과 대화를 나누며 남한 사람들이 탈북민을 일반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자신들 마저도 처음에는 ‘탈북민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지내겠지’, ‘그들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반면, 게스트들은 진행자들을 남한 사람이라고 일반화하지 않았다. 각자 개성과 특징을 지닌 개인으로 보았다. 제작진은 오히려 자신들이 다양한 게스트를 만나며 서서히 변화했고, 지금은 탈북민을 특정한 이미지가 아닌 개인으로서 표현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학교에서 남북통일에 관한 토론 수업을 할 때면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죠. 젊은 세대가 서로를 적이라고 부를 때 가장 가슴이 아파요. 우리 방송이 남북한 주민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더 오래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안성혁 대표의 말이다. 에세이집 에는 이색적인 북한음식이 삽화를 곁들인 레시피로 소개되는데, 책 속 12명의 게스트들은 각자 고향의 음식들을 소개하며 이와 관련된 경험, 추억을 이야기한다 © 프로젝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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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WINTER 156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만 만드는 공예가 온전한 수작업 끝에 완성되는 금속공예가 심현석(Sim Hyun-seok 沈鉉錫)의 작품들은 따뜻한 감성과 절제된 미감을 전달한다. 그는 손으로 직접 만드는 물건이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인 작업을 이어간다. 금속 공예가 심현석(Sim Hyun-seok 沈鉉錫)이 경기도 가평 작업실에서 카메라 앞에 섰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인데, 이는 스스로가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들어 본 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으면 비로소 작품화하기 때문이다. 금속 공예가 심현석은 몇 년 전 경기도 가평으로 작업실과 집을 옮겼다. 농사를 짓고 화초를 가꾸며 살고 싶다는 오랜 바람이 투영된 결정이었다. 그전까지는 서울 화곡동에 있는 스승의 작업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무려 26년에 걸친 도제식 수업이었다. 여유 시간과 사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는 요즘 젊은 세대는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일 것이다. 긴 세월 동안 하루하루를 ‘제자’로 살았던 작가에게는 모든 공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정직함과 무던함이 남았다. 작은 부품까지 모두 직접 만들어 완성하는 핀홀 카메라를 비롯해 장신구와 생활 도구 등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이다. 그는 건국대에서 공예를 전공한 후 캐나다 노바스코샤 예술디자인대학원(Nova Scotia College of Art and Design)에서 금속공예 심화 과정을 밟고 미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5년에는 한국 현대 금속공예의 선구자 유리지(劉里知) 교수를 기념하는 유리지공예관이 주최하고 고려아연주식회사가 후원하는 ‘올해의 금속공예가상’을 받았으며, 국내외 유수의 갤러리와 기관에서 전시를 열며 탄탄한 실력과 매력적인 작품 세계를 인정받고 있다. 소재로 은을 주로 사용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재료로서 은의 매력은 어떤 것인지요? 조선 왕실에서는 인체에 해로운 독극물을 확인하는 용도로 은수저를 사용하곤 했어요. 독이 있는 성분이 은에 닿으면 색이 검게 변하니까요. 그 얘기는 은이 나쁜 성분을 잘 받아들인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은 조각을 물통에 넣어 놔요. 신선도가 유지되고 수질도 좋아지기 때문이지요. 은기(銀器)가 비싸다 보니 장식장에 넣어만 두는 분들이 많은데 그러면 색이 변합니다. 매일 쓰면 변하지 않아요. 그리고 은은 성질이 물러 작업하기가 까다롭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도 않아요. 금속공예 작업에 사용하는 스털링 실버(sterling silver)는 은이 92.5%, 구리가 7.5% 함유되어 있고 강도가 아주 높습니다. 물론 가격도요. 최근에는 무슨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강아지 모양 브로치를 포함해서 장신구를 꾸준히 만들고 있고, 기하학적 형태의 작업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작업을 해야 정교하고 미학적인 작품도 만들 수 있거든요. 밸런스를 맞추는 거죠. 최근에는 스테인리스로 커틀러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스테인리스가 식기류를 만들 때는 무척 좋은 재료예요. 다른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은이나 황동, 적동과 달리 색도 변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다루기에는 어려운 재료예요. 땜이 아닌 용접을 해야 하고, 공방 수준을 넘어 공업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어 어떻게 하면 기존의 제 방식대로 할 수 있을지 고민 중입니다. 기하학 형태의 장신구들. 심현석은 강도가 높은 스털링 실버를 주로 사용하며, 최근에는 스테인리스도 활용하고 있다.© 심현석 귀엽고 재미있는 모양의 장신구들. 그는 작업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정교하고 미학적인 작품과 즐겁고 유쾌한 작품을 병행하여 만든다. 그를 대표하는 작업물은 은으로 만든 수제 핀홀 카메라다. 몸체는 물론 내부에 들어가는 모든 부품까지 직접 제작하기 때문에 최소 몇 개월의 작업 시간이 필요하다. 기존 방식이란 무엇인가요? 모든 공정을 제 두 손으로 직접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범위를 잘 알고 있고, 그 능력과 정도에서 잘하려고 하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보통은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물건을 만들기가 어려운데, 저는 그런 작품을 잘 만들고 또 더 잘하고 싶어요. 대표작 핀홀 카메라는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요? 핀홀 카메라가 제 이름을 세상에 알려준 작품이기는 하지만 안 만든 지 여러 해 되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운 좋게 라이카 카메라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한 적이 있었는데, 제 작업을 촬영하려면 다른 렌즈를 사야 했어요. 가격을 알아보니 900~1000달러 정도 되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막상 렌즈를 만들어 끼워 보니 사진이 찍히더라고요. 몸체도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지요. 그래서 내 손으로 온전한 카메라를 만들게 되었고, 사진을 찍어 현상을 해 보니 제대로 사진이 되어 나왔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작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내게 필요한 걸 만들어 보고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면 그때 비로소 작품을 시작하는…. 긴 세월에 걸쳐 도제식 교육을 받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대학 때 우연히 우진순(Woo Jin-soon 禹眞純) 선생님을 뵙게 됐어요. 학교에 강의 차 나오셨는데 이후 자연스럽게 인연이 됐지요. 은을 다루시는 방식이나 미감에서 끌리는 부분이 많았어요. 스웨덴 스톡홀름 국립디자인공예대학에서 공부를 하신 덕분에 북유럽 작가들이 어떤 작품을 어떻게 만드는지 배우는 것도 좋았고요. 1992년도부터 2018년까지 함께했는데, 가끔 토요일에 뵐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주말을 제외하고 아침 5~6시에 시작해 오후 3~4시까지 작업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작업실을 빼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제가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됐어요. 지금은 매일 아침 9시에 시작해서 저녁 6시까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오늘 하루를 잘 살자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 가야지 생각하기보다는 시냇물 위를 흘러가는 나뭇잎처럼 오늘 하루도 이상한 곳에 빠지지 말고 잘 흘러가자, 내 앞에 있는 길을 잘 헤쳐 나가자 생각합니다. 계획도 잘 세우지 않아요. 선생님과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성격 탓일 거예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범위를 잘 알고 있고, 그 능력과 정도에서 잘하려고 하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보통은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물건을 만들기가 어려운데, 저는 그런 작품을 잘 만들고 또 더 잘하고 싶어요.” 2009년 크래트프 아원에서 열린 그룹전 전에 심현석이 출품한 작품이다. 그는 고도의 집중력과 섬세함이 필요한 작은 크기의 작품에 강점을 보인다. © 심현석 도제 수업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사실은 제가 무척 덜렁대는데 선생님께 배우는 동안 꼼꼼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어요. 꼭 지켜야 할 과정을 건너뛰지 않으면서 그게 습관이 되고, 또 제 작업 태도가 된 것 같아요. 사포질을 예로 들면 240, 400, 600 등 사포의 방 숫자가 커질수록 금속 표면을 더 곱게 갈아내는데, 저는 단계를 건너뛰지 않고 각 과정에서 그에 맞는 사포로 연마 작업을 계속하거든요. 몇 단계를 건너뛴다고 해서 결과에 큰 차이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저는 꼭 그렇게 했어요. 하나 더 말씀드리면, 두 개의 판을 붙이는 땜 작업을 하려면 판 사이에 붕사라는 재료를 발라 줘야 해요. 그 재료가 땜이 잘 흐르게 하고 산화도 막아 주거든요. 그런데 그런 작업을 깨끗한 환경에서 하는 게 의외로 쉽지 않아요. 공방은 주변이 어수선해지기 십상이죠. 하지만 선생님이나 저나 깔끔한 성격이라 늘 주변을 정돈했고, 손도 깨끗이 씻은 다음에 작업을 했습니다. 제 작품을 매우 간결하다고 평가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런 작업 공정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나 계획이 있으신지요? 지금처럼 꾸준히 할 뿐이지요. 해외 전시 계획이 있어서 그 준비도 해야 하고요. 아, 그러고 보니 ‘공예수선소’를 해 보고 싶기는 합니다. 제가 금속을 다루는 사람이다 보니 주방 도구를 땜으로 고치거나 무언가를 덧대 다시 살리는 작업을 잘할 수 있거든요. 금속공예품의 장점은 깨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심하게 찌그러져도 반대쪽에서 힘을 가하면 어느 정도 원상 복구가 가능해요. 찢어진 가죽 소파를 바늘로 꿰매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렇게 망가진 물건을 살려내고 애초에 그걸 가졌던 사람이 오래오래 사용할 수 있다면 보람 있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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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AUTUMN 767

작은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 통계청에 의하면 2019년 11월 현재 전국 1천 813만 호의 주택 가운데 62.3 퍼센트가 아파트였다. 이처럼 한국인의 대표적 주거 형태를 이루는 아파트에는 입주민의 안전을 돌보고, 분쟁이나 민원을 해결하며 건물을 관리해주는 등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관리소 직원들이 있다. 이상용(李相龍) 씨는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510세대로 구성된 아파트 단지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급한 민원이 들어와 인터뷰 시간을 30분 늦추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연락을 받고, 오후 네 시 반에 관리사무소에 들어섰다. 단지 옆 신축 건물 공사로 인해 소음이 발생한다는 것이 급한 민원이었고, 회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언쟁이 오가나 했더니 잠시 후 입주자 대표와 공사 현장 담당자 등이 일어나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마주한 이상용 씨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문제가 있거나 불만이 있는 분들이 저를 찾아오시니, 늘 이래요.” 민원을 해결하고 분쟁을 조정하는 것은 관리소장의 주요한 업무 중 하나이다. 이상용씨는 2009년 육군 예비역 대령으로 전역한 뒤 지금은 서울 마포구 강변힐스테이트 아파트 관리소장으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다양한 민원 “이야기가 잘 되면 괜찮은데 가끔 상식에 어긋나는 사람도 있죠. 지난봄에는 109동 사는 분이 민원을 계속 넣었는데, 그 동이 가라앉고 있다는 거예요. 모든 세대가 냉장고를 같은 자리에 놓아두고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우기 때문에 그 무게 때문에 침하한다, 베란다 뒤에 균열도 보인다고 주장해요.” “우리 아파트는 3년에 한 번씩 정밀 점검을 받고 있고, 2019년에도 점검을 받았지만 문제가 없었다”고 아무리 말해도 믿지를 않자 결국 입주자 대표회의에 안건을 올려서 세 군데 전문업체한테 문의를 했다. 결론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고, 이상용씨는 “내년에 또 정밀 점검을 하니 이상이 있으면 조치하겠다”고 겨우 설득에 성공했다. “아무리 황당한 민원이어도 모른 척할 수는 없고, 반드시 처리한 다음 결과를 이야기해주어야 해요.” 가장 빈번하고 골치 아픈 민원은 소음이다. 몇 주 전, 위층에서 아이들이 너무 뛰어서 잠을 못 자겠다는 민원이 밤 열 두 시쯤 들어왔다. 당직하던 경비원이 위층에 인터폰을 넣어서 사정을 말했지만, 밤 늦게 연락을 했다고 한참 욕을 먹었다. 이 사실을 다음날 아침에 보고 받은 이상용 씨는 무척 속이 상했다. “그분 입장도 이해가 되지만 경비원은 무슨 죄예요. 층간소음의 경우에는 솔직히 방법이 없을 때가 많아요. 바로 위층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하기도 해요. 아래층에서 민원이 들어왔다고 하면 나쁜 감정을 가질 수도 있으니 여러모로 조심스럽게 말하라고 직원들을 교육합니다.” 지하주차장에 드나드는 차소리가 시끄러우니 해결해달라는 주민도 있었다. 공용시설은 경비용역업체가 관리하고 개인시설은 입주자 각자가 관리해야 하는데, 경계가 불분명한 것도 있고 입주자 입장에서는 다 공용시설이라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상용 씨는 경비원과 미화원을 포함해 총 열 세명의 직원들을 통솔한다. 그는 입주민은 물론 직원들과의 소통 역시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의 하루 일과는 반복적이면서도 규칙적이다. 아파트 단지 전체에 안내방송을 하는 것도 그 중 하나인데, 요즘은 코로나 19로 인해 안내 방송이 더 잦아졌다. 입주민들은 매일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이상용씨를 찾아온다. 그는 민원을 꼼꼼하게 듣고, 입주민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도우려 노력한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하루 종일 조용할 틈이 없다. 직업군인에서 관리소장으로 이상용 씨가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딴 것은 2011년, 지금 아파트의 관리소장으로 온 것은 2019년이었다. 주택관리사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500세대 미만의 주택에서 3년 이상 경험을 쌓아야 500세대 이상주택의 관리를 맡을 수 있다. 그는 2012년에 250세대가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일을 시작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자격증 시험이 없었다. 아는 사람에게 맡겨 주먹구구식으로 관리했다. 지금은 해마다 주택관리사 자격증 시험이 있고 1,500~2,000명이 합격한다. 자격증을 딴다고 모두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서비스직이라서 적성이 맞아야 한다. 불만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대처를 잘못하면 쉽게 감정 싸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직업의 좋은 점은 정년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모두 다 오래 일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나이가 많다고 일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입주자들이 싫어할 수 있어요. 젊은 사람들은 아이디어가 많지만 경험이 부족하고, 나이 든 사람들은 기계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지만 뭘 바꾸려고 하지 않죠. 장단점이 있어요.” 주택관리사가 되기 전에 이상용 씨는 32년 간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다. 2009년 6월 중령으로 제대해 지인이 하는 군 관련 회사에서 잠깐 근무했다. 그러다 한 선배가 적성에 맞을 거라며 권유해 주택관리사 시험을 봤다.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군대에서의 경험이 일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많다. 지휘관으로 근무할 때 원칙 중 하나가‘1% 지시, 99퍼센트 확인’이라는 것이었다. ‘지시는 짧게 하고 확인은 철저하게 하라’는 군대의 지휘 체계가 관리 업무에도 잘 적용된다. 출근시간은 오전 9시지만 그의 하루는 8시 5분에 시작된다. 오전 6시에 기상했던 군대 시절의 습관 때문에 5시면 눈이 떠진다. “집에서 전철을 타고 여기 오면 정확하게 8시 5분이에요. 월, 화, 금요일에는 사무소로 바로 들어오지 않고 우선 단지 안을 한 바퀴 둘러봐요. 월요일에는 주말 동안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화요일에는 분리수거 업체가 오는 날이니까 수거 후 청소 상태 를 확인하고, 금요일에는 주말 동안 쉴 테니 여기저기 꼼꼼하게 둘러보죠.” 이해심과 참을성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는 없는지 묻자 “없다고는 못하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이 힘들기 보다는 상식을 벗어난 사람들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을 해달라고 하는 입주민은 으레 감정이 나빠지면 “우리가 봉급 주는데”라는 말을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비애감이 든다. 이상용 씨는 그럴 때 시간을 가지며 마음을 다스린다. 서로 마음이 풀린 다음에 이야기하면 대부분 해결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 일하는 아파트에는 심한 갑질이 없다. 대신 자랑할 것이 많다. 이 아파트 단지에는 매주 화요일마다 과일 행상이 온다. 그 행상에게 매주 경비원 6명, 미화원 5명의 과일 값 6만원을 지불하는 입주민이 있다. “1년은 52주인데 작년에 그 행상이 51번 왔어요. 1년이면 삼백만원이 넘죠. 제가 여기 오기 전부터 하신 일이라는데, 처음에는 부모님이 하다가 지금은 따님이 한대요. 인사를 드리러 찾아갔더니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말라고 하세요. 우리가 청소를 하거나 다른 작업을 하고 있으면 빵이나 음료수를 사주시는 분들도 많아요.” 오후 6시에 퇴근을 하고 6시 50분 전철로 귀가하여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TV 드라마를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저녁 10시 반에는 잠자리에 든다. 주말에는 맛있는 걸 먹으러 가거나 바둑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서울 외곽에 있는 친척집에 가서 텃밭을 가꾼다. 이상용 씨는 뭔가를 돌보고 가꾸는 것을 좋아한다.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지금도 텃밭에서 일을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관리소장에게 필요한 적성으로 그는 이해심과 참을성을 꼽았다. 사람과 부딪치는 일이니 이해하고 배려하고 참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아파트라는 공동체는 시계 바늘처럼 정확한 그의 일상과, 마을을 지키는 커다란 나무처럼 듬직한 그의 배려에 의해 오늘도 차곡차곡 돌아가고 있다. “작년에는 아파트 정문 쪽이 휑해 보여서 꽃을 심기로 했어요. 같이 꽃을 심을 분들은 나오시라고 방송을 했더니 아이들 데리고 여러 분이 오셨어요. 함께 꽃을 심고 나서 광장에서 막걸리 한잔 같이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어요. 애로사항이 있어도 얘기 못하는 분도 많거든요. 그럴 때 듣는 거죠. 순찰을 돌고 있으면 때로는 그에게 다가와 “소장님, 그때 고마웠어요, 도움을 받았어요, 수고하셨어요”라고 말해 주는 주민이 있다. “이분들이 내가 한 일을 알아주는구나. 이 일을 하기를 잘했구나.”그가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아파트라는 공동체는 시계 바늘처럼 정확한 그의 일상과, 마을을 지키는 커다란 나무처럼 듬직한 그의 배려에 의해 오늘도 차곡차곡 돌아가고 있다. 고즈넉한 한강변에 자리한 이 아파트 단지는 510세대의 비교적 아담한 규모지만, 주위에 다른 아파트 단지들과 함께 건축된 서울 도심 서쪽 주거지역의 일부이다.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하지권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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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AUTUMN 758

색다른 지역 관광을 주도하다 색다른 지역 관광을 주도하다 전라북도 농촌 도시인 순창에 사는 레아 모로 씨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구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길 원한다. 레아 모로는 매주 닷새동안 전라남도 순창군 투어 버스인 ‘풍경버스’에서 안내를 진행한다. 풍경버스는 강천산 군립공원, 전통고추장 민속마을, 채계산 등 순창의 주요 관광명소를 돈다. 프랑스 리옹 근처 인구 1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 이제롱(Yzeron) 출신인 레아 모로 씨는 자신이 ‘주류 여성’이 아니라고 소개한다. 케이팝 그룹 중 BTS와 블랙핑크에 감탄하긴 해도 그녀가 아주 좋아하는 가수는 인디밴드 새소년이다. 그리고 서울의 명소보다 소도시의 생활을 선호한다. 풍부한 전통 문화와 관습이 남아 있는 전라북도 시골 도시인 순창에서 레아 씨는 지역 공무원으로 관광 홍보 일을 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외국인이 지역의 관광 명소를 격찬하며 홍보하는 걸 보면 당연히 놀란다. 레아 씨의 한국어 발음은 완벽하지 않지만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전달할 때는 자연스럽게 기분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순창은 고추장과 많은 명승지로 유명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쉽게 닿지는 않는 곳이다. 더 많은 방문객을 유치하고 이들이 주변을 쉽게 둘러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순창군은 2019년에 버스 투어를 도입했고 이를 위한 가이드를 찾고 있었다. 재즈 카페를 운영하는 레아 씨의 친구가 그녀를 추천했다. “제가 불어, 영어, 한국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인과 외국인 관광객 모두 유치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친구가 설득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이미 유튜브 여행 채널을 운영하고 있었고 관광산업 관련 경험도 있었다. 순창군이 그녀를 위해 관광 홍보관 자리를 만들기로 결정했지만 외국인을 공무원으로 채용하기 위해서는 상부 기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6개월 후에 그녀는 홍보관으로 채용되었다. 지역 사람들은 그녀를 “프랑스 공무원”이라 부른다. 레아 씨는 군에서 인기가 많다. 그녀는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데 보관함에는 작업용 장갑, 아줌마 바지, 카메라와 한복이 들어 있다. 그녀의 일을 수행하면서 농부들에게 도움을 줘야 할 때도 있고 비디오 영상을 찍고 싶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KBS의 같은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는 것 역시 자신이 맡은 홍보 일의 일부라 생각한다. 그녀는 소도시에는 볼 게 별로 없다는 편견을 떨쳐버리고 한국에는 서울과 케이팝과 케이드라마 외에 훨씬 더 경험할 게 많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방랑벽 고향 마을 이제롱에서 순창까지 오게 된 건 여행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프랑스 시골에서 자란 레아 씨는 늘 바깥세상이 궁금했다. 그러다 어린 시절 가족이 발리에 배낭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오토바이를 탔어요. 부모님은 저와 제 여동생을 다리 사이에 태우셨죠. 이 여행이 제 삶의 모든 걸 바꿔놓았다고 생각해요.”라고 그녀는 회상한다. “여행을 통해 세상에는 다른 모습의 사람, 다른 문화, 다른 언어가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게 더 많은 기회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레아 씨는 호주에서 18개월 동안 일하고 영어를 배우고 때때로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Great Barrier Reef)에서 다이빙을 즐겼다. 이후 태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동남아시아 여행을 했다. 결국 여행 산업에 마음을 두고 온라인 수업을 듣고 관광경영 학사를 취득했다. 이 수업이 요구하는 것 중 하나가 한 나라에서 6개월간 인턴을 하는 거였다. 한국인 친구가 광주에 있는 페드로 하우스와 여행 카페를 추천했다. 2016년 그녀는 한국에 왔고 거의 2년 동안 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게 되었다. “광주를 사랑하게 되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역사를 좋아했던 할아버지로부터 한국 역사에 대해 배웠어요. 할아버지는 남한과 북한에 대해 알려주셨죠. 하지만 광주와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어요. 광주는 한국의 현대사와 한국사회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좋은 곳이었어요.” 광주에 사는 동안 그녀는 전라도 지역을 많이 여행했고 특히 인근 섬들을 포함해 외진 곳들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외국인을 위한 관광정보가 없었기 때문이 이 여행들은 외국인 배낭 여행자에게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페드로 하우스의 주인 페드로 김(본명 김현석)과 함께 가이드북을 쓰게 되었다. 책은 출간되지 않았지만 온라인에서 “전라 고 (Jeolla Go)"라는 이름의 채널로 재탄생되었다. 나중에 경상도 지역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그녀는 조선산업이 대부분의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거제도의 문화센터에서 한동안 일하기도 했다. 광주로 돌아왔을 때 순창에서의 일자리는 좀 더 지속적인 일을 추구했던 그녀에게 마침 좋은 기회가 되었다. 모로는 모국어인 프랑스어와 한국어는 물론 영어에도 능통해 주로 순창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최근에는 한국인을 더 많이안내한다. 한국인 관광객들은 그의 한국말 설명을 들으며 순창의 여러 장소를 흥미롭게 돌아본다. ⓒ Lea Moreau 아주 바쁜 가이드 관광 홍보관이자 경험 많은 배낭여행자로서 레아 씨는 다른 여행자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데 즐거움을 갖는다. 그녀는 소도시에는 볼 게 별로 없다는 편견을 떨쳐버리고 한국에는 서울과 케이팝과 케이 드라마 외에 훨씬 더 경험할 게 많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녀는 순창에는 한국에서 가장 긴 출렁다리 중 하나가 있다고 예를 든다. 또한 봄에는 벚꽃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곳 중 하나로 유명한 진해나 하동보다 덜 붐빈다. 가을에는 강천산국립공원의 단풍이 유혹적이다. 하지만 그녀가 새 일을 시작하고 얼마 있지 않아 코로나 팬데믹이 닥쳤고 관광은 사실 거의 정지된 상태다. 미소 짓는 얼굴 모습을 하고 오픈탑 형태를 갖추고 두 개의 버스를 합쳐 특별히 제작된 순창 시티투어버스는 현재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약 10명 정도 실어 나른다. 팬데믹 방침에 따라 모두 버스를 타기 전에 체온을 측정한다. 투어는 외국인 승객이 없을 때는 한국어로 진행된다. 대부분의 여행이 가상체험으로 이루어지는 이때 레아 씨의 홍보 일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지속된다. 매주 한 번 정도 그녀는 ‘전라 고’에 새로운 내용을 업로드하고 순창군의 공식 유튜브 채널인 ‘순창 튜브’에도 협업을 하고 있다. 이런 일을 그녀는 가장 좋아한다. “영상 촬영을 좋아해요. 고등학교 다닐 때 저희 반은 마다가스카로 여행을 갔고 그때 제가 촬영을 맡았어요. 물론 그때 찍은 영상의 질이 아주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촬영 기술이 좋아진 게 분명하다. 작년에 관광 비디오 컨테스트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150만원 상금으로 그녀는 파노라마 촬영을 위해 드론을 구입했다. 현지 이웃들 사이에 ‘프랑스 공무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모로는 현재 순창군 미생물산업사업소 미생물계 소속 직원이다. 순창은 고추장, 된장으로 유명하고 미생물산업사업소는 이런 발효 음식을 연구하고 홍보하는 일을 맡고 있다. 덕분에 모로는 고추장과 된장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매력에 관해 한국사람만큼 잘 안다. ⓒ Lea Moreau 꿈을 살다 레아 씨는 최근에 순창군과의 계약을 3년 연장했다. “제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일상을 공유함으로써 한국을 좀 더 잘 알게 되는 거예요.”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제가 한 곳에 머무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가 만나는 사람들과 사귄 친구들 때문이에요. 한국인은 정말 환대해 줘요. 외국인을 보면, 특히 시골에서는, 도움을 주려고 하죠. 제게는 그런 만남이 그 자체로 하나의 모험이 되고요.” 레아 씨는 자신의 한국어가 완벽하지 못함에도 동료 공무원들이 자신에게 행정 시스템과 일에 대해 알려주려고 애를 쓰는 걸 고맙게 생각한다. “저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저를 신뢰하는 걸 알고 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고마운 생각에 그녀는 일주일에 10시간 온라인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레아 씨의 개인적인 삶의 모토는 “인생을 꿈꾸지 말고 꿈을 살아라”이다. 그녀는 한국에서의 삶과 여행에 대한 책을 쓰는 것, 여행 TV쇼를 만드는 것, 지역 산업을 좀 더 홍보해서 지역공동체에 기여하는 것 등 미래에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좀 더 여행을 많이 하고 자신의 글로벌 여정을 공유하도록 영감을 주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그녀는 말한다. 조윤정 프리랜서 작가, 번역가 허동욱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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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고 이질적인 이야기에 대한 사랑 독특하고 이질적인 이야기에 대한 사랑 전민희(Jeon Min-hee 全民熙)는 1990년대 PC통신망을 기반으로 등장한 판타지 소설의 1세대에 속하는 작가다. 1999년 연재를 시작한 『세월의 돌(The Stone of Days)』 이후 지금까지 수십 권의 작품을 펴냈으며, 그중 상당수가 일본·중국·태국·대만에서 출판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룬의 아이들’ 시리즈와 ‘아키에이지’ 시리즈는 게임의 밑바탕이 되었다. 경복궁 근처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판타지 소설가 전민희(Jeon Min-hee 全民熙)는 1999년 PC통신 나우누리에 『세월의 돌(The Stone of Days)』을 연재하며 데뷔했다. 그의 소설은 섬세한 묘사와 서정적인 문체로 국내외 수많은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소설가 전민희는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있고, 서울에서 가장 고즈넉한 동네인 대통령 관저 부근 마당 있는 집에 산다. 얼핏 평범한 가정주부나 커리어우먼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한국 판타지 소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 꼽힌다. 1999년 PC통신 나우누리에 연재하기 시작한 『세월의 돌』은 잡화점을 운영하는 18세 소년 파비안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목걸이의 네 가지 보석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인데 무려 400만 회 접속을 기록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판타지 소설 마니아들 사이에서 ‘전설’로 회자된다.작가 특유의 판타지 세계관은 게임 업계에서도 사랑받고 있다. 2003년 출시된 넥슨의 클래식 RPG 테일즈위버(Tales Weaver)와 2013년 출시된 엑스엘게임즈의 RPG 아키에이지(ArcheAge) 같은 인터넷 게임이 그녀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됐다. 올해로 데뷔 몇 년째인가? 1999년부터 연재하기 시작했으니 23년째다. 총 3부로 이루어진 ‘룬의 아이들(Children of the Rune)’ 1부 『룬의 아이들 – 윈터러(Winterer)』(2001~2019)가 2001년 처음 종이책으로 출간됐으니, ‘룬의 아이들’ 시리즈가 20주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룬의 아이들’ 시리즈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판매 부수는 얼마나 되는가? 7권으로 완결된 『룬의 아이들 - 윈터러』와 9권으로 끝을 맺은 『룬의 아이들 – 데모닉(Demonic)』(2003~2020)을 2018년 출판사를 바꿔 개정판을 냈다. 그때 추산해 보니 정확하지는 않지만 300만 부가량 팔린 것으로 파악됐다. 개정판을 계속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만큼 작품 퀄리티에 신경을 쓰기 때문인가? 판타지 소설가들은 대개 작품 고쳐 쓰는 걸 싫어한다. 나처럼 어떤 계기가 생겼을 때 글을 수정하는 작가는 소수에 불과하다. 이전 작품을 고칠 시간에 새 작품을 쓰는 편이 작업의 즐거움이나 명성, 수입 면에서 훨씬 낫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퇴고를 거듭해서 책을 내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다른 시점으로 다시 보면 보완하고 싶은 게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세월의 돌』은 2004년 출판사를 바꿔 다시 출간했는데, 첫 작품이라 애착이 크기는 했어도 미숙한 대목들이 빤히 보여 차마 그대로는 찍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때 고치지 않고 그냥 넘어갔더라면 이후 다른 작품들도 다시 손대지 않았을 것 같다. “흔히 판타지 소설은 주로 작가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방대한 자료 조사와 치밀한 연구가 밑바탕이 된다. 그런 사전 작업이 치밀한 구성과 섬세한 묘사를 가능케 한다.” 전 작가의 대표작 ‘룬의 아이들’ 시리즈는 1부 『룬의 아이들 – 윈터러(Winterer)』(2001~2019), 2부 『룬의 아이들 – 데모닉(Demonic)』(2003~2020)에 이어 3부 『룬의 아이들 – 블러디드(Blooded)』(2018~)가 현재 4권까지 출간되었다. 번성했던 고대 왕국이 갑자기 멸망한 지 천여 년 후 여러 국가와 세력이 끊임없이 충돌을 벌이는 가운데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싸워나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개정판에 대한 독자들 반응은 어떤가? 단순히 문장만 다듬는 수준이 아니라 새로운 에피소드를 집어넣기도 하다 보니 독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갈렸다. 개정판을 다시 사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아무래도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수정된 작품을 더 좋아해 주는 독자들이 차츰 늘어났고,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며 달라진 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공유하는 독자들도 있다. 작품이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나우누리에 처음 연재하던 20대 때는 독자들을 의식하지 않고 그냥 내가 쓰고 싶은 걸 썼다. 그런데 의외로 소설이 큰 인기를 얻게 되자, 세상에는 나랑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 취향을 오롯이 반영해도 될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를 척척 만들어 붙였다. 근본적으로는 판타지라는 장르에 내재해 있는 매력 때문이 아닌가 싶다. 판타지 소설은 한 시대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시대를 아우르는 보편성과 호소력이 있다. 거대한 세계를 조명하면서도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다는 평가를 듣는다. 어떻게 생각하나? 흔히 판타지 소설은 주로 작가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방대한 자료 조사와 치밀한 연구가 밑바탕이 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는 없는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도시 문화사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사전 작업이 치밀한 구성과 섬세한 묘사를 가능케 한다. 어떤 계기로 판타지 소설을 쓰게 됐나? 어린 시절부터 습작을 했다. 그때는 그저 쓰고 싶은 걸 썼을 뿐인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썼던 것들이 판타지에 속했다. 이 장르를 제대로 인지하게 된 건 나우누리의 판타지 동호회에서 활동하면서부터였고, 이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운이 좋았던 것 같다. 1990년대는 판타지 소설이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는데, 나와 시대적 코드가 맞았던 거다. 내 개인적인 취향이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공명함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나는 1994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4학년이던 1997년 한국이 IMF 구제금융 체제에 들어갔다. 대학 졸업 후 취직하려야 할 수도 없었고, 취직을 못 해도 하나도 창피하지 않은 시기였다. 내 입장에서는 어차피 돈을 못 벌게 됐으니 좋아하는 일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거였다. 판타지 취향은 어떻게 생기게 됐나? 아마도 어렸을 적 어린이용 세계 문학 전집을 읽으며 생긴 것 같다. 나는 독특하고 이질적인 이야기들을 좋아했는데, 이를테면 ‘삐삐 롱스타킹’ 시리즈로 유명한 스웨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 같은 작품을 정말 좋아했다. 『룬의 아이들 - 윈터러』가 그 작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을 나중에 깨닫게 됐다. 자신의 소설이 어떤 특징을 보인다고 생각하나? 그걸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닌 것 같다. 독자들이 내 소설 세계를 비평하는 글을 내놓을 때가 가끔 있다. 이를테면 어떤 독자들은 내 작품을 ‘청소년 소설’ 스타일로 규정한다.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한국 독서 시장에 청소년 문학이라는 영역이 정착되었지만, 내가 처음 소설을 쓸 때는 그런 카테고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청소년을 타깃 독자층으로 삼았던 이유는 전근대 시기에도 아이들은 성인식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쳤는데, 아이에서 어른으로 이행하는 연령대의 독자들을 위해 통과의례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룬의 아이들 - 윈터러』가 그런 구조라고 생각한다. 어떤 아이가 부모님을 비롯해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두려워서 도망쳤던 최초의 대상과 대면하게 되는 내용이다. 오래된 독자도 많을 것 같다. ‘룬의 아이들’ 시리즈 중 2부의 마지막 권이 나온 게 2007년인데, 3부 『룬의 아이들 – 블러디드(Blooded)』 1권을 2018년에 출간했다. 무려 10년도 넘어서 나온 거다. 그동안 내 소설을 잊어버린 독자도 있을 수 있고 취직을 하거나 결혼을 한 독자도 있을 텐데, 폭설이 내린 겨울 아침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열린 작가 사인회에 무려 500명이나 나타났다. 그때 정말 깜짝 놀랐다. 초등학생, 중학생 때 『룬의 아이들 - 윈터러』로 내 소설에 입문해 이제는 20~30대가 된 독자들이 나를 찾아준 것이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사실상 올해 스케줄이 꽉 차 있다. 손대고 있는 게임 시나리오 작업도 해야 하고, 『룬의 아이들 - 블러디드』도 계속 써야 한다. 신준봉(Shin June-bong 申迿奉) 『중앙일보』 기자 한상무(Han Sang-mooh 韓尙武)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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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영국 여성이 바라본 북한 외교관 남편을 따라 2년간 북한 평양에 둥지를 틀었던 영국 여성. 사회주의 체제 이면의 곳곳에서 보고 느낀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과 그들과 나누었던 다정한 교감은 귀국 후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의 기억 속에 살아 움직인다. 30대 영국 여성이 경험한 북한은 생각보다 다정하고 친절한 곳이었다. 평양 생활은 2년 남짓은 그의 가치관을 크게 바꿔 놓기에 짧지 않았다. 외교관 남편과 함께 평양에서 2년 머물고 영국으로 돌아온 린지 밀러는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예상 불가능했던 북한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책을 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유를 당연하게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 Lindsey Miller 작곡가이자 음악 감독인 린지 밀러(33·Lindsey Miller)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외교관 배우자와 북한에 머물며 만난 사람들의 사진과 이야기를 묶어 지난 5월 책으로 펴냈다. 200쪽의 이 책 제목부터 범상하지 않다. (North Korea: Like Nowhere Else). 북한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는 그곳 사람들이 마치 차가운 로봇 같을 것이라 예상했다. 특히 외국인들에게는 더없이 냉담하거나 적대적일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평양에서 2년을 살다 돌아온 지금, 그런 생각은 편견이었다고 밀러는 말한다. 그가 만난 북한 주민들은 우호적이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외국인들은 흔히 열병식이나 집단체조, 미사일 같은 선입관을 가지고 북한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도 매우 엄하고 딱딱할 것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손주를 귀여워하고,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죠.” 평양 주변은 물론 시골길에서도 마을과 마을 사이를 오가는 군용 트럭 뒤에 빼곡히 앉은 군인들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밀러가 본 군인은 딱딱하고 무서운 존재가 아닌 그저 미소를 짓고 인사도 건네는 젊은이들이었다. ⓒ Lindsey Miller 그들은 군인이기에 앞서 평범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는 이 사진을 찍은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군인들과 인사를 주고받았고, 그들 중 한 명은 밀러에게 손 키스를 보냈다. 확실한 변화 밀러는 북한 사회의 획일화된 분위기 속에서 작은 변화를 발견했다. 어느 날 오후, 단속과 제재를 상징하는 로동신문사 앞을 손잡고 걸어가는 젊은 연인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 광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책에 담았다. 그뿐 아니라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젊은이들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 어린 학생들은 미국 디즈니사의 캐릭터들이 그려진 가방을 메고 다니기도 했다. “미국 문화의 상징인 디즈니 가방을 북한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북한 국영 텔레비전에서도 디즈니 만화영화를 봤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저는 북한 주민들이 그런 것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지 궁금했습니다.” 밀러는 자신이 찍은 수천 장의 사진 중 트럭을 타고 가는 북한 군인들 사진을 가장 좋아한다. 이 사진에는 그가 북한과 그곳 사람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잘 표현돼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 군인이라 하면 김정은 정권을 떠올리지만, 밀러가 보고 느낀 그들은 군인이기에 앞서 평범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는 이 사진을 찍은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군인들과 인사를 주고받았고, 그들 중 한 명은 밀러에게 손 키스를 보냈다. 다들 웃기 시작했다. 밀러도 똑같이 손 키스를 보냈다. “우리는 북한에 이런 일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군복에 너무 집중해 그 사람 자체를 보는 것을 잊곤 하죠. 저는 북한에 살면서 그들이 누군지, 어디서 왔고, 가족과 그들의 인생은 어떨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주민들과의 접촉 외국인 거주자들은 꽤 자유롭게 평양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쇼핑을 하거나 외식을 하고, 거리에서 마주친 주민들과 비교적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놀랍게도 많은 북한 주민들이 기본적인 영어 회화를 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영어를 하려고 먼저 다가오기도 했다. 반면 관광객들과는 달리 외국인 거주자가 지켜야 하는 규칙과 제약도 있었다. 버스나 택시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고 북한 주민의 집 방문도 불가능했다. 북한 주민들과 항상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감시 체계를 많이 경험했다. 길에서 만나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한순간 표정을 바꾸고 갑자기 자리를 뜰 때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영락없이 양복 입은 남자가 서 있곤 했다. 평양 시내의 상점들 역시 이방인을 선뜻 반기지는 않았다. 가끔 가게안에 여러 손님이 있는데도 밀러가 들어오면“영업이 끝났다”고 하기도 했다. 밀러가 가장 흥미롭게 느꼈던 대상은 평양의 젊은 여성이었다. 특히 또래 여성들에게 관심이 갔다. 연애와 결혼, 커리어에 대한 그들의 사고 방식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제가 만난 평양의 젊은 여성들은 결혼과 출산보다는 일과 커리어를 더 중시했어요. 제가 결혼을 했는데도 왜 아이가 없을까 매우 궁금해했습니다. 장시간 일하는 게 너무 피곤하다는 얘기를 한 여성도 있었죠. 결혼하기 싫다는 여학생도 있었어요. 물론 평양의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경우들이었죠. 제가 북한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북한 사회의 상위 권력 계층이었고 외부인들과 접촉도 많이 경험해본 상태였어요.” 그는 외교단지가 있는 평양 동부의 문수동에서 살았다. 각국 대사관, 국제기관, 국제 구호단체들이 있는 지역이다. 규모가 크지 않았고 가끔 전력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위성TV를 볼 수 있었고 인터넷 접속이 가능했으나 속도가 아주 느렸다. 외교단지 안에는 외국인 학교도 있지만, 수준이 높지 않아 대부분의 외교관 자녀는 홈스쿨링을 하고 있었다. 밀러는 북한으로 떠나기 전, 그곳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외화인 달러, 유로, 위안화등을 준비해 오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구겨진 달러는 받지 않았다. 도착 직후 현지인 운전자를 통해 공항 주차장 요금정산소에서 1달러를 줬는데 구겨지고 더럽다며 거절당했다. 평양에선 물건을 산 뒤 거스름돈 대신 껌, 주스 같은 간식거리를 받는 것이 흔한 일이다. 백화점에서는 잔돈을 북한 화폐 원으로 거슬러 주기도 했다. 외국인들은 자동화폐입출금기(ATM)를 사용할 수 없었다. 외화 현금이 동나면 잠시 외국을 다녀오는 지인에게 부탁해 전달받았다. 많은 외국인들이 북중 국경 도시 단둥의 ATM에서 현금을 찾아왔다. 평양의 한 지하철 역에 거대한 김정일 초상화가 우뚝 서 있다. 그 아래를 지나가는 일은 그곳 주민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또 하나의 일상으로 보였다. ⓒ Lindsey Miller 2018년 가을 어느 날 오후 평양 시내 한 작은 아파트의 정경이다. 밀러는 북한의 기성세대가 보고 경험한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믿는 북한의 미래가 어떤 것인지 늘 궁금했다. ⓒ Lindsey Miller 2018년 한 열병식에서 김정은 앞을 지나 평양 거리를 통과하는 여군들이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군중은 이들에게 풍선과 꽃을 건네며 환호했다. 밀러는 이 사진을 책 표지로 결정하는데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 Lindsey Miller 짧지만 강렬한 기억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은 밀러에게 가장 흥미롭고 강렬한 기억을 남겨주었다. 그는 이미 외신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하고 있었지만, 북한 방송은 회담 소식을 하루 늦게 발표했다. 알고 지내던 북한 사람들이 밀러에게 와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하며 설명해 달라고 했다. 평양 시내에 ‘우리는 하나’라는 슬로건과 함께 김정은과 트럼프의 악수 장면을 담은 대형 사진들이 걸렸다. 북한 사람들이 남한 가요를 듣거나 TV 프로그램을 본다는 소문은 많았지만, 밀러 자신이 직접 보거나 듣지는 못했다. 북한에서 남한의 콘텐츠를 접하는 것은 최고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행위이다. 북한 사람들은 밀러가 서울에 가봤는지, 서울은 어땠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한 북한 주민은 그가 발리 해변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너무 아름답다며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그들은 영국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물어봤다. 그러나 성평등이나 동성 결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밀러의 초기 북한 사진에는 건물이 많이 등장한다. 그의 눈에 건축의 외양이나 디자인이 이색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빠르게 사람들로 초점이 바뀌어 자신이 바라보는 북한 사람들의 일상을 창의적인 시각으로 담았다. 간혹 차마 사진에 담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고 밀러는 그들을 존중하기 위해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처음엔 책을 출판할 계획이 없었다. 하지만 영국으로 돌아가 사진을 정리하면서 북한에서의 추억이 떠올랐고 자신이 겪은 경험과 감정들을 돌이켜보면서 이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책은 연출되지 않은 사진 200장과 16편의 이야기로 엮었다. 북한의 체제나 정치 상황보다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췄다. 이라는 제목에는 함의가 많다. “북한이 어떤 곳이냐는 질문에 간단히 답하긴 정말 어려웠습니다. 제가 아는 모든 곳, 제가 경험해 본 모든 장소 중, 이 세상에 북한과 같은 곳은 없거든요. 신분의 외국인들에게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이 확연히 구분돼 있어요. 제 책의 제목을 이렇게 붙인 이유입니다.” 밀러는 북한에서 영국으로 돌아간 뒤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이미 북한에 먼저 살아본 경험이 있어 더욱 가슴이 벅찼고, 비무장지대(DMZ)에서 특히 감정이 남달랐다. “비록 국경은 닫혔지만 북한에 대한 마음까지 닫아서는 안 됩니다. 북한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인터뷰를 마치며 그가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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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SUMMER 1065

대만족의 삶이라 말하는 니코 대만족의 삶이라 말하는 니코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 (Kordonias Nikolaos) 셰프는 어린 시절 맛본 지중해 요리를 오랫동안 즐겁게 만들고 있다. 여러 해를 길 위에서, 다양한 부엌에서 보낸 후 정착한 서울에서 자신의 식당을 경영하며 요리하고 있다. 서울 중심지에 위치한 익선동에서 한 블록 떨어진 작은 골목길에 예상치 못한 그리스문화의 안식처가 손짓한다. 한옥에 들어선 ‘니코 키친’이 토착 그리스 요리를 선보이면서 단골손님을 만들어내고 있다. 식당 주인인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 셰프, ‘니코’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는 에게해에 있는 사모트라키섬에서 성장한 자신의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들려준다. 이 섬은 날개를 단 승리의 여신 니케를 비롯해 신화의 위대한 신들의 성소가 있는 곳이다. 자신의 고향인 이 고대의 섬을 니코는 목가적으로 묘사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얀색으로 칠해진 집들로 가득한 그리스의 섬을 떠올리게 한다. “아름답고 조용하고 사람들은 친절해요. 삶의 속도는 느리고요. 사람들은 느긋하고 여유롭죠. 걱정을 하지 않아요. 집이 있고 일이 있으니까요. 삶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아요. 하지만 원하는 대로 살고 있고 행복하죠.”물론 게다가 “아주 좋은 음식”도 있다. 대화에서는 유기농 생산품, 신선한 닭, 사모트라키섬 주위의 코발트 색 바다에서 잡은 맛있는 생선에 대해 풍부한 얘기가 오갔다. 성장기에 엄마와 할머니가 만든 음식이 그를 사로잡았다. “아마도 냄새였을 거예요.”라고 니코는 말한다.이 모든 게 현재의 그의 삶과 일에 대해 말해준다. 2004년 한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곧바로 다른 음식의 냄새를 알아차렸다. 곧 냄새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에서 요리하는 포장마차의 냄새였고, 아주 달랐어요. 고추, 김치 같은 냄새가 공기에 떠다녔죠.”라고 그는 기억을 되살린다. 그는 국제적 정취로 가득한 서울의 이태원에 있는, 지금은 문을 닫은 그리스 식당 산토리노에 일자리를 얻었다. 어린 시절 태권도 수업 외에는 한국에 대한 경험이 없는 그는 한국이 어떤 곳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한국행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이동은 그에게 자연스러웠다. 지중해와 카리브해 지역의 항구 사이를 운행하는 크루즈 배에서 일한 후 그는 뉴욕의 요리학원에서 공부했고 맨해튼에서 명망 있는 셰프들과 일했다. 그 후 지인이 식당을 여러 개 운영하는 캐나다에서 6년을 보냈다. 오너 셰프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는 아침마다 서울 익선동에 자리한 레스토랑 니코키친의 한옥 문을 직접 연다. 그는 자신의 식당을 찾는 손님들이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곁들인 휴식을 즐기며 아름다운 그리스를 상상하길 바란다. 한국에 정착하다 이태원에서 일하는 동안 니코 씨는 우연히 산토리노가 들어선 건물에서 일하는 서현경 씨를 만났다. 그들은 오가며 마주치다가 결국 결혼으로 골인했다. 니코는 그리스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서 씨는 이전에 여러 해를 살았던 일본으로 되돌아갈 계획을 보류하고 있었다. “어떤 일들은 그냥 운명적인 것 같아요.”라고 니코 씨는 서울에 완전히 정착하게 된 일에 대해 얘기했다. 2018년에 니코 씨와 그의 아내는 ‘니코 키친’을 열었다. 특별히 한옥을 찾아 나선 건 아니었지만 한옥의 건축 양식이 마음에 들었다. 이 집을 샀을 때 불을 먹는 신화적 동물인 해태상 두 개가 있었는데 이전에 이곳에 입점한 카페에 남아 있었던 거였다. 해태상은 꽃나무 화분으로 가득한 작지만 아름다운 정원을 지키고 있다. 니코 키친은 조선왕조의 군인들이 종묘 주위를 순찰할 때 사용한 순라길에서 연결된 골목길에 위치한다. 종묘와 이어진 곳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이 있다. 가까이에는 역사가 오래된 불교 사원이 있고 골목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한국의 전통적인 색동천을 전시하는 색동박물관이 있다. 식당은 매일 영업을 하며 니코 씨가 모든 요리를 한다. 그의 아내는 그가 일중독자라고 하지만 그는 아주 행복해 보인다. “이게 제 삶이고 저는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라고 그는 말한다. “저 자신이 음식을 좋아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제가 만든 음식을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또 방문하는 게 좋아요.” 점심과 저녁 사이에 니코 씨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다. 이때 그는 서울의 여러 곳을 걸어 다닌다. 궁궐이나 절, 서울 한복판을 흐르는 청계천에도 간다. 팬데믹 전에는 사우나에서 몸을 풀기도 했는데 지금은 참고 있다. 식당을 찾은 손님들이 여유 있게 식사하고 와인을 맛보고 긴장을 푼다. 바로 이것이 니코 씨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며 그가 원하는 식당의 분위기이다. 니코키친의 셰프는 오직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 한 명이다. 그가 나고 자란 에개해의 작은 섬, 사모트라키섬의 맛과 가장 비슷한 맛을 내기위해 신선한 그리스식 재료와 레시피를 사용한다. 니코키친의 작은 공간 곳곳에는 그리스를 떠올리는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다. 냉장고의 한 면에는 그리스의 상징적인 지역 사진이 프린팅 된 귀여운 마그넷들이 붙어있다. 식도락가들이 발견한 곳 익선동에서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떨어진 조용한 골목에 위치한 니코 키친은 그냥 지나치다 들어오는 손님이 많지 않다. 그렇지만 이곳은 늘 예약이 꽉 차 있다. 요리 프로그램을 향한 한국인의 채워지지 않는 식욕이 이 식당으로 이어졌고, 니코 씨는 ‘여기GO’ ‘올리브쇼’(올리브 채널) 등 몇몇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손님으로도 심사위원으로도 출연했다. 미디어 노출이 많아지면서 아침 일찍부터 식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전화와 이메일 연락이 온종일 오게 되었다. 니코 씨는 텔레비전 출연의 혜택을 인정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요리에 집중하고 싶어 한다. 메뉴는 그리스 가정식을 바탕으로 한다. 가지와 다진 소고기로 만든 그리스 전통 음식인 무사카는 지속적으로 손님들이 찾는 요리다. 페타 치즈를 넣은 그리스 샐러드, 브라타 샐러드, 치킨 수블라키와 새우 사가나키도 인기 메뉴다. 그리스 음식이 아직 많은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하기 때문에 피자나 파스타도 메뉴로 제공된다. 하지만 니코 씨 자신만의 스타일로 직접 만든 사워 반죽을 사용해 만든다. 퓨전 메뉴를 선택한 건 좀 더 자유롭게 요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기분이 날 때면 스페인 요리나 이태리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자유로움을 좋아한다.하지만 그가 만드는 음식의 핵심은 항상 같다. 건강한 지중해 스타일의 음식으로 신선하고 자연의 재료로 만든 음식이다. 대부분 채식이고 무설탕에 튀김은 최소로 한다. 과거에는 그리스 식재료를 구입하기 어려웠는데 요즘은 원하는 것을 온라인으로 모두 구할 수 있다. 특정한 치즈나 다른 재료를 급하게 구해야 하면 출근길에 그가 아직 살고 있는 이태원의 가게에 들르면 된다. 대부분의 식당처럼 니코 키친 역시 코로나 팬데믹으로 경영이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리스 대사관의 직원들과 근처 절의 스님들을 포함해 많은 손님들이 단골이다. 불교 경전의 여러 장면을 묘사한 다채로운 색의 절 외관이 식당의 정문 위 너머로 보인다. 니코키친은 테이블 4~5개가 전부인 작은 레스토랑이고 모든 좌석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니콜라오스와 그의 아내는 이 곳을 찾는 모든 손님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니코키친은 테이블 4~5개가 전부인 작은 레스토랑이고 모든 좌석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니콜라오스와 그의 아내는 이 곳을 찾는 모든 손님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앞날들 자신이 선택한 제2의 고향인 한국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본 후 니코 씨는 잘 관리된 빌딩과 거리, 그래피티 같이 공공 지역의 흉물이 없는 것, 그리고 교양 있고 친절한 한국인에 대해 얘기했다. “여기는 천국 같아요. 완벽한 곳이에요. 그래서 이곳에 사는 게 행복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그리스를 많이 그리워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팬데믹이 지나가고 일상이 회복되면 사모트라키섬에 가보고 싶어 한다. 좀 쉬면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좋은 음식을 맛보고 바다낚시도 하고 싶다. 그는 자기 인생의 다음 단계를 그려보기도 한다. 그건 퓨전 음식 없이 온전히 그리스 요리만을 제공하는 좀 더 큰 식당을 여는 것이다. 그동안 상황을 살펴왔고 이제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한 곳에서 모두 실현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요. 물론 돈도 벌고요.”라고 그는 말한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 이것이 니코 씨의 간단한 철학이다. 그렇게 말하자 그의 아내가 끼어들어 응수하며 비밀을 폭로했다. 니코 씨가 햄버거를 좋아하고 가끔은 켄터키 프라이 치킨을 즐긴다고. 음식이 그를 한국으로 이끌었고, 그를 여기에 붙들어 두었으며 그를 행복하게 한다. “하루 일과가 끝날 때 만족스럽지 않으면 피곤해집니다. 하지만 만족스러워 미소 지을 수 있으면 모든 문제와 피로는 사라지죠.” 조윤정프리랜서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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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SUMMER 970

탈북민 환자들의 한의사 최초의 탈북 한의사 석영환(石英煥 Seok Yeong-hwan) 원장의 ‘영등포 100년 한의원’은 북한의 전통침술을 적용한 치료법으로 알려져 있다. 탈북민과 중국 교포들이 그의 북한식 진료의 혜택을 받고 있다. 100년 한의원은 탈북자들 사이에서 ‘탈북자병원’으로 불린다. 아픈 곳이 있어 찾아가면 주머니 걱정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석 원장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등포 100년 한의원’의 풍경은 여느 한의원과 조금 다르다. 실내 구조는 비슷하지만, 환자들이 맞는 침(鍼)이 사뭇 굵다. 얇고 가느다란 침만 보던 이들은 겁먹을 정도다. 이곳은 침술이 독특하다. 북한 전통침술인 ‘대침’, ‘불침’으로 유명하다. 지름 0.5cm 정도의 황금 침도 있다. 평양의 고위간부들이 많이 받던 치료법이라고 한다. 서울 문래동에 위치한 이 한의원의 석영환(55세) 원장은 남북한 한의사 면허 1호다. 진료실 책장에 꽂혀 있는 ⟨고려의학(高麗醫學)⟩ 같은 북한 책들이 말 해주듯 석 원장의 진료는 ‘고려의학’ (Koryo medicine), 즉 북한식 한방 요법에 따른다. 환자는 대부분 서울 시민이지만,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탈북민과 중국 교포도 많다. 중국 교포들은 식사나 생활습관이 북한 주민들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이곳에서 처방하는 약과 치료법이 제법 잘 맞는다고 한다. 100년 한의원이 광화문 부근에 있었을 때는 정부 고위인사들도 자주 찾아왔다. 그러나 높아만 가는 건물 임대료를 견디다 못해 2017년 ‘광화문 100년 한의원’을 문래동으로 옮겨 ‘영등포 100년 한의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실내 규모는 과거보다 2배나 넓어져서 661㎡(200평) 가 되었다. 또 하나의 도전 석 원장의 고향은 양강도 갑산이다. 그는 1998년 10월 지금의 아내인 연인과 함께 휴전선을 넘어 남한에 왔다. 그 후 결혼을 했고 현재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큰 아들, 고교생인 둘째 아들, 중학생인 딸을 두고 있다. 북한에 두고 온 부모와 삼 형제를 비롯한 가족의 소식은 끊긴 지 오래다. “연기도 없이 사라졌어요. 소리소문없이 증발했다고 해요.” 그저 간단히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탈북 당시 석 원장은 현역 군의관 신분이었다. 남한의 대위계급에 해당하는 북한군 88호 병원 응급실 진료부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김일성종합대학 소속인 평양의학대학 동의학부를 졸업하고 ‘고려의사’ 자격을 딴 그는 북한 기초의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기초의학연구소는 흔히 ‘만수무강연구소’로 불린다. 아버지가 호위사령부(청와대 경호실에 해당) 고급군관이어서 혜택을 누린 셈이라고 했다. 그가 북한의 현실에 절망을 느끼게 된 것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후 지방의 군부대병원으로 출장 가서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군인들을 보면서였다. 게다가 외국에서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동료 의사들의 얘기를 들으며 남쪽으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함께 탈북을 결심했다. 제3국을 경유하지 않고 탈북 경로를 휴전선으로 선택한 것은 군 장교의 신분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홀몸이 아니었기에 더욱 커다란 모험이었다. 기차를 타면 검문을 받아야 했으므로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서 얻어 타는 등 온갖 수단을 써가며 평양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꼬박 2박 3일이 걸렸다. 그는 남한 정착 3년 만에 한의사국가자격시험에 합격해 의사 면허를 얻었다. 남북한 한의사 자격을 모두 따낸 최초의 기록을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탈북민의 의사자격 기준이 없었다. 1999년 대한한의학회 전문가들의 테스트와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교육부와 보건복지부에서 국가고시 응시 자격을 얻어냈다. 교회에서 만난 교수들로부터 대학 교재를 추천받고 한의사 국가고시 수험서를 사서 동네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어려운 한자가 가득한 남한의 한의학 교재를 읽는 게 힘들었다. 북한에서는 기초한자 정도만 배웠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 도서관에서 옥편을 잡고 진땀을 흘리고 나자 한자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한의사 자격을 딴 후 경희대 한의대학원에서 석사학위도 받았다. 2002년 마침내 ‘광화문 100년 한의원’을 열어 새 삶의 터전을 잡았다. 이후 19년 동안 그는 형편이 어려운 탈북민 환자들에게 진료비를 받지 않고 있다. “어디가 아프다고 얘기해도 말이 달라 못 알아듣는 병원이 많다고 합니다. 나라도 알아주니 환자가 마음이 덜 불편하고 하소연도 할 수 있다고 하네요. 제가 그들보다 먼저 서울에 왔고, 같은 문제를 이미 겪었으니까요.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100년 한의원은 탈북자들 사이에서 ‘탈북자병원’으로 불린다. 아픈 곳이 있어 찾아가면 주머니 걱정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석 원장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한의학의 가장 큰 차이는 침 요법입니다. 북한의 침은 아주 크거든요. 그래도 맞고 나면 시원해 탈북민이 그리워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1. 석 원장은 자신이 힘들게 서울에 정착해 자격증을 따고 한의원을 개원하는 과정에서 남한사회에서 받은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무료진료 등의 봉사활동을 꾸준히 펼쳐왔다. 2004년부터 매주 이어온 봉사활동이 지금은 코로나 19로 잠시 보류되는 중이다. 2. 그가 창립하고 이사장으로 있는 ‘하나사랑협회’는 현재 남한과 북한 출신의 의사, 간호사를 비롯한 자원 의료 봉사 인원이 40명으로 늘어났다. 또 하나의 도전 석 원장의 고향은 양강도 갑산이다. 그는 1998년 10월 지금의 아내인 연인과 함께 휴전선을 넘어 남한에 왔다. 그 후 결혼을 했고 현재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큰 아들, 고교생인 둘째 아들, 중학생인 딸을 두고 있다. 북한에 두고 온 부모와 삼 형제를 비롯한 가족의 소식은 끊긴 지 오래다. “연기도 없이 사라졌어요. 소리소문없이 증발했다고 해요.” 그저 간단히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탈북 당시 석 원장은 현역 군의관 신분이었다. 남한의 대위계급에 해당하는 북한군 88호 병원 응급실 진료부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김일성종합대학 소속인 평양의학대학 동의학부를 졸업하고 ‘고려의사’ 자격을 딴 그는 북한 기초의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기초의학연구소는 흔히 ‘만수무강연구소’로 불린다. 아버지가 호위사령부(청와대 경호실에 해당) 고급군관이어서 혜택을 누린 셈이라고 했다. 그가 북한의 현실에 절망을 느끼게 된 것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후 지방의 군부대병원으로 출장 가서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군인들을 보면서였다. 게다가 외국에서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동료 의사들의 얘기를 들으며 남쪽으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함께 탈북을 결심했다. 제3국을 경유하지 않고 탈북 경로를 휴전선으로 선택한 것은 군 장교의 신분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홀몸이 아니었기에 더욱 커다란 모험이었다. 기차를 타면 검문을 받아야 했으므로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서 얻어 타는 등 온갖 수단을 써가며 평양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꼬박 2박 3일이 걸렸다. 그는 남한 정착 3년 만에 한의사국가자격시험에 합격해 의사 면허를 얻었다. 남북한 한의사 자격을 모두 따낸 최초의 기록을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탈북민의 의사자격 기준이 없었다. 1999년 대한한의학회 전문가들의 테스트와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교육부와 보건복지부에서 국가고시 응시 자격을 얻어냈다. 교회에서 만난 교수들로부터 대학 교재를 추천받고 한의사 국가고시 수험서를 사서 동네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어려운 한자가 가득한 남한의 한의학 교재를 읽는 게 힘들었다. 북한에서는 기초한자 정도만 배웠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 도서관에서 옥편을 잡고 진땀을 흘리고 나자 한자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한의사 자격을 딴 후 경희대 한의대학원에서 석사학위도 받았다. 2002년 마침내 ‘광화문 100년 한의원’을 열어 새 삶의 터전을 잡았다. 이후 19년 동안 그는 형편이 어려운 탈북민 환자들에게 진료비를 받지 않고 있다. “어디가 아프다고 얘기해도 말이 달라 못 알아듣는 병원이 많다고 합니다. 나라도 알아주니 환자가 마음이 덜 불편하고 하소연도 할 수 있다고 하네요. 제가 그들보다 먼저 서울에 왔고, 같은 문제를 이미 겪었으니까요.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100년 한의원은 탈북자들 사이에서 ‘탈북자병원’으로 불린다. 아픈 곳이 있어 찾아가면 주머니 걱정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석 원장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한의학의 가장 큰 차이는 침 요법입니다. 북한의 침은 아주 크거든요. 그래도 맞고 나면 시원해 탈북민이 그리워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3. 석 원장은 북한의 한의학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다. 김일성 전 주석이 평소에 즐겨했던 자연요법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김일성 장수건강법⟩도 그 중 하나이다. 4. 북한의 전통 한의학인‘고려의학’ 정보가 담긴 ⟨생명을 살리는 북한의 민간요법⟩. 북한 한의학에 대한 자부심 석 원장은 평양 기초의학연구소에서 심장·혈관계 연구원으로 근무한 경험을 살려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복용한 것으로 알려진 유심환(柔心丸), 태고환(太古丸)을 직접 만들고 있기도 하다. 두 가지 약은 각각 스트레스 질환과 노화 방지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는 고려의학에 대한 자부심도 크다. “고려의사는 한방과 양방을 함께 배우죠. 양방 외과에서 수술 집도까지 배웁니다. 북한에서는 보통 한방과 양방 검사를 같이해서 진단을 내립니다. 진맥과 양방 기본검사를 다 해서 그 자료를 바탕으로 진단을 하고 치료는 주로 한방으로 합니다. 제가 고려의학부를 졸업할 당시 제 학년이 30명이었는데 그 중 한 두 명 정도만 양방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교육 기간은 6년 6개월이고, 6개월은 임상실습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인턴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남한처럼 양의학 한의학을 엄격히 분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또 다른 차이점에 주목한다. “북한에서는 한글로 고려의학을 공부합니다. 남한의 한의학 교재는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어 어려웠습니다. 북한에서는 객관식 문제를 풀어본 일도 없었습니다. 북한의 시험은 모두 주관식이고, 답을 작성한 후 말로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북한의 한의학은 조선시대 의관 허준(1539~1615 許浚)이 편찬한 ⟨동의보감(東醫寶鑑)⟩(1610)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남북이 분단된 이후 발전 양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북한은 치료의학이 발달했다. 조선 말기 한의사 이제마(1837~1900 李濟馬)의 사상의학을 토대로 체질을 분류해 치료한다. 만성 질환은 한방치료 대상으로 꼽는다. 체질을 개선해야 면역이 형성되고 병과 싸울 수 있어서다. “북한은 한약 처방이 잘 되고 있는 편입니다. 치료 위주의 약 처방이 구체적으로 체질에 따라 배분이 잘 돼 있지요. 임상시험을 통해 객관화·규격화가 돼 있고 효능도 비교적 좋습니다. 또한 침술이 뛰어납니다. 남한에서는 자극을 덜 주기 위해서 얇고 작은 침으로 쓰지만, 북한 침은 아주 굵습니다. 굵은 침이 더 아플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는 이어 ‘환자 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본인의 정신력이 우선이고, 그 다음 어떤 의사한테 어떤 약과 치료법을 처방받는가에 따라 다르다’고 말한다.남북한 양쪽의 한의학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북한에 우수한 약재가 많아 남북간의 협력연구가 바람직하지만 현재의 모든 여건이 희망적이지 않아 아쉽다고 석 원장은 말한다. 봉사활동으로 보답 석 원장은 그사이 틈틈이 ⟨생명을 살리는 북한의 민간요법⟩(2003), ⟨등산도 하고 산삼도 캐기⟩(2003), ⟨김일성 장수건강법⟩(2004), ⟨북한의 의료실태⟩(2006) 등 4권의 책도 펴냈다. ⟨김일성 장수건강법⟩은 일본어로도 번역, 출판됐다. 늦었지만 박사학위까지 딸 계획이다.그가 외부 의료봉사를 이어온 지도 어느덧 17년째가 됐다. 한의원을 개원한 지 2년 만인 2004년 다른 탈북 한의사 한 사람과 어르신 무료진료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정착하는 과정에서 남한 국민 세금을 받고 남한 사회로부터 많은 배려를 받았습니다. 보답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죠. 게다가 봉사를 하면 저 자신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냥 한없이 기분이 좋지요.”‘탈북의료인연합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봉사활동 조직은 2015년 ‘사단법인 하나사랑협회’로 확대 개편되었으나 석 원장이 줄곧 이사장을 맡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동안 탈북의료인수효가 늘어나고 취지에 공감한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봉사자와 후원자도 늘어났다. 한의사, 물리치료사 등 의료인력 30여 명을 포함해 모두 130여 명의 회원들이 봉사에 참여하고 있다.어떤 일이든 1호의 무게는 남다르다. 석 원장 역시 1호의 짐을 평생 짊어지고 갈 수 밖에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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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SUMMER 973

추억을 선물하는 가게 추억을 선물하는 가게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젊은층에게는 새로움을 안겨주는 ‘레트로’가 주요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서울의 옛 도심 종로의 레트로 열풍을 이끌고 있는 한 레코드 가게를 찾았다.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는 러시아의 문학 이론가이며 작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Victor Shklovsky 1893~1982)가 처음 사용한 문학용어이다. 익숙한 이야기 구조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친근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지루함을 줄 수도 있다. 반면 어려운 형식의 구조는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키고 흥미와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 세상은 쉽고 편리하고 간단한 것을 지향하고 있는 듯하지만, 인간의 심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곳을 꿈꾸고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기대한다. 레트로스펙트(retrospect), 또는 요즘 ‘레트로’라고 줄여서 쓰이는 말은 회상, 추억이라는 의미지만 ‘과거의 추억이나 전통 등을 그리워하며 그것을 본뜨려는 성향’이란 의미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새것은 헌것이 되고 헌것은 새로운 세대의 새로움이 된다. 노년은 젊음을 그리워하고 젊음은 노년이 누렸던 것을 동경한다. 역시 인간은 복잡하다. 레트로 감성이 한껏 풍기는 턴테이블이 돌고 LP판 위에 스타일러스를 올리는 순간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서울레코드를 채운다. 요즘처럼 깨끗한 음질은 아니지만 턴테이블이 주는 특유의 감성적인 사운드가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황승수 대표 역시 오프라인 레코드 시장이 부활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세대를 뛰어넘어 서울레코드를 찾는 손님들을 위해 클래식, 재즈, 국악, 트로트, 로큰롤, 올드팝, 뮤지컬, OST, K-팝 등 장르별로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새롭게 주목받는 LP 제2의 성황기를 맞은 서울레코드는 항상 손님으로 북적거린다. 이곳을 찾는 누군가는 추억에 젖고 누군가는 아날로그 감성이 주는 매력에 빠진다. 1980년대 CD가 보급되기 전까지 비닐은 20세기 음악 재생의 가장 중요한 매체였다. CD와 MP3, 음원 생산으로 쇠퇴기를 맞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비닐이 주는 따뜻한 감성을 찾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서울레코드의 내부는 리모델링을 통해 현대적으로 꾸며졌지만, 단층짜리 옛 건물은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종로3가 거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시 종로구 종로3가에 있는 ‘서울레코드’는 낯설고도 익숙하고, 오래된 동시에 새로운 공간이다. 1976년에 문을 열었고 지금의 황승수(黃昇洙) 대표는 이곳의 네 번째 주인이다. LP와 카세트테이프가 CD로 바뀌고, DVD가 반짝 성황을 누리다가 사라진 이후 스트리밍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음반업계의 전망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 와중에 45년을 한자리에서 버틴 40평 남짓한 레코드가게는 그 어떤 레코드보다 희귀할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사장님이 2000년까지 하다가 mp3가 나오면서 가격경쟁이 안 돼서 정리하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음반은 소유하는 것보다 듣기 위한 게 목적이었으니까 사람들이 더 이상 앨범을 사지 않을 것 같았죠. 당시 직원이었던 분이 가게를 인수하면서 두 번째 사장님이 됐어요. 처음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한류가 시작되면서 외국손님들이 많이 왔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운영을 하다가 세 번째 사장님에게 가게를 넘겼어요. 두 번째 사장님 밑에 있던 부장님이 가게를 계속 운영했는데 그때 제가 직원으로 들어왔어요. 제가 일을 시작하고 3년째 되었을 때 세 번째 사장님이 가게를 정리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갑자기 인수받게 되었어요.” 2015년의 일이었고 그는 40대 초반이었다.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으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서 돈을 벌 궁리를 해야 했다.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다가 ‘하고 싶은 일보다 잘 알고 있는 일’을 하게 되었다. “형이 비디오 유통업체에 있었어요. 비디오, CD, DVD 같은 것들은 유통구조가 다 연결되어 있거든요. 어릴 때는 아버지가 전축 시스템 가져오셔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10대 때는 형을 따라 레코드 회사에도 가봤어요. 그러면서 이쪽 세계를 잘 알게 되었어요.” 처음 직원으로 일하던 시기에는 손님의 연령대가 꽤 높았다. 가게 뒤에는 세운상가(1968년 완공된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 길 건너에는 종묘(宗廟 1394년에 착공한,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 옆에는 탑골공원(塔골公園 1897년, 영국인 브라운(J. M. Brown)의 설계로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내 공원)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젊은 세대들은 보기 힘든 동네이기도 하다. LP를 찾는 40, 50대가 그나마 젊은 쪽이었고 카세트테이프를 사려는 노인들이 주고객이었다. 그러다가 분위기가 바뀌었다. ‘힙(hip)’하다는 의미에서 ‘힙지로’로 불리게 된 을지로, 새로운 핫스팟으로 떠오른 한옥마을을 찾는 외국인과 젊은이들이 늘어났고, 음반업계에서 완전히 사라질 줄 알았던 LP가 신선한 아이템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손님들의 연령대가 낮아졌다. 어쩌면 손님들은 물건이 아니라 추억을 구하러 오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세상에서 익숙한 것을 구하고, 익숙한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다. 추억의 공유 “우리 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서 듣는 게 중요했어요. 지금은 스마트폰과 스트리밍 서비스가 있으니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어요. 그래서 음반업계는 소멸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제 듣는 것보다 소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긴 거예요. 스마트폰 화면에 음반 재킷 하나 떠 있는 걸로 성이 안 차는 거죠. 그래서 LP를 사는 게 아닐까요? 젊은 사람들이 와서 LP에 바늘이 타닥타닥 튀는 소리를 듣고 좋아하는 걸 보면서 저도 놀랐어요. 조금 더 깨끗한 소리를 위해 CD가 나온 거잖아요. 세상은 이렇게도 바뀌고 저렇게도 바뀌는구나 싶어요.” 이제는 특정 세대가 아니라 다양한 세대가 이곳을 찾는다. 딸들이 아버지를 데려오기도 하고, 부모가 아이들을 데려와서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고른다. “어릴 때 듣고 좋아하던 곡인데, 가사도 조금 알고 멜로디도 기억하는데 제목은 모른다며 물어보는 분들이 있어요. 나이가 들어 컴퓨터도 할 줄 모르고 혼자 사시는 분들이에요. 이렇게 저렇게 추리해서 찾아드리면 감동하시고, 그걸 보면 저도 기분이 좋죠.” 1960년대에 유명세를 떨쳤던 밴드의 곡이 혹시 있느냐고 물어본 사람이 있었다. 곡을 찾아서 틀었는데 놀랍게도 노래를 부른 사람과 손님의 목소리가 흡사했다. 혹시 본인이 부른 곡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음반을 찾아다녀도 없어서 듣고 싶어도 못 들었던 곡이라 했다. “어릴 때부터 이 동네에서 살던 분인데, 집안이 어려워서 학교를 못 다니고 영화 포스터 붙이는 일을 했다는 손님도 있었어요.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밥을 굶고 영화를 봤다는 거예요.” 길고도 복잡한 타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손님으로 왔다가 추억을 공유하게 된 사람들은 마음에 온기를 품고 돌아가고, 사탕이나 귤, 음료수 같은 걸 들고 다시 찾아와 정을 나눈다. 아름다운 배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침 아홉 시 반에서 열 시 사이에 서울레코드의 셔터가 올라간다. 문은 아내가 열고 황대표는 영두 시에서 한 시 사이에 나와서 교대한다. 저녁 일곱 시 반에 문을 닫는데, 장사가 안 되는 날은 더 늦게까지 열어두기도 한다. 저녁 일곱 시 반 이후, 셔터가 내려진 레코드가게 앞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이른바 ‘내일의 신청곡’ 시간이다. “가게 앞에 빨간 우체통이 있어요. 신청곡을 써서 넣으면 틀어드려요.” 하루 동안 들어온 신청곡을 비롯해 비슷한 분위기의 곡들을 더해서 파일을 만들고, 가게 문을 닫은 후 틀어 놓는다. 음악은 밤 열두 시까지 흘러나온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춤을 추기도 한다. 어둠이 내린 밤의 거리,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삶은 어떻게든 흘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이 안에서 놀거리를 찾는 거예요. 일주일에 일요일 하루 쉬는데, 그날도 음악 듣고 오디오 만지작거리고 영화 보고 그래요. 어떻게 보면 취미를 다 여기 가져다놓은 거예요. 아내가 그래요. ‘너 놀려고 이거 차린 거지?’” 옆에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사장님의 놀이터를 공유하고 있는 거예요”하고 한마디 거든다. “처음부터 크게 돈을 벌겠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어요. 그저 유지하면서 좋아하는 음악 듣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저는 여기서 놀고 손님들은 찾던 음악을 구해가고요.” 어쩌면 손님들은 물건이 아니라 추억을 구하러 오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세상에서 익숙한 것을 구하고, 익숙한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다. 그의 말처럼 세상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흘러간다. 그 흐름 안에 아름답고 정다운 음악이 있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Ahn Hong-beomPhotograp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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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SUMMER 777

아픔이 불러일으키는 보편적 공감 아픔이 불러일으키는 보편적 공감 그래픽노블 작가 김금숙(Keum Suk Gendry-Kim 金錦淑)은 역사적 소재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그려 왔다. 제주 4.3 항쟁의 비극을 그린 『지슬(Jiseul)』(2014),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다룬 『풀(Grass)』(2017), 조선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의 삶을 기록한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2020) 등 여러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해외에서 출판되었다. 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얘기를 다룬 김금숙(Keum Suk Gendry-Kim 金錦淑) 작가의 그래픽 노블 『풀』의 한 장면. 2. 그는 주로 굵직한 역사적 주제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화에 담는다. 지난해 10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유례없이 온라인 중계로 진행된 뉴욕 코믹콘(New York Comic Con)에서 하비상(Harvey Awards) 수상작들이 발표됐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그린 그래픽노블 『풀(Grass)』도 그중 하나였는데, 이 작품은 ‘최고의 국제도서(Best International Book)’ 부문에서 수상했다.2017년 국내에서 출판된 『풀』은 2019년 캐나다의 만화 전문 출판사 Drawn and Quarterly에서 영어판이 출간된 이래 지속적으로 반향을 일으켰고, 2019년 『뉴욕타임스』와 『더 가디언』이 각각 ‘The Best Comics of 2019’와 ‘The Best Graphic Novels of 2019’로 선정했다. 이듬해에도 크라우제 에세이상(The Krause Essay Prize), 카투니스트 스튜디오 최우수 출판만화상(Cartoonist Studio Prize)을 수상하는 등 10곳에서 상을 받았다.작가는 하비상 수상자로 발표된 뒤 두 달이 지난 2020년 12월에야 태평양을 건너 도착한 트로피를 받았다. 코로나19 때문에 실제 트로피를 받는 데도 우여곡절을 겪은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은 여러 언어로 번역돼 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풀』은 최근 포르투갈어와 아랍어로도 번역돼 출간됐고, 지난해 가을 나온 신작 『기다림(The Waiting)』은 프랑스어판이 출간되었으며 영어, 포르투갈어, 아랍어, 이탈리아어 출판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 4월 김 작가를 그가 살고 있는 강화도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회화와 설치미술을 전공했는데 그래픽노블 작가로 이름을 얻게 된 사연이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스트라스부르 고등장식미술학교(École supérieure des arts décoratifs de Strasbourg)에서 설치미술을 배웠어요. 생활고 때문에 한국 만화가들의 작품을 번역하는 일을 아르바이트 삼아 맡았는데,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받게 되어 그곳에 소개한 한국 만화 작품이 100권이 넘어요.그러던 어느 날 현지 한인 신문사로부터 만화를 그려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저 역시 만화 번역을 하면서 이 장르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참이었죠. 작가의 생각을 종이와 연필만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낀 거예요. 하나씩 그리다 보니 연재 작품 수도 여럿 늘어났죠. 만화를 처음 시작하면서부터 말풍선이나 대화 표현을 어떻게 해야 더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과 노력을 많이 했어요.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있나요? 스토리 면에서는 한국 작가들의 영향이 있었죠. 특히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만화로 잘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이희재(李喜宰), 오세영(吳世榮) 같은 작가들이 떠오르네요. 그림 쪽으로 보면 저는 구상보다는 추상, 그리고 설치나 조각 작업을 주로 했기 때문에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화풍에 있어서 제게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에드몽 보두앵(Edmond Baudoin)이나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그래픽노블로 그린 호세 뮈누즈(Jose Munoz)가 있어요. 특히 흑백의 붓터치를 강조한 부분에서요. 그밖에도 조 사코(Joe Sacco)나 타르디(Tardi)도 제게 여러모로 영향을 줬어요.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 많은 편인데, 초기작 중에서 가장 소개하고 싶은 작품을 꼽는다면요. 저는 자전적인 이야기, 일상을 겪으면서 느낀 점들, 또 제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두루 엮습니다.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소재들을 제가 겪은 일들과 연결시키면서 간절하게 와닿는 이야기들을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하죠. 그중 『아버지의 노래(Le Chant De Mon Pere)』(2013)는 한국의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평범한 가족이 경제적 이유 때문에 서울로 이주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았어요. 그 시절 힘들었던 가족사에 당시 한국 사회의 보편적인 모습을 투영했죠. 어린 시절의 추억도 담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판소리를 하셔서 어릴 적 마을에서 누가 돌아가시면 아버지가 상여 소리를 도맡곤 하셨죠. 하지만 서울에 와서는 동네 누가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아버지가 소리를 하실 일도 없었어요. 초기작에서 아버지를 다뤘다면 최근작에서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기다림』(2020)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작품이에요. 20년 전 파리 유학 당시 어머니가 오셨는데, 그때 진중한 이야기를 하셨어요. 어머니의 언니, 제게는 큰이모 되시는 분이 북한에 계시다고요. 외가댁 식구들이 고향인 전남 고흥을 떠나 만주로 가던 길에 평양에 머무른 적이 있는데, 그때 일이 생겨 어머니는 남쪽으로 내려오고 큰이모는 그곳에 남았던 거죠. 어머니가 말씀해 주시기 전까지 그런 가족사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어요. 어머니는 이산가족 상봉 사업이 진행될 때도 우선순위에서 밀려 안타까워하셨어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누군가 해야 하는데 내가 하자 마음먹었고, 어머니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가 됐죠. 그런데 이산가족 문제는 내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도 전쟁을 겪고 있는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인류 보편적인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궁극적으로 전쟁 때문에 약자들이 희생되고 난민이 되어 뿔뿔이 흩어지는 문제를 담고 싶었습니다. 『풀』 역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이 인류 모두의 비극이라는 시각에서 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구상한 시기를 따지고 올라가면, 1990년대 초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게 계기가 됐어요. 이후 프랑스에 가서도 위안부 문제에 관한 통역을 맡은 적이 있어서 자료를 읽으며 더 자세히 알게 됐고요. 그래서 2014년 앙굴렘 국제 만화페스티벌(Festival International de la Bande Dessinée d'Angoulême) 출품작으로 「비밀」이라는 단편을 냈어요. 위안부 피해자의 삶과 고통을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드러내고 싶어서요. 그런데 이 작품은 단편이라 무거운 주제를 다 담지 못해 아쉬웠어요. 그래서 꼬박 3년 동안 매달리며 더 많은 고민을 거쳐 장편으로 만들었어요. 위안부 피해자의 문제를 약자가 당하는 폭력, 그리고 제국주의와 계급적 문제로 접근했죠. 작품에 나오는 이옥선(李玉善) 할머니를 만나고 인터뷰하면서 안타까웠던 게 있어요. 할머니가 전쟁이라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희생자였는데, 전쟁 후에도 침묵하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작품이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풀』만 해도 14개 언어로 번역됐는데 이처럼 여러 문화권에 넓게 파급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제 작품들은 프랑스에서 번역돼 나온 책이 제일 많긴 해요. 『풀』의 경우 일본어판을 낼 때 그곳 분들이 앞장서 크라우드 펀딩으로 출간에 도움을 준 일이 놀라웠어요. 무엇보다 번역가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해요. 제 이야기가 독특하고 또 사람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내용인데 그런 점을 다른 문화권에 전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준 메리 루(Mary Lou), 영어로 번역해 준 미국의 한인 번역가 자넷 홍(Janet Hong), 일본어 번역을 맡은 스미에 스즈키(Sumie Suzuki) – 이런 분들의 도움으로 각 나라 독자들에게 의미가 잘 전달되었어요. 지금 계획하고 있는 다음 작품이 있나요? 키우는 개들을 매일 어김없이 산책시켜 주고 있어요.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강아지와 인간의 관계를 다룬 작품을 구상해 밑그림까지는 그려 놓았어요. 올해 여름 출판될 예정이고, 제목은 『개』로 정했어요. “위안부 피해자의 문제를 약자가 당하는 폭력, 그리고 제국주의와 계급적 문제로 접근했죠.” 1. 김 작가는 요즘 강아지와 인간의 관계를 다룬 작품 『개』를 준비하고 있다. 올 여름 서울에서 마음의숲(maumsup) 출판사에 의해 출간될 예정이며, 내년 초 프랑스 Futuropolis의 출간도 기다리고 있다. 2. 김 작가의 그래픽 노블(왼쪽부터 시계 방향): 2019년 캐나다 Drawn & Quarterly에서 출간된 『풀』 영어판, 지난해 국내 출판사 딸기책방(Ttalgibooks)에서 나온 신작 『기다림』, 지난해 국내 출판사 서해문집이 발간한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올해 5월 프랑스 Futuropolis에서 간행된 『기다림』 불어판, 올해 9월 Drawn and Quarterly가 출판할 예정인 『기다림』 영어판, 2017년 국내 보리 출판사에서 출판된 『풀』, 지난해 일본 Korocolor(ころから)가 발행한 『풀』 일어판, 지난해 브라질 Pipoca & Nanquim가 포르투갈어로 출간한 『풀』. 김태훈(Kim Tae-hun 金兌勳)『주간경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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