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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SUMMER

어둠 속에 함께 빛나는 별들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올해 첫 기획전으로 1930~50년대 활발했던 예술가들을 조명한다.
특히 이 전시는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었던 불행한 시대에 화가와 문인들의 교류가 어떤 예술적 성취를 낳았는지에 초점을 맞춰 큰 화제가 되었다.

1. <인형이 있는 정물>. 구본웅(具本雄 1906~1953). 1937. 캔버스에 유채. 71.4× 89.4 ㎝.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구본웅은 인상파 위주의 아카데미즘이 유행하던 시기에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화면에 그려진프랑스 미술 잡지 『Cahiers d’Art』를 통해 알 수 있듯 구본웅과 그의 지인들은 서구의 새로운 문화 예술 경향을 동시대적으로 향유했다.

1930년대는 일제 식민 통치가 더욱 혹독해진 암흑기였지만, 한편으로는 근대화가 진행되며 한국 사회에 그 어느 때보다 큰 변화가 일어난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경성(일제 강점기의 서울)은 신문물이 다른 지역보다 먼저 유입되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포장된 도로에는 전차와 자동차가 달리고, 화려한 고급 백화점들이들어섰다. 거리에는 새로운 유행을 앞서 받아들여 뾰족구두를 신은 모던 걸과 양복 차림의 모던 보이들이 가득했다.

현실에 대한 절망과 근대의 낭만이 혼재했던 경성은 예술가들의도시이기도 했다. 당시 경성의 예술가들은 너나없이 다방으로 모여들었다. 중심가 골목 곳곳에 즐비한 다방은 단순히 커피만 파는 가게가 아니었다. 예술가들은 이국적 실내 장식과 커피 향기속에 울려 퍼지는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의 노래를 들으며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해 이야기했다.

카루소와 아방가르드 예술
식민지 국민의 가난과 절망이 예술의 혼마저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고난 속에 피어난 창작의열정 뒤에는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갈 방도를 찾았던 예술가들의 우정과 협업이 있었다.이 ‘역설적 낭만’의 시대를 돌아보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때> 전시는 연일 많은 관람객들을 불러 모았다. 근대를 대표하는 50여 명의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이 전시는 제목이 말해주듯 화가와 시인, 소설가들이 장르의 벽을 넘어 서로 어떻게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예술적 이상을 펼쳐냈는지 돌이켜본다.

전시는 4개의 주제로 요약된다. ‘전위와 융합’을 주제로 한 제1 전시실은 시인이며 소설가, 수필가이기도했던 이상(李箱 1910~1937)이 운영한 다방 ‘제비’와 그곳을 사랑했던 예술가들의 관계에 집중한다. 건축을 전공한 이상은 학교 졸업 후 한동안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일하기도했는데, 폐결핵으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고 다방을 차렸다. 단편소설 「날개」와 실험주의적 시 「오감도」 등 강렬한 초현실주의적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을개척한 대표적 작가로 평가받는다.

제비는 희멀건 벽에 이상의 자화상 한 점과 어릴 적부터의 친구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의 그림 몇 점만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별다른 실내 장식도 없는 초라한 공간이었지만 이곳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구본웅을 위시해 이상과 친분이 두터웠던 소설가 박태원(朴泰遠 1910~1986),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김기림(金起林 1908~?) 등이 이곳에 주로 드나들었다. 이들은 이 다방에 모여 앉아 문학과 미술뿐 아니라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최신 경향과 작품에 대해대화를 나누며 영감을 얻었다. 이들에게 제비는 단순한 사교 공간이 아니라 최첨단 사조를 흡수하며 예술적 자양분을 얻었던 창작의 산실이었다. 특히 장 콕토(Jean Cocteau)의 시와르네 클레르(René Clair)의 전위적인 영화는 이들에게 큰 관심사였다. 이상은 장 콕토의 경구들을 다방에 걸어두었으며, 박태원은 파시즘을 풍자하는 르네 클레르의 <최후의억만장자(Le Dernier milliardaire)>(1934)를 패러디해 식민지 현실을 위트 있게 꼬집은 작품 「영화에서 얻은 콩트: 최후의 억만장자」를 쓰기도 했다.

이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서로의 흔적과 친밀했던 관계가 매우 흥미롭다. 구본웅이 그린 <친구의 초상>(1935) 속 삐딱한 인상의 주인공은 이상이다. 둘은 네살의 나이 차이가 났지만, 학창 시절부터 항상 붙어 다니며 죽이 잘 맞았다. 김기림은 구본웅의 파격적인 야수파 화풍에 누구보다 찬사를 보낸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이상이 27살의 젊은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이를 안타까워하며 그의 작품을 모아 『이상 선집』(1949)을 냈는데, 이것이 이상의 첫 작품집이었다. 이상 역시 김기림의 첫 번째 시집『기상도(氣象圖)』(1936)의 장정을 맡았다. 그런가 하면 이상은 박태원의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될 때 삽화도 그렸다. 박태원의 독특한 문체와이상의 초현실적인 삽화는 독창적인 지면을 만들어 내며 큰 인기를 끌었다.

<자화상>. 황술조(黃述祚 1904~1939). 1939. 캔버스에유채. 31.5 × 23 ㎝. 개인 소장.
구본웅과 함께 같은 미술 단체에서 활동했던 황술조는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독특한 화풍을 이루었다. 이 작품은 35세 젊은 나이에 요절하던 해에 그린 것이다.

1920~40년대 인쇄 미술의 성과를 보여주는 제2 전시실. 이 시기 간행되었던 표지가 아름다운 책들을 비롯해 신문사들이 발행했던 각종 잡지와삽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청색지(靑色紙)』 제5집. 1939년 5월 발행. (왼쪽)『청색지(靑色紙)』 제8집. 1940년 2월 발행. ⓒ 아단(雅丹)문고(Adanmungo Foundation)ⓒ 근대서지연구소
1938년 6월창간되어 1940년 2월 통권 8집을 마지막으로 종간된 『청색지』는 구본웅이 발행과 편집을 맡은 예술 종합 잡지이다. 문학을 위주로 연극, 영화, 음악, 미술 분야를망라했으며 당대의 유명 필진들이 참여하여 수준 높은 기사를 제공했다.

시와 그림의 만남
소설에 삽화를 곁들이는 방식은 예술가들에게 한시적으로나마 일정한 수입을 만들어 주었다. 동시에 신문이대중적이면서도 예술적 감각을 보여 주는 매체로 인식되는 데 기여했다.

정갈한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제2 전시실은 1920~40년대 발행된 신문과 잡지, 책을 중심으로 당시 인쇄매체가 이뤄낸 이 같은 성과를 집대성했다. ‘지상(紙上)의 미술관’을 제목으로 한 이 전시는 안석주(安碩柱 1901~1950)를 필두로 대표적인 삽화가 12명의 작품을 곁들인 신문 연재소설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 있도록 구성해 색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당시 신문사들은 잡지도 발간했는데, 이를 통해 시에 삽화를 입힌 ‘화문(畵文)’이라는 장르가 본격등장했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로 시작하는 백석(白石 1912~1996)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정현웅(鄭玄雄1911~1976)이 그림을 그린 1938년도 작품이 대표적이다. 주황색과 흰 여백이 인상적인 이 그림은 백석의 시를 닮아 아련한 정감 속에 묘한 공허감을 자아낸다. 이 작품은 두 사람이같이 만들었던 조선일보사 발행 문예잡지 『여성』에 실렸다.

세련된 언어 감각을 바탕으로 향토색 짙은 서정시들을 발표했던 백석과 삽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화가 정현웅은 신문사동료로 시작한 관계였음에도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현웅은 옆자리에 앉아 일하는 백석을 종종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열심히 일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 얼굴이‘조상(彫像)과 같이 아름답다’는 찬사를 쓴 짧은 글 「미스터 백석」(1939)을 『문장』이라는 잡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들의 우정은 직장을 떠나서도 이어졌다. 1940년 훌쩍 만주로떠나버린 백석은 「북방에서 – 정현웅에게」라는 시를 지어 보냈고, 남북 분단 이후 1950년 월북한 정현웅은 북에서 백석과 다시 만나 그의 시를 꾸려 시집으로 엮어냈다. 그 시집의뒤표지에는 ‘미스터 백석’보다 더 중후한 모습의 백석이 그려져 있다.

식민지 국민의 가난과 절망이 예술의 혼마저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고난 속에 피어난 창작의 열정 뒤에는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며 함께살아갈 방도를 찾았던 예술가들의 우정과 협업이 있었다.

2.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白石 1912~1996), 정현웅(鄭玄雄1911~1976). 아단문고 제공.
시인 백석이 조선일보사가 발행하던 잡지 『여성(女性)』 제3권 제3호(1938년 3월 발행)에 발표한 시에화가 정현웅이 그림을 곁들인 ‘화문(畵文)’이다. 당시에는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룬 화문이라는 장르를 통해 문인과 화가들이 서로 교류하는 일이 잦았다.

3. <시인 구상의 가족>. 이중섭(李仲燮 1916~1956). 1955.종이에 연필, 유채. 32 × 49.5 ㎝. 개인 소장.
한국전쟁 직후 시인 구상의 집에서 기거하던 이중섭이 일본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그리워하며친구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1. 현대문학사에서 1955년 1월 창간한 문학 잡지 『현대문학』의 표지들. 장욱진(張旭鎭 1918~1990), 천경자(千鏡子1924~2015), 김환기(金煥基 1913~1974) 등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그림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화가의 글과그림
‘이인행각(二人行脚)’을 주제로 한 제3 전시실은 1930~50년대로 시대적 배경을 확장해 예술가들의 개인적 관계에 더욱 초점을 맞췄다. 동시대의문인과 화가들은 물론 다음 세대 예술가들과의 인적 관계에서도 중심에 섰던 인물은 김기림이었다. 그는 신문 기자라는 위치를 십분 활용해 많은 예술가들을 발굴하는 데 앞장섰으며,평론을 통해 뛰어난 작품들을 소개했다. 그런 역할을 이어받았던 이로 김광균(金光均 1914~1993)을 들 수 있다. 시인인 동시에 사업가였던 그는 우수한 예술가들을 경제적으로지원했다. 그래서 이 전시실의 여러 작품들이 그의 소장품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곳에서 많은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림은 단연코이중섭(李仲燮 1916~1956)이 그린 <시인 구상의 가족>(1955)일 것이다. 그림 속 이중섭은 구상(具常 1919~2004)의 가족을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다.한국전쟁 중 생활고로 인해 일본의 처가로 떠난 가족과 헤어져 지내던 시기, 이중섭은 작품을 팔아 돈을 벌어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렵게 개최한 전시회가계획했던 대로 돈을 마련하는 데 실패하자 자포자기했고, 당시 그런 심경이 이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일본인 아내가 남편의 소식을 궁금해하며 구상에게 보낸 편지가 나란히전시되어 있어 전쟁이 가져온 가난과 병고 속에서 일찍 세상을 떠난 천재 화가와 그 가족의 사연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화가의 글∙그림’을 보여 주는 마지막전시실에서는 일반적으로 화가로 알려져 있으나 글쓰기에도 남다른 경지에 이르렀던 6명의 예술가를 만날 수 있다. 단순하고 순수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던 장욱진(張旭鎭1918~1990), 평생 산을 사랑했던 박고석(朴古石 1917~2002), 독특한 화풍뿐 아니라 내면에 솔직한 글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천경자(千鏡子 1924~2015)가포함되었다. 그중 전시의 말미에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김환기(金煥基 1913~1974)의 ‘전면점화’ 네 작품이다. 가까이 다가가 수많은 작은 점들이 빼곡히 박힌 소우주를 바라보고있으면 앞서 지나온 문인과 화가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어두운 시대에 별처럼 빛났던 그들을 이제 비로소 한자리에 불러 모은 듯하다.

2. <18-II-72 #221>. 김환기. 1972. 코튼에 유채. 49 × 145 ㎝.ⓒ환기재단․환기미술관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화가 김환기는 여러 잡지에 삽화를 곁들인 수필을 발표했으며, 시인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말년의 김환기를 대표하는서정적인 추상화 ‘전면점화(全面點畵)’는 그가 뉴욕에 머무르던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데, 그 시기 시인 김광섭(金珖燮 1906~1977)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단초가발견된다.

최주현(Choi Ju-hyun 崔珠賢) 『아트인사이트(Artinsight)』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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