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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SUMMER

글로벌 트렌드와 함께하는 대중문화 콘텐츠

최근 몇 년간 여성 서사는 한국 대중문화의 주류 콘텐츠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전면에 부각되었다.
영화는 물론이고 TV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웹툰에서도 여성의 시각과 목소리가 두드러지고 있다.

1. 올해 미국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Youn Yuh-jung 尹汝貞)의 영화 데뷔작 김기영(Kim Ki-young 金綺泳) 감독의 <화녀(Woman of Fire)> 포스터. 그는 이 영화에서 신인 배우답지 않은 격정적이고 농염한 연기를 펼쳐 주목받았다.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Pioneer Pictures Film)
2. 김기영 감독의 <하녀(The Housemaid)>(1960)를 리메이크한 임상수(Im Sang-soo 林常樹) 감독의 <하녀>(2010). 하녀로 잔뼈가 굵은 눈치 빠른 선임 하녀를 연기한 윤여정은 이 영화로 다수의 국내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휩쓸었다.ⓒ 씨네21

3. <돈의 맛(The Taste of Money)>(2012)은 전작 <하녀>에서 가진 자들의 본성을 밑바닥까지 파헤쳤던 임상수 감독이 후속작으로 내놓은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윤여정은 자신의 돈과 권력을 과시하며 젊은 남성의 육체를 탐하는 재벌가 안주인 역할에 도전했다. ⓒ 씨네21

리 아이작 정(Lee Isaac Chung) 감독의 2020년 작 <미나리(Minari)>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쿠키를 굽는 대신 화투를 치고, 프로레슬링 중계를 챙겨 보며, 욕도 잘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남편과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순종적인 모습이야말로 여성의 진정한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할머니는 한국인들이 어머니 혹은 할머니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 이미지와 다소 거리가 있다.

배우 윤여정(Youn Yuh-jung 尹汝貞)이 이 배역으로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전형적이지 않다. 그는 동시대 여배우들이 흔히 그러했듯 비련의 여주인공이나 발랄한 청춘 스타가 아닌 ‘악녀’로 대중과 만났다. 그의 영화 데뷔작은 국내에서 사이코 스릴러 장르를 개척한 김기영(1919~1998 金綺泳) 감독의 <화녀(Woman of Fire)>(1971)로, 자신을 겁탈한 주인집 남자에 대한 집착으로 살인까지 저지르고 파국을 맞이하는 가정부 역할을 맡았다. 이 작품으로 그는 국내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에는 같은 감독의 <충녀(Insect Woman)>(1972)에도 주연 배우로 출연했는데 <화녀>의 속편 격인 이 영화 또한 애증과 질투를 그린 스릴러다. MBC TV 드라마 <장희빈>(1971~1972)에서도 표독스러운 주인공 역할을 맡은 그의 초기 배역들은 하나같이 본연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강렬한 캐릭터였다. 결혼 이후 오랜 공백기를 거쳐 1980년대 후반 활동을 재개한 이후 선택한 작품들에서도 그는 대부분 상식과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파격적인 연기를 보여 줬다.

4. 이재용(E J-yong 李在容)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The Bacchus Lady)>(2016)에서 윤여정은 생존을 위해 노인 남성들을 상대로 몸을 팔며 살아가는 역할을 연기해 주목을 받았다. ⓒ 영화진흥위원회(KOREAN FILM COUNCIL)

상업 영화
2019년 한국 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영상자료원이 개최한 기획 전시 <여성 캐릭터로 보는 한국 영화 100년展>은 ‘나쁜 여자, 이상한 여자, 죽이는 여자’라는 부제를 달았다. 전시 제목을 통해 드러나듯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욕망이나 의지를 드러내는 일은 나쁘거나 이상한 것으로 평가되었고, 영화 속에서 여성은 남성 감독의 시선에 의해 왜곡된 모습으로 그려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점차 높아지면서 영화계에 여성 감독과 프로듀서가 등장하게 되었고,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 내는 여성 서사와 여성 캐릭터들이 점차 늘어났다. 최근 대중문화 콘텐츠의 주류로 떠오른 여성 서사는 상업영화 속에서도 그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조남주(Cho Nam-ju 趙南柱) 작가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김도영(Kim Do-young 金度英) 감독의 <82년생 김지영(Kim Ji-young: Born 1982)>(2019), 전 세계 여러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거머쥐며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김보라(Kim Bo-ra [金宝拉]) 감독의 <벌새(House of Hummingbird)>(2019) 같은 작품들에 이어 김초희(Kim Cho-hee 金初喜)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Lucky Chan-sil)>(2020), 윤단비(Yoon Dan-bi 尹丹菲)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Moving On)>(2020), 홍의정(Hong Eui-jeong 洪義正) 감독의 <소리도 없이(Voice of Silence>(2020) 같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와 관객과 평단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런 상업 영화들을 살펴보면 페미니즘을 전면에 드러내는 작품뿐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 기업의 조직적 비리와 싸우는 여직원들, 범죄와 맞서는 여성 히어로 등 주제와 소재 면에서 여성 서사가 풍부해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코미디, 범죄, 퀴어 로맨스 등 장르적으로도 다양하게 확산되고 있다.

1.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는 한 소년의 추락 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여형사를 통해 과연 이 시대의 참다운 어른은 누구인지 질문을 던지는 TV 드라마이다.ⓒ 스튜디오S

TV 드라마와 웹툰
주목할 점은 이런 경향이 비단 영화만이 아닌 대중문화 전반에서 뚜렷한 흐름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파극에서 가족 드라마, 멜로 드라마를 거쳐 최근 장르물로 옮겨온 드라마 트렌드의 변화는 그 자체로 여성 캐릭터들의 변화 과정을 담고 있다. 신파극이나 가족 드라마 속에서 여성은 주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안에서 이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인물로 그려졌으며, 멜로 드라마에서는 부유한 남성을 만나 신분 상승에 성공하는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가 주로 다뤄졌다.

하지만 드라마의 주력 트렌드로 장르물이 자리를 잡으면서 가족과 결혼에 한정되었던여성 캐릭터들의 다양한 면모가 묘사되고 있다. <하이에나(Hyena)>(2020, SBS TV)의 성공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여성 변호사,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2020, SBS TV)의 권위주의적인 동료 남성 형사들과는 사뭇 다른 강인함으로 수사에 임하는 여형사, <보건교사 안은영(The School Nurse Files)>(2020, Netflix Original Series)의 젤리 괴물들과 싸우는 주체적인 여전사가 그렇다.

그런가 하면 기존 가족 드라마가 그려 내곤 하던 성차별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켜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드라마도 등장했다. <산후조리원(Birthcare Center)>(2020, tvN)은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사회생활과 어떤 갈등 상황을 빚어내는지 탐색한 작품이고, <며느라기(No, Thank You)>(2020, 카카오TV)는 결혼 후 시집 식구들에게서 느끼게 되는 차별을 통해 한국의 가부장제가 야기하는 불행을 섬세하게 포착해 냈다. 이 드라마의 원작은 수신지(Soo Shin Ji) 작가의 인기 웹툰이다.

이처럼 웹툰에서도 서서히 여성 서사가 부상하는 중이다. 최근 가장 대표적인 여성 서사 웹툰으로 <정년이>(2019~2020, 네이버 웹툰)를 꼽을 수 있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당시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단을 새롭게 조명한 이 작품은 성차별과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난다.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대중들의 가치관과 정서를 수용했고, 여성 서사의 봇물도 이 흐름 위에서 탄생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같은 흐름이 세계적인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진화하는 서사
한국은 1970~80년대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하는 ‘가족적이고 국가적인’ 시스템을 통해 압축 성장의 길을 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희생된 많은 가치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1980년대 정치 민주화, 1990년대 경제 민주화로 확장되던 열망이 이제 ‘삶의 민주화’로 발전했다. 이 지점에서 전면에 나타난 것이 바로 성 평등 사회를 요구하는 목소리다.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대중들의 가치관과 정서를 수용했고, 여성 서사의 봇물도 이 흐름 위에서 탄생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같은 흐름이 세계적인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 on Fire)>이 2019년 칸 국제영화제 퀴어종려상(Queer Palm)과 각본상을 비롯해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열린 다수의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휩쓸었던 것처럼 해외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여성 서사가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2. TV 드라마 <하이에나(Hyena)>에서는 부유한 법조계 집안의 엘리트 남성 변호사와 간신히 변호사가 된 후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성 변호사의 치열한 대립이 펼쳐진다.ⓒ 키이스트(KEYEAST)

3. 출산으로 인해 삶의 변환기를 맞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실감 나게 그린 TV 드라마 <산후조리원(Birthcare Center)>은 여성 시청자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었다.ⓒ CJ ENM

정덕현(Jung Duk-hyun 鄭德賢)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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