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2021 WINTER

베일을 벗고 대중에게 공개된 이건희 컬렉션

삼성그룹 고 이건희(Lee Kun-hee 李健煕) 회장 타계 후 그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국보급 문화재들을 비롯해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 근현대 미술 작품들 2만 3천여 점이 사회에 환원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기증받은 작품들 중 일부를 선별하여 일반에 공개했으며, 이 특별전들은 대중적 관심 속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focus1.jpg

<인왕제색도>. 정선(鄭敾 1676~1759). 1751. 종이에 먹. 79.2 × 138 ㎝.비가 그친 후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서울 인왕산의 여름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조선 후기 화가 정선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인왕산 자락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이 산의 모습을 자신감 있는 필치로 담아냈다. 전통적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실제 경치를 직접 보고 그리는 실경 산수의 화풍을 크게 발전시켰던 그의 말기 작품이다.

2020년 10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코마 상태에 빠졌던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대중들은 그가 남긴 소장 미술품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창업주인 그의 부친 이병철(李秉喆) 회장 때부터 시작된 삼성가의 미술품 수집은 유명했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작품들에 더해 이건희 회장 부부가 그 규모를 획기적으로 늘린 컬렉션 중 일부는 그동안 삼성그룹의 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호암미술관이나 리움미술관을 통해 전시된 적이 있었지만, 전체 규모나 세부 목록은 공개된 바 없었기 때문에 늘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들은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이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들보다 문화적 가치가 더 높다고 평가하기도 했으며, 재산적 가치가 수조 원이 넘는다고 추정하는 시각도 있었다. 2021년 4월 삼성가는 이 회장의 개인 소장 문화재와 미술품 2만 3천여 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고미술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국내외 거장들의 미술 작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7월 21일부터 9월 26일까지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 -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 특별전을 개최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또한 7월 21일부터 내년 3월까지 ⟨MMCA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전을 열고 있다.

focus2.jpg

<수월관음도(Water-Moon Avalokitesvara)>(왼쪽). 14세기. 비단에 채색. 83.4 × 35.7 ㎝. ‘수월관음’은 관음보살의 또 다른 이름으로 하늘의 달이 여러 곳의 맑은 물에 비치듯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뜻을 지닌다. 관음보살이 걸친 투명한 옷 아래 비치는 문양과 은은한 색채의 조화에서 고려 불화 특유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천수관음보살도(Thousand-Armed Avalokitesvara)>(오른쪽). 14세기. 비단에 채색. 93.8 × 51.2 ㎝. 천수관음보살은 무수히 많은 손과 눈으로 중생을 구원한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 불교는 천수관음보살 신앙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림으로 전하는 천수관음보살도는 이 작품이 유일하다.
이 그림의 천수관음보살은 11면의 얼굴과 44개의 손을 지닌 모습으로 각각의 손에 좋은 의미를 가진 물건을 들고 있다.

국보급 문화재
이건희 컬렉션은 국가 기증에 앞서 작품의 성격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의 미술관에도 일부 기증되었다. 예를 들어 전라남도 출신의 화가 김환기(1913~1974 金煥基)와 천경자(1924~2015 千鏡子)의 작품들은 전남도립미술관에, 경상북도 대구 출신의 화가 이인성(1912~1950 李仁星)과 서동진(1900~1970 徐東辰)의 작품들은 대구미술관에, 강원도 양구 출신인 박수근(1914~1965 朴壽根)의 작품은 양구 군립 박수근미술관에 각각 수십 점씩 전달되었다.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기증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간 유물들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작품들일 것이다. 국보급 문화재들을 비롯해 한국 미술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선사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토기, 도자기, 조각, 서화, 목가구 등 방대한 유물 2만 1,600여 점이 기증되었다. 이번 전시에는 그중 당대 최고의 미감과 빼어난 기술을 보여 주는 명품 77점이 선별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전시작 중 대표적인 것들로는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정선(1676~1759 鄭敾)이 1751년 그린 <인왕제색도>와 국보급 금동불상들, 그리고 미려(美麗)한 보살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린 고려 불화 <천수관음보살도>를 들 수 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연코 <인왕제색도>이다. 이 작품은 경복궁 좌측에 자리 잡고 있는 인왕산에 비가 내린 직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시기적으로 유럽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는 그랜드 투어가 유행하면서 점차 관심을 끌게 된 풍경화들과 동시대에 제작되었다. 이 그림은 영국의 풍경화가 리차드 윌슨(Richard Wilson)이 1750년 이탈리아를 방문하면서 그렸던 작품들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먹과 유화 물감이라는 재료의 차이가 있지만, 윌슨의 작품이 사실적 색채 묘사에 입각하여 목가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충실하였다면, <인왕제색도>는 붓의 다양한 놀림과 먹의 농담에 의해 생겨나는 미묘한 차이를 이용하여 비가 개인 직후 안개가 걷혀 가는 인왕산의 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했다는 점이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focus5.jpg

<여인들과 항아리>. 김환기(Kim Whanki 金煥基 1913~1974).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281.5 × 567 ㎝. 그림에 등장하는 반라의 여인들과 백자 항아리, 학, 사슴 등은 김환기가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까지 즐겨 다루었던 모티브들이다. 대형 벽화 용도로 제작된 작품으로 파스텔 톤의 색면 배경 위에 양식화된 인물과 사물, 동물 등이 정면 또는 정측면으로 배열되어 고답적인 장식성을 띤다.
© 환기재단·환기미술관(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미술사적 가치
국립현대미술관이 기증받은 이건희 컬렉션은 1,488점이다. 규모에서도 국립현대미술관 역사상 최대 기증이지만, 20세기 초의 희귀하고 중요한 작품들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이곳에서 현재 전시되고 있는 58점의 근현대 미술 작품들은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형성하는 작가들의 대표작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20세기 전반기에 식민 통치와 민족 분단에 이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혼란과 파괴의 시기를 겪었다. 이 때문에 이 시기를 전후로 한 미술품들의 상당수가 파괴되거나 분실되어 미술사 연구의 자료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따라서 고난과 결핍을 이겨내며 어렵게 제작된 작품들 중 적지 않은 수량이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focus3.jpg

<낙원>(오른쪽). 백남순(Baik Nam-soon 白南舜 1904~1994). 1936년경. 캔버스에 유채. 8폭 병풍. 173 × 372 ㎝.도쿄와 파리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한국의 1세대 여류 화가 백남순의 대형 작품으로 서양의 아르카디아와 동양의 무릉도원이 동시에 연상되어 동서양의 이상향이 결합된 듯한 느낌을 준다. 동서양 회화의 소재와 기법을 어떻게 융합하고 변형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긴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화가였던 남편 임용련(任用璉 1901~?)이 한국전쟁 중 실종된 후 1964년 자녀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고, 그 이후의 작품 활동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focus4.jpg

<공기놀이>. 장욱진(Chang Ucchin 張旭鎭 1917~1990). 1938. 캔버스에 유채. 65 × 80.5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장욱진은 집, 나무, 새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소재들을 단순화시켜 동화적으로 표현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 작품은 양정고보 재학 중 조선일보가 주최한 공모전에 출품하여 최고상을 받은 것으로 그의 대표적인 초기작이다. 세밀한 묘사는 생략되었지만 화면 구성이 잘 짜여 있다. 널리 알려진 그의 독특한 화풍이 시작되기 이전의 작품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출품작 가운데에는 백남순(1904~1994 白南舜)의 <낙원>과 장욱진(1917~1990 張旭鎭)의 <공기놀이>, 그리고 김환기의 <산울림> 등이 주목된다. <낙원>은 한국의 전통적 8폭 병풍 형식의 화면에 유화로 그린 작품으로 동서양 미술의 형식적 만남을 보여 주며, 현재까지 발견된 백남순 작가의 거의 유일한 대형 작품이다. 단순하고 천진한 작품을 주로 그렸던 장욱진이 20살에 신문사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상한 <공기놀이>는 작가의 전성기 작품들과 달리 사실주의적인 풍속화 형식의 묘사를 보여 준 귀중한 초기작으로서 주목된다. 1963년부터 1974년 사망할 때까지 뉴욕에서 작업을 한 김환기가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973년에 제작한 점화(點畵) <산울림>은 최근 국내뿐 아니라 뉴욕과 홍콩 등의 경매에서도 수백만 달러의 낙찰가를 기록하면서 주목받고 있는 작가의 전성기 대작 가운데 하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기증받은 이건희 컬렉션은 1,488점이다. 규모에서도 국립현대미술관 역사상 최대 기증이지만, 20세기 초의 희귀하고 중요한 작품들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focus6.jpg

<구성>. 이응노(Lee Ungno 李應魯 1904~1989). 1971. 천에 채색. 230 × 145 ㎝. 이응노는 장르와 소재를 넘나드는 끊임없는 실험으로 한국 미술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작가이다. 1960년대 초부터 제작한 ‘문자 추상’ 시리즈 또한 그의 조형적 실험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이 작품은 서정적 경향이 나타나는 초기작과 달리 문자가 더욱 입체적, 추상적으로 조합되어 있다.

focus7.jpg

<작품>. 유영국(Yoo Young-kuk 劉永國 1916~2002). 1974. 캔버스에 유채. 136 × 136.5 ㎝.유영국은 1960년대 초부터 일관되게 ‘산’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발표했다. 그에게 산은 자연의 신비와 숭고함을 담은 아름다움의 원형이었으며, 동시에 형태와 색감 같은 회화적 요소를 실험하기 위한 매개체였다. 그의 회화적 여정에서 전환점이 되는 시기에 그려진 이 그림은 기존의 절대 추상에서 형태와 색감이 보다 자유로운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전시 관람 열기
이건희 회장의 유족들이 기증한 이번 작품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두 전시에 대한 관람 열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최고 부자가 소유한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에 더하여 최근 국민 소득 증가에 따른 문화 소비의 활성화가 맞물려서 그야말로 예술계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평소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았던 일반 시민들, 특히 젊은 층들이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향했는데 여기에는 평소 전시장을 자주 찾는 것으로 알려진 그룹 BTS의 리더 RM뿐 아니라 젊은 층들에게 인기 있는 유명 연예인들의 행보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양 전시는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하여 사전 예약으로 제한된 인원만 관람이 가능한데, 그 때문에 입장권 예약 경쟁이 뜨거워지고 한때 암표가 등장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미술관 관람 문화는 유럽의 살롱전 형식과 유사한 조선미술전람회가 1922년 창설되면서 일반 관람이 시작되어 이제 겨우 한 세기를 지나고 있다. 그동안 전시 관람은 높은 문화적 소양을 요구하는 특별한 행위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최근 이러한 사회적 인식에 점차 변화가 생겨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전시 관람과 전시장에 인접한 편의시설에서 여가를 즐기는 것을 일상의 중요한 활동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때마침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들이 공개되면서 그 열기가 더욱 확산되어 가고 있다.

focus8.jpg

<노오란 산책길>. 천경자(Chun Kyung-ja 千鏡子 1924~2015). 1983. 종이에 채색. 96.7 × 76 ㎝. 꽃과 여인을 즐겨 그린 천경자는 동양의 전통 안료와 종이의 성질을 이용한 기법을 통해 화면에 몽환적인 느낌을 담아냈다. 자신의 큰며느리를 모델로 한 이 그림 역시 아름다운 색감과 문학적 서정을 토대로 독자적 양식을 완성한 그의 작품 세계를 잘 보여준다.

하계훈(Ha Kye-hoon 河桂勳)미술평론가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