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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WINTER

추억을 떠올리는 맛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맛과 재료가 조금씩 변화해왔지만 떡볶이가 한국인의 소울 푸드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서울 떡볶이 맛집’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이 가게는 시어머니의 손맛을 이어 40년째 수많은 고객에게 정겨운 추억을 만들어주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추억 한 조각에 떡볶이가 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골목에서 풍겨 나오는 맛있는 냄새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오늘날 흔히 먹는 고추장 떡볶이는 마복림(马福林, 1920~2011) 할머니가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전에는 가래떡을 먹기 좋게 적당한 크기로 잘라 여러 가지 채소를 넣고 간장으로 양념해 볶은 음식이었다. 조선 말기 19세기에 편찬된 저자 미상의 조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에 의하면, ‘흰 가래떡과 등심, 참기름, 간장, 파, 버섯 등을 함께 볶아 만든 궁중음식’으로 ‘떡찜’, 또는‘떡잡채’ 라고 했다. 고급 재료들로 만들던 귀한 음식이 어떻게 대중적인 음식으로 바뀌었을까?

한국전쟁 직후였던 1953년, 마 씨는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중국 음식점을 찾았다. 마침 개업 직후여서 주인이 자축하는 떡을 테이블마다 돌렸고, 마 씨는 실수로 짜장면 그릇에 그 떡을 빠뜨렸는데 그게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비싼 춘장 대신 고추장에 떡을 버무려 매콤한 떡볶이를 만들었다. 그는 고추장과 춘장을 섞은 소스로 만든 떡볶이를 파는 가게를 서울 중구 신당동에 열었고, 1970년대에 들어 이것이 전 국민의 간식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이 동네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분식집이 성행했는데, 그 중에는 DJ가 신청곡을 틀어주는 가게도 있었다. 하교 길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떡볶이를 나눠 먹는 것이 그 시절 청소년들의 오락이었다.

한 가족의 생계
김진숙(金眞淑) 씨의 시어머니는 1980년대,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있는 시장에서 떡볶이 장사를 시작했다. 간판도 없는 노점상이었다.

“올해 아흔 두 살이신 어머님은 당시 사십 대 중반이었고, 제 남편은 열한 살이었어요. 주위에 여자고등학교가 세 개나 있어서 학생들이 많았대요. 학교 급식이 없던 시절이라, 점심시간엔 나와서 떡볶이를 먹는 아이들도 많았고요. 그 아이들이 졸업한 후에도 찾아오고, 그래서 늘 손님들이 북적거렸대요. 시댁에 식구가 많았는데, 어머님이 그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셨어요.”

김 씨는 1992년에 시어머니의 넷째 아들인 김완용(金完用) 씨와 결혼했다. 십 년 전 시어머니가 고관절 수술을 받은 후 혼자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온 가족이 시간을 쪼개 짬나는 대로 왔다. 남편도 하던 일을 그만두고 가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김 씨에게 ‘같이 한 번 가볼래?’라며 제안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작은아이가 마침 여름방학이어서 손이 좀 덜 갈 때였다. 그렇게 따라가서 일주일쯤 일을 거들었는데 지켜보던 시어머니가 계속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멋도 모르고 덥석 하겠다고 대답했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2015년, 도시 재개발로 인해 시장이 없어진 후 시장 자리가 있던 곳에 새로 차린 것이 지금의 가게이다. ‘갈현시장 할머니 떡볶이’라는 간판도 그때 처음 달았다.

“그때 어머님은 이미 팔십 살이 넘으셨는데도 할머니라고 불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셨어요.” 김 씨가 웃으며 당시를 돌이켰다. “그때부터 남편이랑 저랑 둘이서 가게를 하게 됐어요. 메뉴는 어머님이 시장에서 팔던 그대로예요. 떡볶이, 순대, 만두 두 종류, 삶은 달걀, 김말이.”

기본적인 조리법은 시어머니의 방식을 이어가지만, 소스의 비율이 조금 달라졌다. 자극적인 맛을 줄이고 지금은 부드러운 맛을 강조한다. 덜 달고 덜 짜고 덜 매운 맛이다. 식재료도 건강과 위생을 고려하여 좋은 것으로 세심하게 골라 쓴다.

남편은 아침 7시에 가게에 나온다. 전날 씻어 둔 조리기구들을 세팅하고 물을 올리고 순대를 찌고 달걀을 삶고 기본적인 준비를 하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

“떡볶이용 밀가루 떡이 뭉쳐 있는데, 하나하나 떼는 게 고된 일이에요. 하나씩 떨어져 있는 떡도 있지만 그런 떡은 맛이 떨어져요. 우리 손이 한 번 더 가면 손님들이 더 맛있는 걸 드실 수 있어요. 떡 한 판에 낱개로 324개 나오는데 하루 열 판 정도 나가요.”

두 시간 동안의 준비가 끝나고 9시가 되면 가게 문을 연다. 김 씨는 10시쯤 가게에 나온다. 부부 사이에 특별한 역할 분담은 없다. 두 사람 모두 조리를 하고 손님을 받는다.“둘 중 한 명이 없어도 장사를 해야 하니까 둘 다 뭐든지 할 줄 알아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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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갈현동에 있는 ‘갈현시장 할머니 떡볶이’주인 김진숙, 김완용 씨 부부는 어머니가 40여 년 전에 시작한 가게를 이어받아 옛 맛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다. 전에는 3명의 직원을 데리고 가게를 운영했으나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작년부터는 시간제 직원 한 명만 두고 부부가 모든 일을 하고 있다.

비법을 지킨다

갈현동 할머니 떡볶이 가게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맛으로 떡볶이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김진숙 씨는 시어머니 진양근씨가 1980년대 가게를 내면서 개발한 소스의 비법을 아직도 소중하게 지키고 있는데, 그 맛이 뛰어나서 동네 손님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종종 있다.


조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벌 끓이기’이다. 손으로 하나씩 떼어놓은 떡은 끓는 물에 넣어 잠시 끓인 다음 조리용 판으로 옮겨진다. 이 과정이 제대로 안 되면 떡이 퍼지거나 질겨진다. 매일 조금씩 다른 떡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해 온도와 시간을 맞추는 것이 관건이다.

“사람들은 농담처럼 ‘회사 때려치우고 떡볶이 장사나 할까’라고 말하지만, 사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장사죠.”

손님이 끊이질 않는 맛있는 떡볶이를 만드는 비법은 소스를 만드는 재료의 비율, 불의 온도, 그리고 조리 시간이다.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비율이 안 맞고 온도와 시간이 안 맞으면 소용없다. 이 과정은 모두 시어머니에게 배운 비법이고 때문에 영업비밀이다. 고춧가루, 고추장, 물엿 등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을 포함하여 열 가지 남짓한 재료가 소스에 들어간다. 이렇게 만든 떡볶이는 1인분에 3,500원이다. 지난 4월, 3,000원 하던 가격을 500원 올렸다.

“해마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그게 반영돼 모든 식자재값이 오르기 때문에 가격을 안 올릴 수가 없어요. 하지만 떡볶이는 한끼 식사가 아니라 간식으로 먹는 음식이라 값을 올리기 쉽지 않아요. 계속 고민하다가 6년 반 만에 500원을 올렸어요.”

1인분의 양은 ‘고무줄’이라고 김 씨는 말한다. 보통 17~18개의 떡에 어묵을 섞어 1인분으로 담지만 학생이나 노동자에게는 늘 덤을 얹어 주기 때문이다.

열 평이 채 못 되는 가게의 테이블은 요즘 모두 한쪽으로 치워져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홀 손님을 받지 않은 지 일 년이 지났다. 가게 한 구석에 작은 전기밥통과 인덕션이 있는데 부부가 짬을 내어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는 곳이다. 늦은 오후에 군것질로 대충 허기를 채우고 저녁 8시에 문을 닫는다. 정리와 청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밤 10시.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부부의 하루 일과이다.

“일주일에 하루, 월요일에 쉬어요. 이 가게를 연 이후 그 밖에 쉰 날이 딱 사흘인데 제가 수술받은 다음날, 아들 입대한 날, 그리고 퇴소한 날이었어요. 가끔 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손님들과의 약속이니까요. 이 지역에 사는 손님만 오는 게 아니라 전국 팔도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는데, 헛걸음하면 미안하잖아요. 쉬는 날에도 다른 거 없어요. 밀린 집안 일하고, 손목터널증후군 고치러 병원에 가요. 직업병이죠.”

손님이 끊이질 않는 맛있는 떡볶이를 만드는 비법은 소스를 만드는 재료의 비율, 불의 온도, 그리고 시간이다.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비율이 안 맞고 온도와 시간이 안 맞으면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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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을 초월한 많은 한국 사람들의 소울푸드인 떡볶이는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흰떡을 여러 가지 야채, 어묵과 함께 고추장 소스에 넣고 뭉근하게 끓여 만든다. 국물 떡볶이, 즉석 떡볶이, 간장 떡볶이, 로제 떡볶이 등 다양한 종류의 떡볶이가 있는데 그 중 국물이 자작한 국물 떡볶이가 가장 대중적이다.

최선을 다하는 하루하루
시어머니를 도와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김 씨는 호된 경험을 했다.

“제대로 된 포장용기가 없어서 비닐 봉지를 사용하던 시절이었어요. 떡볶이를 포장해간 손님이 조금 있다가 다시 왔어요. 국물이 새서 청바지에 묻었다면서 떡볶이가 든 봉지를 그대로 던졌어요. 놀라고 당황해서 덜덜 떨었어요.”

이처럼 가끔 부부를 힘들게 한 손님들이 있었다. 달걀 하나를 빠뜨렸다고 전화로 삼십 분 동안 항의한 손님도 있었다. 알아보니 다른 손님과 봉지가 바뀌었던 것인데 값을 물어주겠다고 해도 계속 화를 냈다. 자신이 원하는 만두가 아닌 다른 만두를 줬다고 접시를 던진 손님도 있었다. 가게에 와 있던 친척이 말리다가 싸움이 붙어 경찰까지 오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일을 겪고 부부는 ‘손님이 뭐라고 하면 무조건 인정하자’고 다짐했다.

물론 대부분의 손님들은 따뜻하고 다정하다. 더운 날 마시고 일하라며 음료를 사오기도 하고, 텃밭에서 딴 채소를 가져오는 이들도 있다.

“어머님을 기억하는 분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도 하고, 초등학교 동창회하고 다같이 오시기도 해요. 그분들은 떡볶이가 아니라 추억을 먹으러 오는 거죠. 이런 손님들을 보며 따뜻한 마음과 베푸는 방법을 배워요. 이런 게 세상 사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김 씨는 언젠가 이 가게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쉽다. 앞으로 십 년만 더 하고 가게를 접을 계획이기 때문이다. 서운하긴 하지만, 이 힘든 일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도 않다. 아이들이 직장에도 다녀보고 원하는 것을 다 해보고도 떡볶이 장사를 하고 싶어 한다면 몰라도.

새벽부터 재료 하나하나를 정성껏 준비하여 뜨거운 불판 위에서 조리하고, 먼 길을 찾아온 손님에게 푸짐하게 담아주는 떡볶이는 허기뿐만 아니라 추억을 채워주고 마음을 데워주는 음식 이상의 무엇이다. 김 씨 부부는 그 옛날,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팔았던 추억의 맛을 이어가기 위해 고단하지만 날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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