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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SPRING

마음을 안아주는 편의점

유동인구가 많은 도시의 여느 편의점과 달리 훤히 트인 논밭을 끼고 들어선 고층 아파트 동네 앞 편의점. 7년간 이곳을 지키는 마음씨 따뜻한 주인은 자신의 가게가 이웃 사람들의 포근한 사랑방이자, 다친 마음을 위로하는 든든한 쉼터가 되기를 바란다.

경기도 안성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이정심 씨의 일과 중 중요한 부분이 하루 두 번, 주문한 제품이 잘 배송되었는지 확인하고 진열하는 일이다. 인근에 경쟁 편의점이 생기거나 코로나 19의 타격으로 고객들의 발길이 줄어도 그는 항상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자신의 가게가 동네 주민들의 쉼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아직 들판에 봄기운이 돌기 전, 경기도안성시청을 지나 왕복 이차선 도로로 들어서니 양옆으로 펼쳐 진 논에 밑동만 남은 벼 포기들이 줄지어 있다. 저수지를 지나 토현리 마을로 들어섰다. 들판에 비닐하우스, 농기계수리소, 축사, 작은 공장들이 듬성듬성 눈에 띈다.

여기부터 목적지까지는 2Km, 하지만 약속시간은 50분이나 남았다. 날씨가 쌀쌀하니 뜨거운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가도 가도 카페는커녕 구멍가게도 보이지 않는다. 민가도 없이 논만 펼쳐진 벌판 저 멀리 아파트 몇 동이 우뚝 서있다. 저기다! 속도를 높인다. 도시에서는 익숙하지만 이곳에선 낯설어 보이는 편의점이 거기 있었다. 반갑다.


 

이정심 씨는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단순한 계약직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정직원으로 대우한다. 덕분에 직원들은 주인 의식을 가지고 꼼꼼하게 매장을 관리하고, 친절하게 손님을 응대한다.

한결 같은 마음
‘딸랑’– 출입문을 밀자 종소리가 울린다. “어서 오세요!” 종소리보다 맑은 목소리가 나를 반긴다. 조금은 삭막해 보였던 겨울날 들판에 서 있다가 갑자기 고급호텔에 들어선 듯하다. 귤빛 조명이 은은하게 공간을 채우고 눈앞엔 정갈하게 정돈된 와인진열대가 있다.

따끈한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고 커다란 통유리 창을 마주한 시식대에 앉는다. 한적한 논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커피 때문일까? 봄을 기다리는 들판은 더 이상 휑하거나 추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난 해의 고된 노고를 위로하듯 평온하다.

이곳은 ‘이마트24 R안성유안점’이다. 시골동네 편의점이라면 먼지 앉은 상품이 듬성듬성 놓여 있는 초라한 진열대가 떠오르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곳은 뭔가 많이 다르다. 갖가지 일상에 필요한 상품들이 빠짐없이 빼곡하게 차있다. 과자, 즉석식품, 음료, 와인은 물론, 푸짐한 반찬을 갖춘 도시락뿐 아니라 신선식품을 비롯해 한 끼 밥상을 차리는데 부족함 없는 찬거리까지 풍성하다. 거기다 귀이개, 손톱깎이와 같은 자잘한 생활용품에 반려동물의 간식까지, 대형마트의 상품들을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동네 주민들이 시내 마트까지 차를 타고 물건을 사러 나갈 필요가 전혀 없어 보인다.

“저는 무엇이든 꽉꽉 채우는 성격이에요.”이 곳의 경영주 이정심(李貞心) 씨는 말한다.

“이웃들이 차를 몰고 멀리 나가지 않아도 집 가까이에서 편하고 빠르게 일상 용품을 살 수 있기를 바라요. 그래서 가능한 한 본사에서 취급하는 상품들을 종류 별로 빠짐없이 발주해요. 작은 편의점이지만 동네 이웃들에게 확실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이윤을 쫓기보다는 우선 편의를 제공하고 싶어요.”

1969년 경남 남해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정심 씨는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언니가 살던 수원으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우연하게도 첫 직장은 체인점을 거느린 중소규모 마트의 캐셔였다. 22살 이른 나이에 결혼해 1남 2녀를 둔 정심 씨는 2002년 가계에 도움이 되고자 교보생명에 보험설계사로 입사했다. 17년 공을 들여 영업소장까지 했고, 전국 1300여 영업소 가운데 100위 안에 들어 상도 받았다.

“애들 키우며 주부로 살 때는 몰랐는데, 일을 하다 보니 저에게 고객을 대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보험 일을 처음 시작할 땐 두려웠지만, 차츰 남들만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업소장을 할 때도 뒤처지지 않았어요. 무조건 진실하고 한결같이 사람을 대했죠. 늘 고객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어요. 그게 편의점을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보험 고객을 찾아다니던 정심 씨는 이제 스스로 찾아오는 고객을 맞이한다. 그는 지금도 예전의 마음가짐 그대로 껌 한 통을 사러 들어온 손님에게도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넨다. 말 한마디에 정성을 담고, 사소한 것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는 마음 씀씀이로 이웃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진심과 배려
2016년 홈플러스가 운영하던 할인마트 겸 편의점 체인 ‘365플러스’를 인수한 것이 시작이었다. 오랜 보험업무로 몸과 마음이 방전됐을 즈음이었다. 지금의 절반 크기도 되지 않았던 매장의 원래 주인은 보험 고객 중 한 명이었는데, 정심 씨는 신기하게 처음부터 이 곳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운영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정심 씨가 인수하자 이전보다 매출이 오르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고된 나날이었지만 고객들을 만나면 힘이 생겼다. 그 기운이 삶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정심 씨의 매장이 활기를 띠어서인지 브랜드 이미지가 높은 편의점이 인근에 들어선 것이다. 고객이 드나들 때마다 울리던 종소리 간격이 갈수록 뜸해졌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좌절하지 않고 열과 성을 다했다. 그의 진심이 통했는지 멀어졌던 이웃들의 발길이 다시 정심 씨의 마트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새로 연 편의점이 브랜드 인지도가 높고, 물품도 다르니까 제가 고객에게 드릴 수 있는 것들의 한계가 있었죠. 저는 그저 하던 대로 열심히 하며 고객을 기다렸어요. 6개월쯤 지나니 대부분 다시 찾아오시더라고요.”

2021년, 홈플러스가 편의점 사업을 접자 정심 씨는 브랜드를 바꿔 이마트24 매장을 열었다. 마트와 나란히 있던 식당 자리까지 인수해 공간을 두 배 이상 넓혔다. 임대료도 그만큼 늘어났다. 농촌이라 고객은 한정되어 있다. 매출만 생각한다면 굳이 공간을 늘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정심 씨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했다.

“매장이 작아서 아쉬웠던 게 있었어요. 손님들이 도시락을 사서는, 실내에 자리가 없으니 바깥에서 먹게 되는 거예요. 그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쾌적한, 겨울에는 따뜻하고 아늑한 실내에 앉아서 드시게 하고 싶었죠. 매장이 두 배가 됐다고 매출이 두 배가 되는 게 아니었지만, 그게 제 꿈이었어요.”

아늑한 조명 아래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실내에 대형 통유리로 시야가 확 트인 시식대는 휴양지의 전망 좋은 카페와 다르지 않다. 커피전문점에서나 볼 수 있는 커피머신이 눈길을 끈다. 컵을 올리고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커피가 내려지는 일반 편의점 기계와는 많이 다르다.

“제가 만든 라떼 한 잔 드릴까요?”

정심 씨가 커피 머신 앞에 선다.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린다. 순간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김이 퍼진다. 밀크 스티밍이다. 하트가 그려진 찰진 라떼의 거품이 입술을 감싼다.

정심 씨는 1급 바리스타 자격증도 땄다.

“스티밍을 하고 안 하고는 거품의 탄력이 달라요. 같은 가격이라도 좀 더 좋은 커피를 손님에게 서비스하고 싶어 열심히 배웠죠.”

정심 씨가 간절히 원하던 테이블을 마련한 뒤, 손님들은 이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며 음식을 먹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최근엔 코로나 19 때문에 취식이 제한되어 그를 안타깝게 한다.

카페 같은 편의점
이쯤 되면 정심 씨의 매장을 단순히 편의점이라 부를 수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작 그가 아끼는 보물은 따로 있다. 매장을 지키는 사람이다.

편의점 알바 구직 앱에 들어가면 주당 15시간 이내의 단기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주휴수당과 같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자영업자들의 고육지책이다. 하지만 정심 씨는 다른 길을 택했다. 비록 자그마한 편의점이지만 일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소중한 일터라 생각할 수 있도록 정직원 대우를 한다. 주휴수당, 4대 보험은 물론 명절마다 약소하지만 상여금을 주고, 근속에 따른 수당도 있다. 일터에 대한 자부심을 지닌 직원들은 경영주처럼 매장을 관리한다. 언제 오더라도 알바생이 아닌 경영주가 직접 고객을 맞이하는 셈이다.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니, 찾아오는 손님도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매장을 나선다. 매출이 오르는 비결이다.

때론 고객도 기꺼이 가게 일을 돕는다. 한 번은 편의점을 자주 찾던 손님의 얼굴이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기에 정심 씨가 “사는 게 힘드시죠?” 하고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손님이 자신의 어려움을 한없이 풀어놨다. 보증 때문에 어려움에 처했고, 이로 인해 가족들과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정심 씨는 자기 일처럼 공감하고 위로했다. 그 뒤로 손님은 물류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찾아와 말없이 일을 돕고 간다.

밭농사를 짓는 이웃은 채소를, 과수원을 하는 손님은 배를 한 소쿠리 들고 찾아온다. 이런 물건들은 직원들에게 나누어진다. 넉넉한 시골 인심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래서 정심 씨의 편의점은 동네 사랑방이자 마을 정자와 같은 곳이다. 몸이 불편한 남편을 시중하는 할머니, 아픈 아이를 돌보는 젊은 엄마, 거름을 내다가 온 농부, 기름때 절은 작업복의 이주노동자. ‘딸랑’하는 종소리와 함께 이들이 들어설 때, 정심 씨는 언니이자 누님이고, 딸이자 벗이 된다. 때론 아이들의 고모이자 큰엄마가 되어 한 가족으로 어우러진다.

돌아오는 길, 정심 씨의 마음이 담긴 라떼가 오래도록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오도엽(Oh Doye-ob 吳途燁) 시인
하지권(Ha Ji-kwon 河志權)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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