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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AUTUMN

귀로 듣는 즐거움

배우들의 목소리를 통해 희곡이 지닌 문학성을 전달하는 낭독극이 공연계에서 활성화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음악이나 영상을 접목한 새로운 실험도 나타난다. 기존 연극과는 사뭇 다른 매력을 지닌 낭독극이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정착하며, 공연 예술의 저변을 넓히는 중이다.

2020년 10월 남산예술센터에서 극단 풍경의 배우들이 중국 극작가 쉬잉(徐瑛)의 「로비스트(說客)」를 낭독하는 모습이다. 한중연극교류협회(Performing Arts Network of Korea and China)가 주최하는 제3회 <중국 희곡 낭독 공연>의 프로그램 중 하나다.
한중연극교류협회 제공



문학의 한 장르인 희곡은 연극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 배우가 관객들에게 대본을 읽어 주는 낭독극이 확산되고 있다. 일반적인 연극 공연과 달리 세트나 조명, 음향, 의상 등은 최소화하거나 생략한 채 오로지 텍스트에만 집중하는 방식이다. 낭독극은 1945년 창단한 뉴욕의 리더스 시어터 컴퍼니(The Readers Theater Company)가 처음 시도한 이후 점차 널리 퍼진 것으로 알려졌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나라에도 낭독극의 원형이라 할 만한 형태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시대(1392~1910) 후기에 활동했던 전기수(傳奇叟)는 소설을 직업적으로 읽어 주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당시 인기가 있었던 고전 소설들을 실감 나게 읽어 주면서 돈을 벌었다. 이들의 탁월한 입담과 뛰어난 연기력은 관객들에게 상당한 재미를 안겨 주었다고 전해진다. 근래에 오디오북이 보편화되는 추세인데, 전기수는 시대를 한참 앞서갔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낭독극은 본래 연극화 이전 단계에서 제작에 참여할 후원자를 찾고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한 홍보 목적으로 꾸려졌다. 그러다가 2000년대 초반부터 쇼케이스 성격의 무대 리딩(stage reading)을 넘어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공연들이 선보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어엿한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전문 극단뿐 아니라 희곡 읽기를 즐기는 동호인들이 모여 공연을 열기도 하고, 학생들의 사고력과 감성을 키우기 위해 교육 현장에서도 낭독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추세다.


낭독극을 통한 국제 교류

낭독극이 지금처럼 활성화되기까지 여러 기관과 단체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일연극교류협의회(KJTEC, Korea-Japan Theatre Exchange Concil)와 일한연극교류센터(Japan-Korea Theatre Communications Center 日韓演劇交流センター)의 낭독 공연 사업은 그 의미가 자못 깊다. 두 단체는 20년 동안 서로 상대국의 현대 희곡을 번역하여 정기적으로 공연을 올려 왔다.

일본 내 7개 연극 단체가 공동으로 발족시킨 일한연극교류센터는 일본 문화청의 지원을 받아 2002년부터 우리나라의 현대 희곡을 자국 관객들에게 소개했다. 첫해에는 김광림(金光林)의 「사랑을 찾아서」, 박근형(朴根亨)의 「대대손손」, 장진(張鎭)의 「허탕」, 조광화(趙光華)의 「미친 키스」 등 국내 대표적 극작가들의 작품이 도쿄 스기나미(Suginami 杉並区)에 있는 대학생협회관 지하 공연장(大学生協会館ヴァーシティホール)에서 사흘 동안 상연되었다. 이듬해에는 이에 대한 화답으로 한일연극교류협의회가 일본 현대 희곡 세 편을 국립극장 별오름극장 무대에 올렸다. 올해 2월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白星姬張民虎劇場)에서 열린 열 번째 공연까지 합산하면 지금까지 양국에서 각각 50명의 극작가와 50편의 희곡이 소개됐다.

이 프로젝트는 초기에는 연극적 요소를 배제하고 희곡 읽기에만 집중한 낭독회 형식으로 진행됐지만, 희곡의 글맛과 묘미를 한층 더 살리기 위해 차츰 연극적 표현을 가미하기 시작했다. 특히 올해 공연은 낭독극 본연의 단순한 읽기 방식에서 탈피해 보다 연극에 가까워진 형태를 보여 줬다.

낭독 공연에서 소개한 작품이 본 공연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다수다. 대표적으로 일한연극교류센터가 2019년 소개한 이보람(李宝藍)의 <소년B가 사는 집(少年Bが住む家)>은 살인죄를 저지른 열네 살 소년과 그 가족이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모습을 그린 이야기인데, 2020년 마나베 다카시(Takashi Manabe 眞鍋卓嗣)가 연출해 정식 공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 연극은 그해에 일본 문화청예술제상 연극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 희곡을 무대화한 작품이 일본에서 권위 있는 연극상을 받은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됐다. 국내에서는 학교 폭력 문제를 다룬 하타사와 세이고(Seigo Hatasawa 畑澤聖悟)의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親の顔が見たい)」를 비롯해 청춘들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린 마에다 시로(Shiro Maeda 前田司郎)의 「위대한 생활의 모험」 등이 연극으로 만들어져 호평을 받았다.

낭독 공연 <떠돌이 개 두 마리(兩只狗的生活意見)>의 한 장면. 중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멍징후이(孟京輝)의 이 희곡은 개들의 시선을 통해 다양한 인간 군상과 복잡한 인간 사회를 풍자한다.
한중연극교류협회 제공

공감 가능한 스토리

한중연극교류협회(Performing Arts Network of Korea and China)가 주최하는 <중국 희곡 낭독 공연>도 주목할 만하다. 이 협회는 한국과 중국, 대만, 홍콩 등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나라들의 문화적 교류를 위해 2018년부터 해마다 중국 희곡을 번역 출판하는 한편 그중 엄선한 작품으로 낭독 공연을 개최하고 있다. 올해 4월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진행된 다섯 번째 공연은 사전 예약 티켓이 금세 매진됐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이는 그만큼 중국 희곡에 대한 국내 관객들의 관심이 높아졌다는 방증일 수 있다.

이 공연을 통해 그동안 수십 편의 중국 전통 희곡과 현대 희곡이 소개됐는데, 그중 「물고기 인간(魚人)」, 「낙타상자(駱駝祥子)」,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一句頂一萬句)」 등이 이후 연극 무대로 옮겨져 성공했다. 「물고기 인간」은 현재 중국 연극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인 궈스싱(過士行)의 1989년 데뷔작으로 중국인들의 대표적 취미인 낚시를 소재로 삼아 진정한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 묻는다. 「낙타상자」는 중국의 소설가 라오서(Lao She 老舍)가 1937년 발표한 동명의 장편 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Rickshaw Boy』라는 제목으로 서구에서도 출판된 바 있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력거꾼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는 중국 신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류전윈(劉震雲)의 동명 장편 소설을 중국 실험극의 선구자라 불리는 연출가 머우썬(牟森)이 2018년 재해석한 작품이다.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다양한 직업과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휴먼 드라마다.

이 프로그램이 첫발을 내딛을 때만 하더라도 국내 관객들에게 중국 희곡은 매우 생소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기대감이 높아지는 중이다. 삶의 본질을 궤뚫는 통찰력과 따뜻한 시선이 배우들의 목소리를 타고 전해져 깊은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2022년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된 낭독극 <찻집(茶館)>의 한 장면. 중국 근대기, 베이징의 한 찻집을 무대로 민초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펼쳐지는 원작을 국내 스타 연출가 고선웅(Koh Sun-woong 高宣雄)이 무대에 올렸다.
한중연극교류협회 제공

극작가 위룽진(喩榮軍)의 「손님(家客)」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면서도 위트 있게 던진 화제작이다. 2020년 남산예술센터에서 극단 죽죽(竹竹)의 배우들이 원작의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전달했다.
한중연극교류협회 제공

새로운 시도와 변화

요즘 낭독극은 연출가의 시선이 더해지고 배우들의 감정 연기가 적극적인 형태로 변모하는 중이다. 이른바 ‘입체 낭독극’이라 불리는 이러한 경향은 음악, 무대 미술, 조명, 의상 같은 연극적 표현 요소들을 두루 활용한다. 때로는 영상이나 연주를 결합하기도 하는데, 이는 희곡의 서사를 보다 풍부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기존 낭독극이 오롯이 텍스트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입체 낭독극은 연출가의 해석을 바탕으로 일정 부분 극의 형식을 갖춘다.

지난해부터 국립극단이 진행하는 ‘창작 공감: 희곡’은 한국 연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희곡 발굴 사업이다. 투고작 중 선정한 작품들의 정식 공연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입체 낭독극 형식을 활용한다. 올해 2월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소극장 판(The Theater PAN)에서 관객들과 만난 < 금붕어 휠체어 > 는 SNS를 도용 당한 인물과 도용한 인물의 자아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이 공연은 독특한 무대 연출이 돋보였는데, 특히 양쪽 벽면에 영상을 비춰 두 인물의 SNS 이미지를 관객들이 직접 볼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장치는 관객들이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젊은 예술가들의 실험적 작품을 지원해 온 두산아트랩(DOOSAN ART LAB)이 지난 3월 두산아트센터 무대에 올린 < 유디트의 팔뚝 > 도 음악 낭독극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극은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의 <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 > 를 모티브로 삼아,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성의 팔뚝이 왜 굵은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 공연이 흥미로운 것은 17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삼은 이야기에 한국 전통 음악을 접목시켰다는 점이다. 창작자들은 당시 시대상과 여성 화가의 삶을 가야금 연주와 노래로 풀어냈다.

이처럼 낭독극은 다양한 시도를 통해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낭독극이 활성화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정식 연극과 달리 배우들이 대본을 완벽히 외울 필요가 없다. 무대 장치를 간소화할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도 공연을 올릴 수 있다. 관객 입장에서는 시각적 자극이 줄어든 만큼 배우들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무대 예술의 완결성을 위해 충분히 갖추어야 할 다양한 연극적 표현이 배제되는 데 우려를 표하기도 하지만, 관객들에게 연극과는 다른 매력과 몰입감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낭독극이 공연 예술의 저변을 확대하고 다양화하는 데 일조하는 것은 분명하다.

두산아트센터의 창작자 지원 프로그램인 두산아트랩(DOOSAN ART LAB)을 통해 올해 3월 공연된 < 유디트의 팔뚝 > . 가야금 연주를 접목해 화제를 일으킨 공연이다. 이처럼 낭독극은 새로운 시도로 공연 예술의 저변을 확대하는 중이다.
ⓒ 두산아트센터



김건표(Kim Geon-pyo 金建杓)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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