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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WINTER

오래된 미래를 꿈꾸다

전통 신은 수십 번의 제작 공정을 거쳐 완성될 만큼 정밀한 기술력과 숙련된 솜씨가 필요하다. 신분과 성별, 나이에 따라 종류가 다르고 부르는 명칭도 제각각인데, 신는 사람의 발 모양에 맞춰 형태가 완성되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황덕성(Hwang Duck-sung 黃德成) 씨는 화혜장(靴鞋匠)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6대째 전통 신을 만든다.

대대로 전통 신을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난 황덕성 씨는 화혜장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6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한국 전통 신의 아름다움은 곡선미에 있다. 한옥 기와지붕의 처마가 그러하듯 직선으로 힘 있게 내려가다가 살짝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코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특유의 곡선미는 버선과 함께 신을 때 배가된다. 버선의 날렵한 앞 끝이 신의 맵시를 살려준다. 좌우 구분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 신다 보면 발 모양에 맞게 형태가 잡히고, 왼쪽과 오른쪽이 자연스럽게 구별되면서 발도 편해진다.
전통 신을 ‘화혜(靴鞋)’라고 한다. 목이 있으면 ‘화(靴)’, 목이 없으면 ‘혜(鞋)’이다. 이를 만드는 장인을 화혜장이라 하는데, 가죽을 다룬다고 하여 갖바치라고도 불렀다. 조선 시대(1392~1910)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TV 드라마에는 갖바치가 곧잘 등장한다. 조선 시대 통치의 근간이 된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1485)에 의하면 당시 중앙 관청에만 화혜장 수십 명이 소속돼 활동했다고 한다. 그만큼 수요가 많았으며, 그 기능도 분화돼 있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쓴 『미암일기(眉巖日記)』에 보면 과거에는 관혼상제 같은 의식은 물론이고 신분에 따라서도 소재, 모양, 색상 등을 구별해 신었다. 연령에 따라 색상과 배색에 차이를 두기도 했다. 재료는 가죽 외에도 비단, 삼베, 모시, 종이, 나무, 짚풀 등 다양하다. 오늘날 화혜는 혼례나 제례 등 특별한 날에 격식을 갖추기 위한 용도로 쓰인다.


선택이 아닌 운명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생활고로 배달 일을 병행하셨어요. 일반 수요가 거의 없으니 화혜만으로 밥벌이가 안 되니까요. 그게 싫어서 학교 졸업 후 잠깐 회사에 다니기도 했는데, 적성이 아니더라고요. 마침 그때 아버지가 오래 염원하던 복원 작업에 성공하셨어요. 그 과정을 지켜보며, 세상에서 잊힐 뻔했던 것을 되살려 내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깨달았죠. 가업이 운명임을 받아들인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황덕성 씨는 태어날 때부터 예고된 장인이었다. 그의 집안은 갖바치 명가로, 예부터 왕실 장인들이 모여 살던 서울 인사동 토박이들이다. 화장과 혜장이 국가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채택되고 나서 1971년 첫 번째 화장으로 인정받은 이는 증조할아버지 황한갑(黃韓甲)이었다. 이후 2004년 아버지 황해봉(Hwang Hae-bong, 黃海逢)이 화혜장으로 통합된 국가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의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현조(玄祖)할아버지 황종수(黃種秀)가 철종(재위 1849~1863) 때 궁궐에 가죽신을 납품한 것이 시작이고, 그가 2016년 이수자가 되면서 6대째 대를 잇고 있다.
“증조할아버지의 할아버지부터 왕실에 신을 만들어 올렸어요. 증조할아버지는 조선 마지막 왕실의 화장으로, 고종 황제의 적석(赤舃)을 만드셨죠. 애석하게도 기록만 있지 실물은 남아 있지 않아요. 증조할아버지가 1982년에 돌아가셨는데, 당시 아버지가 서른 살이고 제가 세 살 때였죠. 할아버지가 그보다 두 해 전 앞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맥이 끊길 뻔했지만, 다행히도 이후에 아버지께서 적석과 청석(靑舃)을 복원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대를 잇게 됐습니다.”
그가 진열장 맨 위에 있는 상자를 꺼내 보여 준다. 왕과 왕비가 신는 ‘석(舃)’이다. 붉은색 신은 왕실 의례 때 왕이나 왕세자가 제복 차림에 신었고, 푸른색 신은 왕비나 왕세자빈이 예복과 함께 신었던 것으로, 복원 전까지 옛 문헌에 기록으로만 남아 있었다. 이를 그의 아버지가 관련 학자들의 고증을 토대로 재현해 낸 것이다.

신발 제작의 첫 번째 단계인 백비를 만들기 위해 황덕성 씨가 작업대 위에 광목을 올려놓고 재단하는 모습이다. 전통 신은 숙련된 장인의 손에서 70개가 넘는 공정을 거친 후 완성된다.

사람에게 맞추는 신발
보통 ‘꽃신’이라 부르는 ‘혜’ 한 켤레를 만드는 데 종류에 따라 4일에서 10일 정도 걸린다. 숙련된 장인의 손에서 70개가 넘는 공정을 거쳐야 완성되기 때문이다. 우선 신발의 옆면인 신울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백비가 필요하다. 신울의 안쪽에 대는 백비는 모든 신발 제작의 첫 번째 단계이다. 쌀로 풀을 쑤어 광목에 삼베와 모시를 여러 겹으로 붙인 다음 며칠 동안 바람에 잘 말린다. 여기에 재단한 비단을 으깬 밥풀로 붙이면 신울이 완성된다. 밥풀칠을 할 때는 중간에 굳지 않도록 물 적신 수건을 넣은 항아리에 신울을 넣었다가 꺼내 작업하기를 반복한다. 매 단계마다 숙달된 기술뿐만 아니라 최적의 상태가 되도록 기다리는 것 또한 중요하다.
다음에는 밀랍으로 칠한 면사와 돼지털로 신울 두 짝을 연결한다. 이때 뒤꿈치를 먼저, 앞코 부분을 나중에 꿰맨다. 이어서 소가죽으로 밑창을 만들고, 신울과 밑창을 맞바느질하여 연결한 다음 마지막으로 나무로 된 신골을 넣어서 신발 형태를 잡아 준다.
“비단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전통 방식대로 멧돼지 뒷덜미 갈기를 바늘로 사용합니다. 나이 든 멧돼지는 갈기가 빳빳하면서도 잘 휘어지기 때문에 가죽과 비단을 꿰매기에 딱 좋습니다. 백비에 비단을 붙일 때는 밥풀을 손으로 이겨서 사용하고요. 밥풀이 굳으면 돌처럼 딱딱해져 신의 형태를 유지해 줍니다.”
만드는 사람으로서 어떤 부분에서 혜의 묘미를 느끼느냐 묻자, 곡선을 그리며 날렵하게 올라간 신발 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코의 곡선은 걸을 때 평평한 신발이 벗겨지지 않게 하는 기능적인 측면도 있다.
“왼쪽과 오른쪽의 구별이 없다고 하지만, 조금 신다 보면 형태가 만들어지면서 저절로 구분이 됩니다. 우리 전통 신은 사람이 신에 맞추는 게 아니라 신이 발 모양에 맞게 서서히 변하면서 사람에게 맞춰 가는 게 특징이죠.”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문양을 수놓은 수혜(繡鞋)가 툇마루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전통 신은 형태와 재료,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고 명칭도 제각각이다. 그중 비단에 수를 놓은 수혜는 흔히 ‘꽃신’이라 불렸으며, 주로 반가의 여인들이 신었다.

전통 재현의 소명
한때 황 장인은 수요를 넓히기 위해 신을 개량하는 데 관심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꽃신을 사람들이 전통 신으로 오해한다는 게 문제였다.
“개량한 한복처럼 요즘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취향, 기능에 맞게 변형해서 현대화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죠. 그런 시도가 저에게 자극이 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누군가는 전통 방식을 지키면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버지께서 선대의 유물을 복원해 보여 주신 것처럼 전통 그대로 후대에 물려주는 일이 저의 소명인 거죠.”
올해 7월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갤러리에서 있었던 국가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전시회는 젊은 장인에게도 반환점이 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3년 만에 열린 이번 전시에는 작품 전시뿐 아니라 체험 수업도 진행했는데, 신청자가 몰려 전시가 종료된 이후에도 보충 수업을 해야 했다.
“신청자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이어서 반가웠어요. 우리 전통 신의 정교한 아름다움과 견고함에 놀라더군요.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니 반응이 무척 좋았어요. 현대화에 대해서만 고민할 게 아니라 강의나 시연 등을 통해 전통을 제대로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신청 문의가 계속 이어지자, 그는 화혜 체험 강좌를 정례화해 일반 수요자들과 직접 만날 계획도 세웠다.
“주요 공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재료와 기법 등을 좀 더 단순화할 방법을 찾고 있어요. 전수생이 없는 현실에서 아버지와 제가 오롯이 감당하기에 버거운 일이긴 하죠. 하지만 아내가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어머니가 아버지 곁에서 평생 힘이 되어 주신 것처럼요. 제 아들 둘이 아직은 어리지만 든든하고요.”
단절 위기에 처한 전통 공예 장인들이 가는 길은 유독 외롭기 마련이다. 그도 예외는 아니지만, 어쩐지 편안함이 느껴진다.

이기숙(Lee Gi-sook 李基淑)자유기고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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