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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SPRING

문화 예술

아트 리뷰 추상화시킨 일상

독일을 중심으로 국제적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설치미술가 양혜규(Yang Hae-gue [Haegue Yang] 梁慧圭)는 그간 일상 속 친숙한 소재를 활용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들을 연출해 왔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회에서는 이런 시도들이 더욱 다양하고 과감해지며 또 다른 화두에 대한 작가의 도전을 보여 줬다.

양혜규는 빨래 건조대, 블라인드, 전구 등 일상적 소재를 작품에 자주 활용한다. 대표적으로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관 작가로 참여해 철제 프레임과 선풍기, 뜨개실 등으로 부엌을 형상화한 작품 <살림(Salim)>을 선보인 바 있다. 이후 카셀의 도큐멘타(Documenta in Kassel), 파리의 조르주 퐁피두센터 등 세계 여러 곳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일상 소재를 활용한 설치 작품을 다양한 형태로 변주시켜 왔으며, 여기에 그래픽 디자인을 활용한 벽지 설치 작업까지 더해졌다. 최근작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이미지들이 복잡하게 얽혀 다소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때로는 “이미지 밀도가 과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에 대해 그는 난해함을 본인 작품의 특징으로 설명한다.

2019년 1월, 타이베이 난강 전시 센터(Taipei Nangang Exhibition Center)에서 열린 제1회 타이베이 당다이(Taipei Dangdai 台北 當代) 아트페어에 참여한 양혜규(Haegue Yang 梁慧圭). 그는 특정한 역사적 인물이나 일상의 사물들을 설치, 조각, 영상, 사진,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추상적인 조형 언어로 표현한다. ⓒ Sebastiano Pellion Di Persano,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침묵의 저장고 – 클릭된 속심(Silo of Silence - Clicked Core)>. 2017. 알루미늄 베니션 블라인드, 분체 도장 알루미늄 및 강철 천장 구조물, 강선, 회전 무대, LED 등, 전선. 1105 × 780 × 780 cm. 베를린 킨들 현대미술센터(KINDL – Centre for Contemporary Art)는 매년 작가 한 명을 선정해 20미터 층고에 달하는 보일러 하우스 공간에 단독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2017년 9월부터 2018년 5월까지 양혜규의 작품이 이곳에서 전시되었다. ⓒ Jens Ziehe, 작가 제공

동일한 대상, 다른 해석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2020. 9. 29.~2021. 2. 28.)도 예외가 아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대형 설치 작품 <침묵의 저장고-클릭된 속심(Silo of Silence-Clicked Core)>인데, 제목부터 난해한 이 작품은 베니션 블라인드와 조명 기구들을 활용한 11m 높이의 대형 모빌 형태를 하고 있다. 관람객들은 짙은 푸른색과 검은색의 베니션 블라인드가 서로 엇갈리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작품의 내외부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고, 거대한 규모와 색상이 연출해 내는 다채로운 공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 작품에 사용된 베니션 블라인드는 그의 대표작 <솔 르윗 뒤집기(Sol LeWitt Upside Down)>의 상징과도 동일한 소재다. 전시장 내부로 이동하면 흰 블라인드를 활용한 <솔 르윗 뒤집기> 연작을 볼 수 있는데, 제목에 언급된 미국의 개념미술가 솔 르윗의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미니멀리즘적 요소가 강하다. 이 연작들 앞에서 관람객들은 21세기에 과거의 미니멀리즘 양식을 되풀이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작가는 작품 소재로 활용하는 블라인드에 대해 “누군가는 서양적, 다른 이는 동양적이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보는 시각에 따라 어떤 이는 서구적인 오피스 공간을, 다른 이는 동양적인 대나무 발을 머릿속에 떠올릴 것이다. 이렇게 동일한 대상을 통해 각기 다른 맥락에 따라 의미가 변하는 현상을 보여 주려는 의도를 다른 작품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2017년 멕시코 시티 쿠리만주토(kurimanzutto)에서 열린 <장식과 추상(Ornament and Abstraction)> 전시 전경. 이 전시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열린 양혜규의 첫 번째 개인전이다. ⓒ Omar Luis Olguín, 쿠리만주토 제공
<중간 유형 – 확장된 W 형태의 우흐흐 생명체>. 2017. 인조 짚, 분체 도장 스테인리스강 천장 구조물, 분체 도장 스테인리스강 프레임, 강선, 너설, 부포. 580 × 750 × 60 cm.
<해과 달 아래 말 잃은 큰 눈 산 – 신용양호자 #315>. 2017. 보안 무늬 편지 봉투, 모눈종이, 색종이, 사포, 액자, 접착 비닐 필름 11개. 86.2 × 86.2 cm; 57.2 × 57.2 cm; 29.2 × 29.2 cm.
<솔 르윗 뒤집기 – 1078배로 확장, 복제하여 다시 돌려 놓은 K123456>. 2017. 알루미늄 베니션 블라인드, 분체 도장 알루미늄 천장 구조물, 강선, 형광등, 전선. 878 × 563 × 1088 cm.

뒤섞인 경계
본격적인 전시가 펼쳐지는 제5전시실에 이르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소리 나는 家物(Sonic Domesticus)> 연작이 설치되어 있다. 이들 작품은 인조 짚과 플라스틱 끈, 놋쇠 방울이 주된 재료로 금속 방울이 알알이 달려 있는 모습 때문에 첫눈에는 기괴한 생물체처럼 보인다. 조금씩 눈에 익숙해지면 이들 형태가 각각 다리미, 마우스, 헤어드라이어, 냄비임이 드러난다.

블라인드를 활용한 작품에서 동서양의 경계를 겨냥했다면,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무생물과 생물의 경계를 탐색한다. 헤어드라이어를 게로, 두 개의 마우스를 쌓아 곤충 같은 형체를 만든다. 또는 다리미를 맞붙여 가위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 이 작품들엔 바퀴가 달려 있어 움직일 때 소리가 나기도 한다.

작품 오른쪽 벽면에는 네 가지 유형의 문손잡이들을 달았는데, 구각형의 기하학적 형태로 배치되었다. 여기서 노리는 효과도 비슷하다. 손잡이는 문을 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것이 벽에 달리면서 기능을 잃어버린다. 이렇게 맥락에 따라 바뀌는 사물의 의미를 통해 작가는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려는 듯하다. 다만 이런 전략은 이미 100년 전 다다이즘 작가들이 보여준 바 있어 아쉽게 느껴진다. 양혜규가 다리미를 교차해 가위 형태를 만들기 훨씬 이전에 시각미술가 만 레이(Man Ray)는 다리미판에 압정을 박아 그 기능과 의미를 무화시킨 바 있다. 1921년 작품 <선물(Cadeau)>이 바로 그것이다. 더 거슬러 오른다면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와 <샘>(1917)이라고 명명한 것과 연장선상에 있다.

물론 요즘엔 미술사에 나타난 특징적 요소들을 시대와 상관없이 작가가 마음껏 차용하는 경향이 국제 미술계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19세기 이전 회화를 차용해 추상화하는 영국 작가 세실리 브라운(Cecily Brown)은 물론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도 자신의 우상인 피카소의 작품을 대놓고 빗댄다. 그렇다면 개념미술을 빌린 양혜규만의 목소리는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다.

동양과 서양,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묻던 작가가 이제는 현실과 가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마저도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왼쪽) <진정성 있는 복제>. 2020. 인공지능(타입 캐스트), 양혜규 목소리, 스피커. 가변 크기. 기술 제공 네오사피엔스.
(오른쪽) <오행 비행>. 2020. 폴리에스터 현수막 천에 수성 잉크젯 인쇄, 애드벌룬, 아일렛, 강선, 한지. 가변 크기. 그래픽 지원 유예나.
국립현대미술관의 (2020. 9. 29.~2021. 2. 28.) 전시에서 양혜규는 인공 지능으로 복제된 자신의 목소리를 삽입하거나 현수막에 디지털 이미지를 합성한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선보였다. ⓒ 홍철기(Cheolki Hong),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작가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다리미, 헤어드라이어, 마우스, 냄비 형태를 토대로 재료들을 서로 맞붙이거나 교차 결합하여 혼종 기물을 탄생시켰다. ⓒ 홍철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소리 나는 가물(家物)>. 2020. 분체 도장 스테인리스강 프레임, 분체 도장 격자망, 분체 도장 손잡이, 바퀴, 검은색 놋쇠가 도금된 방울, 놋쇠가 도금된 방울, 빨간색 스테인리스강 방울, 스테인리스강 방울, 금속 고리, 플라스틱 끈.
(왼쪽) <소리 나는 가물(家物) – 다림질 가위>. 208 x 151 x 86 cm.
(왼쪽에서 두 번째) <소리 나는 가물(家物) – 게걸음질 드라이기>. 155 x 227 x 115 cm.
(왼쪽에서 세 번째) <소리 나는 가물(家物) – 조개 집게>. 291 x 111 x 97 cm.
(오른쪽) <소리 나는 가물(家物) – 솥 겹 솥>. 224 x 176 x 122 cm.

현실과 추상
이번 전시에서 양혜규는 기존에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선보였다. 디지털 이미지를 합성한 현수막 작품 <오행비행(Five Doing Un-Doing)>과 인공지능 목소리가 나오는 <진정성 있는 복제(Genuine Cloning)>가 그것이다.

<오행비행>에 대해 작가는 “정치적 선전물을 닮은 강렬한 그래픽과 과장된 타이포그래피가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5개의 현수막에는 오방색(파랑, 빨강, 노랑, 하양, 검정)이 상징하는 다섯 가지 요소(나무, 불, 흙, 철, 물)의 이름이 적혀 있다. 현수막 아래쪽에는 한지로 만든 무구가 술처럼 달려 있다. 이 작품은 이번 전시의 제목 와 큰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작가는 일상에 존재하는 공기와 물이 ‘O2’와 ‘H2O’로 기호화되는 것에 주목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현실을 다섯 개의 요소로 추상화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설명으로 들린다.

그런가 하면 <진정성 있는 복제>는 현수막 사이 사이에 스피커를 매단 작품이다. 스피커에서는 인공지능 기술로 복제된 작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동양과 서양,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묻던 작가가 이제는 현실과 가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마저도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베를린과 서울 사이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난 양혜규는 199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해 미술대학 슈테델슐레(Städelschule)를 졸업했다. 2005년부터는 베를린에 정착해 활동하고 있으며, 2014년에는 서울에도 스튜디오를 열고 두 곳을 오가며 작업 중이다. 2018년 아시아 여성 작가로는 처음으로 독일 볼프강 한 미술상(Wolfgang Hahn Prize)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팬데믹 상황인 2020년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뉴욕의 현대미술관 재개관을 기념한 <손잡이들(Handles)>(2019. 10.~2021. 2. 28.), 그리고 영국 콘월의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Tate St Ives)에서 대규모 전시 <이상한 끌개(Strange Attractors)>(2020. 10. 24.~2021. 5. 3.)가 열렸다.

2014년 이불(Lee Bul 李昢)로 시작한 ‘MMCA 현대차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중진 작가를 지원하기 위해 만든 연례전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이 미술관이 기획한 양혜규의 첫 번째 개인전으로 40여 점의 작품이 소개됐다.

김민 (Kim Min 金民)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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