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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WINTER

문화 예술

포커스 잊어버린 왕국 고려를 돌아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GORYEO: The Glory of Korea)은 5세기에 걸쳐 한반도를 지배했던 중세 통일 국가 고려(918∼1392)의 미술을 종합적으로 돌아보는 최초의 대규모 전시이다. 내년 3월 3일까지 계속되는 이 특별전은 해외 4개국 11개 기관을 비롯해 국내외 45개 기관의 주요 소장품 총 450여 점을 보여 준다.

<고려 태조 왕건상>, 10~11세기, 청동, 높이 138.3 cm. 한국 역사상 현존하는 유일한 왕의 초상 조각으로 개성역사유적지구 내 현릉에서 1992년 출토되었다. 비단 의상은 부식되고 나신상과 옥으로 만든 과대만 발견되었다. © 평양조선중앙역사박물관

<희랑대사 좌상>, 10세기, 목조 건칠, 높이 82 cm. 해인사 조사(祖師)였던 희랑대사의 진영상은 국내에서 유일한 승려의 진영 조각이다. 조성, 봉안 이후 이번 전시를 위해 첫 바깥 나들이를 했다. 보물 제999호로 지정되어 있다. © 해인사 성보박물관

고려는 출발부터 다양성을 존중했다. 주변국들과 다원적 외교 관계를 이루었고, 외국인을 재상으로 등용할 만큼 개방성과 포용성, 그리고 통합 정신을 실천해 나갔다. 한국의 영문 명칭인 ‘코리아’가 ‘고려인이 사는 나라’, ‘고려인의 땅’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됐듯 고려 시대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배양한 시기였다.
그러나 고려 역사 500년은 많은 것들이 베일에 싸여 있다. 오늘날 남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고려의 구체적 지명이나 유적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남북 분단이라는 불행한 근현대사와 연관된다. 고려의 이미지가 막연한 것은 수도 개경(오늘의 개성)을 비롯해 정치, 종교, 문화, 통상의 중심지가 대부분 북한에 있어 접근할 수 없고, 그렇다 보니 많은 부분이 공동체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만월대는 건국 이듬해인 919년 태조 왕건이 송악산 남쪽에 궁궐을 창건한 이래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고려 왕들의 주된 거처였다. 1918년 일제가 조선 고적 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촬영한 사진에서 보듯이 만월대는 폐허로 남아 있다. 마침 사진이 촬영되던 이 해는 고려 건국 1,000년이 되는 시기였지만, 일제 강점기에 어느 누구도 그것을 기념할 수 없었다. 1,000년을 기념할 기회를 놓친 우리에게 찾아온 1,100주년은 그래서 더욱 값지다.
고려 건국 1,100주년을 기념하고 그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올해 전국에서 다양한 전시와 학술 행사가 개최되었다. 12월 4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시작된 특별전은 미국, 영국, 이탈리아, 일본을 포함하여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주요 고려 유물의 상당수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다는 점에서 그중 백미라 할 수 있다.

고려는 앞선 왕조가 이룬 문화적 전통을 배척하지 않고 다원적인 태도로 융합했으며, 주변국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아름답고 창의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왕과 스승의 조상(彫像)
이번 특별전에서 기대되는 것은 고려 태조 왕건과 희랑대사의 ‘만남’이다. ‘북한에서 온 왕’과 ‘남한에 있던 왕의 스승’이 11세기를 뛰어넘어 서울에서 만나게 되기를 소망한다.
우선 ‘청동 태조 왕건상’은 개성 소재 왕건과 그의 제1비 신혜왕후의 무덤인 현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한국 역사상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왕의 초상 조각이다. 높이가 138.3cm인 이 청동 조상은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며 만든 이 조각은 사찰에 봉안되어 제례의 대상이 되었다. 매납(埋納) 당시에는 비단 옷에 허리에는 옥으로 만들어진 과대를 착용하고 있었으나, 1992년 발굴될 때는 옷은 부식되고 청동상과 과대만 출토되었다. 현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개성역사유적지구의 일부이다.

<대방광불화엄경판 수창연간판(大方廣佛華嚴經板 壽昌年刊板)>, 1098년, 목재, 24 × 69.6 ㎝. ‘고려대장경’과 함께 고려 시대 판각 기술을 알 수 있는 ‘고려목판’은 국가 기관에서 제작한 고려대장경과 달리 사찰이나 지방 관청에서 만들었으며 불교 경전뿐 아니라 고승들의 저술, 시문집 등도 새겨져 있다.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목판은 총 54종 2,835판으로 그중 ‘대방광불화엄경판 수창연간판’은 간행 기록이 남아 있는 고려목판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가치가 높으며 고려 시대 길고 긴 대장경의 역사를 보여 준다. © 하지권(Ha Ji-kwon 河志權)

한편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희랑대사의 건칠목조상 또한 930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승려의 진영 초상 조각으로는 국내 유일한 사례이다. 스님의 실제 모습을 담아 인간적 면모까지 느낄 수 있는 이 조각상은 해인사에 봉안된 후 사찰 바깥에서는 최초로 일반에 공개된다. 이 두 점의 진귀한 유물이 각별한 이유는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희랑대사는 왕건의 정신적 지주로 후삼국 시대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렸던 왕건을 도왔으며, 고려 건국 이후에는 왕의 스승이 되었던 인물이다.
고려의 정치적 상징인 태조 왕건상과 정신적 가치를 상징하는 희랑대사상은 조성된 당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전시 오픈 이후에도 태조 왕건상이 오면 전시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지장보살도>, 14세기, 비단에 채색, 104.3 × 55.6 ㎝.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지장보살을 그린 불화로 상단에 본존불을 강조하고 하단에 여타 인물들을 배치하는 고려 불화의 일반적 구도를 따르고 있다. 보물 제784호. © 삼성미술관 리움

금속활자와 대장경판
이번 전시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점은 산문을 나선 적 없던 고려 대장경판이 이번에 공개된다는 것이다. 경판이 보관된 해인사를 방문해도 실제로 마주 하기 힘든 귀한 전시품이다.
고려는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를 만들어 낼 만큼 뛰어난 출판의 역사를 자랑한다. 중세 유럽 수도사들의 일과가 기도와 성경을 베껴 쓰는 일을 포함했듯, 고려의 승려들에게도 경전을 손으로 베껴 쓰는 사경(寫經)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 오랜 필사의 전통에서 인쇄로의 전환은 세계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쇄 문화는 수도원과 사찰에서 성경과 경전을 매개로 꽃피었다. 구텐베르크의 성서가 서양 문화사에서 인쇄된 책의 시대를 열어 준 혁명의 상징적 아이콘이 되었듯이, 대장경은 불교 성전의 총합체인 동시에 당시 아시아의 지혜와 지식을 집대성한 획기적 출판물이었다.
971년 송나라 태조가 시작해 983년 완성된 개보장(開寶藏)은 송 황실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기념 사업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소실되어 현존본이 극히 적다. 반면에 고려는 총 세 차례에 걸쳐 국가적 사업으로 대장경을 간행했다. 초조대장경은 개보장에 이어 세계 역사상 두 번째로 판각된 대장경으로, 1011년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이뤄진 거사였다. 이후 고려의 대장경 간행에 자극받아 만들어진 것이 거란대장경이다.
초조대장경이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불탄 후 고려는 기존의 송본, 초조본, 거란본의 내용을 종합한 재조대장경을 간행했다. 이때 간행한 대장경판이 무려 16만 쪽을 양면에 판각한 8만 장에 이르기 때문에 이를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해인사에 700년간 보존되어 온 팔만대장경판은 동아시아 불교 문헌을 집대성한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경판이다.
중세 동아시아에서 대장경의 위력은 지금의 핵무기 경쟁에 못지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국내적으로도 대장경 간행은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대규모 사업이었고, 목판으로 대량 인쇄해 전국의 사찰에 봉안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다지고 국민을 통합할 수 있었다. 또한 인근 나라에 인쇄본을 나누어 줌으로써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외교적으로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다. 대장경을 요청하고 이를 하사받은 과정의 기록, 목판을 얻고자 노력한 기록을 보면 국제 정세 속 대장경을 통한 고려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포용과 융합
3개월 동안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크게 3가지 주제로 구성된다. 1부는 ‘국제 도시 개경과 왕실의 미술품’으로 활발했던 해상 교류와 다양한 물산에 대해 살펴본다. 국제 도시였던 수도 개경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드나들었다. 고려 인종 재위 시절인 1123년에는 송나라 사절단 일행이 도착했다. 휘종이 보낸 200여 명의 사절을 이끌고 온 사신 서긍도 그중 하나였다. 서긍은 고려에서 보낸 한 달을 『선화봉사고려도경』이란 책에 담았다. 그는 개경에서 보고 들은 문물을 상세히 기록하고 직접 그림을 그려 황제에게 올렸으나, 몇 년 후 북송이 금에 의해 멸망하면서 그림들은 전란 속에 사라지고 문장만이 전한다. 관람객들은 이 전시를 통해 지금은 찾아갈 수 없는 고려의 중심 개경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2부에서는 왕실과 더불어 미술품의 주된 소비 장소였던 ‘사원의 미술’로 구성되었다. 불교는 국가의 종교이자 사상이었고, 삶과 정신의 중심이자 생활 그 자체였다. 고려가 이룬 문화적 성취는 불교 문화에 기반하여 정점을 이루었다. 고려 이전과 이후의 어떤 왕조도 고려만큼 불교의 정신과 가치를 이해하고 꽃피우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3부는 ‘고려의 멋, 고려의 미술’이 주제이다. 고려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중국 본토의 송뿐 아니라 북방의 거란족이 건립한 요, 여진족의 금과도 200년 이상에 걸쳐 국교를 유지하며 교류했다. 한편 고려의 후반기는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대제국을 건설한 원이 다스리던 시기였다. 이렇듯 고려의 주변 정세는 늘 요동치며 크고 작은 전쟁이 숱하게 벌어졌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전쟁의 길은 문화가 오고 간 교류의 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격변의 시기에 고려의 뛰어난 공예품은 기술의 수용과 교류, 이질적인 요소들과의 융합을 거치면서 활발히 유통되었다.

<은제 금도금 주자와 승반>, 12세기, 은에 도금, 주자: 높이 34.3 cm, 바닥 지름 9.5 cm; 승반: 높이 16.8 cm, 입 지름 18.8 cm, 바닥 지름 14.5 cm. 화려한 연꽃 무늬와 봉황 장식으로 뚜껑을 장식한 주자와 승반으로 고려 시대 금속 공예의 정수를 보여 준다. 청자와 금속 공예의 형태 및 장식이 서로 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명품이다. © 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 12세기, 높이 15.3, 대좌 지름 11.5 cm. 상감 기술이 개발되기 이전 고려 청자의 대표적 명품 중 하나이다. 향이 빠져나가는 뚜껑과 향을 태우는 몸통, 받침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양한 기법이 사용돼 장식적 요소가 많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형적 비례가 조화를 이룬다. 국보 제95호. © 국립중앙박물관

불변하는 가치의 재발견
역사서는 이런 교류에 대해 단편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미술품들은 고려가 중국, 일본의 여러 왕조와 활발하게 교류했던 모습을 풍부하게 보여 준다. 따라서 이번 특별전은 미술품을 통해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창출된 고려의 문화적 성취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고려는 앞선 왕조가 이룬 문화적 전통을 배척하지 않고 다원적인 태도로 융합했으며, 주변국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아름답고 창의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고려인들은 인간의 정서와 감정을 포착하고 그것을 색과 재료, 기술적 성취를 통해 뛰어난 미술로 구현했다. 이는 때로는 강력하지만 때로는 극히 우아하고 섬세하여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관람객들은 이번 전시에서 잊고 있었던 고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정명희(Jeong Myoung-hee 鄭明熙)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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