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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WINTER

생활

인문학 기행 치유의 섬에서 만나는 ‘눈부신 풍경’

한반도의 서남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진도는 국내에서 세 번째 큰 섬으로 크고 작은 수많은 섬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중국과 일본 양 방향으로 통하는 바닷길의 길목에 위치해 일찍부터 교류가 많았던 만큼 역사적 부침도 많았다. 이런 환경은 독특한 문화를 키워 냈다.

첨찰산에서 내려다본 진도의 풍경이다. 야트막한 산들이 서남해의 푸른 바다와 촌락 앞 황금빛 논들 사이에 담장처럼 둘러쳐져 있다. 진도는 여느 섬들과 달리 농토가 넓고 저수지들이 곳곳에 있어 쌀 생산량이 높다. 바다 건너 해남 땅이 보인다.

진도는 멀다. 최고 시속 300㎞로 달리는 고속철도를 타고 서울에서 목포까지 2시간 반, 그리고 다시 목포에서 자동차로 1시간이 걸린다. 이 물리적 거리는 진도를 1,000년 가까이 유배의 적소로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온 진도는 국경의 끝에 있는 섬이라는 점에서 가장 가혹한 유배지였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의 거리감은 한국인들과 달랐다. 유럽의 정반대 동쪽 끝에 있으니 거리로 치면 비길 수 없이 멀지만, 그들은 조선을 중국과 인접한 나라이고 그중 진도는 중국과 가까운 해안에 있다고 여겼다.

조도와 세방낙조
1816년 영국의 군함 두 척이 중국 텐진을 거쳐 광동에 도착했다. 이 배는 뒷날 인도 총독을 지낸 윌리엄 애머스트(William Pitt Amherst 1773~1857)가 타고 왔는데, 그는 영국과 청나라 간 무역 증진이란 사명을 띤 특별 대사의 신분이었다. 그가 중국에 머물고 있는 동안 리라(Lyra)호와 알세스트(Alceste)호 두 척의 군함은 영국 정부로부터 한국의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리라호의 함장 바실 홀(Basil Hall 1788~1844)은 1816년 9월 9일 진도 앞바다에 있는 상조도(上鳥島) 정상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점점이 떠 있는 154개의 섬들을 둘러보며 “눈부신 풍경”에 감탄했다. 무엇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는지는 상조도에 조성된 도리산 전망대에 올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바실 홀은 이때의 기록을 『10일간의 조선항해기』(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 in the Japan Sea, 1818)라는 책으로 남겨 진도를 뱃길로 갈 수 있는 조선의 대표적 장소로 세상에 알렸다. 조선이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기 반세기 전의 일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뒤 영국은 조선 정부에 진도와 조도 군도의 조차(租借)를 요청했다고 한다. 진도 사람들은 이때 조선이 진도를 빌려 주었다면 지금의 홍콩처럼 크게 발전했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진도군에서는 도리산 전망대 부근에 ‘바실 홀 공원’을 만들어 그의 방문을 기리고 있다.
조도 군도를 오가는 카페리호는 진도의 남쪽 여객항인 진도항에서 하루 다섯 번 출발한다. 오후 늦게 진도에 도착하였다면 네비게이터에 ‘세방낙조’를 입력한 뒤 부지런히 남서쪽 해안가 언덕으로 달려가라. 일몰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세방낙조 전망대에서 구름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해의 왼쪽으로 검은 새처럼 늘어선 섬들을 보았다면 당신은 운이 좋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실 홀이 감탄한 조도 군도다.

보존과 유입의 문화
한반도 동해의 북쪽에서 내려오는 한류와 적도 지방에서 올라오는 난류가 부딪치는 곳이 바로 진도 앞바다다. 여기에 조류의 영향까지 더해지면 섬 주위의 물살은 더 빨라진다. 진도를 둘러싼 이 빠른 물길이 멀리는 중국과 일본을 이어 예부터 사신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으며, 가깝게는 한반도의 남해에서 서해를 지나 개경과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의 길목이었다. 진도의 특산물이 꽃게와 조기, 멸치, 전복, 낙지 같은 다양한 어종과 양질의 미역, 김, 다시마 같은 해초류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 또한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진도 바다가 준 혜택이다.
진도를 돌아다니다 보면 섬이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산과 들판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촌 풍경을 자주 만난다. 보통의 섬과 달리 농토가 넓고 저수지들이 곳곳에 눈에 띤다. 섬과 육지의 양면성을 갖춘 것은 일찍이 구릉을 깎아 갯벌을 메우는 간척 사업을 꾸준히 벌인 결과이다. 이것이 “일 년 농사를 지으면 삼 년을 먹는다”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고, 섬이면서도 ‘비옥한 고을’이란 뜻을 가진 옥주(沃州)라는 지명을 얻은 이유다. 주산물은 쌀이다. 생산된 쌀의 일부는 진도보다 4배나 넓지만 논농사가 불가능한 제주도 사람들의 식량으로 공급되었다. 진도가 한국 제일의 종묘지인 것도 농업의 혜택이다. 섬이라는 조건에 더해 세 방향이 산으로 둘러싸여 잡종 수정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춤과 노래는 자연스럽게 진도 사람들의 특질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어느 마을에 가든 부녀자들의 느릿하고 구성진 육자배기 한 자락쯤은 쉽게 들을 수 있으며, 농사철에 들리는 흥겨운 들노래는 논일 하며 부르는 노래와 밭일 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각각 다르고 가락도 무척 다양하다. 8월 한가위 보름달이 뜨면 마을 처녀와 아낙네들이 새 옷으로 단장하고 손을 잡고 둥글게 모여 뛰노는 강강술래 놀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진도 아리랑, 빠르고 경쾌한 진도 농악은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인구 3만 명의 섬에 기악단, 성악단, 무용단으로 구성된 국악연주단을 보유하고 현대식 공연장과 교육 시설을 갖춘 국립 남도국악원이 들어서 있는 걸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자연 조건이 진도의 토속 문화를 잘 보존하게 만들었다면, 역으로 이런 조건에서 외부로부터 유입된 인위적인 교류는 진도의 문화를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 전파 경로에 대한 합리적 추론이 가능한 것은 유배 문화다. 정치적∙사상적 이유로 유배형을 받은 사대부들이 유배 생활 중 지역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타 지역의 문화가 새롭게 유입되었다. 이들은 시대를 달리하며 짧게는 3년 길게는 20년가량 진도에 살면서 이 지역의 준재들에게 새로운 시대 정신과 가치의 전파자로 기여했다.
예를 들어 진도가 남종문인화의 본거지로 인정받고 올해 제1회 국제수묵비엔날레가 열린 것도 허련(1809~1892), 허백련(1891~1977) 같은 출중한 남종화가들이 대부분 이곳 출신이기 때문인데, 이들을 지도하고 후원한 이들이 바로 높은 안목과 식견을 갖춘 유배인들이었다. 찹쌀로 술을 빚은 뒤 증류 과정에서 지초(芝草)의 마른 뿌리로 담홍색의 빛깔을 낸 홍주를 마시고, 섬 곳곳의 산야에서 자라는 차나무의 여린 순을 덖은 차를 즐기던 문화도 그 맥락은 같다. 그러나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진도의 이런 풍토가 항상 좋은 결과만 가져오지는 않았다.

진도의 세방낙조는 한반도 최남단의 아름다운 일몰 전망지로 명성이 자자하다. 태양이 수평선에 몸을 담그기 시작하면, 다도해에 떠 있는 154개의 작은 섬들이 검은 실루엣으로 변신한다.

찹쌀로 술을 빚은 뒤 증류 과정에서 지초(芝草)의 마른 뿌리로 담홍색의 빛깔을 낸 홍주를 마시고, 섬 곳곳의 산야에서 자라는 차나무의 여린 순을 덖은 차를 즐기던 문화도 그 맥락은 같다. 그러나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진도의 이런 풍토가 항상 좋은 결과만 가져오지는 않았다.

삼별초와 명량해전
지금은 차를 타고 해남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잠깐 사이에 진도에 이르지만, 조선 시대에는 우수영진에서 현재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는 녹진나루로 건너는 뱃길이 관로였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이용하는 뱃길은 가깝지만 물살이 센 이곳보다 옥동 선착장에서 벽파항으로 건너가는 1㎞의 뱃길이었다. 그 벽파항에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으면 용장산성이라는 유적지가 나오는데, 이곳이 39년 동안의 대결 끝에 몽골과 화친하기로 결정한 고려 정부에 반대해 ‘또 하나의 고려’를 꿈꾸며 끝까지 저항하던 이른바 ‘삼별초’라 불리던 군사 정부의 수도였다.
몽골과의 결사 항전을 선언한 삼별초에게 진도는 방어와 군수 조달 등 모든 면에서 최적지였다. 1270년 8월 19일 진도에 들어온 삼별초는 당시 읍성이 있던 용장에 진을 치고 용장사라는 진도 최대의 사찰을 기반으로 주위에 방어용 도성을 쌓는 데 주력했다. 그들은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독자적으로 왕을 추대하는 한편 개경(오늘날의 개성)의 왕궁인 만월대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산성을 축조하는 등 고려의 정통성을 내세웠다.

진도 사람들은 삼별초의 꿈을 지지해 힘을 보탰다. 그들의 바람은 보다 더 현실적이었으니, 새 지배층이 될 몽골의 수탈을 걱정했고 이것이 삼별초에 대한 호응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세계의 패권국인 몽골의 위세를 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1년도 채 못 버티고 1271년 5월 여몽연합군의 총공격으로 용장산성은 함락되었다.
진도 사람들은 삽시간에 지옥 같은 전쟁터로 변해 버린 삶의 터전 앞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마음을 짐작하게 하는 장소가 있다. 굴포리에 있는 삼별초 장수 배중손의 사당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당제를 지낸다. 역사학자들은 삼별초가 진도로 향하기 전에 신분증명서를 태워버린 사건을 상기시킨다. 귀족을 중심으로 한 엄격한 신분 사회였던 고려에서 삼별초는 신분 사회를 부정하고 민중 중심의 새로운 사회를 꿈꿨다. 전쟁이 끝나자 몽골군은 주민 1만여 명을 포로로 끌고 갔고, 섬에는 말 목장이 들어섰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진돗개가 이때 몽골이 목축을 위해 들여온 개와 토종 재래견의 혼종이라는 견해는 꽤 설득력이 있다.
진도 벽파진이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300년이 더 지난 뒤인 정유재란(1597~1598) 때이다. 거짓 정보와 모함으로 파직되었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에게 가용할 수 있는 군선은 열두 척뿐이었다. 1597년 8월 29일, 그는 이 배들을 지휘해 벽파진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보름 뒤 녹진과 벽파 사이의 울돌목에서 왜군 함대 400척과 2만의 군대(일본의 기록이다)와 맞서 빠른 물살과 조류를 이용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명량대첩’이라 부른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싸움을 뛰어난 전술로 소수가 다수를 이긴 전쟁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잘 훈련된 군사라기보다는 좁게는 200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좁은 물길의 양안에 늘어서서 이순신의 수군을 지원하고 함성을 지르며 돌과 화살로 왜군을 교란했던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이순신의 수군이 재정비를 위해 서해안으로 올라간 뒤 이들에게 닥친 것은 패전 소식을 접한 왜군들의 엄청난 보복이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23일 만에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인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사람의 자취도 보이지 않는 적막강산일 뿐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아무리 참혹한 보복도 수세에 몰렸던 조선이 전세를 뒤집고 일본과의 7년 전쟁을 끝내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사실만은 뒤집을 수 없었다.

두 개의 묘역
명량해전의 격전지였던 울돌목과 벽파진 사이인 고군면 도평리 지방도로 옆 산기슭에 230여 기의 무덤이 모여 있다. 공식 명칭은 ‘정유재란 순절묘역’이다. 이곳에는 명량해전 당시 전사한 조선군들을 비롯해 왜군들의 보복으로 죽임을 당한 민간인들이 묻혀 있다. 10여 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신원 미상의 무덤이다. 무덤은 모두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고 있다.
이곳에서 산을 끼고 바닷가 쪽으로 9㎞쯤 돌아가면 고군면 내동리에 왜덕산이라 불리는 아담한 야산이 나온다. ‘왜덕’이란 이름은 ‘왜인에게 덕을 베풀다’는 뜻이다. 이곳에도 100여 기의 무덤이 있었는데, 이 무덤들의 주인공들은 명량해전 때 일본 수군의 선봉에 섰던 구루시마 미치후사 휘하의 수군들이었다. 이때 전사한 일본 수군의 주검이 남동 조류를 따라 해안가로 떠밀려오자 마을 사람들이 이 시신들을 수습해 일본이 바라보이는 남쪽의 양지바른 언덕에 묻어 주면서 조성된 묘역이다. 지금은 개간과 도로 공사로 훼손되어 50여 기가 남아 있다.
2006년 8월, 처음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인 후손들과 뜻있는 일본 대학생들이 마을 사람들의 안내로 이 묘역을 성묘했다. 일본 히로시마의 한 신문엔 성스러운 왜덕산과 고마운 진도 사람들에 대한 기사까지 실렸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화해를 중시하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생사관과 ‘씻김굿’이라는 독특한 장례 문화를 이어온 진도 사람들에게는 이런 행위가 낯설거나 드문 일이 아니었다.

남도진성은 13세기 고려의 정예 부대 삼별초가 진도에서 몽골과 항쟁을 벌일 때 해안 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전해진다. 이후 조선 시대에는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한 해군 진지로 사용되었다.

서망항 포구에서 어민들이 어망에 걸린 조기를 털어내느라 여념이 없다. 조기는 그물에서 재빨리 떼어내 냉동시켜야 상품성이 유지되는 생선이라 조기철이면 수많은 어촌 주민들이 공동으로 작업하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용장사 석불좌상은 삼별초가 인근에 새로운 왕국의 터전으로 용장성을 쌓을때 화강암으로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앙에 있는 높이 2m의 약사불은 결가부좌한 하체를 높고 크게 표현해 고려 불상 특유의 비례 감각을 엿보게 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
씻김굿이란 죽은 사람의 맺힌 마음을 풀어주고 달래어 편안해질 수 있도록 기원하는 굿이다. 서양의 종교와 비교하자면 ‘씻김’이란 ‘세례’라는 말과 유사하고 그 종교적 원리도 다르지 않다. 다만 물에 빠져 죽은 망자의 넋을 건질 때 행하는 ‘건지기 씻김굿’, 객사하여 고혼이 된 망자를 위하여 행하는 ‘혼맞이 씻김굿’ 등 그 서사는 죽음의 양태나 장소,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절차나 연행의 방식도 다양하다. 여기에 다른 지역과 다른, 단순하면서도 매력적인 ‘신춤(신을 위한 춤)’과 소리로 음악을 만들어 내는 사설(辭說), 다양한 무구(巫具) 같은 빼어난 예술적 요소가 더해져 진도의 씻김굿은 종교적 의식 행위를 넘어 국가의 중요무형문화재로 대접받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를 바라는 마음의 밑자리에는 언제나 아픈 옛날의 기억이 웅크리고 있다.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과 1950년의 한국전쟁 같은 역사의 질곡을 거치며 번번이 정의롭지 못한 떼죽음을 경험한 진도 사람들에게 2014년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를 바라보는 마음은 더 짠하고 애달프다. 모든 죽음은 사적이면서 동시에 공적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슬픈 열대』에서 간파한 메시지를 옮겨 보자.

“한 사회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와의 관계를 다루는 관점은 결국 한마디로 말하자면 종교적 사고법을 통해서 살아 있는 자들 상호간에 실존하는 관계를 숨기거나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는 진리는 은폐할 수가 없는 것이다.” - 박옥줄(朴玉茁) 역, 삼성출판사, 1997년, 238쪽
어쩌면 이것이 진도가 독특한 치유의 문화를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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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기 (Lee Chang-guy 李昌起)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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