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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WINTER

생활

라이프스타일 아날로그 놀이에 빠지다

최근 국내 대학가를 중심으로 보드 게임 카페들이 성업 중이다. 일상적으로 보드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도 눈에 띄게 늘고 있는데, 이들은 다양한 콘텐츠가 주는 재미도 크지만, 함께하는 사람들끼리 생각과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점에 끌린다고 말한다.

1995년 독일에서 출시된 ‘카탄의 개척자(Die Siedler von Catan)’는 2,400만 장 이상 판매되면서 보드게임 시장의 규모를 바꾼 것으로 평가되는데, 미국 워싱턴포스트지에서 집중 조명하는가 하면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자원을 얻어 마을을 만들고, 마을을 도시로 발전시키며 경쟁하는 게임이다. © KOSMOS Verlag

30대 직장인 이선우(李宣優) 씨는 요즘 보드 게임에 흠뻑 빠져 있다.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하는 게임에는 무관심했던 그가 보드 게임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은 독일 여행 중 마주치게 된 어떤 풍경 때문이었다.
“한 카페에 들렀는데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황혼의 투쟁’이라는 게임을 하고 계시더군요. 혼자 모니터 앞에서 하는 컴퓨터 게임과 달리 보드 게임은 사람들이 마주 앉아서 한다는 점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평생 취미이자 놀이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죠.”
귀국 후 그는 보드 게임 카페를 자주 찾게 되었고, 지금은 열렬한 마니아가 되었다. 보드 게임이 주는 아날로그적 재미와 감성에 빠진 사람은 비단 이 씨만이 아니다. 한동안 시들했던 전통 방식의 이 놀이 형태가 최근 다시 조명받고 있는데, 대학가와 도심을 중심으로 전용 게임 방이나 카페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인식 개선과 저변 확대
국내에서는 1982년 출시된 ‘블루마블’이 큰 인기를 끌면서 보드 게임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블루마블의 원조는 ‘모노폴리’이며, 모노폴리의 원조는 지주 게임이라고 불리는 ‘랜드로드스 게임’이다. 이 게임은 미국의 게임 디자이너 엘리자베스 매기에 의해 고안됐는데, 정사각형 보드에 여러 국가나 지역의 이름을 써 놓고 부동산으로 돈을 버는 게임이다. 국내에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구현되어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모두의 마블’도 바로 이 게임이 원형이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보드 게임 전용 카페가 많이 생기면서 전성기가 열릴 것 같았지만,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할리갈리’나 ‘루미큐브’처럼 쉽고 단순한 게임들만 유행하고 어려운 게임들은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싫증을 느껴 지속성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또한 난이도 높은 게임은 규칙 설명에 시간이 오래 걸려 시간당 회전률이 떨어지는데, 이는 보드 게임 카페의 수익 구조를 악화시켰다.
사그라들었던 시장이 최근 몇 년 사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한 디지털 라이프스타일의 확대가 보드 게임의 부활을 이끌고 있다”고 분석한다.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게임을 하고, 이를 기반으로 규모 있는 대회까지 열리면서 저변 확대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게임에 대한 인식 개선도 영향을 주었다. 게임은 남성 중심의 폐쇄적인 문화라는 생각이 바뀌면서 젊은 여성들도 친구들끼리 모여 보드 게임을 즐기게 되었다.
또한 온라인으로 불특정 다수에게서 자금을 모으는 방식인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게임 개발에 나설 수 있는 환경도 마련되었다. 미국의 유명한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킥스타터에 의하면 2015년 1년간 이 플랫폼을 통해 모은 보드 게임 펀딩 금액은 8,500만 달러에 달한다. 이는 같은 기간 비디오 게임 펀딩 금액인 4,100만 달러의 두 배에 이르는 규모다. 이렇게 출시된 보드 게임 수는 약 1,400개에 달한다.

2018년 10월 27일 경기도 파주시 교하도서관이 개최한 보드게임 대회에서 어린이들이 여러가지 게임을 즐기고 있다.

약진하는 산업
지난 9월 29일 서울 만리동 광장에서 열린 ‘2018 서울로 보드 게임 대전’에는 수천 명의 관람객들이 몰렸다. 이날 경기 종목은 낙타 경주 보드 게임 ‘카멜업’이었는데, 200인치 대형 스크린으로 중계되는 결승전에서 보드판 위 낙타 말이 움직일 때마다 관람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열띤 응원을 펼쳤다.
파주시에서도 10월 27일 가족전과 개인전으로 나눠 보드 게임 대회가 개최되었다. 교하도서관 개관 10주년을 맞이해 개최된 이 대회 가족전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1명씩 참가해 ‘할리갈리’로 승부를 겨뤘다. 개인전에서는 ‘우봉고’ 게임에 초등학생들이 참가해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자를 가렸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의 대회를 유치하는 지방자치 단체들도 점차 늘고 있다.
국내에선 아직 보드 게임 산업의 역사가 짧아 정확한 시장 규모를 산출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게임을 수입하거나 제작해 판매하는 회사의 매출을 기반으로 파악한 국내 시장 규모는 2015년 기준 약 1,000억 원 수준이다. 이는 국내 완구 시장의 약 10%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이 중 국내 최대 업체인 코리아보드게임즈의 매출은 연간 10% 안팎으로 늘고 있다. 게임 개발과 배급, 유통을 담당하는 이 회사의 매출은 2015년 245억 원에서 2017년 288억 원으로 증가했다. 행복한 바오밥이나 젬블로 등 규모가 작은 업체들도 20% 이상의 매출 증가를 보이고 있다.
호황은 국내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해외 시장도 최근 5년간 두 자릿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미국 완구협회에 의하면 미국 시장은 2015년 기준 16억 달러로 2014년보다 약 11% 성장했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에서도 시장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

보드 게임은 단절되고 소외된 현대인들의 외로운 마음을 위로하는 순기능이 있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얼굴을 맞대며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만드는 추억
보드 게임 산업의 매출 성장세에는 콘텐츠의 변화도 한몫을 하고 있다. 최근 출시되는 게임은 스마트폰과 연계해 게임을 진행하거나 증강현실 기술을 적용하는 등 신기술이 접목되고 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해 몰입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보드 게임을 교육 보조 기구로 활용하는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보드 게임이 지닌 사회적, 정서적, 학습적 특성을 통해 아동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교육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예컨대 블루마블 형식의 ‘엔트리봇’게임은 작은 판에 자신이 원하는 코드를 심고 말을 움직이면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기초를 배우게 한다.
그런가 하면 가족형 게임은 오프라인에서 외형을 넓히고 있다. 규칙이 쉽고 단순해 가족이 함께 즐기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시간 안에 스위치를 눌러 폭발물을 해체하는 ‘다이너마이트’나 미션 카드에 따라 장난감 총으로 목표물을 맞히는 ‘황야의 무법자’, 제한 시간 안에 카드에 있는 얼굴 모양대로 조각을 조합하는 ‘미스터 퍼니페이스 ’ 등이 인기를 끌고 있는 가족형 게임들이다.
보드 게임 업체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는 한 직원은 “보드 게임 유저는 연령별 취향도 크게 다르고, 게임 선택의 기준도 각기 다르다”면서 “게임을 통해 각자의 생각과 감정을 교류한다는 점이 보드 게임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어떤 상황에서 누가 어떻게 했는지 등 함께 게임을 즐겼던 과정이 훗날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보드 게임은 단절되고 소외된 현대인들의 외로운 마음을 위로하는 순기능이 있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얼굴을 맞대며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각자 바빠서 얼굴을 보기도 힘든 가족들을 모이게 하고 유대감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가족 중심 여가 활동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가운데 개인 간 단절을 부채질했던 스마트폰 게임 중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보드 게임 형태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서울 상암동 문화창조융합센터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대표적 보드 게임 중 하나인 ‘젠가’(Jenga) 를 가상현실로 체험해 보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보드 게임에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 등 신기술 접목이 시도되고 있다. Ⓒ 연합뉴스

최병일(Choi Byung-il 崔昺一) 한국경제신문 여행∙레저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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