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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SPRING

생활

이 사람의 일상 신발을 깁고 닦아서 얻은 행복

한때 서울의 골목골목에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었던 구둣방이 점차 사라져 이제는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컨테이너로 만든 작은 구둣방을 30년이 넘도록 홀로 지켜 온 김성복(Kim Seong-bok 金成福) 씨의 일상은 단조롭지만 평화로웠다.

김성복 씨(왼쪽)는 1986년 서울 옥수동 아파트 상가 주차장에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작은 구둣방을 마련한 후 지금까지 일요일만 빼고 매일 출근해 일한다.

인생의 첫 운은 부모에게 달렸다.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보듯 좋은 부모는 아이가 전쟁마저 놀이로 느끼게 하는 기적을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녀의 인생을 전쟁터로 만드는 부모도 적지 않다. 구둣방 주인 성복 씨의 어린 시절은 불운하게도 전장 같았다.

그의 고향은 한반도 최남단, 흔히 ‘땅끝마을’로 불리는 전라남도 해남이다.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는 노름을 좋아했고, 그런 남편을 둔 탓에 어머니는 소금과 생선을 팔며 일곱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아홉 살 때는 제무시(GMC) 트럭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를 심하게 다쳤고, 그 바람에 평생 장애를 안은 채 살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차 고치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어느 날 나락을 실어 나르는 제무시가 고장이 났는지 수리를 하고 있더군요. 그걸 지켜보고 있는데, 운전 조수가 다가와 잔심부름을 해 주면 태워 주겠대요. 그래서 물건도 날라 주고 시동 거는 일도 도와줬어요. 그런데 막상 시동이 걸리니까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냥 떠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트럭 뒤에 매달렸는데, 그러다가 달리는 트럭에서 그만 떨어졌어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는 “수많은 신발을 닦고 고치며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고 말하며 웃었다.

일감이 많았던 옛날에는 구두를 닦아서 버는 돈이 훨씬 많았지만, 요즘에는 구두 닦는 고객이 부쩍 줄어들면서 수선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혼자 서울로 간 소년
어린 시절, 동네 어른들은 성복 씨에게 “그 다리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지만, 서울에 가면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을 거다”라며 상경을 권했다. 그 말을 믿었던 성복 씨는 집을 떠나 홀로 무작정 상경했다. 그의 나이 고작 열두 살 때였다. 서울역에 도착해 어디로 갈까 서성이던 어린 소년은 부랑자 두목쯤 되는 사람의 눈에 띄어 ‘찍새’로 일하기 시작했다. 찍새란 서울역 근처 사무실을 돌며 닦아야 할 구두를 수거해 오는 사람을 일컬었다. 그것이 성복 씨가 구두와 맺은 첫 인연이었다.

그렇지만 찍새는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 3년 하다 그만두고 신문팔이와 껌팔이를 했다. 그렇게 가족 없이 혼자 서울을 이리저리 떠돌다 보니 불량한 친구들이 많아졌다. 착실하게 살아 보려고 해도 그런 친구들이 자꾸 찾아와 유혹하니 뜻대로 살 수가 없었다. 그때 그를 잡아준 사람이 어린 시절 옆집에 살던 이유숙(Lee Yu-sook 李柳淑) 씨였다. 그녀도 10대 말에 상경해 여러 가지 일을 하며 힘겹게 살고 있었다.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두 사람은 2년쯤 교제한 후 성복 씨가 스물셋, 유숙 씨 나이 스물에 결혼했다.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을 거예요. 결혼식도 못 올리고 살았지만,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또 그 사람하고 살고 싶어요. 지난 세월, 그 사람도 나처럼 열심히 일했어요. 도배, 미싱, 파출부…. 쉬지 않고 일했고, 지금도 봉제 일을 하고 있죠.”

성복 씨는 결혼 후엔 구두를 닦고 수선하는 일에만 전념했고, 1986년 만 서른다섯 살 때 서울 성동구 옥수동 한 아파트 상가 주차장에 작은 구둣방을 열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30년이 넘게 일요일만 빼곤 한 평짜리 정사각형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자신의 가게로 출근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김없이 오전 9시에는 문을 열고 저녁 6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성복 씨가 노름꾼이었던 자신의 아버지와 다르게 책임감 있는 가장 역할을 하는 동안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한 두 딸은 그에게 세 명의 손자를 안겨 주었다. 이제 그의 삶은 전장을 벗어났지만, 그의 하루는 여전히 군인처럼 규칙적이고 분주하다. 여전히 매일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자신의 승용차로 집에서 30분 걸리는 가게에 출근하는 일과를 거르지 않는다.

구둣방의 어두운 미래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는 구두 한 켤레 닦는 값이 1,500원이었는데 지금은 4,000원이에요. 물가 오른 것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죠. 옛날엔 오토바이에 바구니 달고 구두를 걷으러 다닐 정도로 일감이 많았어요. 20년 전까지만 해도 일이 많아서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온종일 바쁘게 일해야 했거든요. 닦아야 할 구두가 가게 앞에 스무 켤레씩 쌓여 있었으니까요. 덕택에 두 딸 대학 보내고 좀 살 만해졌는데, 요새는 구두 신는 사람도 별로 없고 나도 나이 들어 힘에 부쳐서 오토바이는 안 타요.”

2005년 공무원들의 복장 자유화가 이루어지면서 정장을 입지 않아도 되는 문화가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되자 구두를 신는 사람들도 차츰 줄기 시작했고, 덩달아 구둣방 문전도 한산해져 갔다.

“이젠 아이고 어른이고 다들 운동화처럼 편한 신발을 신잖아요. 그러니까 구두 닦을 일이 없지요. 물론 아직도 일주일에 서너 번씩 구두를 닦는 단골손님들이 있지만 많진 않아요. 게다가 요새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요. 다들 차를 타고 다니니까 구두가 잘 더러워지지도 않고, 길도 다 아스팔트 포장이 돼 있어서 더욱 그렇죠. 예전엔 구두 닦아서 버는 돈이 훨씬 많았지만, 이제는 수입의 절반을 수선으로 벌고 있어요.”

그는 손님이 없을 때는 산책하듯 동네를 돌아다닌다. 한곳에서 33년째 구둣방을 하고 있으니 어딜 가나 아는 사람들이다. 그가 부재중일 때 손님이 가게에 찾아와도 걱정은 없다. 손님들이 가게 문에 적힌 그의 전화번호로 연락을 하기 때문이다. 성복 씨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지금처럼 매일 구둣방으로 출퇴근하며 살고 싶다고 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구둣방의 앞날이 밝지 않다는 것이다.

“이 일은 우리 세대의 직업으로 끝날 것 같아요. 젊은 사람들 중에 이 일을 배우려는 사람조차 없으니까요.”

성복 씨의 말처럼 구둣방은 곧 사라질지 모른다. 오랫동안 이 나라 사람들의 고된 발을 감쌌던 짚신이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근대 이전 이 땅에 살던 대다수 사람들은 지푸라기를 꼬아 엮은 짚신을 신었고,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은 가죽신을 신었다. 가죽신이나 고무신을 전문적으로 닦고 수선하는 신기료장수는 19세기 말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성복 씨가 태어나 자란 1950년대 시골 장터나 도시 변두리엔 으레 신기료장수가 있어서, 갈라지거나 터진 고무신에 접착제를 바르고 달군 쇠로 눌러 붙여 다시 신을 수 있게 해 주었다. 20세기 초 근대화와 함께 들어온 양화(洋靴)가 널리 퍼지며 고무신은 점차 스님들이나 교도소의 재소자들, 시골 노인들만 신는 신이 되었고, 신기료장수들의 일도 대부분 가죽 구두 수선이 되었다. 그 신기료장수의 후예인 성복 씨가 구둣방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성복 씨의 말처럼 구둣방은 곧 사라질지 모른다.
오랫동안 이 나라 사람들의 고된 발을 감쌌던 짚신이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김성복 씨는 구두에 약을 바른 뒤 천에 물을 조금 적셔 문지른다. 그래야 깊이 있는 광택이 나기 때문인데 이런 방법을 ‘물광’이라고 한다.

소박하고 즐거운 삶
“신문팔이, 껌팔이, 다방 주방 청소, 동대문시장 옷가게에서 라벨 찍기, 별의별 거 다 해 봤어요. 이발 기술도 5년이나 배웠고, 창신동 봉제공장 동네 작은 공장에서 여자 기성화 만드는 일도 했었는데 오래 앉아 있으면 다리가 아파서 그만두었어요. 여러 일 중에서 구두 닦는 일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어려서 장애를 얻은 몸인데, 이 일을 하며 참 잘 써먹었지요. 나는 도둑질도 못 하고, 펜대 잡는 일은 더더욱 못 하고, 노는 것도 싫어해요. 언제나 뭔가 일을 해야만 하는 성격이라 이 일이 잘 맞았던 거죠.”

그의 하루는 사계절 내내 다르지 않다. 고작해야 여름엔 7시 반에 퇴근하고 겨울에는 6시에 퇴근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을 부추겨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봄철 꽃바람조차 성복 씨를 컨테이너 박스에서 끌어내진 못한다. 어쩌면 그에겐 여행이 필요 없을지 모른다. 열두 살에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온 이래 그의 삶은 늘 먹고 잘 곳을 찾아 낯선 곳을 헤매는 비자발적 여행 같았으니 말이다. 그는 서울 25개 구(區)의 수만큼이나 이사를 다녀야 했다. 그가 살아 보지 않은 구는 고작 한둘뿐이다.

“일할 때는 손님 많으면 기분 좋고 손님 없을 땐 쉬고, 집에서는 텔레비전 보면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식구들하고 밥 먹고, 그러면 돼요. 일요일이면 아내와 교회에 가지만 거기에 매달리진 않아요. 나는 즐겁게 살아요. 언짢은 일이 생겨도 마음에 잘 담아 두지 않죠. 남한테 줄 거 없고, 받을 거 없고, 남의 눈치 볼 것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다들 내가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고 해요.”

성복 씨의 신산했던 지난 얘기를 듣다 보면 한국의 전래동화 「콩쥐팥쥐」와 외국 동화「신데렐라」가 떠오른다. 가혹한 운명에 시달리던 착한 사람들이 마침내 복을 받아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 고전들에서 악운을 행운으로 바꿔 주는 열쇠가 바로 ‘신발’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로는 벌과 복을 내리는 신과 사람들이 신는 신발, 둘 다 ‘신’이라고 발음한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네가 신고 있는 신은 확실하다. 신을 믿지 말고 네 신을 믿어라’라는 말이 있다. 또 ‘사람의 운명을 정하는 건 신이지만, 운명을 바꾸는 건 신발’이란 말도 있다. 수많은 신발을 고치고 닦으며 어린 시절의 불운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가정의 가장이 된 김성복 씨가 어느 날 문득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말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김흥숙(Kim Heung-sook 金興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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