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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SUMMER

생활

연예토픽 예능 프로그램에 투영된 투어리즘

1983년 제한적으로 시작된 한국인들의 해외 여행은 1989년이 되어서야 완전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요즘에는 매년 해외로 나가는 출국자 수가 무려 3천만 명에 이를 정도로 해외 여행이 보편화되었다. 국내외 여행을 소재로 하는 다양한 TV 예능 프로그램들이 변화하는 한국인들의 여행 문화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여행이 TV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KBS가 2007년 8월에 방영을 시작한 리얼 버라이어티 쇼 <1박 2일>이 처음이었다. 몇 명의 유명 연예인들이 단체로 전국의 숨은 여행지를 찾아다니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은 이 프로그램은 ‘아웃도어 라이프’라는 새로운 여행 문화를 만들었다. 특히 복불복 게임을 통해 지는 편이 한겨울에도 텐트에서 자는 이른바 ‘야외 취침’은 전국의 야영지들을 텐트의 물결로 채워 놓는 진풍경을 만들었다. 당시 텐트는 물론이고 각종 아웃도어 장비 및 의류에 이르기까지 관련 산업이 들썩했을 정도였다. 이와 함께 역사 유적지나 경치가 뛰어난 명소를 찾아 사진을 찍어 남기는 ‘관광 여행’이 실질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체험 여행’으로 바뀌었다.

2019년 3월까지 거의 12년에 걸쳐 장수한 이 프로그램은 한국의 TV 여행 예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나영석(Na Young-seok 羅䁐錫) PD의 작품이다. <1박 2일> 시즌 1 이후 지상파 공영방송 KBS에서 케이블 채널 tvN으로 이적한 그는 후배 PD들과 함께 소위 ‘나영석 사단’을 만들어 여행을 소재로 한 다수의 예능 프로그램들을 연출했다. 이 프로그램들은 한국 TV 여행 예능의 트렌드를 이끌며 대중의 여행 문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런가 하면 동시에 관광에서 체험으로, 국내에서 해외로, 또 단체에서 개인으로 바뀌고 있는 여행 문화를 보여 주기도 한다.

<꽃보다 할배>는 노인들의 배낭여행을 주제로 한 TV 리얼리티 여행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포맷을 사들인 미국 NBC는 를 제작하여 방영했다. Ⓒ tvN

여행 예능에 담긴 정서
2013년, 70세를 넘긴 대여섯 명의 노배우들이 팀을 이루어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꽃보다 할배>가 등장하며 다시 한번 시청자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낭여행은 대학생들이 선호하는 여행 문화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가 자못 신선하게 다가왔다. 노인들의 배낭여행이 TV 예능의 주제가 될 수 있었던 건 해외 여행 러시와 함께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은 중장년층과 노년층의 해외 여행 욕구를 촉발시켰다.

그런가 하면 젊은 연예인 두어 명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오로지 하루 세 끼를 챙겨 먹는 일에만 집중하는 <삼시 세 끼>는 과중한 업무와 사람 관계에서 극심한 피로를 느끼던 도시인들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2014년 시작해 2017년 시즌 7까지 방영된 이 프로그램은 도시에서는 일상적으로 쉽게 해결되는 ‘한 끼’를 만들기 위해 출연자들이 좌충우돌하는 장면들이 웃음과 공감을 이끌어 냈다. 잠시 도시를 떠난 출연자들은 지인들을 불러 한 끼 식사를 같이 차려 먹는 것으로 여행의 색다른 행복감에 젖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런 여행 방식 혹은 친환경적인 라이프스타일이 극단화되어 나타난 게 이른바 ‘오프그리드’ 트렌드다. 나영석 사단은 2018년에는 전기나 가스 같은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는 외딴 숲 속에 집 한 채를 지어 놓고 거기서 지내는 일상을 들여다보는 <숲 속의 작은 집>이라는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고립된 곳이어서 더 잘 들리는 새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깜깜한 밤하늘에 가득한 별들이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치유해 주었다.

<윤식당>은 해외에서 한식당을 열어 현지인 및 관광객들에게 음식을 팔며 소통하는 프로그램이다. Ⓒ tvN

소통을 통해 느끼는 행복
해외에서 한식당을 열어 현지인과 관광객들에게 한식을 판매한다는 설정의 <윤식당>은 한국을 떠나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도하고픈 창업의 욕망과 더불어 외국인들과의 일상적 소통 욕구를 담아 냈다. 여행이란 본질적으로 타인의 삶과 공간을 둘러보는 일이다. 해외 여행을 떠나는 한국인들이 많아진 건 그만큼 더 넓은 세상에 존재하는 타인들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7년과 2018년 두 시즌에 총 20회 방영되어 큰 호응을 얻은 이 프로그램은 그러한 시류를 잘 반영했다.

2019년 3월 방영을 시작한 <스페인 하숙>도 마찬가지로 인기 연예인들이 등장하는 정착형 여행 프로그램인데 한층 더 진화된 의도와 구성을 보여 준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하숙집을 차려 놓고, 그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 따뜻한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순례길의 하숙집이라는 설정은 자연스럽게 그 동네 주민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그곳을 찾는 한국인뿐 아니라 여러 나라 사람들과의 소통을 담아 낸다.

얼핏 한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여행이라는 소재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곳에서, 어떤 인물들과 함께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것을 나영석 사단은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의 여행 문화가 여행자의 취향에 따라 앞으로 한층 더 다양하고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한때는 여행에도 획일화와 집단주의가 두드러졌던 시대가 있었다. 모두가 간다고 하면 나도 꼭 떠나야 할 것 같았던 여행의 시대는 지나갔다. 패키지 투어에서 자유 여행으로, 나아가 개별적으로 계획하는 ‘취향 여행’이 점점 여행 산업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하게 되었다. 다양한 취향을 반영하는 여행 예능 프로그램들이 방송가에 쏟아지고 있는 것은 이렇게 달라진 시대의 공기를 말해 준다.

가장 최근 방영된 <스페인 하숙>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하숙집을 차려 놓고 그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 tvN

정덕현(Jung Duk-hyun 鄭德賢)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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