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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SUMMER

생활

식재료 이야기 호박에 숨어 있는 시간

호박은 어릴적 밥상을 떠올리게 하는 친숙한 재료이고, 밑반찬은 물론 주식으로까지 활용할 수 있다. 또한 호박은 과육뿐 아니라 씨와 꽃, 넝쿨도 먹을 수 있어 쓰임새가 많다.

가을과 겨울이 제철인 늙은 호박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식재료이다. 추운 겨울철 찹쌀가루와 섞어 죽을 해 먹기도 하고, 산후 부기를 제거하는 데 효과가 있어 아기를 낳은 산모들이 즙을 마시곤 한다. Ⓒ 토픽

계절이 변하면 우리가 먹는 호박도 변한다. 얇은 껍질을 벗기지 않고 그대로 먹을 수 있는 부드러운 육질의 호박은 여름을 의미하고, 단단하고 두꺼운 껍질 속에 고구마 같은 질감과 맛을 내는 노란 속살을 숨기고 있는 호박은 겨울을 의미한다. 그러나 수확 계절에 따라 호박의 특성을 나누는 이러한 구분이 모든 경우에 다 들어맞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흔히 호박을 애호박과 늙은 호박으로 구분하여 부르는데, 둘은 같은 품종일 수도 있고 다른 품종일 수도 있다. 여름철 연한 녹색 빛의 덜 자란 조선애호박과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럭비공처럼 커다랗게 자란 황갈색의 늙은 호박은 같은 품종이다. 하지만 요즘 늙은 호박은 청둥호박처럼 아예 다른 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늙은 호박을 밀어내고 인기를 구가하는 단호박도 연중 내내 구할 수 있기는 하지만 맛과 질감, 저장 기간에서 겨울 호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과 이야기에 등장하다
호박에는 또 다른 시간이 숨어 있다. 그림의 소재로 호박이 등장하면 그 그림이 어느 시기에 그려진 것인지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화가 바르톨로메오 빔비(Bartolomeo Bimbi)의 작품 <피사의 대공 정원에 있는 거대한 호박>(Giant Squash from the Ducal Gardens in Pisa)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약 80킬로그램이나 되는 엄청난 크기의 호박을 보여 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호박을 화가의 작업실까지 운반하기 위해 두 명의 힘센 남자가 필요했고, 그 장면을 보려는 구경꾼들이 박수를 치며 뒤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 그림 속 호박은 현대의 거대 호박에 비하면 그리 크진 않다. 세계 기록을 보유한 호박은 2016년 벨기에에서 수확되었는데 무게가 무려 1,190.5kg에 달했다. 여하튼 빔비의 그림 속 호박을 보고 우리는 그가 그림을 그린 시기가 적어도 16세기 이후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인 호박은 기원전 5000년 무렵부터 재배되었으나 유럽에 이 채소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빔비의 작품은 1711년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것이다. 밀라노 출신의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의 <베르툼누스>(Vertumnus)에는 호박을 비롯해 여러 채소와 과일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이 그려진 시기는 1590년경이다. 이 그림 속에서 호박은 옥수수와 함께 신세계에서 온 작물로 등장한다.

이야기 속에 호박이 처음 나타나는 시기도 비슷하다. 신데렐라 이야기 속 요정이 마법을 부려 호박을 황금마차로 변신시키는 장면은 옛날이야기 같지만 실은 오래 전부터 구전되던 이야기에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가 1697년 추가한 내용이다. 1597년경 쓰여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에도 호박이 등장한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포드 부인은 과식과 과음을 즐기는 호색가 폴스태프의 성격을 빗대 “물기가 많은 호박 같다(this unwholesome humidity, this gross watery pumpkin)” 고 말한다. 사람들이 아직 호박과 덜 친숙했던 시절의 유럽에서 커다란 늙은 호박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은 뚱뚱하고 자기 중심적인 성격의 인물을 묘사하는 데 적당했을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호박을 기념하는 축제를 열 정도로 호박을 사랑했지만,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처음에는 호박을 시골 가난뱅이의 먹거리로 멸시하곤 했다.

추억의 음식
오늘날 한국에서도 못생긴 사람을 종종 호박에 비유한다. 그러나 소설가 박완서(1931~2011)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반들반들 윤기 나고 허리가 잘록한 애호박을 보면 뭐를 해 먹겠다는 생각 없이 일단 사고 본다고 했다. 또한 남의 집 담장이나 울타리를 타고 올라간 호박 덩쿨 사이에서 동그란 토종 애호박을 보면 어찌나 예쁜지 슬쩍 따 가고 싶은 마음까지 동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정말 사랑한 것은 호박이 아니라 호박잎이었다. 산문집 『호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싱싱한 호박잎을 잎맥의 까실한 줄기를 벗기고 깨끗이 씻어서 뜸들 무렵의 밥 위에 얹어 부드럽고 말랑하게 쪄내는 한편 뚝배기에 강된장을 지진다. 된장이 맛있어야 한다. 된장을 뚝 떠다가 거르지 말고 그대로 뚝배기에 넣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마늘 다진 것, 대파 숭덩숭덩 썬 것과 함께 고루 버무리고 나서 쌀뜨물 받아 붓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풋고추 썬 것을 거의 된장과 같은 양으로 듬뿍 넣고 또 한소끔 끓이면 되직해진다. 다만 예전보다 간사스러워진 혀끝을 위해 된장을 양념할 때 멸치를 좀 부숴 넣어도 좋고, 호박잎을 밥솥 대신 찜통에다 쪄도 상관없다.”

호박잎은 여름부터 가을 찬바람 날 무렵까지 맛볼 수 있는 계절의 별미다. 말랑하지만 서걱거리는 호박잎 속에 감칠맛 가득한 강된장과 밥알이 씹힐 때 대비되는 맛과 질감은 그저 계속 먹을 수밖에 없이 매혹적이다. 그리하여 박완서의 표현처럼 “마침내 그리움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흐뭇하고 나른해진다.” 그에게 그 맛은 반세기 전 고향의 소박한 밥상과 호박 덩쿨이 기어 올라가던 울타리와 텃밭과 장독대, 그리고 고향에 당도했을 때의 피곤한 안도감까지 떠오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호박은 세상 누구에게나 추억의 음식이다. 호박을 넣은 라따뚜이 없는 프로방스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탈리아에서는 애호박 꽃을 즐겨 먹는 것이 오래된 전통인데, 16세기 빈첸초 캄피(Vincenzo Campi)의 그림 <과일 장수>에는 과일, 채소와 함께 식용 호박꽃이 나온다. 호박의 원산지인 중남미에서도 예부터 호박꽃을 먹었다. 멕시코에서는 호박꽃을 넣은 수프나 호박꽃을 오악사카 치즈로 채운 요리가 인기 있다.

값이 싸고 맛도 좋은 애호박은 여름철 밥상 위에 자주 올라가는 반찬 재료인데, 열매는 물론 잎도 즐겨 먹는다. 연한 잎을 찌거나 데친 후 밥에 쌈장을 올려 싸 먹는다.

된장찌개에 넣어 먹고 국수 고명으로도 자주 사용하지만, 얇게 썬 호박에 밀가루와 달걀물을 묻혀 부쳐낸 호박전은 달콤한 풍미가 일품이다.

멥쌀가루에 늙은 호박 과육과 소금, 설탕을 넣고 찐 호박떡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별미 간식이다.

호박선은 지역마다 만드는 방법이 약간씩 다른데, 칼집을 낸 사이사이에 양념한 소를 넣고 익혀 먹는 방식은 공통적이다. 옛 문헌에도 조리법이 나온다.

호박전은 만드는 방법이 간단하고 맛이 있어 가정에서 즐겨 해 먹는 반찬이다. 애호박을 가로로 도톰하게 썰어 밀가루와 달걀 물을 입힌 후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부친다.

여름 호박과 겨울 호박
호박은 추억의 음식이면서 동시에 최신 트렌드에 맞는 음식이기도 하다. 저지방, 저칼로리에 단백질, 탄수화물, 비타민A, 칼륨, 섬유질이 풍부하니 늘 체중과 다이어트를 고민하는 현대인에게 매력이 충분하다. 스파이럴라이저로 국수 모양으로 뽑은 주키니를 밀가루 면 대신 먹는 것이 최신 유행이지만, 익히면 속살이 국숫발처럼 풀어지는 스파게티호박 품종도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존재했다.

여름 호박은 특히 품종이 다양하다. 길쭉하게 생긴 녹색의 주키니가 있는가 하면 모양은 같아도 버섯 풍미가 살짝 도는 노란색 주키니도 있다. 진한 푸른색, 노란색, 오렌지색, 황록색 등 색깔도 가지각색이지만 모양과 크기도 다양하다. 도토리처럼 생긴 도토리호박도 있고, 납작하게 눌러놓은 모양에 가장자리는 가리비처럼 생긴 패티팬호박도 있다. 요즘은 여름 호박이라도 연중 내내 구할 수 있지만 그래도 여름 호박은 여름철에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15~20cm 정도로 작고 어릴 때 딴 것이 물기가 적어서 맛이 더 달다. 된장찌개에 넣어 먹고 국수 고명으로도 자주 사용하지만, 얇게 썬 호박에 밀가루와 달걀물을 묻혀 부쳐낸 호박전은 달콤한 풍미가 일품이다.

호박은 감칠맛과 잘 어울린다. 19세기 말 조선의 상차림과 조리법을 정리한 책 『시의전서』(是議全書)에 나오는 호박선 조리법도 호박에 감칠맛을 더한 찜 요리다. 주먹만 한 크기의 어린 호박을 쪼개어 어슷어슷하게 등에 칼집을 내고 푹 쪄낸 다음 다진 쇠고기를 파, 마늘, 후춧가루, 기름, 꿀과 같은 양념으로 볶아 만든 소를 칼집 사이사이에 넣고 표고, 느타리, 석이버섯, 실고추, 달걀부침 채친 것을 얹어낸다. 100년 전 음식이지만 요즘 밥상에 올려도 손색이 없는 멋진 조리법이라 이를 재현해 보려는 사람이 많다. 새우젓과 애호박을 함께 볶아 들기름을 더해 먹는 방식도 한국인이 애용하는 호박 요리법이다.

보관 기간이 짧은 여름 호박에 반해 겨울 호박은 전분 함량이 높고 수개월까지 보관이 가능하다. 겨울 호박은 카로티노이드가 풍부하여 노란색, 오렌지색을 띤 것들이 주종이지만 녹색 줄무늬를 띄거나 알록달록한 것도 있다. 날로 먹기에는 단단하지만 익히면 달콤한 풍미를 내는 고구마처럼 변한다. 버터넛스쿼시 같은 겨울 호박을 오랫동안 천천히 가열하면 글루탐산이 녹아나오며 감칠맛이 더 풍부해진다. 서구에서 호박을 넣은 파이와 타르트, 수프를 즐겨 먹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겨울철이면 호박죽을 간식으로 먹는다. 오븐에 구워서 꿀을 뿌려 먹거나 그냥 쪄서 먹어도 맛있다. 호박과 함께 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못생긴 사람을 호박에 비기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도시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라는 박완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정재훈(Jeong Jae-hoon 鄭載勳) 약사, 푸드 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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