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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AUTUMN

문화 예술

아트 리뷰 미술관에서 경험하는 춤

민머리와 화려한 의상으로 흔히 기억되는 현대무용가 안은미(Ahn Eun-me 安恩美)는 자신이 거둔 과거의 성취를 과시하듯 늘어놓지 않는다. 그의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회고전 <안은미래(known future)>도 관객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다목적 공간을 연출해서 다양한 참여를 유도한다. 상당히 선동적인 이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6월 26일 개막해 9월 29일까지 계속된다.

‘21세기 무당’으로 알려진 현대 무용가 안은미는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격려하고 포옹하며 잠시나마 덩실덩실 춤추게 한다. 근엄한 얼굴로 현실을 비평하거나 어려운 이론을 바탕으로 미래를 진단하는 것 같은 일은 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선 거의 언제나 화려한 색채와 생동감 있는 다채로운 표정이 넘쳐난다. 그의 무용 인생 30주년을 돌아 보는 <안은미래>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기획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관습적 방식을 거부하고 미술관 한편에 자리를 요구했다.

모더니즘 시절의 현대 미술관들이 화이트 큐브를 표방했다면, 21세기의 주요 미술관들은 다원적 미술 공간이 되기를 희망하며 여러 실험을 시도해 왔다. 예컨대 뉴욕 모마미술관은 현대 무용을 적극적으로 포용해 왔다. 또한 오늘의 미술관이 시민들을 위한 자기 주도적 학습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안은미래>전은 여러모로 시대정신에 부합한다.

마치 안은미의 페르소나처럼 전시장 초입에서 그의 의상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2016년 작 <세상의 모든 가능성>에서 입은 의상이다.

무대가 된 전시 공간
이 전시는 공간의 변이를 통해 사람들의 행동 프로토콜 변화를 유도한다. 전시장 입구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들을 맞는 것은 안은미의 주요 무대 의상들이다. 천장에 매달아 늘어뜨려 놓은 의상들은 시각적으로 무척 화려할 뿐 아니라 관객들은 이 의상들이 머리와 얼굴을 스칠 때 다양한 질감을 경험한다. 이곳을 지나면 2016년 작 <세상의 모든 가능성>에 사용된 의상이 안은미의 페르소나처럼 환영의 제스처를 취한다. 다시 비즈 커튼을 가르고 전진하면, 이번엔 그의 모습을 담은 풍선공이 바닥에 가득한 공간이 나타난다. 전시 소개 글과 영상, 주요 작품 이력, 그리고 작업 세계를 스스로 해설하는 에세이가 벽화와 함께 펼쳐진다. 여기까지가 이번 전시의 서막이다.

다음 공간으로 이동하면 키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는 은색 기둥들과 주요 작품을 다중 스크린으로 제시하는 우물들, 무지개색 커튼이 나타난다. 이번 전시의 진짜 핵심은 그 뒤에 펼쳐지는 낮고 드넓은 무대이다. 무대용 조명과 디스코볼, 원형 판으로 가득한 벽면과 의상 교체가 가능한 드레스룸, 사운드로 공간을 꽉 채우는 스피커들과 두 마리의 해태 조각상 등이 무대를 보좌한다.

‘이승/저승’이라 이름 붙인 이 공간에서 안은미는 퍼포먼스와 강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몸춤’ 프로그램에선 대중들을 위한 강의가 제공되고, ‘눈춤’ 시간엔 신작을 안무하고 리허설하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입춤’ 시간엔 강연과 토론이 이어진다. ‘몸춤’과 ‘입춤’은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사전 신청을 받아 진행하는데 참가비는 무료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과 설치미술가 양혜규(Yang Hae-gue 梁慧圭)의 강연도 눈에 띄지만, 관객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시간은 안은미의 몸 털기 레슨이다. 미술관의 문턱 낮은 무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재발견하고 잘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일에 많은 관람객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분위기다.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는 ‘이승/저승’을 지난 관객은 커다란 전광판 2대를 통해 영상 작업을 보게 된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의 춤 동작에서 시작해 할머니들의 막춤에 이르기까지 구작과 신작이 다채롭게 교차 편집된 영상인데, 핵심은 안은미가 발견한 ‘춤의 보편성’에 있다. 걷기 시작한 아기들의 원초적 춤과 평생 노동으로 등이 굽고 다리가 휜 할머니들의 춤에는 공통점이 있다. 앞으로 숙이고 뻗는 노동의 움직임과는 다른 방향으로 근육과 관절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살기 위해 노동해야 하는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원초적 움직임을 통해 기쁨과 슬픔을 표출하는 자존의 행위— 춤의 본질은 바로 거기에 있다는 이야기다.

이 공간을 지나면 울긋불긋하고 물컹한 ‘안은미식 침대’가 나타나고, 그간의 의상 디자인 원안들과 공연 팸플릿 등을 무용 음악과 함께 보여 준다. 이전 공간들에서 풍선공을 발로 밀거나 차던 관객들은 이곳에선 침대에 누워 셀피를 찍거나 자료를 검색하며 시간을 보낸다. 안녕히 가시라는 메시지가 적힌 투명 커튼을 밀고 전시장을 나서면 곧 출간될 30주년 기념 아카이브 도록이 빙글빙글 돌며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이승/저승’이라는 이름의 낮고 드넓은 이 무대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핵심적인 공간으로 다양한 퍼포먼스와 강연 프로그램이 여기서 진행된다.

독자적 추상 어법
1988년 <종이 계단>을 발표하며 독립 예술가로서 활동을 개시한 안은미는 서양 무용의 형식과 방법론을 추종하며 아름다운 몸짓을 강조하던 국내 무용계의 관행을 버리고, 비무용적인 ‘몸말’을 새롭게 도입했다. 그는 한국 전통 무용의 어법과 구미 현대 무용의 어법을 뒤섞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데뷔 초기와 뉴욕에서 거주하며 활동하던 시기를 포함하는 1990년대에는 사회 현실에 기반을 둔 주제, 타 장르 예술가와의 협업, 원색과 사물의 적극적 사용, 시각 이미지로 구현한 무대 등을 통해 현상학적 현존을 넘어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무용 언어를 실험하고 개척했다. 이 시기를 짧게 정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국화, 한국 춤의 포스트모던화’라고 할 수 있다.

대구시립무용단장으로 취임하며 대작을 발표했던 2000년대 초반에는 무용과 연극을 결합해 서사성의 회복을 추구한 피나 바우쉬(Pina Bausch)의 ‘탄츠테아터’를 범본 삼아 한국식 탄츠테아터의 영역을 개척했다. 하지만 한국식으로 ‘버내큘러 탄츠테아터(Vernacular Tanztheater)’를 시도하고 실현하는 단계에 안주하지 않았다.

2004년 피나 바우쉬 페스티벌에서 초연한 에서 안은미는 방법론적 도약을 이뤘다. 비무용적 몸동작들을 반복하고 변주하고 구축함으로써 그는 다시 한 번 현대 무용의 추상 세계로 전진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세계에서 독자적으로 추상 어법을 만들어 낸 안무가는 윌리엄 포사이드(William Forsythe)와 안은미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안은미의 다양한 작품을 편집한 영상이 두 개의 커다란 전광판에 비춰진다. 관객들은 ‘춤의 보편성’이 일관된 주제임을 느낄 수 있다.

관객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시간은 안은미의 몸 털기 레슨이다. 미술관의 문턱 낮은 무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재발견하고 잘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일에 많은 관람객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분위기다.

보편적 몸말의 탐색
2011년부터는 할머니·청소년·아저씨를 문화인류학적 탐구 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실재를 무대 위에 인용, 구현하는 실험에 도전했다.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에서 그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몸말을 수집하고, 또 실제 인물들을 무대 위에 올려서 조사 연구한 바를 바탕으로 안무한 작품과 병치·혼합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그는 “무대용 작업을 25년 동안 해오면서 세상을 향해 뭔가를 토해내고 호소했다면, 이제 뭔가 그와 반대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춤을 돌려주고 싶다’는 안은미의 꿈은 그로 하여금 다원성을 표방하는 미술관을 매체로 활용하도록 이끌었다. 21세기의 미술관이라는 새로운 조건 아래에서 그는 자신을 갱신하고, 무용수들을 갱신하고, 관람객을 갱신하려 든다. 이렇게 계속 시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미술관도 갱신되지 않을까.

6월 26일 서울시립미술관 1층 로비에서 펼쳐진 <안은미래전> 개막 공연을 관객들이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현대무용가 안은미의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안은미래전> 포스터에 사용된 스스로 삭발하는 장면.

임근준(Michael Lim 林勤埈)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Art and Design Histo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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