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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WINTER

문화 예술

FOCUS 괴물, 사이보그, 유토피아의 희망과 절망 사이

이불(Lee Bul 李昢)은 예리한 사회 비판과 역사 의식, 유토피아에 대한 인본주의적 탐구 속에 자신의 개인적 서사를 투영하는 작업을 해 왔다. 얼핏 괴기하고 섬뜩하지만 동시에 장엄한 느낌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그의 작품들은 이미 오래전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올해 5월 호암재단으로부터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한 그의 최근 행보와 작품 세계를 들여다본다.

“취약할 의향 – 메탈라이즈드 벌룬 V3” 2015-2019. 나일론 타프타 천, 은박 폴리에스터, 송풍기, 전선, 폴리카보네이트 미러. 230 x 1000 x 230 cm. ‘인카운터스’ 섹터, 2019 홍콩 아트바젤. 사진 제공: 작가, 리만 머핀 갤러리, PKM 갤러리,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

런던의 헤이워드 갤러리는 개관 50주년을 맞아 작년 6월부터 8월까지 특별 기획전으로 "이불: 크래싱(Lee Bul: Crashing)을 개최했다. 한국의 대표적 현대 작가 이불의 198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30년 예술 활동을 100여 점의 작품을 통해 돌아본 이 대규모 회고전은 이어서 베를린의 마틴-그로피우스 바우 미술관으로 옮겨 "이불: 크래시(Lee Bul: Crash)라는 제목으로 작년 9월부터 올 1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불은 올해도 활발한 행보를 이어나갔다. 3월에는 아시아 최대의 미술 축제인 아트바젤 홍콩의 요청으로 홍콩컨벤션센터 1층 전시장 입구에 은빛 비행선을 띄웠다. 이 설치 작품은 헤이워드 갤러리와 마틴-그로피우스 바우 미술관 전시에서도 선보인 바 있는 "취약할 의향 - 메탈라이즈드 벌룬(Willing To Be Vulnerable - Metalized Balloon 2015~2016)으로 관람객들이 작품을 배경으로 앞다퉈 사진을 찍을 만큼 인기가 있었다. 2019년 아트바젤 홍콩의 테마 ‘Still We Rise’는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들어 그의 가장 뜻깊은 활동은 역시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 참여일 것이다. 1999년 한국관 대표 작가로 참여한 그는 당시 특별상을 받았는데, 이번 전시로 그는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두 번 초대된 최초의 한국 작가가 되었다. 이처럼 이불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가 된 이유는 아마도 그의 도발적인 문제 의식과 이를 표현하는 정력적인 창작 활동에 대한 놀라움과 공감 때문일 것이다.

“히드라 II (모뉴먼트)” 1999. 비닐에 사진 프린트, 에어 펌프. 1200 × 700 × 600 cm. "핫 에어전, 일본 시즈오카 그란십센터. 야스노리 타니오카 촬영, 난조 앤 어소시에이츠 제공

전위와 파격
내가 이불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미술관이 아니라 1990년대 말 발행된 한 패션 잡지에서였다. 두 면에 걸쳐 커다랗게 실린 사진 속 여자는 보디수트와 망사 스타킹, 비단 가운을 입고 머리에는 구슬 장식을 주렁주렁 매단 채 가죽 부츠를 신고 서 있었다. 압권은 보디수트에 붙어 있는 3개의 아기 인형 머리였다. 참으로 기괴하면서도 관능적이고, 무시무시하면서도 우스꽝스러웠다. 당시에는 그저 전위적인 패션 화보인 줄로 알았지만, 몇 년 후에야 그것이 이불의 초기 대표작인 풍선 설치 작품 "히드라: 모뉴먼트"(Hydra: Monument, 1998)에 프린트하기 위해 찍은 작가 자신의 사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히드라’는 그리스 신화 속 영웅 헤라클레스가 물리친 9개의 머리를 가진 물뱀인데,머리 하나를 자르면 두 개가 더 생기는 재생력을 가진 공포스러운 괴물이다. 이불은 그런 히드라를 동서양 잡종 문화와 오리엔탈리즘 판타지로 뒤덮고는, 마냥 순종적일 것이라는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강렬한 이미지로 반격했다. "히드라: 모뉴먼트"와 함께 내 머리에 이불이라는 이름을 깊게 각인시킨 작품은 구슬꽃으로 곱게 치장한 날생선들이 천천히 썩어가는 "화엄"(Majestic Splendor, 1991)이다.

"화엄"은 1997년 뉴욕 현대미술관에 설치되었다가 지독한 냄새로 인해 위층에서 열리는 미국 유명 작가의 전시 오프닝 직전 철거되면서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격년으로 수여하는 휴고 보스상의 1998년도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이불의 세계적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은 그 후 20년간 전시되지 않다가 2016년 서울 아트선재센터의 "커넥트 1: 스틸 액츠(Connect 1: Still Acts) 전시를 위해 다시 제작됐기 때문에 실물을 보고 싶었던 내 열망은 그때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내가 "화엄"에 큰 흥미를 느낀 이유는 그것이 동서양 미술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포스트모던한 도발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휘황찬란한 구슬꽃에 둘러싸여 부패해 가는 생선은 17세기 유럽의 바니타스 정물화와 닮아 있으며, 일본 불화 구상도(九相圖)와도 일맥상통한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아름다운 사치품들이 해골, 촛불, 모래시계 등과 함께 놓여 있는 그림으로 죽음 앞에 모든 것이 덧없음을 상징한다. 구상도 또한 아름다운 여인의 시신이 부패해 가는 과정을 아홉 단계로 그려내 만물이 무상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듯 낯선 시도가 아니었음에도 "화엄"이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것은 ‘신전’이 된 미술관에 생명의 부패 과정과 그에 따른 지독한 냄새를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진정한 힘은 생선이 부패하면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할 때이고, 이는 후각이 배제되었던 시각예술의 관습적 위계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다. 뉴욕 현대미술관이 냄새 때문에 "화엄"을 철거한 것은 역설적으로 이 작품의 의미를 방증한 셈이다. 이불은 자신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구슬을 꿰었던 작업에서 생선의 구슬 장식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군사독재 시절 반정부 운동가로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어려운 생활을 했고, 구슬 가방 만들기 같은 가내노동으로 생계를 꾸렸다.

왼쪽부터 : "사이보그 W1". (왼쪽 첫 번째) 1998. 캐스트 실리콘, 폴리우레탄 충전물, 페인트 피그먼트. 185 × 56 × 58 cm. "몬스터: 핑크". (왼쪽 두 번째) 1998. 패브릭, 섬유 충전물, 스테인리스 스틸 프레임, 아크릴 물감. 210 x 210 x 180 cm. "사이보그 W2". (가운데) 1998. 캐스트 실리콘, 폴리우레탄 충전물, 페인트 피그먼트. 185 × 74 × 58 cm. "사이보그 W4". (오른쪽 끝) 1998. 캐스트 실리콘, 폴리우레탄 충전물, 페인트 피그먼트. 188 × 60 × 50 cm. "이불"전 전시 전경, 서울 아트선재센터, 1998 이재용 촬영, 아트선재센터 제공

경계를 초월한 잡종
2000년 전후까지 이불의 작업에서는 여성이자 아시아인으로서 정체성 인식과 관습적 통념을 전복하려는 시도가 처절하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주로 신체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진다. 그의 조각 연작 "몬스터"(Monster, 1998)를 보자. 인체, 문어, 말미잘, 인삼 뿌리 같은 여러 동식물이 융합된 듯한 형태와 부드러운 촉감을 가진 촉수 괴물들은 매우 육감적이면서 거부감과 매혹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이들은 본래 작가가 1990년 전후 야외 퍼포먼스에서 착용했던 괴물 의상들이 독립된 조각으로 변형, 발전된 것이다. 그는 날고기 같은 붉고 하얀 근육에 여러 개의 팔다리와 촉수가 달린 옷을 입고, 12일 동안 도쿄 거리를 활보했다. 그의 거리 퍼포먼스 "수난유감 -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낀 줄 아냐?(Sorry for suffering – You think I’m a puppy on a picnic?)는 인간과 괴물, 이성과 감성, 남성과 여성 등 관습적 이분법에 대한 신랄한 문제 제기였다.

그는 "몬스터" 연작과 동시에 또 다른 대안적 신체인 "사이보그"(Cyborg 1997~2011) 연작도 선보였는데, 이 작품들은 런던과 베를린 회고전에도 "몬스터" 연작과 함께 전시되었다. "사이보그" 연작은 일본 애니메이션 풍으로 가슴과 엉덩이는 두드러지고 허리는 잘록한 과장된 체형의 여성 로봇들이다. 마치 그리스 조각을 대체할 듯한 순백의 여신상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팔다리가 하나씩 결여된 불완전한 모습으로 공중에 매달려 있다.

이 연작은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페미니스트 과학 철학자인 도나 해러웨이의 유명한 에세이 「사이보그 선언문」(A Cyborg Manifesto, 1985)에서 영향을 받았다. ‘cybernetic organism’의 준말인 사이보그는 한마디로 유기체와 기계가 결합된 존재를 말한다. 해러웨이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그리는 SF 영화들과 달리 사이보그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데, 그 까닭은 사이보그를 통해 “그간의 성별·인종 등의 차별적 경계와 구분을 초월하여 우리의 감각을 확장시키고 새로운 정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사이보그적 연립-친화로 일상생활의 경계를 재구축하는 것이 향후 페미니즘 정치의 나아갈 길이라고 말하며, “나는 여신보다 차라리 사이보그가 되겠다”(I would rather be a cyborg than a goddess.)라는 유명한 말로 에세이의 끝을 맺는다.

이불이 촉수 달린 괴물 의상을 입고 거리를 활보한 것은 ‘경계를 초월하는 잡종’으로서 넓은 의미에서 사이보그적 정체성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몬스터"와 "사이보그" 연작의 융합이자 진화라고 할 수 있는 "아나그램(Anagram, 1999~2006) 연작은 곤충, 식물, 기계를 결합시킴으로써 더욱 확장된 정체성을 지니며, 이는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문과 아주 잘 어울린다.

이불의 작업 전반에는
아름다움과 공포, 연약함과 힘의 독특한 병치가 나타난다.
그것은 패배주의와는 다른,
지속적인 희망과 절망의 공존을 상징한다.

이불은 역사적, 사회적 현상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고유한 예술 세계를 구축해 왔으며, 동시대 미술계를 선도하는 예술가로 주목받고 있다. 리 판 촬영, 이불 스튜디오 제공(Photo by Le Pan, Courtesy of Studio Lee Bul)

"마제스틱 스플랜더" (부분). 1997. 생선, 장식 구슬, 과망가니즈산칼륨, 마일러 백. 로버트 푸글리시 촬영, 이불 스튜디오 제공

역사와 시대에 대한 성찰
사이보그를 통해 신체와 사회적 억압의 상관 관계를 탐색했던 이불은 "나의 거대 서사"(Mon Grand Récit, 2005~) 연작에 이르러 또 다른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 연작은 유토피아를 지향한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대표적 건축물과 발명품을 모티프로 하는데, 그는 여기에 폐허 같은 풍경을 접목시킴으로써 실패한 유토피아의 꿈을 다룬다. 한때 기술 진보와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었으나 1937년 폭발로 대참사를 일으킨 힌덴부르크 비행선을 모티프로 한 작품들이 대표적인 예다. 이 작품들은 2014년에 열렸던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이불" 전에 등장했다.

"나의 거대 서사" 연작에서 이불은 격변을 겪어온 한국 사회의 풍경에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녹여낸다. 그는 모더니즘 시대의 ‘거대 서사’에 회의와 불신을 표명했던 철학자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의 말에 주목하며 역사와 시대를 성찰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소개글에 의하면 “작가는 거대 서사의 불가능성을 인식, 이에 파편화되고 완전하지 않으며 미해결된 채 지속적으로 부유하는 ‘작은’ 이야기들”을 다루고자 했으며, “역사에서 드러난 부패의 흔적, 모더니즘 이상주의의 실패, 그럼에도 여전히 개인들의 의식과 일상에 등장하는 모던 망령들에 대해 관객들이 새삼 숙고하게끔” 유도했다.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려 인간의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고 유토피아를 이루려 하는 희망과 그 좌절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사이보그" 연작으로 대변되는 2000년대 초까지의 작품들과 그 이후의 "나의 거대 서사" 연작은 외관상 달라 보이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연결된다. 지난해 런던과 베를린의 회고전을 기획한 스테파니 로젠탈(Stephanie Rosenthal)이 말한 것처럼 이불의 작업 전반에는 “아름다움과 공포, 연약함과 힘의 독특한 병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패배주의와는 다른, 지속적인 희망과 절망의 공존을 상징한다.

문소영(Moon So-young 文昭暎)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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