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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SPRING

CULTURE & ART

Focus 고통을 말하는 두 가지 방식

『소년이 온다』(2014)는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바 있는 한강(Han Kang 韓江)이 1980년 5월 광주의 민주화 운동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 두 편이 2019년 말 한국과 폴란드에서 비슷한 시기에 무대에 올랐다. 역사의 격변기에 참혹한 경험을 한 두 나라의 연극인들이 이 작품을 해석하고 무대에 올리고 교류하며 올 5월과 11월에는 양국에서 나란히 번갈아 공연할 예정이다.

2019년 남산예술센터 시즌 프로그램의 마지막 작품인 <휴먼 푸가>(Human Fuga)는 1980년 5월 광주 시민과 계엄군 사이에 벌어졌던 투쟁과 학살의 참혹한 사건을 다뤘다. 남산예술센터와 공연 창작 집단 ‘뛰다’(Performance Group TUIDA)가 공동 제작한 이 작품은 한강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가 원작인데, 원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원작이 있었기 때문에 연극적 접근이 쉽지 않았다. 한국 현대사의 참사를 상징하는 단어가 된 ‘광주’ 문제가 아직 일단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제작진은 어떤 길로 가야 할지 고민이 깊었다.

2019년 11월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상연된 연극 <휴먼 푸가>의 한 장면. 한강의 원작 소설 <소년이 온다>의 서사를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배우들의 몸짓과 음악, 무대 장치를 통해 인물들의 내면 세계를 표현했다. 이승희 촬영, 남산예술센터 제공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
국내에서는 일반적으로 한 작품을 준비하는 데 대략 3개월 정도 시간이 걸린다. 역시 우리 시대의 주요 화두를 다루었던 남산예술센터의 2019년도 두 작품 —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건을 다룬 <7번 국도>와 세월호 참사 5주기를 기념하는 <명왕성에서> — 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무대에 올리기까지 10개월 이상 소요된 이 작품은 매우 이례적이다. <휴먼 푸가>의 제작진과 배우들은 2019년 11월 공연을 위해 1월부터 광범위한 리서치와 토론, 연습을 계속했다.

우리는 소설의 서사를 그대로 재현한다면 이 사건과 원작의 의미를 퇴색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써 설명하거나 연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배우들은 절제된 몸짓을 통해, 때로는 무용수의 춤사위 같은 격정적인 몸부림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아물지 않은 상처와 고통 받고 있는 내면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고통을 대사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의 몸짓을 통해 관객들이 느끼도록 했다.

또한 하나의 주제를 자유롭게 모방하는 음악 형식인 푸가처럼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생겨난 고통이 여러 사람들의 삶을 통해 반복되면서 변주되도록 극을 구성했다. 이런 연유로 서사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있어 관객들은 각 등장인물의 기억과 증언을 그때그때 단편적으로 따라가야 하지만, 각 인물들의 감정은 더 직접적으로 체감될 수 있었다.

이런 노력이 빛을 본 덕분에 <휴먼 푸가>는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광주 문제를 신체를 통해 연극, 춤, 설치예술을 포괄하면서 혼신의 힘으로 창작한 품격 있는 공연”이라는 평을 받으며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에 선정됐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이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광주를 오갈 적에 저 멀리 타국에서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광주를 수도 없이 들여다보았던 다른 팀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국내 한 일간지를 통해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하는 다른 공연 소식을 듣게 됐다. 이 소설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은 폴란드 연출가 마르친 비에슈호프스키(Marcin Wierzchowski)가 연극으로 각색할 생각을 하고 5․18기념재단을 통해 한강 작가와 접촉한 것이었다.

같은 소설을 토대로 삼은 두 편의 연극이 한국과 폴란드에서 비슷한 시기에 상연된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우리는 두 공연을 양국에서 함께 선보이면 어떨까 생각했다. 이메일과 국제전화를 통해 공연 교류 프로젝트를 준비하다가 서로의 공연을 직접 보기로 했다. 광주의 아픔이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는 한국 사회와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의 아픔을 가진 폴란드 사회가 공유하는 정서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원작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제작 의도나 연출 방향까지 같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2019년 10월에는 한국 제작진이 폴란드를, 11월에는 폴란드 제작진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배요섭이 연출한 <휴먼 푸가>(왼쪽)와 마르친 비에슈호프스키가 연출한 의 포스터. <휴먼 푸가>의 포스터는 광주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을 담았고, 의 포스터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을 촬영한 사진 기자 김녕만(Kim Nyung-man 金寧万)의 작품이 등장한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2019년 10월 폴란드 크라쿠프의 스타리국립극장에서 막을 올린 1부에서 전남도청 앞 광장에 시민군 시신을 안치했던 5.18 당시 상황을 재현한 장면이다. 이 연극은 <휴먼 푸가>와 달리 원작의 서사를 따라 장면을 구성했다. Magda Hueckel 촬영, 스타리국립극장 제공

하나의 원작, 전혀 다른 연출
국내 관계자들이 폴란드 크라쿠프(Krakow)에 방문해 관람한 은 장장 5시간 동안 진행되는 긴 공연이었다. 1부는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구성했고, 2부에서는 폴란드의 현실을 반영한 두 가족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이 공연은 1781년 설립되어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인 스타리국립극장(National Stary Theater)의 여덟 군데 공간을 이동하며 진행됐다. 소설의 각 장면이 공간을 따라가며 아주 세밀하게 그려졌다.

마르친 비에슈호프스키는 이 소설을 통해 광주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는데,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폴란드 관객들에게 국가적 폭력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고 한다. 광주의 비극이 한국에만, 1980년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시공간을 뛰어넘어 폴란드는 물론 언제 어디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은 <휴먼 푸가>와 달리 원작의 서사를 세밀히 전달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2019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비에슈호프스키는 <휴먼 푸가>를 관람한 후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말하며 연출가 배요섭(Bae Yo-sup 裵曜燮)을 끌어안았다. 이어 관객과의 대화에 패널로 참석한 그는 이 소설을 읽게 된 계기에 대해 “내 쇼핑 메이트인 아마존이 나를 그 소설과 연결해 주었다”며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연출한 에 대해서도 짧게 설명해 주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한국 관객들은 양국의 상이한 연출 경향에 매우 흥미로워했다.

최근 국내 연극계에서는
사건의 재현을 지양하는 대신
감각을 강조하는 특성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인물들의 내면 세계를
섬세하게 해부했던 우리와 달리
폴란드에서는 광주를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보고
그 잔인함을 어떻게 하면
더 세밀하게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의 2부에서는 정치 권력에 의해 벌어진 대량 학살로 인해 두려움에 떠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Magda Hueckel 촬영, 스타리국립극장 제공

연극을 통해 ‘광주’와 대면하다
양측의 프로덕션은 비슷한 준비 과정을 거쳤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폴란드에서도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와 유사한 사건의 영상, 영화들을 보면서 작업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두 편의 연극이 사뭇 달랐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현재 두 나라의 연극계가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국내 연극계에서는 사건의 재현을 지양하는 대신 감각을 강조하는 특성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인물들의 내면 세계를 섬세하게 해부했던 우리와 달리 폴란드에서는 광주를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보고 그 잔인함을 어떻게 하면 더 세밀하게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2019년 11월 6일부터 17일까지 상연되었던 <휴먼 푸가>는 전 회차가 매진되었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정말 값졌던 것은 “이 연극을 보고 광주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됐다”고 털어놓는 관객들의 소감과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 해 주어서 기쁘다”고 전한 5.18 생존자들의 말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이 벌어졌던 1980년 5월 이후 40년 세월이 지났다. 2019년 말 구(舊) 광주교도소 일원에서 신원 불명의 유골들이 발견되었을 때 한 실종자 가족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아들 뼈가 나오면 난 춤을 추죠. 진짜로. 내 원한을 푸니까.”라고 말했다. 40년간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은 그때 그 시간 속에 머물러 있어야 했지만,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망각과 오도로 광주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광주의 아픔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아직 밝히지 못한 진실이 남아 있다. 202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서울 남산예술센터와 광주 빛고을시민문화관에서 <휴먼 푸가>와 이 차례로 관객과 만난다. 그리고 올해 11월에는 <휴먼 푸가>가 폴란드를 찾을 것이다. 한 권의 소설에서 시작된 두 프로덕션의 만남이 두 나라의 관객들을 통해 더 빛나는 가치를 얻으며 더 멀리 퍼져나갈 것이라 믿는다.

송서연(Song Seo-yeon 宋瑞研) 남산예술센터 기획 제작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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