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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SPRING

CULTURE & ART

전통유산을 지킨 사람들 느림의 맛을 지킨다

정성과 시간이 이루어 내는 발효 과정은 한국 전통 음식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깊고 오묘한 맛으로 상징되는 발효 음식 중에서도 간장은 요리의 기본인 까닭에 더욱 중요하다. 360년 동안 씨간장을 지켜 온 집안이 있다. 그 책임은 대를 이어 오롯이 종부의 몫이다.

“별것도 없는데 이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했어요.”

종가의 며느리다운 단아한 너그러운 모습의 기순도(Ki Soon-do 奇順度) 명인의 말에 구수한 된장 맛이 묻어났다. 살포시 웃는 그의 뒤를 백구가 졸졸 따라다니며 손님을 함께 맞았다. 그는 지난 48년 동안 한결같이 전통 장을 만들어 왔다. 그 공을 인정받아 2008년 제35호 대한민국 전통식품 명인에 지정됐다. 명인은 20년 이상 한 분야의 식품에 정진했거나 기존 명인에게 5년 이상 전수 교육을 받은 다음 10년 이상 동종 업계에 종사한 이들에게 농림축산식품부가 심사를 통해 주는 명예 칭호다. 그는 5년 이상 숙성한 간장인 ‘진장(陳醬) 제조 가공’분야에서 명인의 자격을 얻었다.

그가 만든 간장엔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 걸까?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인 전남 담양군 창평면 그의 집 너른 마당엔 장독 1200여 개가 잘 훈련된 군인들처럼 도열해 있다. 그 많은 독 속에 여러 단계의 숙성 과정에 있는 갖가지 장이 익어 가고 있었다.

“냄새 한번 맡아 보시겠어요?”

그가 소매를 잡아끌었다. 뚜껑을 열어 코를 가까이 대봤더니 묘한 향이 났다. 발효 식품 특유의 쿰쿰한 향이 났지만, 특이하게 달콤한 냄새도 섞여 있었다. 그가 만드는 간장은 청장, 중간장, 진장 세 가지다. 청장은 숙성 기간이 1년 이내로 연한 것이 특징이고 주로 콩나물국이나 오이냉국 같은 맑은 국을 만들 때 넣는다. 숙성 기간이 5년 이하인 중간장은 짭조름하고 색이 짙은데 불고기나 장조림 등의 양념으로 쓰인다. 가장 진한 진장은 육포나 약과 등을 만들 때 쓰며 숙성 기간은 5년 이상이다. 노란 햇콩을 푹 삶아 메주를 쑤어 볏짚 위에서 발효시킨 다음 물과 소금을 넣고 담근 장에서 간장을 걸러내면 된장이 된다.

“콩을 삶는 날엔 부정 타지 않도록 목욕재계부터 해요. 아무리 가까운 분이라도 상갓집엔 안 가고요. 그만큼 몸과 마음을 다해 정성을 들이는 거죠. 장의 기초를 만드는 일은 신성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전라남도 담양군에 있는 기순도(Ki Soon-do 奇順度) 간장 명인의 집 마당에는 1200여 개의 장독이 늘어서 있어 장관을 이룬다. 그는 48년 동안 전통적인 방법으로 정성껏 장을 만들어 왔으며, 그 공로와 장맛을 인정받아 2008년 제35호 대한민국 전통식품 명인에 지정됐다.

몸과 마음을 다하는 정성
기순도 명인의 오랜 노고와 정성은 해외에도 알려졌다. 뉴욕의 에릭 리퍼트(Eric Ripert)와 덴마크 코펜하겐의 르네 레드제피(Rene Redzepi) 같은 세계적 명성의 요리사들이 이곳에 다녀갔다. 2017년 방한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위한 청와대 국빈 만찬에 기 명인의 씨간장이 올랐고, 300여 년 이어온 씨간장의 내력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저는 죽염으로 장을 담그죠. 콩도 100% 국산입니다. 씨간장도 잘 간직하고 있어요. 매년 가장 좋은 간장을 씨간장독에 줄어든 만큼 부어요.”

그에게 ‘기순도 장’의 비법을 더 물었더니, 장의 기본인 물은 167m 아래 있는 지하수를 끌어올려 사용하고 죽염 재료인 대나무도 담양산으로만 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집이 있는 담양은 본래 질 좋은 대나무가 생산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재료가 탁월하니 맛이 좋을 수밖에 없지만, 기술이 부족하면 완성도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는 죽염도 시중에서 파는 것과는 다르다고 했다. “서해안에서 생산한 천일염을 700도 이상 뜨거워진 황토 가마에서 3박 4일 동안 아홉 번을 구워서 만든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설명에서 깊은 자부심이 느껴졌다.

“음력 11월 동짓달에 콩을 삶아서 메주를 만들어요. 한 달간 발효시킨 다음 음력 1월15일 정월대보름에 장을 담급니다. 장 담그기는 날 잡는 게 중요하죠. 연습은 없어요. 1년에 딱 한 번 담근 장이 그해 밥상 맛을 좌우하는 거죠.”

그는 발효실도 황토로 지었다. 황토는 메주 특유의 쿰쿰한 냄새를 없애주고 그의 장에서 달콤한 향이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음식의 간을 맞출 때 사용하는 간장은 한국 요리의 기본이다. 예전에는 간장 담그는 일이 각 가정의 중요한 연중행사였고, 집집마다 조금씩 다른 고유의 간장 맛을 귀하게 여겼다. 지금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시판되는 간장을 사 먹는다.

종가의 내림음식
“배고프죠? 자, 이것 드셔 보세요. 설탕은 거의 안 넣은 거랍니다.”

그가 당근정과와 도라지정과, 약과가 담긴 작은 소반을 내왔다. 그는 장뿐만 아니라 전통 음식에 두루 남다른 솜씨로 이름이 높다. 과연 끈적이는 도라지정과를 한입 베어 먹으니 입 안에 천국이 펼쳐졌다. 달콤하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조차 없는 우아한 맛이었다.

도라지정과의 단맛은 뒤따르는 쌉쌀한 맛으로 완성됐다. 약과는 바삭하지도, 아삭하지도 않은 식감이 매력적이었다. 이 단맛의 비결도 궁금했는데, 편하자고 물엿을 쓰면 제대로 된 맛이 나지 않기 때문에 번거로워도 전통 방식대로 조청을 만들어 사용한다고 했다. 목이 마른 것을 알았는지 그가 식혜를 내놓았다. 식혜 역시 그동안 익히 마셔 왔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덜 달고, 밥알이 많았다.

“밥알이 많아야 단맛이 진하게 나지요. 본래 단맛은 밥에서 나는 거예요. 엿기름도 새싹을 틔워 만들었어요.”

그는 장흥 고 씨 양진재(養眞齋) 문중의 10대 종부다. 종부는 한 문중에서 맏이로만 이어 온 큰집인 종가의 맏며느리를 말하며, 종가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의무이다. 그 전통 중엔 물론 음식 문화도 있다. 그 집안만의 레시피가 전승돼 오기 때문에 각 종가마다 내림음식이 다르다. 또한 종가 음식은 그 지역 식재료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에서 고품질의 신토불이 음식이기도 하다. 이 집안의 대표적 내림음식으로 우엉들깨탕, 죽순전, 간장 김치, 백일주(百日酒)가 꼽힌다. 우엉들깨탕은 우엉, 버섯, 양파 등을 어슷하게 썰어 들기름에 볶은 다음 물을 붓고 끓이다가 들깨를 곱게 간 즙과 파, 마늘을 넣고 더 끓여 낸다. 슴슴한 맛이 일품인 건강식이다. 재료 본연의 맛이 돋보이는 것은 죽순전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이 종가의 내림음식 중 특이한 것은 매콤한 김치에 젓갈 대신 간장이 들어간 간장 김치다. 요즘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채식의 진수가 이 집에 있었다.

기 명인은 본래 근엄한 종가의 며느리가 될 생각은 없었다. 담양에서 차로 40여 분 걸리는 고향 곡성에서 1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조선 시대 양반집 가풍을 이어 온 친정 부모님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한 막내딸이라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가 집안 대소사가 많은 종갓집 종부가 되었다고 했다. 스물셋 나이에 시집 온 그는 1년에 30번 넘게 제사를 지내야 했다. 제사를 치르고 돌아서면 또다시 제삿날이 찾아오는 분주한 일상 속에 시어머니를 도와 장을 담갔다. 그는 그것을 운명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시어머니가 살아계실 당시엔 독이 50개 정도 있었죠. 장을 만들기만 하면 사람들이 와서 퍼 갔어요. 그만큼 맛이 좋았어요.”

장맛이 좋다고 소문이 나면서 종부의 장 담그기는 사업으로 이어졌다.

“남편은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수행자의 길을 걷기를 원했어요. 하지만 종가에선 어림없는 일이죠. 아들을 낳아 집안의 대를 잇는 게 종손의 가장 큰 책임이니 결국 자신의 길을 포기했죠.”

기순도 명인이 메주를 말리기 위해 짚으로 묶고 있다. 장맛을 좌우하는 핵심 재료인 메주는 보통 초겨울에 만들기 시작한다. 노란 콩을 삶아 찧은 뒤 네모나게 빚어 따뜻한 곳에 두면 곰팡이가 생기면서 발효되고, 이것을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매달아 말리면 메주가 완성된다.

느리게 더 느리게
남편 고갑석(高甲錫) 씨가 10여 년 전 작고한 후 종가를 지키고 가풍을 잇는 일 모두가 온전히 기 명인 혼자의 몫이 되었다. 그 노력의 결과는 외국에서도 빛났다. 그의 장은 파리에 있는 르 봉 마르셰(Le Bon Marché) 백화점에 진출했고, 세계 3대 음식 박람회 중 하나인 파리 식품 박람회에도 초대되어 행사를 치렀다. 2019년엔 한국관광공사와 전라남도종가회가 공동 진행한 ‘남도종가보물투어’에도 참여했다.

이렇게만 보면 그의 삶이 탄탄대로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명문대에서 가업인 간장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은 둘째 아들이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기 명인은 자신을 추슬렀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전통 장이었다. 그의 솜씨로 운영해 가는 고려전통식품은 전통 장뿐 아니라 요즘 생활 양식에 맞도록 개량한 장 종류, 그리고 장을 기반으로 한 밑반찬들을 판매하고 있다. 그는 ‘빨리 더 빨리’가 시대의 화두가 되어 버린 지금 ‘느리게 더 느리게’ 만드는 우리 장을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사명이라 생각하고 있다.

“다른 이들이 만든 장과 제 장이 다르지 않다면 굳이 제가 만들 필요는 없죠.”

상업적인 유혹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그의 다짐을 뒤로하고 고택을 떠났다. 이번에도 백구가 기 명인과 함께 배웅했다.

“음력 11월 동짓달에 콩을 삶아서 메주를 만들어요.
한 달간 발효시킨 다음 음력 1월15일
정월대보름에 장을 담급니다.
장 담그기는 날 잡는 게 중요하죠.
연습은 없어요.
1년에 딱 한 번 담근 장이
그해 밥상 맛을 좌우하는 거죠.”

장흥 고 씨 양진재(養眞齋) 문중의 대표적 내림음식인 우엉들깨탕은 담근 지 2년 이상 5년 미만인 중간장으로 간을 맞춰야 제맛이 난다. 우엉, 버섯, 양파를 어슷하게 썰어 들기름에 볶은 뒤 물을 붓고 끓이다가 들깨즙과 파, 마늘로 양념을 해서 끓여 먹는 건강식이다. 기순도 전통장 제공

박미향(Park Mee-hyang 朴美香) 한겨레신문 음식문화 기자
안홍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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