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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SUMMER

생활

식재료 이야기 더위를 씻어내는 메밀국수

한여름에 먹는 시원한 냉면은 더위에 지친 입맛을 돋우는 한편 원기도 회복시켜 준다. 냉면의 주된 재료인 메밀이 다른 곡류에 비해 월등히 많은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메밀을 빻아 묵을 쑤어 먹기도 하고 전을 부쳐 먹기도 하지만, 냉면을 가장 사랑한다.

살얼음이 떠 있어 보기만 해도 시원한 평양냉면. 갓 뽑아 삶은 메밀 국수를 차가운 육수에 말아 먹으면 면발에서 탄력이 느껴진다. ⓒ 연합뉴스

남북 정상 회담이 열렸던 2018년 4월 27일의 날씨는 섭씨 22도를 웃돌았다. 판문점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나란히 앉아 차가운 국물에 담긴 국숫발을 젓가락으로 집어 드는 장면이 국내외에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 모습을 지켜봤던 시민들은 냉면 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섰고, 즉석 냉면 판매량도 3배 이상 늘었다.

지금은 여름철 별미로 굳어졌지만 원래 냉면은 겨울에 즐겨 먹던 국수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차가운 국물을 만들 수 있는 얼음이나 동치미 국물이 겨울에나 구할 수 있는 재료였기 때문이다. 또한 국수의 재료인 메밀을 늦가을에 거둔 것도 그 이유이다. 메밀은 2~3개월이면 다 자라 수확할 수 있지만, 여름에 거두면 저장이 만만치 않다. 대부분의 곡물과 비교하여 2배에 달하는 지질이 들어 있어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 저온에서 저장할 수 있는 겨울이 되어야 그나마 장기 보관이 가능했으니, 여름에 씨를 뿌려 늦가을에 거두는 것이 시기상 적절했다.

채 썬 오이와 무, 홍어회 무침이 매콤달콤한 양념장과 함께 곁들여진 함흥냉면. 국수 주재료로 녹말가루를 사용하기 때문에 평양냉면보다 면발이 더 가늘면서도 식감이 쫄깃쫄깃하다. ⓒ 뉴스뱅크

계절 별미
냉면이 겨울 별미로 여겨진 것은 추운 겨울날 뜨끈한 온돌방에 앉아 맛보는 차가운 국수의 운치 때문이기도 했다. 1929년 12월 1일자 대중잡지 『별건곤(別亁坤)』에 실린 김소저(金昭姐)라는 사람의 냉면 예찬을 보자.

“살얼음이 뜬 진장 김칫국에다 한 저(箸) 두 저 풀어 먹고, 우루루 떨려서 온돌방 아랫목으로 가는 맛! 평양냉면의 이 맛을 못 본 이요! 상상이 어떻소?”

이런 역설적 즐거움은 다시 1973년 1월 1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로 이어진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 봉산탈춤 예능 보유자 김선봉(金先峰 1922~1997) 씨는 아들과의 대화에서 휴전선 너머 고향 황해도의 겨울을 이렇게 추억한다.

“밤 깊도록 윷놀이를 하다가는 밤참으로 얼음 동치미에 막국수를 말아 꿩고기로 구미를 해서 먹지. 그 맛이란 참! 이불을 목에까지 뒤집어쓰고 훌훌 소리 내며 먹으면 위에선 이가 시려 덜덜 떨리고 아랫도리는 방바닥이 뜨거워서 후꾼후꾼 달고….”

요즘에는 막국수를 강원도 음식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위 기사에서 볼 수 있듯 막국수는 냉면과 동일한 음식이다. 막국수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첫 번째는 막과자, 막소주처럼 거친 음식을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메밀을 막 갈아 만든 국수에서 명칭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둘 다 일리 있다. 껍질을 덜 깎은 겉메밀을 섞어 갈아 만든 메밀국수의 식감은 ‘막’이란 접두어의 뜻처럼 거칠다. 또한 메밀국수는 제분하자마자 ‘막’ 국수로 삶아 내야 한다. 메밀 속 지질은 분해되기 쉽고 휘발성 풍미 물질은 열을 가하면 날아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제분기가 과열되기라도 하면 견과류 같은 고소한 향미는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햇메밀이나 저온에서 보관한 통메밀을 갓 빻아 반죽에 사용하는 것이 제일 좋다. 반죽도 바로 사용해야 한다. 치댈수록 글루텐이 엉기며 쫄깃해지는 밀가루 반죽과 달리 메밀에는 글루텐이 들어 있지 않아서다.

메밀 속 80%를 차지하는 전분, 14%의 단백질과 약간의 점액질이 반죽을 결합시키긴 하지만 불안정하다. 그래서 메밀의 결합력을 보완하기 위해 전분이나 밀가루를 섞기도 하는데 함량에 따라 면의 조직감이 달라진다. 풍미와 조직감을 좋게 하려면 반죽을 만들자마자 즉시 국수틀에 통과시켜 면을 뽑아야 한다. 남북 정상 회담 만찬을 위해 평양 옥류관에서 판문점까지 제면기를 공수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제면기로 면을 뽑자마자 바로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서 익혀야 한다. 메밀국수는 2~3분 만에 익는다. 타이밍을 놓치면 금방 퍼져 버린다. 얼른 꺼내서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씻어 더 이상 익는 것을 막고 겉면의 전분을 씻어내어 달라붙지 않도록 해 줘야 한다. 이렇게 만든 면을 어떻게 담아내느냐에 따라 식감이 또 달라진다. 차가운 국물에 말아 먹을 때는 단단하면서도 탄력이 느껴지고, 매콤달콤한 양념장에 비벼먹을 때는 부드럽다.

메밀국수는 2~3분 만에 익는다. 타이밍을 놓치면 금방 퍼져 버린다. 얼른 꺼내서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씻어 더 이상 익는 것을 막고 겉면의 전분을 씻어내어 달라붙지 않도록 해 줘야 한다. 이렇게 만든 면을 어떻게 담아내느냐에 따라 식감이 또 달라진다.

전통 국수 틀을 이용해 막국수 면을 뽑고 있다. 메밀에는글루텐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반죽하는 즉시 면을 뽑아야 하며, 뽑아낸 면은 바로 뜨거운 물에서 빨리 익혀야 덜 퍼진다. ⓒ 연합뉴스

쓴메밀은 주로 볶아서 차로 만들어 마신다. 중국과 네팔을 비롯한 히말라야 고산 지대에서 재배되는 품종으로, 일반 메밀보다 루틴이 평균 70배 이상 함유되어 있어 건강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쓴메밀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 네이버 지식백과

미식 논쟁
여름철 공이를 눌러 국수를 뽑던 일은 이제 사람 대신 기계가 대신하게 되었고, 냉장, 냉동 기술의 발달로 냉면은 사시사철 어느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별건곤』 1931년 7월호에 이미 이런 설명이 실렸다.

“평안도 같은 데는 여름보다 겨울 냉면을 더 맛이 있고 운치 있는 것으로 알지만 서울에서는 여름철에 냉면을 많이 먹는다. 아니 평안도에서도 실제 많이 먹기는 여름이다. 그것이야 어찌 되었든 여름철에 냉면 국수를 눌러먹고 사는 사람이야 냉면집밖에 또 무엇이 있으랴. 서울에도 지금은 냉면집이 해마다 늘어간다. 값으로 치면 어느 집이나 보통 15전이지만 솜씨를 따라서 맛이 각각이다.”

냉면은 오늘날에도 한국에서 미식 논쟁이 가장 치열한 음식 중의 하나다. 심지어 몇 해 전 ‘면스플레인[면(麵)과 explain의 합성어]’이란 신조어가 등장했을 정도다. 합성어 ‘mansplain’이 남성이 여성보다 더 해박하다는 생각에 일단 가르치려 드는 행위를 뜻하는 것처럼 이 단어 역시 무엇이 진정한 냉면인지 가르치려는 행동을 말한다.

논쟁의 중심에는 여전히 평안도식 냉면, 즉 평양냉면이 있다. 현재 평양에서 먹는 냉면이 평양냉면이냐 서울에서 먹는 냉면이 원형에 가까운 진짜 평양냉면이냐부터 시작해서 면과 육수에 대한 논쟁, 식초와 겨자에 대한 논쟁, 고명에 대한 논쟁이 이어진다. 냉면을 맛나게 먹으려면 선주후면(先酒後麵)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소리 높이기도 한다. 불고기, 닭무침, 편육과 같은 안주에 술 한 잔을 하고 나서 먹을 때 진정한 냉면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미식을 제대로 즐기려면 배가 적당히 부른 상태여야 한다.

지역별 특미
하지만 냉면의 참맛에 대한 소소한 규칙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다양한 냉면이 있다. 한국전쟁 전후 북한을 떠나 온 실향민이 정착하여 들여온 음식이지만 서울, 의정부, 인천의 평양냉면이 각기 다르고 대전, 대구의 평양냉면이 또 다르다. 진주에는 해물 육수에 육전이 올려진 진주냉면이 있으며, 부산에는 메밀 대신 100퍼센트 밀가루로 만든 밀면이 있다.

냉면 대신 막국수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는 강원도에서도 지역에 따라 면, 육수, 고명의 종류가 가지가지다. 대관령을 기준으로 서쪽인 영서 지방에서는 곱고 하얀 속메밀을 쓰고, 동쪽 영동 지방에서는 겉메밀을 섞어 거칠고 색이 거뭇한 면을 낸다. 육수도 지역에 따라 동치미, 고기 육수, 간장 육수로 달라진다. 휴전선 바로 남쪽 바닷가 속초에서는 함경도 실향민들이 고향의 맛을 그리며 명태회를 고명으로 올려 고추장 양념에 비벼 먹는 회냉면이 별미이다.

최근에는 일반 메밀보다 맛이 써서 쓴메밀이라 불리는 새로운 품종을 이용한 메밀국수의 소비도 늘고 있다. 본래 메밀에는 루틴이라는 항산화 물질이 들어 있다. 루틴은 혈관을 튼튼하고 유연성 있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플라보노이드인데, 일반 메밀보다 쓴메밀에 20배에서 100배 가까이 더 많다. 쓴맛을 줄이면서도 루틴 함량은 그대로 유지하는 가공 방법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여름날 차가운 메밀국수로 더위를 씻어내려는 미식가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정재훈(Jeong Jae-hoon 鄭載勳) 약사, 푸드 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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