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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WINTER

문화 예술

인터뷰 낮은 곳으로 임하는 예술

설치 작가 최정화(Choi Jeong-hwa 崔正化)는 자신이 작가로 불리는 것을 반갑게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이 ‘디자이너’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그는 미술관보다 전통 시장이나 벼룩시장이 더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9월 마지막 주, 추석 연휴를 앞두고 남쪽 지방 도시의 한 청과시장에 지름 2~8m의 거대한 과일 풍선들이 등장했다. 커다란 석류, 복숭아, 딸기 모양의 이 풍선들은 <과일 여행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선보인 최정화의 설치 작품이었다.

최정화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소재를 높이 쌓거나 커다랗게 확대해 공공장소에 내놓는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최정화 – 꽃, 숲>에서는 시민들이 기증한 식기 7,000여 개를 모아 높이 9m의 작품 <민들레(Dandelion)>를 만들었다. 올해는 대구미술관에 녹색과 빨간 플라스틱 소쿠리 5,376개를 쌓은 <카발라(Kabbala)>(2013년)를 전시하기도 했다.

이런 방법들은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나 클래스 올덴버그의 거대한 조각을 떠올리게 한다. 다만 그 소재가 플라스틱 소쿠리나 냄비 등 한국인에게 익숙하다는 점이 다르다. 화려한 색과 친근한 소재는 누구나 한번쯤 눈길을 주게 만든다. 이 때문에 최정화라는 이름은 몰라도 그의 작품을 스치듯 본 사람은 적지 않다. ‘한국적 팝’으로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그를 서울 종로구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최정화 하면 ‘쌓기’가 떠오릅니다. 그 시작이 언제인가요?
1990년대 초반 개인전 <플라스틱 파라다이스>를 열면서 초록색 소쿠리로 쌓은 탑 여러 개를 내놓았어요.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하려는 시도였어요. ‘플라스틱 소쿠리를 미술관 전시장에 가져다 놓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장난기 어린 생각으로 시도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어요.

왜 하필이면 플라스틱 소쿠리였을까요?
저는 원래는 그림을 그렸고, 대회에서 상도 탔었죠. 그런데 회의를 느끼고 있었어요. 그래서 전시 제안이 와도 거절하다가 3년 만에 응하려는 순간, 우리 집에 있는 빨간 소쿠리가 눈에 들어왔어요. 시장에 가도 쌓여 있고, 어느 집에나 소쿠리 하나쯤은 있잖아요. 누구나 있는 재료를 써보자는 생각에서 시작된 거죠.



예술적 재주를 부리지 않을 방법을 찾다가 생활 재료를 사용하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택하는 방법이나 주제는 대부분 바깥에서 놀고, 바깥에서 설치하는 거예요. 2015년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연 개인전 제목은 <옆(With)>이었죠. 박물관 주변 폐가에서 가구를 모아 밥상 탑을 만들기도 했고요. 예술로만, 미술로만 놀지 않기를 시도하는 거죠. 자칫 잘못하면 ‘그들만의 리그’가 되니까요. 제 표현으로는 ‘삶이 예술이 되는 놀이터’를 만들려고 해요. 그러면 누구나 자신의 기억이나 추억을 떠올리며 즐거워할 수 있죠. 근본적으로 예술은 모두의 것인데 특정한 부류의 1%만 향유한다는 데 불만이 있었어요.

‘불만’은 평소 잘 쓰지 않는 표현인데요. 사실 지금도 저에겐 현대 미술이 어려워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아요. 하물며 일반 관람객들은 어떻겠어요.



굉장히 솔직한 말씀이시네요.
사실인걸요. 얼마 전 P21 갤러리에서 열렸던 개인전에서도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이 전시는 최정화의 예술 상품전, 부적전”이라고요. 예술가가 만드는 것이 결국은 상품 아니냐는 이야기에요. 저는 상품을 만들었고, 테스트를 해보았더니 관객의 호응이 있었던 거죠.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인가요?
결론적으로 보면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전문가를 겨냥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처음 전시할 때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보시더니 “소쿠리 예쁘네. 나도 하나 줘” 하고 말을 걸었어요. 제 나름대로의 소통 방법이 성공한 것 아닌가 생각해요.



영화나 무대 미술감독, 인테리어 디자이너로도 활발하게 활동하셨는데요.
패션숍이나 클럽, 바 인테리어를 했어요. 그러다 현대무용가 안은미(安恩美)를 만나 무대 미술을 하고, 시인 겸 소설가 장정일(蔣正一)의 작품을 영화화한 <301 302>(1995년)로 미술감독을 시작했어요. 이 영화는 거식증과 폭식증에 걸린 두 여성이 한 아파트에 이웃으로 살면서 생기는 일을 그렸죠. 처음엔 미술만 맡으려고 하다가 제가 총괄 감독을 하겠다고 제안해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일을 했어요.

사실 그 이전에 제가 1980년대 후반 인테리어 회사에서 일을 했고, 직접 회사를 만들기도 했죠. 그때 제가 했던 것은 ‘눈이 부시게 하찮은’ 것들이에요. 일반적인 패션숍에서는 쓰지 않는 재료를 쓰거나, 철거된 것들을 그대로 놔뒀죠. ‘치밀하게 엉성한’ 것이기도 하구요. 그때의 재료, 공간 경험이 지금을 만들었어요.

<알케미(Alchemy)> 시리즈를 ‘부적’에 비유하는 것은 기복적인 의미인가요?
알케미가 말 그대로 연금술이니까요. 제가 만든 플라스틱 기둥이 그 이상의 것이 된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실제로 황금을 만들 수는 없지만, 물질이 정신이 되는 과정이에요. 시장 상인들이 물건을 쌓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감탄이 나오죠.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엄청난 내공이 느껴져요. 무수히 쌓인 플라스틱에서 숭고미를 느끼는 거죠.



기복을 왜 중요하게 생각하나요?
글쎄요. 어릴 때 못 살아서 그런 걸까요? 찢어지게 가난했고, 국민학교 6년 동안 여덟 번이나 전학을 다니는 바람에 한곳에 정착하지 못했죠. 그래서 유년 시절의 기억이 없어요. 완전한 암흑, 공백이에요. 기억이 없다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시절을 이용했다고 생각해요. 잦은 이사로 같이 놀 친구가 없다 보니, 혼자 쓰레기나 물건을 줍는 습관이 생겼어요. 대학생이 되어서는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에서 어마어마한 감동을 받곤 했죠. 고물상, 공사 현장이 있었거든요. 언젠가는 황금 덩어리도 주웠어요. 그러나 학교에 가면 먹먹하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지 저를 잘 아는 작가들은 제 작품이 슬프다고 해요.

“‘모든 사람을 위한다’는 건 위험한 생각이지만, 저는 길바닥에서 예술을 했어요. 예술이 저 높은 곳에 있을 때 “내려와라, 놀자”, “예술은 당신 옆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죠.”

작품에 어머니의 영향이 있어 보여요.
제가 미대에 가는 걸 아버지가 반대하셨어요. 그림을 못 그리게 붓도 분질러서 경기공전(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디자인과를 갔죠. 그런데 어머니께서 몰래 미대 입시를 도와주셨어요. 화실비가 없으니 대신 화실에 김치를 갖다주기도 했고요. 홍익대 미대에 간 것은 다 어머니 덕분이죠. 어머니는 제게 창조주이자 여신이죠. 실제로 정말 재주가 많으시고요.


현재 진행 중인 경남도립미술관 개인전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청과물 시장에서 쓰던 50~70년된 리어카가 미술관으로 들어와 작품이 됩니다. 시장의 알록달록한 파라솔은 샹들리에로 바뀌고요. 바닷가에 버려진 배도 등장하죠. 더 중요한 것은 지역 재생 활동하는 분들을 작가로 초청해 그들의 프로젝트를 소개한다는 거예요.


앞으로의 활동은 어떻게 될까요?
‘모든 사람을 위한다’는 건 위험한 생각이지만, 저는 길바닥에서 예술을 했어요. 예술이 저 높은 곳에 있을 때 “내려와라, 놀자”, “예술은 당신 옆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죠. 지금은 ‘재생’에 관심이 많아요. 이제는 다시 근본, 근원에 대한 회귀를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김민(Kim Min 金民)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허동욱 사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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