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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WINTER

생활

연예토픽 1990년대를 정직하게 기억하는 영화

2019년에 개봉한 독립영화 <벌새(House of Hummingbird)>의 주인공 소녀는 자신이 마주한 거대하고, 때로는 가혹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마치 1초에 90번 날개짓을 한다는 벌새처럼.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를 찬찬히 담백하게 풀어낸 이 영화는 여러 나라에서 유료 개봉되었으며, 수많은 상과 함께 평단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8월 29일은 영화 <벌새>가 개봉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서울의 한 극장에서 이를 기념한 guest visit 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보라(Kim Bo-ra [Bora Kim], 金宝拉) 감독이 한 말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제가 너무나 열심히 매달리는 게 부끄러웠던 적이 있어요. ‘적당히 해, 왜 그렇게 열심히 해?’란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우리 사회엔 꿈을 꾸며 달려가는 사람을 보고 ‘정신 못 차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풍토가 있어요. 그래서 저도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걸 오랫동안 숨겨 왔었어요.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저를 덜 부끄러워할 것 같아요. 혹시 이 자리에 꿈을 간직하고 뭔가 해보려는 분이 계시다면 자신의 그 진지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이 ‘부끄러움’ 뒤에 탄생한 영화가 바로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무려 51개 상을 휩쓴 <벌새>다. 지난해 베를린 국제영화제 제네레이션 14플러스 부문 대상(大賞)을 시작으로 트라이베카 영화제, 시애틀 국제영화제, 베이징 국제영화제, 넷팩 아시아영화제, 아테네 국제영화제 등에서 주요 부문 상을 거머쥐었고, 올해 6월 한국 백상예술대상에서 감독상과 함께 여자 조연상을 수상했다.

소소한 이야기
<벌새>의 성과는 비단 다수의 영화제 수상에 그치지 않았다. 올 여름에는 미국 시장에서 유료 개봉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국가적 비극과 사건 뉴스, 친구의 고통 등을 통해 주인공이 서서히 알게 되는 삶의 진실을 관객이 함께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사려 깊게 균형 잡는다(Kim discreetly balances the personal and the social, bringing us close to Eun-hee while also letting us see the other realities and truths — a national tragedy, a news bulletin, a friend’s pain — that she is slowly starting to notice.)”고 호평했다.

영화 평론 사이트 「로저에버트닷컴(rogerebert.com)」은 이 영화에 만점을 매긴 뒤 “한국 관객들이 깊이 공감할 이야기이면서도 청소년기의 정서적 위기감과 우정을 묘사함에 있어 모든 문화권의 경계를 뛰어넘는다(Although there are doubtlessly aspects of the story that will resonate more deeply with Korean audiences (who will presumably be more primed for the major event that the story is building towards in the final scenes), she finds a way of recognizing and depicting the emotional perils of adolescence — especially the way in which seemingly unshakeable friendships can turn on a dime — in ways that cut across all cultural boundaries.)”고 상찬했다. 또 ‘영화 신선도 지수’로 잘 알려진 평점 사이트 「로튼토마토(Rotten Tomatoes)」의 전문가 신선도 지수에서도 100%를 기록했다. 참고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과 미국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받은 <기생충>의 신선도 지수는 99%다.

감독이 1주년 행사에서 울먹이며 남긴 코멘트는 <벌새>의 세계관과도 맞닿아 있다. 자전적 성격이 짙은 이 영화는 감독 자신과 한국의 1990년대를 정직한 방식으로 응시한다. 1994년 서울, 중학교 2학년인 주인공 은희가 가정과 학교, 동네 학원에서 겪는 우정과 폭력, 그리고 소외와 애정의 기록이 당시 한국의 사회상과 정교하게 맞물린다. 사회적 참사를 주요 배경으로 10대 소녀의 시선으로 세상의 질서를 그린 다음 그 시절의 서울로 관객의 손을 잡아 이끈다. 그리고 그 정점에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부끄럽고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 1994년 10월의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등장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1990년대 이후 한국 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이른바 ‘사회파 영화’들이 주로 남성 감독들의 주도 아래 거대한 사회 담론에서 출발하는 서사를 이끌어 온 데 비해 <벌새>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만을 전하면서도 당대 한국 사회의 공기를 고스란히 움켜쥐었다는 것이다. 이는 주인공을 ‘진지하게 사랑한’ 여성 감독의 힘이다.

1990년대 이후 뉴웨이브 영화를 이끈 이른바 ‘사회파 영화’들이 주로 남성 감독들의 주도 아래 거대한 사회 담론에서 출발하는 서사를 이끌어 온 데 비해 <벌새>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만을 전하면서도 당대 한국 사회의 공기를 고스란히 움켜쥐었다.

공감의 힘
영화 전반부에 은희가 오빠에게 심하게 얻어맞는 장면이 있다. 은희에겐 흔한 일이다. 저녁 식사 시간,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은희는 용기를 내 오빠가 자신을 때렸다고 말한다. 가족의 질서를 잡는 아빠를 향해 던진 말이었지만, 아빠는 답이 없고 엄마가 대신 나선다.

“너희들 싸우지 좀 마.”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백하게 구분되는 일방적 폭력이 마치 대등한 사이에서 벌어진 다툼처럼 무마된다. 아빠는 문제에 무관심하고, 엄마는 어려서부터 몸에 밴 가부장적 방식으로 사건을 봉합한다. 후반부엔 이런 장면도 있다. 은희가 고함을 지르며 부모에게 항변하자 오빠가 동생의 뺨을 세게 때린다. 이번엔 아빠가 소리친다.

“어디 아빠 앞에서 동생을 때려!”

자신이 보지 않을 때 벌어진 폭행에는 뒷짐을 지지만, 자신의 눈앞에서는 폭력을 휘두르면 안 된다는 생각은 서열을 중시하는 1인자의 권위주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당시 한국 사회에서 적지 않은 딸들이 당했을 이런 일들을 관객은 영화를 통해 다시 목격한다. 그래도 은희는 덤덤하게 학교에 나가고, 절친한 친구와 일상의 억울함을 나눈다. 여기에 동네 학원 선생님 영지가 은희의 마음에 기댈 곳을 내준다.

영지는 명문대를 다니다 어떤 사정으로 인해 오랫동안 휴학하고 있는 상태다. 영화에서 설명되지는 않지만, 한국 학생운동의 기운이 쇠락하기 시작한 1990년대 전반부 운동권 학생의 표류 같은 것이 그녀의 눈빛에서 엿보인다. 영지에게 마음을 의지하게 된 은희가 묻는다.

“선생님은 자기가 싫은 적이 있어요?”

영지는 아주 많다고 대답한다. 은희는 자신에게는 대단하게만 보였던 영지에게도 사정은 다르지만 비슷한 감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슬픔을 겪는 자에게 도움이 되는 위로란 뭔가 대단한 사람에게서 건네받는 것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와 함께 옆자리에 앉아 나누는 것이다.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비롯해 최근까지도 잇따르고 있는 일련의 사회적 참사를 집단 기억으로 안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벌새>의 날갯짓은 그렇게 오래도록 울림을 전한다.



관객을 향한 질문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한국 대중문화의 르네상스기였던 1990년대는 앞서 언급한 뉴웨이브 영화부터 K-pop의 역사를 태동시킨 그룹 서태지(徐太志)와 아이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TV 대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나 격동의 현대사를 다룬 TV 드라마 <모래시계>(1995) 등 새롭고 재미있는 콘텐츠로 가득했다. 그런 이유로 최근 그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하는 대중문화 상품들이 잇따라 등장해 인기를 모으고 있다. TV 드라마 <응답하라 1997>(2012), <응답하라 1994>(2013), <응답하라 1988>(2015)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또한 그 시절 인기 가요들도 유튜브에서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부활하고 있다.

그러나 <벌새>는 다른 방식으로 1990년대를 기억하며 관객을 향해 묻는다. 그 시절의 당신은 어땠나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나요? 학교에서는 맞는 아이였나요, 아니면 때리는 쪽이었나요? 성수대교 붕괴와 바로 몇 달 후에 일어났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요?

멀지 않은 과거, 즉 영화의 캐릭터 영지 선생님이 대학에 입학할 즈음, 권력을 비판하는 영화를 몰래 제작하다 당국에 들켜 투옥된 영화인들이 있었다. 이제 이처럼 우리의 과거를 정직하게 기억하는 영화가 세계 곳곳에서 찬사를 받는 것을 지켜보고 이를 소개하는 일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송형국(Song Hyeong-guk 宋亨國)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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