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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작가들의 작품에 스며든 서쪽나라 한국

Five Looking West.전시회 제목이‘다섯이서 서쪽을 바라본다’ 라니 이게 무슨 뜻일까? 《태평양을 넘어 한국을 바라보다-미국 예술가 5인의 시각전》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이들의 지리적 조건에서 한국은 서쪽이 분명한데 동방예의지국, 극동, 동북아 등의 수식어에 익숙한 필자로선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월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에서 열린 이들의 전시에서 미국 예술가가 바라본 서쪽나라 한국은 어떤 모습인지 확인해 보았다.



동양의 전통과 서양의 창의성이 결합된 랭카스터 가족의 독특한 예술세계
《태평양을 넘어 한국을 바라보다-미국 예술가 5인의 시각전》은 설명이 없으면 관람 포인트를 놓치거나 길을 잃기가 십상이다. 북아트, 회화, 판화, 도자기, 사진, 목공예,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50여 점은 한국문화와 사상, 자연에 영감을 받아 제작되어서 그런지 어딘가 낯익고 익숙한 듯 하면서도 하나하나가 기발하고 독특하다.
먼저 로이스 랭카스터의 작품들을 살펴보자. 한지를 꼬아 만든 종이끈들과 앞뒤 표지를 판화로 찍어 만든 북아트 ‘종이끈 이론’을 보고 있노라니 현대물리학의 ‘초끈이론(Super String Theory)’이 연상된다. 양자론과 우주론을 통합하는 만물이론을 추구하는 ‘초끈이론’처럼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정신세계를 통합하고자 했던 것일까? 스탠퍼드대에서 인류학을 전공하고 버클리대에서 시각디자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로이스 랭카스터는 1970년 남편을 따라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가 당시 한국민화 수집가인 조자룡씨와의 만남을 계기로 한국의 신화와 샤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한국적 모티브를 반영한 복합형식의 북아트 판화와 회화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그의 북아트 작품은 최근 영국국립도서관에서 구입하여 <아시아의 영향과 예술 특별전>에 출품되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라이너스 랭카스터는 1970년 일곱 살 때 부모를 따라 처음 한국에 온 이래 수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그 경험과 한국 예술가들과의 교류가 작품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회화 ‘중광스님과 살기’는 그의 부친이 중광스님의 시화를 담은 ‘Mad Monk’란 책을 출판하게 된 것을 계기로 중광스님이 자신의 집에 머물렀던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장승모양의 나무조형물에 갈퀴 두 개를 붙인 ‘장소표지(Site Marker)-수호자’는 그가 1997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 봤던 한국의 장승에서 강한 인상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마을의 수호신이자 표지물인 장승에는 마을의 혼이 들어있어요. 만일 장승이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면 그 혼도 같이 옮겨질까요? 물질과 의식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대해 장승은 뭔가를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어쩐지 랭카스터란 성이 귀에 익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의 부친은 바로 미국 학계에 한국의 불교를 처음 소개한 루이스 랭카스터 전 버클리대 교수였다. 한국 불교를 미국에 알린 공로로 그는 지난 2007년 조계종 총무원과 만해문화원이 주관하는 만해대상(포교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적 예술을 빚는 도공 부부의 소박한 시선
부부 도예가인 크리스 살리와 메리 페티스-살리는 한국방문이 처음이지만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서 직접 설치한 한국식 가마에서 구워낸 도자기들은 우리 분청사기의 소박한 멋을 그대로 닮았다.
“가마에 그릇을 차곡차곡 쌓고 장작불을 지핀 후 며칠을 기다려 가마문을 열고 보물이 나올지 실패작이 나올지를 확인하는 일련의 작업은 큰 즐거움입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인데다 제작 과정 자체가 가마속에서 진흙이 불길과 공기, 습기를 만나 빚어내는 도자기의 오묘한 색깔에 그대로 담기기 때문이에요.”
크리스 살리의 작품 타원형 수반모양의 ‘붉은팥 깍지’는 동짓날 한해동안 들어온 나쁜 기운을 물리치려고 팥죽을 먹는 한국의 풍습에서 힌트를 얻어 좋은 기운을 기원하는 의미로 제작됐다. 두 개의 해가 떴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한 ‘더블 선 트라옐’, ‘옹기호롱불’, ‘17개의 찻잔-폐백 의식’, 빗살무늬 토기‘ 등 그의 작품은 10대 때 한국도예가에게서 처음 도자기를 배워서인지 한국 전통 문화와 풍습이 많이 반영돼 있다.
이에 비해 메리 페티스-살리의 작품은 조선시대 분청기법으로 제작한 도자기 토르소와 동물의 머리뼈, 손모양의 나무조각 등을 결합시켜 자연과 자연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며 인간의 영성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탐색한다. ‘찌르레기’, ‘세 개의 종’, ‘도자기 달 아래의 스프링’, ‘붉은 달 아래 천상의 몸’ 등 그의 작품에는 30년 동안 2,000에이커나 되는 큰 목장을 운영하면서 가축을 돌보고 자연과 벗하며 살아왔던 그의 삶이 녹아있다.

여백의 아름다움을 아는 작가의 산을 바라보는 시선
쉐브론사의 전속 사진가로 30년 넘게 일한 뒤 사진작가로 전업한 매릴린 헐버트는 몇 년 전 한국 민화를 접하고 문양의 반복적 사용과 ‘텅 빔’의 정신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한국 민속예술과 신화에서 산이 매우 중요한 존재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말 기뻤어요. 저는 산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이번에 출품한 작품의 소재도 산이에요. 사진작업을 할 때 한국의 전통 회화에 등장하는 안개나 구름, 여백을 최대한 구현하려고 했어요”.
그의 작품은 대부분 아리조나주 동남쪽 황량한 사막에 있는 바위산인 치리카후아산을 소재로 했다. 구름에 덮인 산 정상이나 울퉁불통한 바위, 숲속의 정경을 담은 사진들에 그는 ‘그림자 폭포’, ‘안개속의 마법’, ‘길을 호위하다’ 등의 제목을 붙였다. 특히 구름사이로 솟아오른 치리카우하산 정상을 포착한 사진에 그는 ‘한국으로 날아가다’란 제목을 달았다. “이 작품은 한국의 전설을 듣고 나서 한국의 금강산 사진을 보니 이 산들이 정말로 미국 아리조나주로 날아와 치리카후아산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치리카우하산과 금강산은 백만 년 전 화산폭발로 탄생한 자매산이 아니었나 싶어요.”

이들 5명의 작가는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캘리포니아에서 공동으로 전시회를 가진 적이 있다. 과연 이들 다섯 사람을 한데 묶어 이곳 한국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로이스 랭카스터가 지은 시 ‘인드라망(網)’의 한 구절처럼 ‘매듭으로 이뤄진 무한한 그물망’일까, 아니면 전생의 인연일까. 전시장을 나서면서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