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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의 수준을 가늠하다

한국 현대미술 작가 9명의 작품 17점을 소개하는 한국현대미술전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회는 역동적인 한국 현대미술을 소개함으로써 독창성과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전시 준비부터 성공리에 끝마칠 때까지의 과정을 들어본다.

준비(準備)
참으로 오랜 준비가 있었다. 필자가 모스크바 사무소장으로 부임하기 훨씬 이전부터 전시장과 전시 콘셉트를 잡기 위해 책임 큐레이터인 서울대 김영나 교수가 모스크바를 구석구석 다녀갔고, 올봄에는 러시아 측 파트너인 러시아 화가연맹 집행위원장과 큐레이터가 재단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 현대미술의 효과적인 러시아 소개 방안에 대해서 머리를 맞댔다. 한국인들의 역동적인 삶의 모습과 이에 대한 한국 현대 작가들의 성찰을 러시아 사람들에게 보여주자는 것으로 방향이 잡혔고, 이를 위해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 자연과 환경, 기술문명과 현대성에 대한 한국인의 체험과 반응이 나타나는 작품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전시회의 제목도 대한민국의 역동적인 모습을 다양한 측면에서 ‘만화경’처럼 보여주겠다는 의미에서 ‘Contemporary Kaleidoscope, Art in Korea’로 붙여졌다.



산고(産苦)
그동안 몇몇 한국 작가들이 개인전이나 특정 장르를 가지고 러시아에서 전시회를 연 적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회화, 조각, 사진, 비디오, 웹아트 등 한국 현대미술계 전반을 아우르는 여러 장르의 작품들을 골고루 선보이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어려움이 생겼다. 선정된 몇몇 작품들이 러시아인의 시각으로 볼 때 지나치게 이해하기 어렵고 오해와 마찰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것이다. 현대미술은 특성상 일반인이 쉽게 이해하고 즐기기 위한 내용보다는 예술가들이 시대를 성찰하고 반응하는 것이므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시대적 경험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상황에서 한국의 현대미술 전반을 소개하기 위한 목적으로는 처음 시도되는 교류전인 만큼 지나치게 난해한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전시장 배치가 바뀌고 도록이 수정되는 등 행사 진행자의 입장에서 곤란한 문제들이 잇달아 터졌다. 행정 진행에 따른 관행이 한국과 러시아 양측 간에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나 가뜩이나 취소와 연기 위기를 여러 번 넘기며 어려움을 겪던 전시회 개막은 마지막 순간까지 산고를 겪었다.

개막(開幕)
그러나 개막식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현대미술전의 특징상 일반인보다는 전문가나 예술 애호가 중심으로, 그리고 한국 교민이나 고려인 동포들보다는 러시아 현지인을 중심으로 초청이 이루어졌음에도 개막식 행사장은 참석자들로 인해 매우 비좁았다. 100명을 예상한 공간에 150여 명의 초청 인사가 가득한 가운데 파트쿨린 러시아화가연맹위원장과 김성엽 재단 기획이사의 개회사, 이규형 주러시아 대사와 미트로파노바 러시아 국제과학문화협력센터 이사장의 축사에 이어 가야금 공연과 리셉션이 진행되었다.
언론의 관심도 뜨거웠다. 한국 언론은 한국 현대미술이 종합적, 전반적으로 소개되는 최초의 행사라는 데 의미를 두고 모스크바 특파원들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러시아 예술 애호가들의 반응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러시아 언론도 주요 일간지에서 이번 전시회를 한국 특집판에 포함시켜 다루고 국영 TV 방송에서도 개막식을 보도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음미(吟味)
이번 전시회에서는 한국의 현대사회와 문화 등 여러 영역에 관심을 갖고 활동 중인 중진 또는 소장 작가 9인의 작품 17점이 전시되었다. 특히,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를 크리스털과 레고 블럭으로 재탄생시킨 황인기의 ‘방겸제’ 시리즈, 각목으로 현대인의 내면을 형상화한 안규철의 ‘흔들리지 않는 방’, 최근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웹(Web) 아티스트인 장영혜 중공업의 ‘파오 파오 파오’, 소금을 소재로 하여 현대 한국여성의 회한을 표현한 김시연의 ‘눈물’ 등이 주목을 받았다. 전시회를 관람한 러시아 인사들은 한국 현대미술의 독특한 개성과 가치에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작품을 출품한 한국 작가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모스크바를 직접 방문해 설치 작업을 진행한 작가들은 러시아 예술인 및 언론인들과 활발한 의견 교환을 나누며 깊은 인상을 남겼고 향후 러시아 미술계와 한국 미술계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춧돌을 놓았다.

정리(整理)
모스크바는 문화예술의 도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발레나 오페라 등 수준 높은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미술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시장 모퉁이와 전자상가 한쪽에서 쉽게 미술품 판매상을 찾아볼 수 있고, 젊은 미술가들의 작품이 마치 휴대폰이나 고급 화장품처럼 자연스럽게 유통되고 있는 거대 미술품 시장이 존재하는 도시다.
이번 전시회는 여러 면에서 뜻깊은 일이었는데, 첫째로 이러한 문화예술과 미술의 도시인 모스크바에 역동적인 한국 현대미술 전반의 각 단면들을 소개함으로써 그 독창성과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앞으로 재능 있는 한국의 젊은 현대미술 작가들이 러시아에 소개될 수 있도록 러시아 미술계의 관심을 유발하는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둘째로는 이명박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과 맞물리는 시점에 개최됨으로써 한국문화예술을 화두로 한국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데에 기여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는 한국 미술에 대한 전시가 최초로 러시아 미술계의 중심 단체인 화가 연맹과 공동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앞으로 양국 문화예술계가 더욱 가까이 협업할 수 있는 계기와 발판을 마련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 전시회가 일회성 사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양국 미술계가 서로에 대한 매력을 확인하고 장래에 상호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양국 간 문화교류를 한 차원 더 높게 도약하게 만드는 디딤돌이 되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