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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 공개강좌」, 호놀룰루 현장에서

"이현씨, 문화교류팀으로 발령 났어요!"지난 3월, 이 한마디로 나의 문화교류팀 근무가 시작되었다. 그 동안 주로 국내외 기 관의 한국학 연구 지원업무와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인사 초청 업무를 담당했던 나에 게 새로운 일이 주어지는 순간이었다.
기대 반, 근심 반으로 담당 업무를 설명 받았을 때, 코앞에 닥친 일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고급문화를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한국문화 공개강좌」 사업이었다. 당시 2000년도 한국문화 공개강좌 안내 서신을 받은 해외의 여러 기관들이 앞다투어 보내온 신청 서신을 토대로 올해 사업 방향의 큰 가닥을 잡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보통 미국과 유럽 각각 한차례씩 봄, 가을로 나누어 강좌를 개최했는데, 작년의 경우 IMF의 여파로 1회 행사에 그치고 말았다. 그 때문인지 안내 서신을 받은 거의 대부분의 대학과 박물관에서 현지경비는 자신들이 부담한다며 강연을 요청해 왔고, 결국 올해의 공개강좌는 각기 다른 세 개의 주제를 가지고 미국에서 2회, 유럽에서 1회, 총 세 번의 행사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행사는 최근 서구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禪(Zen)'사상에 착안하여 불교 음악과 무용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칫 기독교 문화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띠면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어 학술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도록 각별히 유의했고, 강연을 맡으신 하와이대 민족음악과 이병원 교수께서도 학자적인 관점에서 프로그램을 구성해 주셨다.
이번 강연의 특징으로는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불교 음악을 전공하시는 스님들이 직접 시연도 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슬라이드 등 시청각 자료를 활용하여 강연을 진행할 수 있지만, 한국의 고급 문화를 직접 접하면서 좀 더 사실적인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동국대학교 교수이신 법현스님 등 불교음악 전문가 4분이 함께 동승하게 되었다. 동승하신 스님들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영산재' 전수자들로서 불교음악인 범패의 현대화와 보존작업을 위해 분주히 활동하고 계신 분들이다. 강연을 개최하는 곳은 하와이대, 클리블랜드 미술박물관, LA 한국문화원 그리고 시애틀 동양 박물관으로 확정되었다. 끝까지 일정을 조정하여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던 버밍햄 미술박물관은 아쉽게도 이번에는 가지 못하고 가을 강연 때 방문키로 어렵게 양해를 구했다.
항공권을 구입하고 여권을 내고 비자를 받고…. 출장일은 시시각각 다가왔다. 행사를 개최할 기관들과 수시로 연락하며 최종 점검까지 마쳤지만,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첫 기착지인 하와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저녁에 출발한 비행기는 아침 일찍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다. 지루한 여권심사를 마치고 공항을 나오니 비로소 하와이의 파란 하늘과 상쾌한 공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숙소는 하와이대 내에 미국 정부가 아시아-태평양 국가와의 교류활동을 증진하기 위해 설립한 East-West Center의 Lincoln Hall 이었는데, 바로 옆에 Center for Korean Studies 건물이 위치하고 있었다. 하와이대 내에 한 국가에 대한 연구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독립건물을 갖고 있는 곳은 한국연구센터뿐이어서 부러움을 사고 있다고 한다. 센터건물 밖에서는 한국에서 파견 나온 여러 장인들이 센터건물의 기와 교체작업을 벌이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고, 강의실과 연구실, 강당이 구비된 건물 안에서는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교수님들과 행정 요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 다.
공개강연 행사는 땅거미가 지는 저녁 무렵에 시작되었다. 불교 음악의 대가들이 온다는 소문에 행사장을 찾은 관객층은 다양했다. 동양사상 연구생들, 하와이대 교수들, 한인 교포,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온 이웃 주민, 티벳 승려까지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정적을 흔들어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묵직한 징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잔잔한 호수에 잔물결이 일듯 맑은 목탁음이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시는 스님들의 모습을 더욱 청아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어서 이병원 교수의 한국 전통 음악과 불교 음악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과 스님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이어졌고, 청중들이 정적인 분위기에 지루해하지 않도록 엄선한 다양한 종류의 음악과 무용이 시연되었다.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스님의 나지막이 드리워지며 길게 이어지고 천천히 진행되는 울림은 산사(山寺)의 대웅전에 운무가 밀려들 듯 어둑어둑해지는 교정의 정적을 그윽하게 채워주었고, 하늘거리며 나비춤을 추는 스님의 바닥을 스치는 긴 장삼자락은 청중들의 가슴에 긴 여운을 남겨주었다. 이 모든 강연 장면은 디지털 테이프에 녹화되었고, 조만간 재단 홈페이지에 게재될 예정이다. 정보화시대에 발맞춰 사업 성과를 높일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시도되고 있는데, 정보 전달을 위한 다양한 매체의 활용 또한 이러한 재단의 변화하고 있는 작은 모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나는 호놀룰루 공항을 떠나고 있다. 원고마감이 얼마 남지 않아 나머지 세 곳의 소식을 마저 싣지 못하고 하와이 소식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이번 출장은 나에게 큰 의미를 주고 있다. 그 동안 사무실에서 내가 해왔던 일들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사실 책상에 쌓이는 서류뭉치들 처리하랴, 시도 때도 없이 전송되어 오는 e-mail 체크하랴,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다 보면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이 일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의구심을 가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산 자동차가 가물에 콩 나듯 한두 대 보이고, 전체인구 중 한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3% 미만이라는 이 곳 호놀룰루 하늘 아래에 한국학센터가 굳건히 서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나는 힘을 얻고 있다. 그리고 미약하나마 기반을 잡아가고 있는 해외에서의 한국학 진흥과 'Korea'의 문화이미지 구축을 위해 좀 더 창의적인 자세를 갖고 성실히 나의 업무에 임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사무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재단의 동료들을 생각하며, 남은 일정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 나는 지금 클리블랜드로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