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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지로 빚어낸 한국의 심장과 혼

지난 2월 14일, 작가 전광영이 일본 도쿄 모리 아트센터에서 한국인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전광영의 이번 전시는 ‘한지’라는 한국 고유의 소재로 위대하고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주제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예술은 국경을 초월해 하나로 통한다는 위대한 메시지를 전한 소중한 기회였다.

2월 14일부터 전시 기간 내내 한국 작가 전광영의 전시 포스터가 모리 아트센터가 위치한 모리 타워를 비롯해 롯폰기힐스 지하철역 등 인근을 뒤덮었던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세계 현대미술의 심장부인 도쿄 모리 아트센터에 한국 작가가 그 어떤 명분을 떠나 당당히 작품성만으로 전관을 사용해 전시한 것은 일찍이 유래 없는 일이었다. 전광영은 전통 한지를 이용한 독창적인 작품으로 이미 국내외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70년부터 시작된 한국과 일본의 현대 교류 이래 처음으로 일본의 모리 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연 작가가 되었다. 세계인을 매료시킨 그의 작품은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인 한지를 사용해 한국인의 심성인 정(精)의 문화를 보여준다.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을 담아낸 한지 예술
이번 전시에서는 신작을 포함해 150호에서 300호까지 평면 및 조각 작품 31점을 선보였고, 그 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1970~1980년대 회화를 전시해 한지 작업의 근원을 돌아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선사했다. 전통 한지를 작품 소재로 사용하는 전광영은 한지를 작가 자신의 뿌리라고 여기며, 우리 민족의 얼 같고 혼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내 이야기, 내가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자랐는지, 즉 내 뿌리를 찾고자 시작한 한지 작업은 초기에는 인류 문명의 쓸쓸함 또는 우주를 상징하는 모노톤 위주로 시작했다. 그가 사용하는 한지는 보통의 한지가 아니라 오래된 고서다. 무수한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고서를 통해 우리는 조상을 만날 수 있고, 이 종이를 스쳐간 여러 사람의 영혼을 만날 수 있다. 멀리서 보면 일견 세련된 작품의 외양에 눈길이 가지만, 가까이 바라보면 낡아서 바랜 듯한 고서의 모습은 동양 한자 문화권의 유구한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는 듯하다. 자연친화적인 전광영의 작품은 요사이 대두되는 인간적인 현대미술의 한 단면과 조우하는 듯한 떨림이 느껴진다. 그의 작품 제작 방법은 삼각형 모양의 스티로폼에 한지를 보자기처럼 싼 뒤 하나하나 캔버스에 붙이고 쌓는 방식이다. 작은 한지 입체 조각이 무수히 모여 집합체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작은 개인이 모여 궁극적으로 집단과 조화를 이루는 동서고금의 인간 군상과 크게 닮아 있다.



심장을 울리는 섬세한 장인의 손길
마치 작은 우주 같은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전광영은 한지를 자르는 것부터 종이를 꼬고, 삼각형을 싸는 과정을 거쳐 화면에 집적하기까지 무수한 시간과 노동력을 들인다. 작품을 이루는 삼각형 모양의 오브제는 작가가 어릴 때 강원도 홍천에서 큰아버지의 한약방에서 보았던 약봉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흥미로운 유년기의 기억과 과거 한국 문화의 중요한 원류를 더듬어보는 문화사적 의미를 지니는 매개체다. 전통적인 한약 봉지의 이미지는 한국 현대회화의 한 획을 긋는 전광영 작품의 중요한 오브제로 변신해 첨단과학으로 무장한 기계적인 삶 속에 놓인 우리에게 전통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이를 모티브로 하여 현대미술이라는 공통 언어로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을 촉구하는 듯하다. 한국적인 그의 작품 언어는 세계인에게 우리 전통 문화를 쉽게 이해하게 하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언어로 작용한다. 지금은 사라진 사물인 옛날 한약방의 한약 봉지에 그가 담아낸 예술적 의미는 이처럼 크다. 고서로 싸여 있던 한약 봉지에는 2000년이라는 전통과 역사 그리고 우리 민족의 애환과 혼이 깃들어 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보던 책장 하나하나에 쌓인 무수한 손자국과 흔적, 한약방의 약재를 싸던 정감 있는 추억은 작품을 통해 잊혀진 과거의 일상을 보여주는 예술적 메시지로 자연스레 탈바꿈한다. 모리 아트센터 전시장에는 심장 모양의 거대한 한지 오브제가 자리 잡고 있는데, 작가는 이 작품을 새카맣게 타버린 한국인의 심장이라고 부른다. 전광영은 한국인의 ‘한’을 ‘정’과 더불어 한국 문화의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그의 작품 하
나하나에는 이처럼 한국의 역사, 정, 한의 문화가 담겨 있다. 한국인이 넘치는 정을 획일화된 상자가 아닌 넉넉한 보자기에 싸듯, 100년 전 우리 조상의 손때가 묻은 한지로 우리 민
족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전광영의 작품은 한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에서도 작품 자체가 지닌 조형미 덕분에 높이 평가된다. 독창적인 기법으로 동양적 정서와 서양적 조형 논리를 동시에 보여준 전광영의 작품은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나아가 한국적인 현대미술의 대표자로 한일 문화 교류의 수준을 격상시킨 데에 커다란 의의를 둘 수 있다. 한국 근•현대 미술의 11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최근 20년 사이에 한국의 작가들은 세계 유수의 비엔날레, 아트 페어 등 국제무대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왔다. 또 전광영 같은 작가들의 작업이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는 한층 더 나아가 전광영의 일본 모리 아트센터 전시처럼 단순한 국제무대 진출이 아니라 작품의 독창성으로 국제적 명성의 작가와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지속적이고 한 단계 높은 세계무대 진출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