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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연구 국제화의 시발점, 하버드대 국제학술회의를 다녀와서

2005년 4월 5일부터 7일까지 사흘간 미국 하버드대에서 ‘고구려 역사와 고고’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하버드대 부설 한국학연구소가 주최하고 한국국제교류재단을 비롯하여 여러 기관에서 후원했는데, 서양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고구려사 관련 국제학술회의였다. 한국 6명, 중국 3명, 일본 3명 등 동아시아 3국에서 가장 많은 학자가 참가했지만, 미국 2명, 프랑스 2명, 호주 1명 등 서양학자들도 각 국에서 고루 참가했다.

또한 하버드대뿐 아니라 미국 각지의 한국학 관련 학자들이 대거 참석한 이번 학술회의는 고구려사 연구를 국제화시킨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학술대회를 조직한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마크 바잉튼 박사나 카티 에커트 교수의 ‘이 회의를 영어권에서 고구려사(한국고대사) 연구를 활성화시키는 계기로 삼자’라는 제안은 이번 학술회의의 의미를 적절히 지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학술회의의 주제
이번 학술회의는 외형적인 측면뿐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알찬 성과를 거두었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고구려사에 관한 주요 주제 거의 모두가 다루어진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우선 고구려 역사와 관련하여 국가 형성(마크 바잉튼,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초기 왕계(케네쓰 가디너, 호주국립대),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대외정책(여호규, 한국외대), 고구려 문화의 국제적 영향(이성시, 와세다대),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송기호, 서울대), 신라와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노태돈, 서울대), 최신 연구동향(최광식, 고려대) 등이 발표되었다.
고구려 고고와 관련해서는 중국 지린성(진쉬둥, 지린성문물고고연구소)과 랴오닝성(리신취안,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소), 남한지역(최종택, 고려대) 등의 최신 발굴 성과가 소개되었다. 또한 유적과 역사의 연관성(웨이춘청, 지린대), 묘제(墓制)와 왕권의 연관성(아즈마 우시오, 도쿠시마대), 성곽 축조법(서길수, 서경대) 등도 발표되었다. 고분벽화와 관련해서는 쌍영총(낸시 쉬타인하르트, 펜실베니아대)과 사신도(알렝 페린, 파리7대학 한국학연구소)를 분석한 논문, 일제시기의 조사현황(사오토메 마사히로, 도쿄대), 북한 지역의 고분벽화 보존현황(한준희, 유네스코 문화유산국) 등이 발표되었다.
이처럼 중요 주제가 거의 모두 다루어짐으로써 고구려 역사와 문화의 진면목, 나아가 연구상의 핵심 쟁점을 서양 학계에 널리 소개할 수 있었다. 지난 100여 년간 축적한 핵심 연구성과 및 최신 연구동향을 바탕으로 고구려사 연구의 국제화를 향한 거보를 내디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학술회의는 서양학계에서 고구려사를 연구하기 위한 학문적 토대를 굳건히 다진 학술 논의의 장(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상호 정보 공유의 장
다음으로는 중국학계와 한국학계의 최신 발굴성과가 풍부하게 소개됨으로써 각국 학자들이 정보를 폭넓게 공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중국학자들은 아직 발굴보고서도 발간되지 않은 푸순(撫順)의 시가 벽화고분, 환런(桓仁)의 망강루 적석묘 등을 공개했다. 시가 벽화고분의 경우 고구려의 도성 지역이 아닌 지방에서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향후 벽화고분뿐 아니라 지방 제도 등을 연구하는데 많이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서기전 1세기로 편년된다는 망강루 적석묘도 부여계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고구려 건국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한국학자들도 남한지역의 고구려유적에 대한 최신 발굴성과를 폭넓게 소개했다. 특히 문헌자료와 연관시켜 고고학 발굴 성과를 새롭게 해석하고, 이를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활용하여 소개함으로써 각국 학자들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중국학자들은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에서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된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는 표정이었으며, 관련 정보에 대한 궁금증을 적극적으로 질의했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학술회의는 최신 연구성과와 고고학자료를 활발하게 교류한 정보 공유의 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서양학자들이 자료의 출처나 소장처에 대한 기본 정보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서양학계에 고구려사나 한국사에 관한 연구 정보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기본 정보조차 제대로 제공되지 않는데, 누가 고구려사나 한국사에 관심을 가지며, 더욱이 훌륭한 연구자가 나올 수 있겠는가? 고구려사나 한국사 연구를 국제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양학계에 관련 정보를 폭넓게 제공하는 시스템 구축이 시급함을 느꼈다.

고구려사에 대한 다양한 접근
물론 각국 학자들은 동일한 시각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고구려사에 접근했으며, 특히 한국과 중국 사이에 첨예한 시각차가 표출되기도 했다. 한국학자들이 동아시아사의 동향을 고려하며 고구려사의 주체성을 강조한 반면, 중국학자들은 고구려와 중국 중원(中原) 지역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가령 한국학자들이 고구려가 4-5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 변화를 적극 활용하여 독자적인 천하관을 확립했다고 발표하자, 중국학자들은 고구려가 중국왕조의 책봉을 받았으며 중국왕조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은연중에 중국사라는 그들의 주장을 드러냈다.
또한 한국학자들이 고구려 성곽에 보이는 독특한 면모를 다각도로 설명하자, 중국학자들은 고구려인들이 중원지역과 달리 주로 돌을 이용하여 산성을 축조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후기의 성곽은 요나 금과 유사하다며 독자적인 면모를 애써 외면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한국학자들이 고구려사가 발해사로 계승된 측면, 나아가 통일신라의 고구려 통합의식이나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발표하자, 중국학자들은 삼국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며 한국학자의 견해도 결국 정치적 입장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일본학자들은 고구려나 발해와 주변국의 교류에 중점을 두며, 고구려사나 발해사의 복합적 성격을 강조했다. 서양학자들은 한국학자들에게 고구려 왕실이 결국 중국으로 갔지 않느냐며 한국사로의 계승성에 의문을 표했으며, 중국학자에게는 고구려와 중원 문화의 차별성을 더욱 명확히 규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토론을 통해서 고구려사를 둘러싼 각 나라의 입장 차이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고, 한국이 고구려사와 관련해서 어떤 점에 더욱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특히 서양학자들은 고구려사가 한국사라는 사실에 공감하면서 고구려 고분벽화의 기원과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중국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중동지역의 자료까지 섭렵하여 다각도로 분석했다. 한국학계의 최신 연구성과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아 일부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서양학자들의 관심이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사 속에서 고구려사의 객관적 위상을 규명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구려사 연구의 국제화
따라서 서양학계에 고구려사를 소개할 때 한국사라는 사실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근대 국민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누가 보더라도 고구려사는 한국사임이 명확하지만, 고구려사를 한국사라는 울타리에만 가두려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는 고구려사의 다양한 면모를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며, 아전인수식(我田引水式) 해석이라는 비판도 면하기 힘들다. 최소한 동아시아사의 전개과정을 고려하며 고구려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고구려사의 객관적 위상을 정확히 규명하여 세계인들에게 ‘고구려사는 복합적 성격을 지녔지만, 근대 국민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사임이 명확하다’라고 정정당당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학자들이 ‘고구려사는 한국사이다’라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이번 학술회의를 주도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가한 6개국 17명의 학자 가운데, 한국 국적 학자가 무려 8명이나 되었다. 한국학자들은 고구려 역사와 고고학, 나아가 유네스코의 북한지역 고분벽화 보존 노력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사와 관련된 중요한 주제에 대해 다각도로 발표하며 회의장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리하여 이번 학술회의 참석자들은 한국학자들이 드러내놓고 주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고구려사가 한국사의 일부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고구려사 연구의 국제화가 일단 한국 주도로 시작된 것이다. 이는 이번 국제학술회의가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후원 아래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가 주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만약 중국의 후원으로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같은 중국학 관련 연구소가 주최했다면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회의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반성과 평가
이번 학술회의는 고구려사를 비롯해서 인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역사적 쟁점의 경우 앞으로도 서양의 한국학 연구기관을 후원하여 이런 국제학술회의를 계속 개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다만 이 경우 한국학자들이 패널 구성과 발표자 선정 등 학술회의를 조직하는데 적극적으로 관여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학술회의의 결과물이 세계학계로부터 학문적인 연구성과로 인정받으려면 국제적인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이번 학술회의의 조직을 전적으로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에 맡긴 것이나 학술회의 개최 시점에도 출판 예산을 확보하지 못한 점은 ‘옥에 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국제학술회의가 고구려사에 대한 세계학계의 학문적 토론을 한국이 주도하는 선례를 남긴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사뿐 아니라 독도와 일본 역사교과서 등 한국과 일본 사이의 중요한 쟁점들을 풀어가는 데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러한 쟁점에 대해서도 한국 주도로 국제적인 학술회의를 개최함으로써 국제사회가 자연스럽게 우리의 주장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학계와 관련 기관이 힘을 합하여 우리의 입장을 세계 학계에서 공인받을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