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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가득 담아 한국에게 감사드립니다”

1966년에서 1981년까지 영어교육, 공중보건, 직업훈련 등의 봉사활동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발전에 기여했던 미국 평화봉사단. 귀국 후에도 ‘프렌즈 오브 코리아(Friends of Korea)’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한국과의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을 만큼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이들 평화봉사단원들이 부푼 마음을 안고 다시 한국을 찾았다.

1966년, 평화봉사단원으로 첫발을 내딛다
평화봉사단원으로 지원할 당시 제 나이는 22세였습니다. 국제관계학 전공자로서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았는데 마침 한국으로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지요. 사실 한국이 어떤 나라고, 또 어떤 상황인지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궁금했습니다. 저의 모험 정신이 그렇게 저를 이끌었죠. 한국에 도착해서 과연 평화봉사단원으로서 이 나라, 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는 가늠하기 힘들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제가 얻은 것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의정부 그리고 영어 선생님
의정부여중•고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제게는 정말 잊지 못할 경험이었죠. 당시 우리 봉사단원들에게는 사생활이라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뚫어질 듯한 시선을 받거나 아니면 굉장히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한국인들에게는 너무 신기한 존재였던거죠. 어떤 학생은 자전거를 타고 가다 저를 보고 너무 놀라 중심을 잃고 함께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제게 영어를 배웠던 학생들은 키도 크고 낯선 언어를 하는 제가 신기했을 겁니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좀 새로웠을 법한 방법으로 영어를 가르쳤거든요. 영어 연극반을 만들어서 학교에서 공연을 올렸습니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너무 부끄러워했지만 하고 싶어하는 열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망설이는 학생들은 무대로 확 밀어넣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의 2년, 삶에 변화가 일어나다
평화봉사단원 임기가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많은 이들이 한국에서의 생활을 궁금해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이해를 못하더군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때의 경험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지 말로 설명하거나 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거든요. 전 개인적으로는 이 경험을 통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하버드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후에 평화봉사단 스태프로 5년 동안 일할 기회도 얻었고, 펄벅재단에서 일하면서 한국에서도 일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보고 느낀 그들의 가족 관계, 가족 사랑이 후에 제 가정을 가꿔나가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죠. 한국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한국땅을 밟았는데 오히려 한국이 제 삶을 변화시켰던 거예요.

3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
우리 평화봉사단원들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 한국에서의 경험을 공유하고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을 해주었고 어떤 의미였는지 기억하고 싶어서 ‘프렌드 오브 코리아’라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이 모임은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켜줬고, 우리는 사람들에게 한국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봉사단원들이 미국 전역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별 모임은 가능했어도 다같이 모이는 것은 힘들었죠. 이번 한국 방문이 우리를 다시 한번 뭉치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이번에 의정부를 다시 방문했습니다. 그간 연락이 끊겼던 선생님들과 학생들을 다시 만났는데,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뭉클한 뭔가가 올라오는 기분이었습니다. 예전에 의정부여중•고가 있던 자리에도 가보고, 의정부 곳곳을 둘러봤습니다. 아, 그리고 예전에 제가 영어 연극반을 꾸려나가던 때 너무 부끄러워 차마 무대에 오르지 못했던, 그래서 제가 무대 위로 밀어넣었던 그 여학생을 다시 만났습니다. “선생님!” 하면서 제게 뛰어오는데,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감동적이었습니다.

평화봉사단, 그 의미를 다시 되새기다
물론 제가 선생님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당시 만났던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부분들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제가 얻은 것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평화봉사단원들이 기여한 것이 무엇이었냐’라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단정짓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물론 글로리아 마모킨 씨처럼 세브란스와 서울대학병원에 언어교정센터를 설립하는 데 기여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만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봉사단원 개개인들이 그 발전에 조그맣게 한 방울씩 기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번 방문을 통해 여러 사람들을 만나 든 생각은, ‘시니어 평화봉사단’을 만들어보면 어떨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돌아와서 다른 종류의 봉사, 서비스 활동을 해보고 싶습니다. 한국과 미국이 함께 봉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저는 이제 남은 일정 동안 한국을 더욱 느끼고 마음속에 담아 돌아갈 예정입니다. 따뜻한 환대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