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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와 함께 어우러진 한국 현대 무용의 힘찬 몸짓

<엘리베이터 살인사건>은 2007년에 고양아람누리 개관 작품으로 처음 공연을 한 작품이었다. 그 후 2008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초청을 받았고, 같은해에 인도 공연을 준비하게 되었다. 나는 지난 여름부터 인도 초청공연 소식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게 인도는 어떤 미지의 땅 같았다.
1월 2일은 인도 공연을 위한 첫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모든 무용수들이 미팅을 위해 연습실로 모였다. 평소 쉽게 긴장하는 성격이라 새로운 연습을 시작할 때면 항상 초조하곤 했지만, 왠지 이번에는 마음이 편안했다. 나는 무용수 중 나이가 가장 어렸지만 저마다 쟁쟁한 실력과 경력을 갖춘 다른 무용수와 펼치는 경쟁에서 지기는 싫었다.
다음날부터 바로 연습을 시작했다. 연습 일정은 빡빡했다. 바뀐 멤버들과 기존의 공연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고, 인도에서 처음으로 초청하는 컨템퍼러리 무용이라는 말에 어깨가 무거웠다. 추운 겨울이라는 것도 잊고 거의 매일 연습실에서 땀 흘렸다. 연습의 시작은 자신에게 맞는 연기와 움직임의 틀을 만들어 그것을 채우는 과정이었다. 어려웠지만 안무가 박호빈 선생님의 도움으로 평소 찾기 힘든 감정들을 끌어낼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안무가 선생님의 격려와 질책에 더 열심히 움직였다. 우리의 온기는 연습실을 채워갔으며, 열정은 조그만 연습실을 뚫고 나가는 듯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서로를 알고 가까워져 있었다.



첫 해외 공연의 잊을 수 없는 추억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새 인천공항에 있었다. 생애 첫 비행기 여행, 첫 해외 공연이었다. 그 기분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아마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15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날아 인도에 도착했다. 인도 공항을 나서는 순간 이국적인 인도의 풍경을 기대했지만 칠흑 같은 어둠만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인도의 첫 인상은 그렇게 고요하고 무거웠다.
다음 날 간밤의 피곤에서 눈을 떴을 때, 인도는 이미 깨어있었다. 우리를 삼킬 것 같았던 인도의 지난밤 어둠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고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우리 일행은 먼저 인도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극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식당에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손으로 밥을 먹어서 포크를 사용하던 우리가 오히려 그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숙소와 극장은 도보로 15분 정도 걸렸는데 흙먼지가 심하고 동정을 바라며 손을 내미는 사람들, 차선을 무시하며 먼저 가려는 경적 소리 때문에 무척 시끄러웠다. 번화가에 있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극장은 주택가 안에 있었다. 사실 그곳은 음악 전문 극장이었고, 그래서인지 바이올린 같은 모양으로 지어졌는데 그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친근하게 다가왔다. 인도는 치안이 불안해서 어느 곳에서나 검문이 일상적이었다. 극장에 들어갈 때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 일행도 검문을 받았다.
극장은 우리나라 못지않게 크고 멋졌지만 음향이나 조명같은 기술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 평소와 다른 좁은 무대였지만 우리를 위해 노력한 모든 스태프에게 너무 감사했고 멋진 공연으로 보답하리라 다짐했다.
무대 셋업이 끝나고 리허설을 기다리다가 야외에서 펼쳐지는 개막식을 보러 갔다. 인도 무용수들과 더불어 벨기에, 일본 무용수 등이 참가해 이루어진 공연은 우리의 눈을 바쁘게 할 정도로 화려했다. 소박함 속에 감추어진 그들의 열정은 우리를 무대 위로 부르고 있는 듯했다. 개막식 열기가 더해갈 때쯤 오늘은 리허설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대 셋업이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리며 숙소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신선한 문화 충격, 따스한 관객의 미소
드디어 공연 첫날 아침이 밝았다. 약간 불안했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마치 공연이 무사히 끝날 수 있음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다행히 공연 스태프의 밤샘 작업으로 무대 셋업은 끝나 있었고 이제 우리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평소보다 더 열정적이지만 차분하게 여러 번의 리허설을 했고 아직은 불안하지만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무대 위에 섰다.
막은 이미 올라갔으며 관객은 우리를 보고 있었다. 공연을보던 그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관객 모두 진지한 관찰자처럼 우리에게 집중했으며 때로는 소박한 미소를 지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공연은 순간처럼 스쳐갔고, 무사히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타국에서 펼쳐진 공연은 커다란 장벽인 동시에 가슴 벅찬 희열을 느끼게 했다. 많은 박수를 받았고 미소를 지으며 커튼콜을 했다.
이어서 작가와의 만남이 이뤄졌다. 그들은 가볍지만 진지한 관심과 애정 어린 시선이 담긴 질문을 했다. 특히 관심을 받았던 것은 엘리베이터의 상징적인 의미와 동성애 장면이었다. 아마도 그들과는 다른 문화적 또는 종교적 차이가 신선한 충격으로 그들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모든 것을 마치고 한번 더 인사를 하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나는 왠지 친근한 마음에 손을 흔들었는데 따스한 미소를 보내주던 관객에게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리셉션 장소에서도 박호빈 선생님과 무용수들은 많은 관심과 질문을 받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없이 자랑스러웠고 내가 이들 사이에 함께 있음이 커다란 행운이며 기쁨임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기회를 주신 안무가 선생님께 한번 더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전원 기립 박수의 놀라운 감동
공연 둘째 날은 전날보다 더 좋은 공연을 할 수 있었다. 무용수, 배우, 스태프 모두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앙상블을 이루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시간이 첫날 공연보다 더 빠르게 지나가는 듯했다. 공연을 마치고 커튼콜을 하던 순간의 아쉬움과 미련도 잠시, 예상치 못한 관객의 전원 기립 박수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작가와의 만남에서는 어제보다 많은 질문들이 나오진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며 움직이고 있을 때 관객 또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우리를 바라보고, 느끼고 있었음을…. 그렇기 때문에 질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용수들도 관객들도 맘껏 즐기고, 느꼈기에 그것으로 충분한 공연이었다.
마지막 돌아오는 날은 날씨가 너무 화창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평온해졌다.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평온함이었다. 박호빈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원하는 것을 좇고 있을 때 나타나는 그곳, 모든 것이 시작되는 그곳, 그곳이 바로 인도라고 하셨던 말씀….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 말뜻을 알 것 같다. 철학처럼 어렵게 생각되던 말이 인도의 아침 햇살에 녹아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곳을 천천히 둘러본 후 오후 늦게 비행기를 타고 인도의 하늘에 미련을 남긴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