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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펠로 지방답사를 다녀와서

나는 광주에서의 판소리 공연 관람과 칠량 옹기마을, 보성 차마을 방문에서 한국
전통문화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었고, 한국의 전통문화가 현대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 사람들은 외국인 인류학자인 내가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제나 좀 특이하게 여기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전통에 대한 무지를 부끄러워하고 정신없이 진행된 현대화와 과열된 교육열에 전통문화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것이 한국인이다.

한국에는 마치 서울의 도시적 생활양식이 온 나라에 범람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은 아주 짧은 역사적 기간에 전통문화가 현대문화로 변화한 대표적인 예이다. 100년도 채 안 된 사진들 속에서 수도 서울은 촌락의 모습을 하고 있고,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신촌 연세대 주변은 온통 논밭이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서울에서는 지금도 ‘굿’판이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옛날과는 달리, 남몰래 행하는 은밀한 행사로 점차 변질되고 있다. 예전의 정신과 전통은 어디로 간 것일까? 또 현대 한국은 전통 한국을 얼마나 적절하게 계승,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

재단은 아마도 이러한 물음들을 염두에 두고 1999년 펠로 지방답사로 ‘한국 전통문화 체험’의 자리를 마련한 것 같다. 지난 5월 말, 10개국 이상의 다양한 국적과 또 그만큼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펠로들이 전라남도 지역의 지방답사를 위해 4일 간의 여정에 올랐다. 서울을 떠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심기가 끝난 푸른 들판이 창 밖으로 펼쳐지자 모두들 복잡한 서울을 벗어났음을 기꺼워했다. 그러나 답사 일정 내내, 가는 곳곳 고층 아파트와 기계화된 농촌을 보고 한국에서는 외진 시골의 마지막 한 뼘의 땅까지도 모두 상업화가 이루어져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이토록 급속하게 이루어진 현대화의 물결 속에 전통이 보존될 여지가 있을 수 있을까?

전라도 지역에서 가볼 만한 곳을 모두 망라한 듯, 답사 일정은 매우 빡빡하게, 그러나 충실하게 짜여졌다. 방문하는 곳마다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백제시대의 중심지였던 부여와 전주의 한솔제지 박물관,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백련사에서의 참선수행, 강진의 고려청자 보존사업소, 천불천탑 조성의 전설이 있는 화순의 운주사, 순천의 낙안읍성 민속마을, 보성의 판소리 기념공원 및 선암사,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둘러본 지리산의 수려한 풍경 등 모두 매우 인상 깊었다.

지방답사 일정 중 펠로들을 이구동성으로 감탄케 한 것은 광주에서의 판소리 공연 관람과 칠량 옹기마을, 보성 차마을 방문이었다. 나는 거기서 비로소 한국 전통문화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었고, 전통문화가 현대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을 생활로 구현하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전통문화의 진정한 의미를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사람들이었고, 이들 전통문화인들 덕분에 차와 옹기 문화는 단절될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현대한국의 생활양식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정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 한국 어느 지방, 어느 도시에서나 가정집 뒷마당과 옥상에서 쉽게 장독대를 찾아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 도심의 거리마다 전통 찻집들이 자리잡고 있다. 차밭과 옹기마을에서 이러한 문화계승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뜻깊은 경험이었다.

우리는 답사기간 내내 수학여행을 떠나온 교복을 입은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 아이들도 백인은 모두 미국인으로 생각하고 자신들이 아는 몇 마디 영어단어를 동원해 말을 걸고 싶어했다. 나는 그 학생들을 보면서 수학여행이 과연 전통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짧은 수학여행 기간에 박물관 전시물을 둘러보고 사적지를 방문하는 것이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기에 충분 할까? 우리 외국인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존재였던 다도 전문가와 옹기장인들이 이들 청소년들이 섬기는 대중문화의 우상들과 과연 경쟁이 될까?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진실로 전통이 살아 있어 더욱 발전하고, 따라서 현대에도 전통에 대한 필요를 이끌어내고 그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하게 하는 것은 그 이념과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참모습을 만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 이웃 일본, 중국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 주기도
하면서 형성된 한국의 전통문화는, 지금은 전통적 가치와 급속한 현대화 과정의 격돌을 겪으면서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되었다. 표면상으로는 중국이나 일본이 한국보다 문화적으로 접근하기가 다소 쉬워 보인다. 그러나 한국은 한번 관심을 갖게 되면 오랫동안 연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한국과 한국의 문화유적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여러 번 방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한국 문화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은, 한국인이건 외국인이건, 한국을 제대로 알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사람들에게만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이번 지방답사는 내가 앞으로 한국문화를 연구하는 데 좋은 시작이 되어주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