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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교류, 새롭게 접근해야

성완경 교수는 현재 인하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로, 1988년 ASSEM 문화회의 한국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 1995년과 1997년 광주 비엔날레국제전 커미셔너를 역임했습니다.

전통과 고급예술에 편향되어 있고 우리 나라에서 관 주도 문화사업은 모방적이고 낭비적인 경우가 많다. 대부분 그 내용이 엇비슷하고 상투적이며 창조성이 별로 없다. 더구나 염려되는 현상은 기획단계에서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다는 것이다. 창조적 기획이나 창조적 프로세스가 결여된 채로 막대한 예산을 들인 문화 프로젝트가 양산되고 있고 사후평가나 사후관리도 제대로 행해지지 않고 있다.

관 주도 문화사업의 이런 일반적 경향이 국제적 문화교류의 영역에서도 100% 되풀이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와 거의 유사한 낭비적 상투적인 국제교류 사업이 반복되고 있지않은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문제로 관이나 대자본 주도의 막대한 예산을 들인 행사가 대체로 과거 지향적이고 보수적인 개념의 예술행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당대적, 일상적 현실에 기반한 기획은 희소하다. ‘문화대사’처럼 의전적인 측면에 무게를 둔 예술교류가 지배적이다. 외교적 목적의 교류에서 관례적으로 선호되는 것은 전통예술이나 민속문화, 문화유산 등이다. 그것들은 국가적 정체성을 잘 드러내주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을 증명해 주는 문화유산으로 만들어지는 국가 이미지란 일정한 한계가 있다. 현재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의 한국의 얼굴은 무엇인가. 과거 없는 현재도 공허한 것이지만 현재적 계승 없는 과거 또한 공허하기는 매일반이다. 현대미술의 경우 자주 선호되는 것이 화단의 유명 작가 위주의 패키지다. 이것은 포장은 무난해
보이지만 신선도가 떨어지고 내용이 빈약한 경우가 많다. 특히 오늘의 살아 있는 예술 경향과 토픽으로부터 너무 멀어 국제적 예술계의 주목을 받기엔 크게 역부족이다. 이와 달리 참신한 기획력을 보여주는 행사는 거의 전무하거나 아주 드물다. 다양한 당대적 현실에 주목하는 생생한 문화 형식들, 예컨데 일상적 삶의 문화(패션, 건축, 디자인, 공예, 음식, 춤, 노래, 미디어, 생태, 과학기술, 의학, 스포츠 등 ‘삶의 예술’)나, 젊은 예술가들의 새로운 예술 형식들은 보여질 기회가 너무도 적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국제교류를 주도하는 관이나 대자본가가 고급예술이나 전통예술을 선호하고, 명망 있는 작가 이름과 권위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척박한 후원 환경

교류에 드는 자금의 후원과 관련해서도 생각해볼 문제들이 있다. 후원의 주체로 우선 대기업과 다국적 기업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다국적 기업은 소수인 데다가 이런 종류의 후원은 나름대로 후원 주체의 이해 관계로 예상치 않은 제약이 따를 수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바람직한 방향으로 소액 후원자들의 풀(pool)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외국에는 소액 후원자들의 풀이 매우 효과적 기능을 하고 있고, 기본적으로 복수 후원(mixed funding)이 손쉽고 많이 관례화되어 있다. 우리 나라는 이에 비해 기본적으로 소액 후원이 없는 편이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는 아주 굵직한 후원 외에는 소액 후원은 아예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굵직한 대기업 후원에 의한 큰 전시를 제외하면 작은 전시가 수출되는 사례가 거의 없다. 한국은 대형을 좋아한다. 이것이 문제다. 대기업이나 다국적 기업들이 큰 규모의 전시를 좋아하고, 또 이런 전시들은 대개 고급 미술이나 문화재급의 전통예술에 치중되어 있다.

관련 국가 전문가와 협동작업이 효과적

후원 소스에 따라 누가 전시 조직의 주도권을 갖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수 있다. 흥미있는 현상으로 최근 공동전시기획이 많아지고 있는 추세를 주목할 수 있다. 예전에는 한 사람의 전지전능한 큐레이터, 즉 학식 많은 전문가, 미술사가 같은 사람이 전시조직을 전부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최근 이 같은 일방적 전시조직 형식을 지양하고, 보다 다양한 많은 분야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이 늘고 있는 추세다. 평소 꼭 미술이라고 관례적으로 인식되지 않던 분야, 서로 잘 모르는 다양한 분야 사람들까지 참여하여 적절한 직능 분배 속에서 흥미있는 전시 주제를 요리해 내는 사례들이 많아지고 있다.

미술의 국제교류와 관계시켜 이 문제를 살펴본다면, 일방적 전시조직(한쪽 나라에서 전시회를 일방적으로 조직하고, 상대국에는 로컬한 전문가들로 그 조수 역할만 맡기는 유형의 전시조직)을 지양하고, 양쪽 나라 관련 전문가들의 협동작업(co-operation)에 의존하는 전시조직을 바람직한 유형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유형은 한 전시 안에 다양한 전문지식과 역량이 녹아들 수 있다는 장점도 있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로서는 외국인과의 전문적인 협업을 통해 전시조직의 정교한 프로세스를 체험하고 그 노하우를 축적한다는 장점도 있다.

오디언스의 문제도 또한 새롭게 고려해 봐야 할 중요한 사안이다. 이를테면 런던에서 호평받은 전시인데, 한국에서는 전시할 수 없는 전시가 있을 수 있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또한 한국식으로 로컬한 전시조직 과정을 거쳐 작가를 선정해서 조직된 전시가 외국에서 형편없는 전시로 찬밥 먹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특히 오디언스 측면에서 볼 때, 대화가 결여된 전시는 무의미한 전시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점들을 무시한 한쪽 나라의 일방적 관점에서 또는 권위 있는 일인 전시조직자의 독재에 의해 조직된 전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과정 지원 필요

좋은 국제교류의 원천은 뭐니 뭐니 해도 좋은 예술가, 특히 젊은 예술가 집단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창작자들에 대한 지원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이것이 정말 큰 문제다. 독일의 경우 스티펜디움(stipendium)이라는, 기업 작가 지방자치단체의 개인 독지가의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창작기금이 있어서 학교를 마친 우수한 졸업생에게 스튜디오를 무료로 제공하거나(3개월 내지 2년) / 스튜디오 제공 + 생활보조 / 또는 셋방 + 스튜디오 제공 등의 방식으로 창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지방자치단위에서도 작은 도시마다 연주가, 문필가, 미술가 등 다양한 예술장르를 대상으로 한 작가초청기금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아는 한국의 한 젊은 여성 조각가는 미대 졸업 후 이런 기금만으로 그곳에서 4년을 버텼다. 많은 작가들이 이런 종류의 아틀리에 장학금을 받아가며 작업을 한다. 심사위원이 중요한데, 심사위원은 시장으로부터 독립적이다. 대체로 전시회 개최가 조건으로 따라붙는다. 이 전시회는 공공 문화시설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것이 작가가 인정을 받는 중요한 기회이자 발판이 된다. 이것은 기업의 중소기업 인큐베이터의 창업지원 제도와 비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작업 공간을 제공하는 장학 프로그램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근대 작고 작가 재단들이 많은데, 이 작가 재단의 기금들이 이런 장학 프로그램에 쓰인다.

한국의 현실과 비교하면 어떤가. 젊은 작가에 대한 지원이 거의 제로인 실정이다. 95년 베니스 비엔날레 개관식 때, 국내 재벌기업에서 운영하는 문화재단 대표가 국내 작가들도 부르고 외국평론가들도 불러서 호화로운 만찬을 제공했는데, 이 때 많은 외국작가들이 한국은 이렇게 대기업이 지원해주고 또 그 당시 광주 비엔날레가 창설될 때여서 비엔날레 이야기를 하며 예술가들의 천국이라 부러워했는데, 실제 현실을 생각하면 우리 나라에서 기업의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방식이 앞서 말한 독일의 스티펜디움 장학제도에 비해 겉치레이고 비효율적인 것임을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는 얘기를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평론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결과에 대한 포상 대신, 과정에 대한 지원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