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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콘텐츠] 새 시대로 기록될 K-팝 걸그룹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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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로 기록될 K-팝 걸그룹 전성기

김도헌(대중음악평론가)


2010년대 말 세계를 호령한 방탄소년단의 입대가 다가오며 K-팝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전망하는 시선이 늘었다. 2023년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관훈클럽 주최로 열린 관훈포럼에서 K-팝 위기론을 실체화하며 업계 전체의 분발을 촉구했다. 일리 있는 비판이다. 하지만 현재의 우려 섞인 시선은 역으로 그만큼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K-팝의 오늘날을 더 오래 이어가고 싶은 자기 검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지난해 일제히 창사 이래 최고 매출을 갱신한 K-팝 대형 기획사들은 견고한 수익 구조를 바탕으로 다양한 기획과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서로 다른 기획사의 철학과 이상향을 토대로 빚어진 K-팝 아이돌 그룹들은 예상한 대로, 혹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최근 두드러지는 K-팝 흐름은 걸그룹의 약진이다. 과거 적자를 감수해야 했던 걸그룹은 이제 밀리언셀러 판매량과 대중적 인지도,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서사의 필요성에 힘입어 시장을 이끄는 핵심 사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글로벌 셀러브리티로 전천후 활약하며 K-팝 걸그룹 성공 신화를 쓰는 블랙핑크와 트와이스는 월드투어를 진행하며 미국에서의 거대 공연도 어렵지 않게 매진 세례를 기록할 정도로 인지도를 높였다. SM엔터테인먼트의 새로운 가치관을 상징하는 그룹 에스파, K-팝 서바이벌 프로그램 출신 멤버를 주축으로 데뷔와 동시에 인기를 누리는 아이브, 하이브의 첫 걸그룹으로 주목받으며 단단한 정체성을 앞세우는 르세라핌은 빠르게 K-팝의 현재로 자리 잡으며 내일을 그려 나가는 핵심 인재다. 그리고 엄격한 K-팝 문법에 반기를 들고 여성의 시선으로 그린 이상적 걸그룹을 완성하며 파란을 몰고 온 뉴진스가 등장했다.

아이브와 르세라핌은 K-팝의 정수다. 제약 없는 환상의 세계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비주얼과 온몸으로 표현하는 퍼포먼스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아이브가 첫 정규 앨범 ‘I’ve IVE’의 타이틀곡 ‘I AM’에서 증명하고자 한 것은 무대 위 빛나는 젊음의 순간을 기록하고, 이를 모두가 동경하게 하는 하나의 흐름을 만드는 믿음과 숭배의 작동 방식이다. 의심이나 고민, 현실과의 접점은 불필요하다. 누구나 그려보는 무대 위 화려한 정점을 아이브가 대신 실현한다. 르세라핌은 조금 다르다. 최고의 순간을 위해 극한까지 자신을 밀어붙인다는 점은 같다. 대신 르세라핌은 강한 자부심으로 무장했다. 겁 없이 도전하고, 한계를 뛰어넘고, 금기에 도전한다는 저항과 반항의 표어를 반복 강조한다. 도전도 하기 전에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는 면죄부를 스스로 발행하며 야심 찬 미래를 증명하는 타이틀곡 ‘Unforgiven’과 아크로바틱한 퍼포먼스가 르세라핌의 이 악문 세계관을 완성한다. 이는 ‘광야’로 대표되는 독특한 세계관에 완전히 이입해 가상 세계 경험을 안긴 에스파와도 일맥상통한다.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른다. 퍼포먼스 중심으로 규격화되고 의례적인 형식미에 골몰하던 K-팝 흐름을 거부한 어도어 레이블의 민희진 대표는 자신이 그려온 이상적인 십대 서사를 취향의 음악과 결합해 뉴진스 신드롬을 불렀다. 음악, 퍼포먼스, 비주얼, 실물 앨범 등 일사불란한 제작 공정을 통해 매끈하게 마감되어 세상에 나온 뉴진스는 장르 음악을 바탕으로 한 팝 지향의 편안한 노래를 부른다. 고자극의 K-팝에 피로를 느끼던 팬들에게 밀레니얼 시대의 노스탤지어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열린 콘텐츠는 분명 존재했던 것임에도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다. 세계관이나 철학 대신 춤과 음악 그 자체의 즐거움을 일깨운 팀이다. 이 성공 전략은 중소 기획사 걸그룹 피프티피프티와 그들의 노래 ‘Cupid’에도 적용됐다. 소셜 미디어에서 손쉽게 따라 할 수 있는 팝 트렌드와 부드럽고 편안한 가창에 힘입어 그들은 K-팝 걸그룹 누구도 오르지 못했던 전인미답의 경지를 향해 날아오르고 있다.

포스트 K-팝에 정답이나 공식은 없다. K-팝 시장은 다양한 수요를 맞출 만큼 커졌고, 기획의 방향은 더욱 세분된다. 흥미로운 세계관도, 대중적 접근도 좋다. 핵심은 과감한 도전과 완성도에 대한 끝없는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