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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은 탑인가?

필자의 연구분야는 다층 목조탑이다. 동아시아 고유의 탑은 최고의 이상이 실현되는 궁극의 경지를 향해 인간의 정신·마음·손이 일체가 되었을 때 비로소 만들어진 ‘고도의 기술’이 담긴 영적(靈的) 건축물이다. 모든 탑에서는 어느 정도 공통적인 기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탑이 어느 지역에 세워졌건 간에 모두 부분적이나마 동일한 흐름을 나타내고 하나의 기원, 즉 중국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탑 건축은 중국의 문화가 동아시아 전역에서 모방되던 6세기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필자의 연구는 한국과 일본의 탑이 중국의 탑과 얼마나 닮았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탑들이 서로 얼마나 독특한가에 대한 것이다. 아직까지 이들 탑이 어떻게, 어떤 점에서, 왜 서로 다른가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진 바 없다. 다음은 이에 대한 체계적인 비교연구로서, 구조건축, 건축기능, 결과적 특징 등 세 부분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중국 건축사가로서 필자가 지닌 중국 건축물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팔상전의 역사적 배경과 건축학적 특징을 이해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서로 얼마나 다른 방법으로 목탑이 건조되었는가를 유형적, 건축적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팔상전(八相殿)
탑은 4세기부터 불교문화의 일부분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해졌으며, 이어 6세기에 일본에 전해졌는데, 일본의 초기 탑은 백제 이주민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불교가 처음 도입되던 당시 한국은 고구려(37 BC - AD 668), 백제(18 BC -AD 660), 신라(57 BC - AD 935)의 삼국시대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의 황룡사탑도 백제인들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탑은 고대 한국에서 가장 야심적인 건축사업 중 하나였다.

한국의 목탑을 연구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는데, 이는 비교할만한 건조물이 남아 있지 않고, 그나마 목탑 형식을 빌어 만들어진 건축물도 겨우 두 군데 밖에 보존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법주사 팔상전과 쌍봉사 대웅전이 그것인데, 이들 두 건축물 모두 법전 건물이다. 팔상전은 5층 지붕의 정방형 건물로서, 1596년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뒤 1626년 재건되었다. 한국의 많은 유적들이 이처럼 파란 많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쌍봉사 대웅전 역시 1986년에 다시 세워졌다. 팔상전은 문자 그대로 여덟 폭의 그림이 있는 법전이란 뜻으로, 그 이름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석가모니의 탄생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를 여덟 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설명한 그림인 팔상이 모셔진 곳이다. 그러나 팔상전은 국보 목록에 탑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그 이름과 형태가 일치하지 않는 것일까? 건축학적으로 팔상전은 전(殿)인가, 탑(塔)인가?

전(殿)인가 탑(塔)인가
법주사는 ‘불교의 성스러운 산’이라는 뜻의 속리산 자락에 위치한 절로서 한국에서 가장 크고 장엄한 사찰지 중 하나이며,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불교 종파의 하나인 법상종의 본산이다. 법주사의 역사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553년 창건되어 776년 확장되었다. 5층탑이 세워진 것은 절이 확장되던 8세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존하는 팔상전은 총 높이가 22.7m, 평면은 8m의 정방형으로 된 탑처럼 생긴 목조 건물로 돌기단 위에 세워져 있고, 동서남북 사방에 각각 출입구가 있다. 팔상전은 건물 전체 높이에 달하는 중심 기둥, 보를 위에 얹은 4층 높이의 내부틀, 3층까지만 올라가는 외부틀 등의 몇 가지 구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틀 위에는 틀이 받치고 있는 처마가 다섯 층의 지붕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팔상전에 관한 역사기록이 모두 분실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구조형태와 건축특징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1968년 대대적인 보수공사 도중 팔상전에서 두 개의 명문이 발견되었다. 건축물의 건립경위를 명문으로 새기는 것은 관례였는데, 발견된 두 개의 명문 중 하나는 중심 기둥 아래에서 나온 사리함에 새겨진 것이었고, 또 하나는 지붕의 마룻대에 새겨진 것이었다.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사리는 1605년에 안치되었고 지붕은 1626년 완성되었다. 전체 건축에 소요된 시간은 총 21년에 달하였다.

사리함과 중심기둥은 이 건축물이 탑으로 재건되었음을 나타낸다. 팔상전의 기단은 1968년 발굴조사작업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원래는 3 x3칸으로 되어 있었고, 중심기둥은 그대로였다. 이는 팔상전이 원래 크기보다 두 배 이상 확장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크기와 기능이 달라졌기 때문에 약간의 변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시대(1392-1910) 불교계에는 1406년, 1424년, 1507년 세 차례에 걸쳐 개혁이 일어났는데, 교리의 변화에 따라 탑 건축물의 구성형태도 변화를 겪게 되었다. 건축학적으로 그 변화의 이유는 오로지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건물의 규모와 비례는 목재의 크기와 틀 배치에 의해 결정되며, 이것은 다시 건물의 용도와 기능, 경내 다른 건물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이에, 이전에 지어진 건물의 크기가 훗날 종교의식을 치루기에는 너무 작다고 여겨졌을 수도 있다. 새로 지어질 팔상전은 법주사 내 다른 건축물의 특징과 조화를 이뤄야 했을 것이므로 이런 결정은 매우 신중하게 내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팔상전은 구조적으로 중심기둥 탑과 관련이 있으나 정면은 그런 구조에 배치되는 것이며, 구조보다 사면이 더 두드러진다. 팔상전에는 노대가 없고 창문이 있는데, 노대는 목탑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공간적 차원에서 볼 때 팔상전은 법전이다. 그러나 그 높이로 보아서는 탑이라 불러도 될 만큼 높다. 팔상전에서도 중심기둥 유형의 몇 가지 특징이 보이지만 팔상전은 조선시대에 크게 유행했던 높은 기둥 방식을 따른 전형적인 건축물이다. 중요한 사실은 팔상전이 한국의 매우 다른 상황 속에서 전혀 다른 길을 택했던 탑이 불전으로서 살아 남았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