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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만남에 사람이 있었다

동서양 사이의 만남이 역사적으로 13세기 중국을 다녀간 마르코 폴로에서 비롯되었듯이, 유럽대륙 서쪽 끝 스페인과 지구의 동쪽 끝 한국, 이 두 나라의 만남에도 역시 사람이 있었다. 확인된 한국과 스페인 사이의 최초 만남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때 왜군 주장 중 한 사람인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를 뒤따라 나선 마드리드 태생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신부가 그 고리였다. 천주교도인 유키나가는 모두 9대로 이루어진 침략군 제 1대를 이끌고 가장 먼저 한반도에 상륙했으며, 가장 먼저 한양을 함락시킨 맹장이었다.

나라의 만남은 사람의 만남에서
유키나가의 간청으로 미사와 세례 등 성사(聖事)를 집전하기 위해 1593년 말에 한반도 땅을 밟은 신부는 필시 기독교의 한반도 전파 가능성 탐색에도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신부의 한반도 종군이 컬럼버스가 미 대륙에 당도했던 1492년으로부터 꼭 백년을 넘긴 시점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신부 또한 기독교 전파에 큰 뜻을 두었음이 분명하다. 컬럼버스의 영어 이름 ‘크리스토퍼(Christopher)’는 바로 ‘그리스도(Christo)의 전파자(pher: 영어의 bearer)’라는 뜻이고, 컬럼버스가 의도했던 최종 목적지는 일본이 있는 극동이었음을 세스페데스 신부가 모를 리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전쟁 중이라 신부가 만난 조선인은 일본으로 압송되기 직전의 포로가 전부였다. 신부는 먼저 문자 속이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교리를 가르쳤고, 이들로 하여금 다시 문자 속이 없는 사람을 가르치게 한 결과, 일본 억류 조선인 포로로서 천주교 개종자는 무려 7천명에 이르렀다.
전교(傳敎)의 성과가 그처럼 괄목했다 하더라도, 오늘의 우리에게 실감나는 바는 조선인에게 죽음의 일상화를 뜻하던 왜란의 참상에서 인류애의 일단을 실현해준 신부의 발자취라 할 것이다. 유키나가의 정적(政敵)이기도한 가또 기요마사(加藤淸正)같은 불제자(佛弟子) 주장이 일본으로 압송한 조선인을 노예시장에 마구 내다팔 때, 신부는 조선인 포로 매매에 가담하지 않도록 특히 포르투갈 상인들을 제재했다는 사실이다. 이 선행의 여파로 1597년 6월에 일본을 찾았던 이탈리아 신부 카르레티(Francesco Carletti)가 나가사키 노예시장에서 다섯 소년을 구해서 인도 고어까지 데려갔다. 그 가운데 한 소년을 피렌체로 데려가 교육을 시킨 뒤 안토니오 코레아(Antonio Korea)라 이름 지어 로마에 살게 했다. 이 사람이 바로 가장 먼저 유럽 땅을 밟은 조선인이 되었다.
아주 요행으로 이 한국인은 루벤스(Peter Rubens)가 1617~18년경에 그린 유명 드로잉 <조선인>을 통해 그 모습을 남겼다. 갓과 한복을 갖춰 입은 모습에서 어엿한 양가집 자손이었음이 금방 느껴진다. 드로잉은 루벤스의 <성 프란시스 사비에르의 기적> 유화그림 속의 배경인물을 위한 밑그림이었다는데, 사비에르(Francis Xavier)는 바로 세스페데스 신부도 일원인 동방 선교 전문 예수회의 최초 선교사를 말함이다.

아픈 만남, 좋은 만남
세스페데스를 통한 한국과 스페인의 만남은 전쟁이란 곤경 가운데 만남이었기 때문에 비록 역사적 만남이긴 해도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는 없었다. 한국과 네덜란드의 처음 만남이 17세기 중엽, 화란 동인도회사 소속 하멜 일행이 제주도 근해 난파로 말미암았던 점에서 역시 좋은 기억으로 남지 못했던 점과 속사정이 닮았다. 하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팀을 4강으로 이끈 축구감독 히딩크가 네덜란드 사람이었던 인연으로 두 나라 국민사이의 호감도가 폭발적으로 높아져, 각종 교류도 급물살을 탔다. 마찬가지로 근세에 들어 이루어진 한국과 스페인의 만남도 희대의 천재 예술가 피카소가 그 고리였던 점에서 자못 장밋빛이었다.
비록 식민 치하의 한반도이었지만 근대화의 물결을 좇아 20세기 초부터 선각 예술지망생들이 일본으로 그림 유학에 나섰다. 거기서 그들이 소문만 듣고도 흠뻑 동경해 마지않던 세계적 화가 가운데는 당연히 피카소가 돋보였다. 스페인 예술 아이콘에 대한 한국인의 경의는 김병기에게서 한 정점을 이룬다. 제작하는 작품마다 번뜩이는 천재적 조형성에 더해, 사회의식이 돋보인 덕분에 피카소는 넓게는 세계의 식자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는다. 그의 사회의식으로 말하면 무엇보다 프랑코 우파의 만행을 고발한 〈게르니카〉그림이 기폭제였다. 그림에 리얼리티 곧 현실에 대한 피카소의 올곧은 사회의식이 담겼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즈음 우리만 피카소의 고명(高名)을 알았던 것이 아니다. ‘위대한’ 피카소도 1939년 6월 15일 밤, 파리 무용계에 혜성처럼 데뷔한 ‘코리언 댄서’ 최승희의 공연 관람을 통해 조선의 예술을 만나고 있었다.
일본유학을 마친 김병기는 광복의 기쁨을 고향 평양에서 맞는다. 거기서 좌우익 가릴 것 없이 광복의 기쁨이 한결 같은 줄 알고 해방직후 맛보기 시작한 자유의 현장에 그는 직접 참여한다. 북한 땅에 결성된 북조선 문학예술 총동맹 서기장 일을 맡은 것. 하지만 이내 ‘예술가들이 나랏일을 해야지, 정물은 왜 그려?’라고 질책하는 북한 공산정권의 실체를 몸으로 깨닫자 표현의 자유를 찾아 곧장 월남해 버린다. 김병기도, 일제시대의 많은 식자들이 그랬듯이, 한때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러시아문학을 탐독하는 문학청년이던 그가 이전과 달리 공산주의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해진 것은 1937년에 막심 고르키의 장례식에 초대받아 추도사를 했던 프랑스 문학가 앙드레 지드가 소비에트 러시아의 주선으로 학교와 공장을 둘러본 뒤 적었던 <소비에트 기행>을 읽고서다. 책은 자유진영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정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중요 단초가 되었다. 이어 해방직후 북한에서 직접 목격한 공산주의자들의 만행, 이를 참지 못해 월남했다가 다시 북한이 남침을 자행하는 사회적 재난을 당하자 김병기는 말 그대로 ‘의식 있는 반공’으로 돌아선다.
그런 김병기인데, 미군의 북한주민 학살을 개탄한다며 〈조선의 학살>을 피카소가 그렸다는 ‘참담한’ 소식을 부산 임시수도에서 외지(外誌)의 쪼가리 기사에서 만나자마자 반공의식이 폭발한다. <조선의 학살> 작품 제작 이전만 해도 피카소가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에 김병기를 포함한 한국지식사회가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나치 치하의 프랑스에서 공산주의자가 가장 치열하게 레지스탕스에 참여함을 목격한 것이 피카소가 공산주의자가 된 계기였다는 내력에 대해 그럴 수 있겠다고 일단 수긍하는 분위기였고, 언젠가 궁극에 가면 참 예술가가 이념의 포로가 될 리 만무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수긍하던 피카소인데 뜻밖에도 〈조선의 학살〉은 김병기의 생생한 개인적 전쟁체험에 비춘다면 주먹구구식 잘못된 판단의 소산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미군의 양민 학살을 상징한 〈조선의 학살〉은 그가 직접 목격한 학살과 너무 달랐다. 게다가 먼저 전쟁을 일으킨 북한이 나중에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 책임을 오히려 참전 미군에게 전가하는 뻔뻔스러움을 견딜 수 없었다. 실망한 나머지 피카소에게 항의 편지를 적었다. 전쟁 중이라 편지는 부치지 못했다. 대신 아호가 공초(空超)인 시인 오상순 등 30여 명의 문화인들이 모인 부산 남포동의 으슥한 다방에서 ‘피카소와의 결별’이란 선언문을 낭독하는, 요즘 말로 퍼포먼스를 펼쳤다. 남침으로 동족 싸움을 시작한 북한 공산주의자를 그림으로 옹호하는 피카소를 참을 수 없다는 취지였다.
아무튼 <조선의 학살> 이후로 우리 미술교과서에서 어김없이 피카소가 20세기 최대의 천재화가라는 사실까진 적시해도, 그 그림에 대한 언급은 예외였다. 반공을 국시로 삼는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 세력에 동조하는 이적 출판물의 한 유형으로 여겨져 언론 매체나 화집에 도판으로 소개되지 못했다. 심지어 피카소 이름의 방외(方外) 사용마저도 한때는 금기였다. ‘피카소 크레파스’, ‘피카소 수채화’ 등의 이름으로 물감을 만들어온 회사 대표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하고, 그 회사제품의 광고를 중지시킬 정도였다.

이념의 굴레를 이겨낸 예술, 그리고 나라관계
그림 제작이 이념성에서 출발할 수 있지만, 위대한 작품은 이념을 초월한 보편성으로 그 진가가 빛난다. 이념은 현실 왜곡의 포로가 되기 싶지만, 좋은 예술은 현실의 많은 굴곡을 이겨낸 인간승리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학살>이 피카소의 독보적 예술성에 빛나는 기념비적 작품의 하나인지 아닌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 출발점이던 이념은 실체적 진실 면에서 역사적으로 이미 완패했다. 한때 피카소가 옹호했던 공산주의가 1세기의 수명도 누리지 못하고 구소련의 와해로 정치제도로서 붕괴되었고, 공산주의 낙원을 만든다던 북한도 역사적 변환에 뒤쳐진 채 지독한 독재체제로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할 뿐이다. 예술의 참된 가치가 이념의 초월에 있듯이, 나라도 대내외적으로 ‘시시하게’ 한 때의 지도자로 낙인찍히거나 재단될 그런 실체가 아니다. 피카소나 첼리스트 카잘스(Pablo Casals)가 그렇게 싫어했던 바는 조국을 무단 통치했던 정치지도자였지, 조국 그 자체가 아니었다.
이웃 나라로 가까이 다가온 스페인도 이제 한국사람에게 그 나라의 한때를 장악한 정치지도자가 아니라 영원의 진실을 추구했던 위대한 예술가들의 이름으로 다가온다. 한편, 피카소가 이룩한 높은 예술세계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을 오늘의 스페인 예단(藝壇)이 그 사이 대한민국이 불과 한 세대 만에 근대화의 꽃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실현한 세계사적 성취를 평가하는 사이에 피카소의 북한 공산주의 옹호는 한때의 시대적 착오임을 인정하는데 인색하지 않을 것이라 우리는 믿는다. 이해는 이해를 낳는다. 한국사람에게 스페인은 위대한 예술가를 줄줄이 배출한 나라로 진작 기분 좋게 다가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