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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은 공식 일정 하루 전인 일요일 아침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행사 훨씬 이전부터 이번 워크숍에 대한 재단 내외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던 탓에 휴일 아침 침대 속의 달콤함을 뒤에 두고 큐레이터들의 숙소로 향하는 내내 긴장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전날 팀장이 퇴근하면서 던진 말이다. 이제 결과를 겸허하게 기다릴 만큼 나는 최선을 다했던가. 노력은 많이 한 것 같은데…. 심란했다. 그러나 그 긴장감도 잠시. 아홉 개 나라에서 출발 제각각 입국하는 23명의 해외 박물관 한국실 큐레이터들의 호텔 투숙이 확인되는 즉시 일일이 만나서 행사에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전달하느라 점심때가 언제 지났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또 사전에 제출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건만 뒤늦게 들고 온 발표 원고는 왜 그렇게 많은지. 원고 복사를 위해 때마침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인사동의 한 문방구에 도착해서야 이미 저녁 먹을 시간도 지나가고 있음을 알았다. 비에 흠뻑 젖은 바지를 보자 또 조바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홍수가 나도 괜찮지만 내일 개막 행사 때는 절대 비가 오면 안 되는데…. 이번 행사의 성사를 위해 지난 몇 달 간 팀장과 팀원들이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써왔던가.

90년대 들어 재단을 중심으로 관련 기관들의 노력으로 인해 해외 박물관 한국실의 양적 확대는 대폭적으로 이루어졌으나, 한국실을 전담하는 큐레이터는 상대적으로 부족해 한국실의 효율적인 운영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따라서 한국 전문 큐레이터 양성과 함께 이들의 전문성을 높이는 일이 매우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들이 한국 고미술품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박물관 전시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인식 밑에서 재단이 기획한 ‘제1차 해외 박물관 한국 담당 큐레이터 초청 워크숍’(이하 큐레이터 워크숍)은 한국 담당 큐레이터들을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아 한국 고문화예술을 논의하고 해외전시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의미 있는 행사였던 것이다.

뜻깊은 행사였던 만큼 해외에서의 관심도 컸다. 왕복 항공료 자비 부담에도 불구하고 대영박물관 한국실 담당 제인 포털, 미국 스미소니언재단 프리어 갤러리의 동양 고미술 담당 앤 요네무라, 스웨덴 동양박물관 메티 지그스테트 등 비중 있는 해외 박물관 큐레이터들은 거의 모두 신청했다.

고미술강의와 열띤 토론
9월 6일 아침 개막식을 시작으로 17일까지 서울과 지방에서 열린 큐레이터 워크숍의 주요 프로그램은 참가 대상 기관 및 한국 미술 관련 국내외 전문가의 의견 수렴을 거쳐 마련된 것으로, 국내 고미술 분야에 대한 전문가 강의와 경주, 안동, 강진, 부여 등 지방의 문화 유적지를 방문하는 지방 현장 답사 중심으로 짜여졌다. 공동 주최 기관인 국립중앙박물관에서의 개막식에 이어 김영원 국립공주박물관장의 ‘한국 미술 해외전시사’로 시작된 강의는 일주일 동안 김병모 한양대 교수의‘한국 선사미술’, 정형민 서울대 교수의‘한국 회화사’, 김리나 홍익대 교수의‘한국 조각사’, 이주형 서울대 교수의‘한국의 불교미술’, 김성우 연세대 교수의‘한국 건축사’,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의‘한국 도자사’등 한국의 고미술을 조망할 수 있는 주제로 이어졌다.

공개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된 첫날 행사에서는 김영원 관장이 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의 해외 전시사를 지역별, 전시 종류별로 정리하고, 10명의 큐레이터 대표가 각 소속 국가의 한국 미술 전시 현황을 슬라이드 등 각종 자료를 통해 소개함으로써 참가자들은 물론 미술사 전공 대학원생 등 일반 참가자들도 한국 미술의 해외 전시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큐레이터들은 강의마다 예외 없이 질문 공세를 펼쳐 예정 시간을 넘기기가 일쑤였다. 특히 정형민 교수는 선사시대부터 20세기까지 한국의 회화사를 중국, 한국, 일본 회화의 비교 문화적 측면에서 접근, 큐레이터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큐레이터들은 또한 일제시대 주목받던 작가들에 대한 최근의 연구 동향에 대해 집중적인 질문을 던졌으며 중국과 한국의 회화를 비교, 분석하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열띤 토론을 벌여, 강의 시간을 한 시간이나 초과해 행사 진행팀의 손에 엄청난 땀을 흘리게 만들었다.

행사 진행팀을 당황케 한 또 한 가지 에피소드. 호암미술관 관람 이후 다음 이동 예정지인 이천 해강도자미술관으로 향하는 순간 스웨덴 동양박물관 부관장인 메티 지그스테트 박사가 큰일났다며 찾아왔다. 그날 저녁 주한 스웨덴대사와 문화 사업 협의를 위한 만찬 약속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것이다. 남은 시간은 2시간. 2시간 안에 서울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만찬장에 도착해야 한다. 진행팀의 긴급 대책 회의 후 특별 수송 작전이 시작되었다. 우선 큐레이터 이동 버스를 에버랜드 앞에 세운 다음 호암미술관에 연락해 수배한 택시로 서울로 향하게 했다. 물론 한국 지리에 어두운 박사를 위해 행사 지원요원 한 명을 동행케 했다. 덕분에 박사는 늦지 않게 만찬에 참석할 수 있었고 동행했던 지원 요원은 너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선물로 술 한 병을 받았다며 ‘나중에’ 자랑했다. 또한‘한국의 도자사’를 주제로 마지막 강의를 담당한 정양모 관장은 약 200점의 도편(片)을 직접 보여주며 강의를 진행, 참가자들의 열띤 호응을 받기도 했다.

4박 5일 간의 문화유적지 답사
약 일주일간의 강의와 서울 및 인근의 박물관 견학을 마친 큐레이터들은 안동의 하회마을 관람을 시작으로 4박 5일간 전국의 문화유적지를 현장에서 경험하고 배우는 지방 답사 일정에 들어갔다.

지방 답사 첫날 안동 하회마을 및 병산서원 관람을 마친 이들은 천년의 고도 경주로 향했다. 경주의 석굴암에선 마침 이곳을 방문한 인근 사찰의 주지 스님이 한국을 배우러 온 사람들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며 석굴암 주지 스님에게 부탁, 큐레이터들이 석굴암 내부에 입장할 수 있는 예외적 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나 역시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석굴암의 내부 관람은 처음이었다. 내부에서 올려다본 본존불의 미소와 아름다움은 절로 고개를 숙이게 했다. 나는 한국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고 큐레이터들은 과연 어떨까 하고 뒤를 보니 이들은 이미 본존불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있었다.

문화유적의 규모나 중요성에 비추어 매우 아쉬운 이틀 간의 경주 방문을 뒤로 하고 큐레이터들은 해인사를 거쳐 전남 순천 송광사 인근에 숙소를 정했다. 이튿날 송광사 새벽 예불 참가를 위해서다. 전날 밤 언젠지 모르게 잠이든 나는 핸드폰에 미리 입력한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새벽 2시 40분. 3시 40분에 시작하는 예불 관람을 위해서는 적어도 3시에 큐레이터들을 모두 깨워야 했다.

그러나 새벽 3시에 일어났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새벽 산사에서의 엄숙한 예불 행사, 아침 공양, 노스님과의 대화…. 이들이 두고 두고 이야기하게 되는 소중한 기억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후에 방문한 남도의 끝 강진의 고려청자 박물관도 큐레이터들이 잊을 수 없는 곳의 하나. 마침 고려청자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던 데다 군립 박물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설계된 박물관 시설과 전시물들이 이들의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지방 답사 마지막날. 부여박물관의 규모가 지금까지 방문했던 다른 박물관들보다 작고 유물도 많지 않아 혹시 큐레이터들이 실망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부여박물관이 전시 유물의 숫자는 작아도 의미 있는 유물이 많은 데다가 모든 유물에 대한 설명이 일관성을 유지할 뿐더러, 중국과 일본 등 주변 국가와의 연계성까지도 파악할 수 있는 훌륭한 박물관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나는 이번 큐레이터 워크숍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누가 그렇게 말해주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귀경하는 버스 속에서 본 큐레이터 한 사람 한 사람의 만족스런 표정, 정들었던 동료들과 헤어지는 게 섭섭하다고 눈물을 보이던 어느 큐레이터, 귀국 가방에 넘치듯이 실린 한국 미술 관련 서적들, 또 그들 스스로의 직접 증언이 내 확신의 이유이다.

새벽 산사의 어둠 속에서 네 살배기 딸의 손을 잡고 큐레이터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송광사 성보박물관 한성욱 학예연구실장. 속옷까지 흠뻑 젖는 무더위 속에서 장시간 안내의 수고를 해준 이종민 해강도자미술관 학예연구과장, 박물관이 휴무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박물관 소개로 큐레이터들의 박수를 받은 고경희 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지방 답사 전 일정을 인내와 프로 정신으로 통역을 담당한 노재령 교수, 그림자처럼 행사를 지원한 국립중앙박물관 김승희 학예사, 자원봉사요원 강일권 씨, 그리고 큐레이터들의 휴일 한국 문화 탐방 프로그램까지 챙겨준 문화교류팀 김자성 씨. 모두 큐레이터 워크숍 성공의 일등 공신들이다.

독일 함부르크박물관의 수잔 크노델 박사는 지방 답사를 마감하는 자리에서 “이번 워크숍을 통해 보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귀국 즉시 소속 박물관의 한국 미술품 재평가 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녀는 또한 “이번 워크숍을 통해 한국을 담당하는 큐레이터들 간에 ‘유대 의식’이 형성된 것이 무엇보다도 큰 수확일 것”이라고 말해 다른 참가자들의 공감 어린 박수를 받기도 했다.

나를 기쁘게 하는 또 다른 이유. 최근에 필라델피아박물관의 펠리스 피셔 박사에게서 받은 카드 한 장. 나는 경주 답사 중 물이 불어난 개천에 이르러 큐레이터들이 건널 수 있도록 답사지 안내원과 함께 돌다리를 놓아준 적이 있었다. 언제 찍었는지 그 모습이 담긴 사진과 함께 보내준 사연.
(중략)…워크숍은 매우 유익하고 독특한 경험이었어요. 우리 큐레이터들을 위해 개천에 돌다리를 놓아주던 모습을 찍은 사진을 동봉합니다. 워크숍 전 일정을 통해 우리와 한국, 한국 미술간에 보이지 않는 다리를 수없이 놓아주었죠.…끝.





이번 워크숍 참가자 중 한국계가 아니면서도 유창한 한국어로 눈길을 끈 큐레이터가 있었다. 1994년과 1997년 재단의 펠로십으로 한국어와 한국 미술을 공부한 적이 있으며, 현재 영국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서 한국실 담당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샬롯 홀릭 씨를 만나 해외에서의 한국 미술에 대한 연구 분위기와 이번 워크숍에 참가한 소감을 들어보았다.
□ 김자성 (jskim@kofo.or.kr: 문화교류팀) ■영국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한국실 담당 큐레이터 샬롯 홀릭

□ 런던대 SOAS에서 동아시아 미술을 전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학원에서 특별히 한국 미술을 전공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 런던대에서 한국 미술사를 가르치는 박영숙 교수님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그 분의 영향이 컸습니다. 영국에서는 중국이나 일본 미술에 비해 한국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한국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거의 없는 상황이고 보니 미술사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거죠. 따라서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고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중국 미술이나 일본 미술에 비해 한국 미술의 특징은 어떤 것이라고 보십니까?
■ 무엇보다도 역동적인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변화의 속도가 무척 빠르고 활기가 있습니다. 공예 분야의 경우는 색상이 무척 다채로운 것이 특징입니다.

□ 외국에서 한국 미술을 연구하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 한국말을 하지 못하면 깊이 있는 공부를 하기 어렵습니다. 영어로 된 한국 미술 관련 서적이 거의 없을 뿐더러 그나마 영역되어 있는 서적들도 신뢰하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정기간행물의 경우 꾸준히 나오는 간행물의 수가 적고 용어 표기도 통일되어 있지 않아요. 논문과 보고서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일단 자료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박사학위 논문이 심한 편이죠. 중국과 일본같은 경우, 미술사 분야에서도 출판업자와 도서관을 연결해 주는 전문 서적상이 있어서 관련 서적의 유통이 원활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아직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 이번 워크숍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해 주시겠습니까?
■ 전체적으로 훌륭히 기획된 워크숍이었다고 생각해요. 강의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영국에 돌아가면 이번 워크숍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저희 박물관에 있는 한국 도자기 등을 재평가·분류하는데 적용하고, 런던대 강의 때에도 활용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전문적인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는 큐레이터들에게는 일부 일반적이고 역사적 흐름을 개관하는 강의 내용보다는 좀더 세분화되고 전문적인 몇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춰서 강의 편성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박물관의 실무적 측면, 예를 들어 유물의 진위 구별법이라든가 유물의 진열법에 관한 주제들도 다루었으면 해요. 그리고 전반적으로 워크숍 일정이 빠듯하다 보니 강의 후 토론 시간이 부족했고 박물관에서 유물을 감상할 충분한 시간도 없었습니다. 지방 답사는 제가 이전에 가보지 못했던 곳들을 둘러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특히 경주에서 감은사에 이르는 코스는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샬롯 홀릭은 박사논문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워크숍이 끝난 후 2주간 한국에 더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