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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은 첫말 '우리 나라'

내가 한국에 와서 가장 처음 접한 단어는 ‘우리 나라’였다. 선명하고도 가깝게 느껴지는 단어이기도 하다. 지난 2세기 동안 서구에 있었던 폴란드의 망명자들도 자신들의 조국을 그렇게 표현했다. 어릴 때부터 강렬하게 나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탓일까,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가슴 속에서 울려나오는 떨림이 감지됐다.

저녁식사 시간에 부모님과의 대화에서, ‘자유 유럽’이라는 해외에서 보내는 단파 라디오방송에서, 그리고 모든 위험했던 상황에서 자주 들어왔던 단어이다.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역사 속의 한국은 국토 분단과 일본과 중국이라는 이웃 강대국의 위협 속에서 격동의 세월을 잘도 견디어 왔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서울 시내로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내가 묵을 숙소 근처에 있던 연희동 성당이었다. 한국에 온 첫날부터 타국에서의 낯설음과 외로움으로부터 내게 안식처가 되어준 곳이기도 했고, 이 나라의 기독교 신앙을 알게 해준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나는 한국인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개방적이고 활달하며, 인내심 많고 단결된 모습을 보았다.

또한 너무나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느껴지는 한국인의 따뜻한 ‘인정’을 매일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밤낮에 상관없이 온 나라 전체에서 느낄 수 있었다. 몇 해 전 누군가가 내게 해주었던 말 그대로 한국에서 가장 좋은 것은 ‘인정’이 아닌가.

성당을 지나쳐서 그 다음으로 내가 접한 것은 나의 한국 체류를 돕고 있는 연세대 최건영 교수의 가족이다. 그 가족을 통해 이 나라에서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단위인지를 알게 되었다.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나 아빠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물론이고, 족보를 통해 내려오는 가문에 대한 애정을 봐도 그렇다. 내가 이전에 번역한 적이 있는, 한시의 대가 최치원에서 최건영 교수의 아이들에까지 이르는 족보의 역사를 보았을 때의 놀라움이란.

서울에 와서 한국 문화의 한 상징처럼 눈에 들어온 것이 있는데, 연세대 근처의 안산에 우뚝 서 있는 망루가 그것이다. 그 꼭대기의 굴뚝에 밤에는 불꽃으로, 낮에는 연기로 소식을 전했을 세월들을 상상해보면서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의 역사, 세종대왕, 일본의 강점기 등을 떠올려본다. 바로 그곳에서 현재의 서울이 얼마나 우여곡절도 많고 기구한 도시였던가를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멀리까지 퍼져 있는 흰색 아파트 건물들과 사이사이에 여기저기 산재하는 높고 험한 산들이 매우 인상적이다.

외부 강대국의 침략에 시달리면서도 자신들의 전통과 역사를 지켜 가려는 의지가 한국인들에게는 강하게 남아 있다. 여기서 만난 어느 외국인의, ‘한국인은 국수주의자’라는 의견에 그래서 더욱 동의할 수 없다. 어떤 특수한 지정학적인 상황에서는 그것은 미덕이 될 수도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한 한 방법임을 폴란드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동쪽의 ‘국제주의’와 서쪽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을 모두 방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한국에서의 첫 나들이는 전라남도와 부여를 도는 호남 지방으로의 여행이었다. 재단의 초청으로 세계 곳곳에서 온 펠로들에게는 한국의 유적지를 답사하고 전통문화를 접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기회였다. 아마도 전라남도 지방의 광주라는 도시는 폴란드로 치면 뽀즈난과 그단스끄와 같은 역사적 무게가 담긴 곳인 듯하다. 80년대의 민주화운동과 저항정신이 지금도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여행에서 이 나라의 풍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드넓은 평야와 목장, 부드러운 곡선 같은 언덕과 멀고도 가까워 보이던 산길도 고향의 자연을 그리워하는 나를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이미 가을도 무르익어 형형색색으로 물든 자연의 모습은 말로 형언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마치 동화 속 세계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자연이 주는 거대한 평온감, 이것은 가는 곳마다 인공적 아름다움이 배어 있던 일본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산 속 깊은 계곡에 자연과 어우러져 있는 송광사와 운주사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삶에 대한 겸허한 태도도 그렇고 석조전에 대한 의식이 일본과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어느 비구니와의 대화도 잊을 수가 없다. 타 종교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묻자, ‘선(禪)사상’은 카톨릭과 가장 가까우며 자신은 수녀들과 가장 친하게 지낸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서 받은 경건한 마음가짐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작고 약한 것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한 것이었는지 궁금했다.

서기 538년부터 123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를 보호한 부소산의 요새와 신라와 당나라의 침략에 삼천 명의 궁녀가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고 하는 낙화암에서는 뜻밖의 수확도 있었다. 그 역사의 흔적을 보고 나니 갑자기 송익필과 이명한의 한시가 새로운 의미로 떠오르면서 내 가슴에 살아 숨쉬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이제는 그들의 시를 다르게 읽고 제대로 번역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한국 고전 한시를 따라 각지를 여행하면서 이해하는 꿈을 꾸어 보았다.

그 어디에서도 접해보지 못했던 열린 마음과 따뜻한 사랑, 두려움이 아니라 평화를 주는 투박함과 소박함에 감사한다. 최 교수님과 그 분 가족에게, 한국을 연구할 기회를 주고 답사여행 중 그토록 세심하게 우리를 돌봐준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지창선 씨에게도, 그리고 한국에서 살고 싶은 충동을 준 모든 것에 대해서도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늘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