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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사의 올바른 위상을 위하여

이 글은 1998년 12월, 해외소장 한국 문화재 조사사업을 마무리하면서 재단이 개최한 세미나에서 유홍준 교수가 발표한 ‘세계에 비친 한국 문화재’라는 기사를 읽고 보내온 미국 클리브랜드박물관의 일본·한국 미술담당 큐레이터인 Michael R. Cunningham의 서한(지난호에 개재)에 대한 유홍준 교수의 답신입니다.
이 주제에 대하여 관심 있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기고가 이어져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친애하는 마이클 커닝햄 선생님,
지난번 저의 기고문에 대한 선생님의 충정 어린 편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국의 문화재에 대한 연구, 또 그것에 대한 사랑이 한국인 고유의 임무이고 자랑이라는 생각이 은연중 깔려 있는 한국인들에게 선생님 같은 이국인의 애정 어린 충고는 많은 반성과 생각거리를 던져주었으리라 믿습니다.

우선, 선생님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간단히 대답하겠습니다. 아직까지 서구의 유명 미술 관련 출판사에서 발간된 영어로 된 한국 미술사 책이 없다는 저의 지적은 듣기에 따라서는 외국 출판계가 한국 미술사를 무시했다는 뜻으로 비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취지는 분명 그들이 출판하지 않으면 안될 저작이 한국인에 의해 쓰여지지 못했다는 반성의 뜻이었습니다. 이 점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진실로 한국인이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만든 안내책자가 아니라 세계적인 미술 관련 출판사가 앞장서서 출간해 줄 영어로 쓰여진 한국 미술사 책이 하루 속히 쓰여지길 희망합니다. 물론 그것은 한국인의 저작일 수도 있지만 선생님 같은 외국인 한국 미술사 연구자의 저작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한국미술사 연구가 그 독자적인 아름다움에 관한 탐구보다는 중국 미술과의 상관관계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는 선생님의 지적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점은 저도 평소에 대단히 불만스럽게 생각해 온 바이기도 합니다. 특히 회화와 불상 연구에서 그런 경향을 많이 보여왔습니다. 저는 그들이 왜 그런 접근 방식을 취하게 되었는지 불만스럽게 생각하지만, 또 그런 연구에서 얻어진 성과에 대해서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본래 이런 양식비교론의 목적은 중국 미술이 미친 영향을 분석하여 한국 미술의 특성을 더욱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러나 그 연구가 비교에 그치고 원래의 목적에 다가서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겠지요. 그러나 한국 미술의 특징이란 한국, 중국, 일본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미술의 보편성을 말하는 가운데 한국 미술만의 특수성을 드러낼 때 제 빛을 발한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양식비교론은 부정될 것이 아니라 더욱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하리라 믿습니다.
이점에서 저는 한국 도자사의 연구가 좋은 표본이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지금 한국 도자사의 연구를 보면 주로 한국 도자의 특질을 논하는 가운데 중국, 일본의 그것과의 상호관계를 부차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 도자의 특질은 잘 나타나고 있고 또 모두가 크게 공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한국인들의 해외 문화재에 대한 편협한 생각에 대해 한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인들은 아직도 문화재의 해외 반출, 또는 해외에 있는 한국 문화재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저 개인의 생각을 말하자면 이는 명백히 한국인의 잘못된 생각이고 또 오해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한국 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사도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해외에 있는 문화재에 대해 이렇게 너그러운 생각을 갖는 데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일제시대에 받은 피해와 상처가 워낙 컸기 때문에 쉽게 잊혀지지도 않고 논리적으로는 수긍하면서도 심정적으로는 부정하는 자기 모순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같은 전문가는 대개 선생님과 같은 생각이니 언젠가는 정상적 자세로 돌아올 것이라 믿습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사설문화재단이 앞장서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 파리의 기메박물관에 한국실을 개관하는 데 적극 나서고 있는 것도 좋은 전조가 아니겠습니까?

마이클 커닝햄 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같은 미술사가 또는 박물관 관계자가 미국에 건재하고 있음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클리브랜드 박물관이 한국의 회화, 도자기, 불상의 수집에 큰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고 동아시아 미술에서 한국의 비중을 부각시키려는 노력에 경의를 표해 마지않습니다.

양송당 김지의 ‘한림제설도’라는 명작을 구입한 과정이나 ‘청화백자 용문 항아리’ 같은 대작을 구입한 것, 그리고 선생님께서 제게 한국 회화의 명품을 구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신 그 간곡한 말씀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한국인에게는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마침 제가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경주편이 영문으로 번역되어 나왔기에 한 부 보내드립니다. 제목은 「아기부처의 미소」로 되어 있습니다만 부제가 ‘경주의 문화유산 감상하기’로 되어 있듯 일종의 문화재 해설서입니다. 그러나 이 글에는 한국의 문화유산이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상처받았으며 또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진 채 한국인 스스로 무관심하게 지내왔는가에 대한 제 쓸쓸한 생각들이 담겨 있답니다. 이 책을 읽으시면 같은 미술사가라도 선생님과 저의 연구 환경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조금은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마이클 커닝햄 씨. 지금 독일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미술 전시회가 아주 좋은 평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전시회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만, 이런 해외전이 더욱 많이 열리고 그 때마다 좋은 도록이 제작되고 그를 계기로 한국 미술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간다면 머지않아 한국 미술이 제대로 대접받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한국 미술에 대한 선생님의 뜨거운 열정과 애정에 다시 한번 감사와 존경을 보내며, 이런 의견교환이 더욱 자주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