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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우호의 무대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한 지 정확히 10주년이 되는 바로 그 날에 볼쇼이 극장에서 한국과 러시아의 음악과 무용이 만났다. 올해는 한국이 동구권과 수교한 지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많이 열렸고 재단이 주관한 행사 역시 몇 가지 있었지만 볼쇼이 극장에서 펼쳐진 공연은 한-러 양국의 합동 공연이었다는 점에서, 또한 세계 공연예술의 메카로 일컬어지는 볼쇼이 극장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볼쇼이를 보지 못하면 러시아의 절반을 보지 못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또한 볼쇼이 무대에 한번이라도 섰던 예술가는 볼쇼이 무대 데뷔 10주년, 20주년 기념식을 가질 정도로 큰 명예로 생각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발레리나 혹은 발레리노, 솔로이스트, 오페라 단원, 연출가를 막론하고 최대의 꿈을 볼쇼이 극장에 서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한 마디로 볼쇼이 극장은 러시아인들의 자랑이며 자부심 자체이다. 지난 9월 30일, 그러니까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한 지 정확히 10주년이 되는 바로 그 날에 볼쇼이 극장에서 한국과 러시아의 음악과 무용이 만났다.

올해는 한국이 동구권과 수교한 지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많이 열렸고 재단이 주관한 행사 역시 몇 가지 있었지만 볼쇼이 극장에서 펼쳐진 공연은 한-러 양국의 합동 공연이었다는 점에서, 또 세계 공연예술의 메카로 일컬어지는 볼쇼이 극장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이번 공연은 재단과 국립국악원 공동 주최 형식으로 개최되었는데, 재단이 러시아측과의 교섭을 담당했고 국립국악원 연주단원 26명이 파견되었다. 볼쇼이 극장의 합동공연 1부에서는 수제천(궁중음악), 살풀이, 청성곡(대금독주), 가곡, 사물놀이 등 5개 프로그램을 공연했다. 2부에서는 볼쇼이 전속 오케스트라, 발레단, 가수 및 합창단의 무대를 마련했는데, 이 중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임종필 교수(피아노)가 볼쇼이 오케스트라 및 발레단과 협연했다. 또한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볼쇼이 발레단의 정단원이 된 배주윤씨는 “베네치아의 카니발”에 나와서 세련된 춤 솜씨를 보여주기도 했다.

모스크바 공연에 앞서 9월 25일, 블라디보스톡의 고리끼 극장에서의 공연은 비록 러시아와의 합동 공연은 아니었지만 한국의 순수 전통음악과 무용을 선보인 연해주에서의 첫 무대였는데, 수제천, 춘앵전(궁중무용), 가야금 산조, 대취타(궁중음악), 언락(남창가곡), 살풀이, 청성곡, 사물놀이 등 8개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러시아가 공연예술 문화가 발달한 나라라는 것은 극장의 규모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웅장한’, ‘거대한’ 이라는 뜻의 ‘볼쇼이’다운 면모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관현악 단원 200여 명, 독창가수 50여 명, 합창단 170여 명, 발레단 250여 명, 실내악단 100여 명, 소년합창단 30여 명, 무대제작관계 인원 400여 명, 각각 25개나 되는 오페라와 발레 레퍼터리, 매년 280회의 공연기록 등은 그 숫자만으로도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공연을 사랑하고 즐기는 관객의 태도인데, 모스크바에서는 일반 시민은 말할 것도 없고 거리의 부랑아조차도 볼쇼이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레퍼터리가 있고, 공연을 보러 갈 때는 새 부츠로 갈아 신는다고 한다. 공연 중에 휴대폰 울리는 소리를 한두 차례 듣게 되는 서울의 문화와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러시아 동쪽 변방 도시에 세워진 고리끼 극장도 1층 로비에는 900명 관객 전원의 외투를 걸 수 있는 옷걸이가 준비되어 있었고, 객석은 소음이 많은 1층 입구와 로비로부터 멀리 떨어진 2층에 있어서 공연을 잘 감상하기 위해 설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톡과 모스크바에서 우리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얻은 것은 단연 사물놀이였다. 수제천, 가곡, 청성곡 등 앞의 조용하고 느린 음악과 대비가 되어서이기도 했지만, 사물놀이의 폭발적인 에너지와 현란한 몸짓은 러시아 관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특히 자반 뒤집기를 할 때는 수 차례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극동대와 모스크바대에는 사물놀이 동아리가 활동을 하고 있을 정도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고 인기도 높다고 한다. 실제로 필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고려인 4-5세와 현지 러시아의 대학생들이 만든 사물놀이 동아리의 연습실을 찾아가서 공연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사물놀이에 대한 좋은 반응은 어쩌면 예고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볼쇼이 극장의 2부 프로그램 중에 가장 돋보인 것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을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추어 발레로 연출한 작품이었다. 곡의 대부분이 빠른 템포이기 때문에 무용수들이 평소에 매우 어렵게 느끼고 있는 작품이었는데, 피아니스트 임종필 교수는 원곡의 빠르기를 유지하려는 오케스트라와 충분한 표현을 위해 가급적 느린 반주를 요구하는 발레단 사이에서 훌륭히 중재역할을 하며 주 선율을 연주했다. 약 20분간의 환상적인 연주와 무용이 끝나자 관객들은 놀라운 조화를 이루어낸 주연 무용수 니콜라이 치스카리체와 임종필 교수에게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필자는 이번 사업을 세부적으로 기획하는 데 관여했기 때문에 리허설과 장비 세팅, 본 공연을 객석이 아닌 무대 뒤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공연을 정면에서 제대로 감상할 기회가 없어서 아쉽기는 했지만 볼쇼이 극장의 무대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구경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특히 무대에서 신들린 것처럼 춤을 추던 무용수들이 커튼 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면서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질감을 느꼈다.

‘공연의 수준은 무대 뒤에서 결정된다’는 말이 있는데 볼쇼이 극장의 무대 뒤편에서는 많은 인력이 투입되어 세부사항까지 분업화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한국 측은 무대, 조명, 음향 분야를 합해서 3명만이 분투하고 있었기 때문에 1부를 2부와 대등한 무대로 이끌어 가기에는 역부족이지 않았나 싶다. 기술 스탭에 대한 보강은 한국의 공연예술을 해외에 소개할 때마다 되풀이하여 제기되는 문제이지만 아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이번 공연을 통해 느낀 새로운 점은 예술에 있어서 전제조건은 독창성이지만 예술을 예술답게 만드는 것은 완성도라는 사실이다. 볼쇼이 측의 예술은 단원과 스탭들이 고된 훈련을 통해 연기, 음악, 무용, 조명, 무대장치 등의 완벽한 조화를 통해 탄생하였기 때문에 높은 완성도로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이에 비해 한국인들은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를 부르짖지만 이것은 한국의 예술을 해외에 소개할 때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자면 한국적인 독창성을 가지고 있어야 세계 무대에 나설 수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공연예술을 다른 문화권의 시간적, 공간적 조건(서양의 경우 극장의 무대) 속에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많은 실험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