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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행운: 한국학과 나

인정을 하든 안 하든,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상황의 희생자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에 의해 삶이 결정되고, 모든 상황은 자신의 시간의 산물이라는 면에서 그렇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갈 여지는 있다. 나와 한국의 관계도 바로 그랬다. 내가 처음 한국을 경험한 것은 미군에서였다.
대학을 나온 뒤 나는 군 부설 언어학교에서 아랍어를 배울 것에 동의하고 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기초 훈련이 끝난 뒤 가게 된 언어학교에서 나는 억울하게도 아랍어 할당 인원이 다 채워졌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서류 한 장만 검토하고는 한국어반으로 배치되었다.
한국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과연 내가 지도에서 한국을 제대로 찾을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콜로라도와 위스콘신의 작은 마을에서 자란 나는 동양인을 만난 적이 거의 없었고, 아시아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내가 아시아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중국 식당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생소한 환경에 적응하는 데 있어 나를 자극했던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나 이성적인 관심보다는, 단지 언어학교에서 탈락하면 ‘군의 필요에 따라’ 재배치될 것이라는 자각이었다. 어학훈련 기간 도중 낙오한 운 나쁜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그 ‘필요’라는 것이 종종 보병이나 취사병을 뜻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생각이 비로소 바뀌기 시작한 것은 한국에 배치되면서부터였다. 때는 1990년대 중반으로, 가장 격렬한 반미주의의 시기는 지난 뒤였지만 한국인들로부터 어느 정도 미군이 냉대를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를 지켜줬던 것은 바로 모험에 대한 갈망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한국의 모습을 만나기 위해 기회만 있으면 과감히 먼 곳까지 나갔고, 곧 경주, 부여, 목포, 다도해의 섬들, 동해안, 여수, 부산까지 갔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부터 한국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한국의 음식, 풍경, 때로는 성마르지만 참을성 있고 친절한 한국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자라기 시작했다. 제대하면서 나는 한국이 이제부터 나의 일부가 되도록 할 것이라는 결심을 했다. 한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하게 된 이 길이 이제는 온전한 나의 것이 된 것이다.
제대 후 1년간 나는 완도의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바로 이곳에서 나는 장보고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물론 실제 유적도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나를 동북아시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자랑스러운 고대 한국으로 안내해주었다.
1997년 나는 하와이 대학의 한국사 석사과정에 들어갔고, 1999년에는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그동안 한국국제교류재단은 내가 학생이자 전문가로서 한국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변함없이 함께하며 도움을 주는 동반자였다. 지금은 하와이 대학 한국 전문 사서로 일하고 있는데, 재단의 지원은 한국학 도서 컬렉션을 키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내가 받은 도움을 나만의 방식으로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바로 한국학 진흥을 위한 나의 노력을 통해서 말이다.
운 좋게도 나는 지난 12년간 한국에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를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한국이 엄청난 도전과 어려움을 새로운 자신감으로 극복하는 것을 지켜봤다. 많은 면에서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인들은 내게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전통과 역사에 깊이 뿌리내린 문화이지만, 동시에 놀랄 정도로 변화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며, 항상 스스로를 변화시키려는 열정을 갖고 21세기를 맞이하였다. 앞으로 더 다양한 모습의 한국, 즉 한국의 근본정신이 완전히 새롭게 발현된 한국의 등장을 목격하게 되길 바란다.이 길이 바로 지금 내가 나의 의지로 선택한 길이다. 이 같은 여정에, 내 곁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언제라도 관대함과 지지를 보낼 자세로 함께할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