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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어디까지 왔나

세 이후 서양이 주도해온 세계사에서 아시아는 변방이었다. 그렇게 변방인 아시아에서도 한국은 작은 나라다. 게다가 거대한 힘을 지닌 중국과 메이지 유신 이후 미국과 대적할만한 힘을 기른 일본의 사이에 끼어 인고의 세월을 보내왔다.
변방의 조용한 나라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다시 전란의 화마를 입은 가난하고 헐벗은 나라. 그리고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많은 다른 신생 독립 국가가 그러하듯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이 철권을 휘두르는 나라, 한국의 이미지는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한국이 문화 수출국이 되었다.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 애니메이션 등의 대중문화 상품이 아시아 시장에서 최고의 콘텐츠로 각광을 받고 있다. 아프리카와 동유럽, 미국과 남미에까지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으며 현지에서 좋은 반응을 받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지난 3월 28일 문화관광부가 발표한 ‘2004년도 방송프로그램 수출입 현황 분석’은 ‘한류’의 실체를 뒷받침 해준다.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드라마 수출은 총 5,771만 달러에 달했다. 드라마의 편당 평균 수출 단가도 2003년 편당 2,198달러에서 2004년 4,046달러로 무려 84%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드라마를 중심으로 게임과 영화, 애니메이션 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불고 있는 한류 열풍의 경제적 효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가 내놓은 ‘한류의 경제적 효과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류 효과로 인해 벌어들인 외화는 18억 7,000만 달러(약 2조1천4백40억원)로 추산하고 있다. 또 같은 기간 한류 열풍으로 국내에서 거둬들인 경제적 효과는 1조4천3백39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놀라운 문화적 성과에 대해서 한국 사람들은 ‘한류’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붙이고 있다. ‘한국풍’도 ‘한국 스타일’도 아닌 ‘한류’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한류’는 민족주의와 과거 역사로 인해 갈등의 수위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동북 아시아 한중일 삼국을 잇는 평화의 연결 고리다. 또 일본에 대한 오랜 반감과 동남아에서 가장 부강하지만 물질과 향락이 주를 이루는 싱가포르와 홍콩 문화의 공허함, 중국의 패권주의 모두 부담스러웠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신선함이다.
일본은 이 같은 한류를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이야기되는 나라다. 20세기 초반 ‘탈아입구’를 내걸며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무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강점했다. 이로써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역전됐다. 식민지 체제 성립 이전만 해도 일본에게 한국은 문화 전달자였다. 중국에서 탄생한 첨단 문화가 한반도를 거쳐 한 차원 세련되며 독창적으로 발전한 뒤 이것이 일본으로 전래되는 게 근대 이전까지 동북 아시아 문화 교류의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체제로 인해 한국은 거꾸로 일본을 통해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로부터 60년간 한국은 일본의 경제 시스템과 문화를 따라하는 ‘모방자’로 살아왔다. 소니 워크맨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첨단 가전 제품과 애니메이션, 드라마, 패션에 걸친 대중 문화의 세례를 받아온 것이다. 대중 문화에 있어선 한국보다 몇 걸음이나 앞선 까닭에 일본 대중 문화의 전격 개방을 앞두고 ‘자칫하면 한국문화가 일본 문화에 흡수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불과 4~5년 전만해도 높았다.

아시아를 넘어 남미, 동유럽으로 확산되는 한류
이런 가운데 일본에 거꾸로 한국 대중 문화가 전파되는 역류 현상, 즉 한류가 나타나게 된 것은 잘 알려져 있듯이 배용준과 최지우가 주연한 KBS 드라마 ‘겨울연가’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부터였다. ‘겨울연가’를 통해 한류는 한국 드라마의 일시적 흥행 차원을 뛰어넘어 아시아의 문화적 흐름으로 자리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그만큼 ‘겨울연가’가 남긴 각종 기록은 놀랍다. 일본 NHK 방송은 2003년 ‘겨울연가’로만 무려 35억엔(약 350억원)을 벌어들였다. NHK가 발표한 2003년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매출액(자회사 포함)이 1,445억엔으로 전년 대비 98억엔 늘었는데, 이중 35억엔이 ‘겨울연가’ DVD와 비디오, 소설 등을 판매해 올린 수익이다.
그뿐이 아니다. 세트당 35만원에 달하는 ‘겨울연가’ DVD는 2002년 발매 이후 지금까지 30만 개가 팔려나갔다. OST는 60만장(장당 2,500엔)이 판매됐고, 드라마 삽입곡을 기악곡으로 편곡한 싱글 앨범까지 합하면 음반 매출만 200억을 넘는다. 또 대본을 각색한 소설 ‘겨울연가’를 비롯해 가이드북, 드라마를 활용한 한국어 교재 등 관련 서적도 130만부 정도 팔려나갔다. 공식 집계는 아니지만 이를 토대로 추산할 때 ‘겨울연가’의 일본 내 수익은 지금까지 1,000억 원에 달한다.
일본에 ‘겨울 소나타’라는 이름으로 방영된 ‘겨울연가’는 주연 배우인 탤런트 배용준을 일본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줬다. 일본에서 존경의 뜻이 담긴 ‘욘사마’로 불리는 배용준이 자신이 출연한 영화 ‘외출’을 홍보하기 위해 일본을 찾았을 때 일본 방송이 욘사마에 할애한 총 보도 시간은 당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국 허리케인 보도시간을 넘어섰다.
9월 17일 일본 전역 320개 극장에서 상영되기 시작한 ‘욘사마’ 배용준 주연의 영화 ‘외출’은 개봉 27일만에 220만 명을 넘어서 일본에서 개봉된 역대 한국 영화 가운데 최고의 관객 동원을 기록했다. 영화 ‘외출’은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미국의 클릭스타(Click Stars)사가 높은 가격으로 구매, 오는 11월말 하와이를 시작으로 미국 전역에서 개봉될 예정이고 제30회 토론토 국제영화제와 제24회 벤쿠버영화제에 연이어 초대됐다.
애절한 러브스토리인 ‘겨울연가’가 한류의 초석을 쌓았다면 중화권에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궁녀인 장금이 요리사로, 또 한의사로 성공하는 이야기를 다룬 사극 ‘대장금’은 한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지난해 국내 방영 당시 시청률 50%를 웃돌며 ‘국민드라마’로 불렸던 MBC ‘대장금’은 세계 무대 곳곳에 진출해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며 한류의 새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지난해 5월 대만을 시작으로 홍콩 싱가포르 등 중화권을 차례로 휩쓴 ‘대장금’ 열풍은 9월 1일 드디어 중국 본토에 상륙했다.
후난(湖南)위성TV를 통해 중국 전역에 방송되고 있는 ‘대장금’은 첫 회부터 인기를 끌면서 또 한번의 한류 돌풍을 예고하고 있다. 국영 CCTV 등 막강한 경쟁사를 제치고 방영권을 따낸 후난위성TV는 전 중국을 열광시킨 리얼리티쇼 ‘차오지뉘성(超級女聲)’이 방송되던 밤 10시대에 ‘대장금’을 편성, 매일 2편씩 내달 10일까지 방송한다.
‘겨울연가’ 열풍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린 일본 NHK도 10월부터 ‘대장금’을 지상파에서 방송하고 있다. NHK는 앞서 시청자들의 요청으로 7월부터 위성 BS2채널에서 ‘대장금’을 재방송하면서 드라마 내용을 알기 쉽게 소개한 ‘대장금 대사전’ 등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낸 데 이어, 지상파 방송에 맞춰 이영애의 개인 스토리를 담은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지속가능한 한류, ‘메이드 인 월드’로
올 봄 홍콩을 뜨겁게 달궜던 ‘대장금’ 열풍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홍콩 언론들은 홍콩판 ‘대장금’ 주제곡 ‘희망’을 불러 인기를 더욱 높인 톱스타 천후이린(陳慧琳)이 병상(病床)의 소년을 찾아가 ‘희망’을 불러주며 격려한 것을 일제히 화제로 다뤘다. 한국어 학습 붐이 일면서 국영방송 RTHK에 일본어 대신 한국어 방송 강좌가 개설되기도 했다.
‘대장금’은 이밖에도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전역은 물론, 우즈베키스탄과 이란 지상파 방송에까지 진출했다. 유럽, 미국, 호주 등지의 일본어, 중국어 채널을 통해 방송되는 것까지 포함하면 가히 ‘세계적인 드라마’라 할 수 있다.
한류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남미와 동유럽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권상우, 최지우, 김태희 등 한류스타가 출연한 드라마 ‘천국의 계단’은 10월부터 엘살바도르, 페루, 콜롬비아, 도미니카, 파나마,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등 남미 8개국 지상파 방송사를 통해 방영되고 있다. 또 멕시코에서는 2002년 10월부터 여러 지방 공영TV를 통해 ‘이브의 모든 것’과 ‘별은 내 가슴에’가 방영돼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04년 5월 결성된 한류 스타 장동건과 안재욱의 팬클럽 회원수가 2,000명에 달할 정도다.
동유럽도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다. 아리랑국제방송은 8월부터 마케도니아에서 SBS 드라마 ‘올인’을 방송하고 있다. ‘올인’은 2월 터키에서 방영 당시 시청자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지만 마케도니아에서는 종영 2개월 만에 시청자의 요청으로 앙코르 방영되는 것이다. 아리랑국제방송은 폴란드, 불가리아, 러시아, 리투아니아, 벨로루시,우즈베키스탄 등 동유럽 국가와 독립 국가연합(CIS)에서 한국 드라마 등을 송출하고 있다.
이같은 한류의 성공 원인으로는 첫째, 동양적 정서, 윤리관과 세련된 서구적 라이프 스타일의 결합, 둘째, 서정적이면서도 강렬한 감정을 보여주는 힘, 그리고 셋째, 수 천 년을 이어오며 창조적 문화를 만들어온 전통 등이 꼽힌다. 그러나 과제도 적지 않다. 현재의 대중문화 생산 시스템은 한층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 과도한 스타 의존과 비슷한 스토리 라인을 지닌 천편일률적인 복제 드라마의 양산, 작가와 스태프 층이 탄탄하지 못한 점 등이 바로 한류의 최대 적이다.
문화적 제국주의도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벌써부터 일본과 중국, 몽고 등에서 반한류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한류가 일방적인 대중 문화 상품 수출에 국한되면서 일방적인 문화 패권주의로 흐를 경우 이런 현상은 한층 강화 될 것으로 보인다. 지속 가능한 한류를 위해서는 ‘메이드 인 코리아’의 일방적 한류가 아닌 세계인과 같이하는 ‘메이드 인 월드’의 한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한류를 위협하고 있는 안팎의 난제들을 하나씩 풀어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세계인들이 기쁜 마음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문화를 창조해 나갈 수 있다면, ‘한류’는 21세기 한국인들이 찾아낸 가장 매력적인 발명품이 될 것이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한류’는 민족주의와 과거 역사로 인해 갈등의 수위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동북 아시아 한중일 삼국을 잇는 평화의 연결 고리다. 또 일본에 대한 오랜 반감과 동남아에서 가장 부강하지만 물질과 향락이 주를 이루는 싱가포르와 홍콩 문화의 공허함, 중국의 패권주의 모두 부담스러웠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신선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