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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한국

한국은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비교적 박식한 아시아인일지라도 한국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종종 상충되고 모순된 인상이 떠오를 것이다. 한국인들은 산업분야에서 보여준 놀라운 능력 덕에 감탄의 대상이 되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한류라는 문화의 물결로 아시아를 놀라게 했다. 한국은 놀랄만한 성장을 거듭하면서 일본처럼 서구 클럽에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는 아시아에 깊이 융화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이렇듯 상충되는 인상의 근원을 알아내고, 한국이 아시아에서 더 잘 이해되고 평가 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급속도로 발달한 한국의 경제 성장
한국은 처음에 탁월한 산업능력을 보여주면서 산업화 대열에 갑자기 등장했다. 이 방면에서 한국이 거둔 성공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1960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은 가나와 비슷한 정도였으며, 겉으로 보기에 급성장할 희망은 거의 없었다. 마이클 브린의 책 “한국인(The Koreans)”에는 1980년대에 한국 학생들과 나눴던 이야기를 회상하는 어느 학자와의 대화가 실려 있다. 그 학자는 어디에서 왔고, 무슨 공부를 하냐는 질문을 항상 받았는데, 그러면 자신은 한국의 사상을 공부한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면 학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한테는 사상이 없는데요."1)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성공을 거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최근에 일어난 가장 놀라운 경제발전 사례 중 하나인 한국의 국민총소득(GNI)은 1970년 미화(현 시세) 80억 달러에서 2005년 9,220억 달러로, 거의 115배 증가되었다. 이 기간 동안 1인당 소득은 미화 249달러에서 19,729 달러(OECD 자료)로 늘어났다. 한국 기업은 전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 되었다. 삼성, 현대와 같은 브랜드는 세계의 주요 공항 광고물에서 쉽게 볼 수 있으며, 이는 한국제품의 국제적 인지도를 증명해준다. 최근 실시된 자동차 관련 조사에서는 현대가 미국에서 일본의 경쟁사들을 물리치며 프리미엄급 이외의 자동차 가운데 최고 품질의 자동차로 꼽혔다. 2006년 4월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울산에 있는 현대공장을 보고 굉장히 놀랐다. 평생 그정도 수준의 자동화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삼성과 LG 공장은 훨씬 더 자동화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러한 탁월한 산업능력에 대한 이야기는 전 세계에 한국인에 대한 1차원적인 시각을 제공했다. 그것은 열심히 일하고, 근면하고, 헌신적이며 기강이 잘 잡혀있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힘과 기강의 이미지는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전 세계인들의 상상 속에 만들어져 지속된 한국인들의 이미지는 강건함이었다.


아시아 깊숙이 파고든 한류
세계가 한국인들의 부드러운 문화적 측면을 높이 평가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부드러움이 처음으로 세계무대에서 인지될 최초의 조짐이 엿보인 것은 한국의 문화수출이 산업수출만큼 두드러지기 시작하고, 모든 사람들이 한류라는 새로운 단어를 듣게 되면서부터이다. 한국과 일본 양국민 사이의 오랜 경쟁과 심지어 적대감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한류가 일본 속으로 파고 든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심지어 오늘까지도 일본 수상의 신사참배는 한일 양국 관계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주부들이 한국의 젊은 가수 류시원에게 열광하는 모습은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 젊은이는 명백한 양국간 차이를 뛰어넘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류시원이 유일한 경우는 아니다. 그는 수많은 아시아 국가를 휩쓰는 거대한 한국 문화 물결의 일부분이다. 한국의 이미지는 곧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에서부터 문화(한류)로 옮겨갔다. 한류는 한국 기업에도 도움을 주었다. 서울에 본부를 둔 제조업체 대우전자는 2001년 한국인 배우 장동건을 그들의 베트남 대변자로 내세웠다. 그 결과, 5년 뒤에는 "베트남 냉장고 시장에서 대우전자의 점유율은 미미한 수준에서 탄탄한 34%로 늘어났다."2) 한류는 일본과 베트남을 넘어 중국으로도 진출했다. 한국정부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중국에서 현재 국영 TV 네트워크에 방영되는 한국 프로그램은 미국, 일본을 포함한 다른 외국의 프로그램을 모두 합친 것 보다 더 많다"3)며 한류가 한국 내에서보다 국외에서 훨씬 더 높은 인기를 누리는 현상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서구 문화와 아시아 문화의 적절한 조율
한국 문화의 물결은 세계의 상상 속에 다소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세계에는 강인하고 힘찬 한국인들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는데 한국인은 그 못지않게 부드러운 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미지의 충돌은 한국이 여전히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다. 한국과 일본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 가지 특징은 서구 클럽에 합류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이 기본적으로 서구국가들의 기구인 OECD에 일본 뒤를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가입했고, 한국은 이를 자축했다. 또한 강력한 민주적 역량의 증거를 가진 한국은 서구의 상상을 사로잡았다. 따라서 한국의 성공담은 역사에서 수세기 동안 지배적이었던 서구의 물결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서구는 자랑스럽게 한국을 바라보았다. 한국은 서구가 최고라는 그들의 믿음을 더욱 확신시켜 주었다.
그러나 한국의 성공담은 고대 전통 아시아 사회의 부활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문화적 뿌리는 인도와 중국 문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경주에 있는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나는 승려 일연(1206 AD~1289 AD)이 쓴 삼국유사라는 한국의 문헌에 나온 인도 아유다국의 공주 허황옥의 전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인도 공주 허황옥은 서기 48년에 한국의 고대 가야왕국의 왕인 김수로와 결혼하여 가야의 왕비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이 이야기가 전설일지 모르지만 역사의식에서 전설은 중요한 면을 차지한다.
너무나 짧기만 했던 한국 방문에서 내가 느낀 것은 한국인들이 여전히 서구 및 아시아의 문화세계, 모두와의 유대관계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서구와의 경제적, 문화적 유대가 더 강하다. 그러나 고대 한국의 아시아와의 유대관계를 다시 찾으려는 큰 열망도 존재한다.
2003년에 나는 가족과 함께 부탄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캘커타 공항을 경유해서 갔는데, 공항 대기실에서 젊은 한국 여성을 만났다. 나는 그녀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물었다. 그 여성은 불교문화의 뿌리를 좀 더 잘 이해하고자 부처의 탄생지를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와의 짧은 만남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는 그녀와 같은 젊은이들이 나중에 부처의 탄생지인 네팔 룸비니와 불교 교육의 고대 중심지인 인도 나란다를 방문할 수백만의 한국, 일본, 중국의 관광객들의 첫 번째 물결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중동에 마침내 평화가 찾아오면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지를 보기 위해 무리지어 여행할 것이다.
서구의 식민주의 물결이 몰려와 아시아를 조각조각 분리시키기 전, 많은 아시아 사회는 깊고 오래된 수많은 문화적 연결고리가 있었다. 이런 연결고리는 역사의 서구 물결에 의해 방해 받았다(한국의 경우에는 20세기 초 같은 아시아 국가이면서 서구에 합류하길 갈망하던 일본에 의해서 식민지화되었다).
아시아 사회가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그들의 문화적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하면서 오래된 연결고리는 다시 이어질 것이다. 수많은 문화적 재발견의 물결이 밀려올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은 한국이 중국의 문화, 종교, 기술, 철학의 통로로서 어떤 주요한 역할을 했는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때가 되면 한국은 아시아인들에게 그렇게 수수께끼처럼 보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1) 한국인(The Koreans). Breen, Michael. 2004. New York : Thomas Dunne Books, 5.
2) "일본 여성들, 한류를 타다" (Japaness women catch the 'Korean wave'). Faiola, Anthony. 2006. 8. 31. 워싱턴포스트.
3)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