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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불 간 과학기술 분야의 교류 활성화 방안 모색

프랑스 예수회 신부들로부터 입수한 카시니(Cassini)의 역법은 1744년부터 한국이 역서를 만드는 데 도입되었는데, 이는 최초의 한-불 과학 교류였다. 신역법 도입이 과학분야의 교류라고 한다면 1860년에 이뤄진 새로운 대포 제작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술분야 한-불 교류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인 성서 고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BC 2333년에 세워진 고조선은 당시 셈(Sem)족인 아카드(Akkad)인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수메르(Sumer)인이 동진하여 세운 국가라고 합니다. 같은 수메르인이 유럽으로 간 것은 확실합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훈(Huns)족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훈족의 막강한 전력은 기동성과 맥궁(貊弓)에 의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활(맥궁)은 당시 유럽에서 사용되던 활보다는 훨씬 작고 파괴력도 월등하며 발사속도도 높아 1분에 15발까지 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영ㆍ불 100년 전쟁 때 영국군의 유능한 궁수가 1분에 10발을 쏜 것과 비교하면 맥궁의 우수한 운용성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옛 한국인은 좋은 활을 만들기로 유명하여 중국에서도 동이(東夷)라는 별명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활은 당시 기술의 결정체로서 옛 한국인들은 좋은 활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재료가 없었습니다. 좋은 활의 재료 중 하나는 물소 뿔이었습니다. 물소 뿔 없이는 좋은 맥궁을 만들 수 없는 까닭에 고대 중국에서는 물소 뿔을 전략상품으로 취급하였으며, 이들은 옛 한국의 맥궁과 맞교환했습니다. 당시 이미 기술교역이 시작된 셈이지요.
한국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 이슬람제국 전기인 7~8세기경 실크로드를 통하여 극동과 로마를 연결하던 아랍인에 의해서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시기에는 이미 신라에 사라센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었고 알 아드리시(1099~1166)가 제작한 지도에 신라가 섬으로 표시되었다고 합니다. 만화 <아스테릭스>에서 보듯이 당시 로마인이 프랑스 북부의 골족(Gaullois)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니 한국이 간접적으로 프랑스에 알려졌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13세기에 아시아의 새로운 강자, 몽골제국이 나타납니다. 이로 인하여 동서를 연결하는 아랍인들의 활동이 쇠퇴해지면서 유럽과 아시아가 직접 교류하게 되었으며, 이때 한국이 프랑스에 실체적으로 알려졌습니다. 1245년 몽골에 파견되었다가 1247년 리용으로 귀환한 장 드 플랑 카르팽(Jean de Plan Carpin)에 이어 1254년 4월부터 8월까지 몽골에 파견되었던 길로메 드 뤼브루(Guillaume de Rubrouck)가 그의 기행문을 통해 한국의 존재를 처음으로 서구에 전했던 것입니다.
한국이 프랑스에 알려진 시기와 방법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제일 근거 있게 보고된 것은 라 페루즈 백작인 장 프랑수아 드 갈로(Jean-Francois de Galaup de la Perouseㆍ1741~1787)에 의해서였다고 합니다.
한국과 서구 사회, 특히 프랑스와의 최초 만남은 1787년 5월 한국 남단을 항해했던 라 페루즈에 의해서였지만 진정한 만남은 아니었습니다. 라 페루즈의 기록에 의하면 연안 항해 중 선박을 만났지만 한국(조선)의 선박들은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한국과 제일 먼저 교류를 가진 나라는 프랑스입니다. 수교한 연도로 보면 영국이 프랑스보다 3년 앞서지만 실제적인 교류는 프랑스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해외선교회(Missions Etrangeres) 소속의 신부 모방(Maubant)은 1835년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왔고, 이어서 1836년에는 앵베르(Imbert)와 샤스탕(Chastan) 신부가 조선에 도착하여 최초의 조선인 신부 김대건을 탄생시킵니다. 천주교의 힘을 빌려 권력 다툼에서 승리를 노리던 대원군은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천주교를 탄압하고 급기야는 8000명에 이르는 천주교도들을 참수시킵니다. 이 소식에 격분한 프랑스는 1866년 중국에 정박해 있던 군함 3척을 동원하여 로즈 제독(Admiral Rose) 지휘하에 강화도를 침공하였지만 조선군에 의하여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고 물러갔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당시 프랑스 함대에 막대한 손실을 입힌 대포는 병인양요 이전인 1847년 한국에 프랑스 선교사 참수의 책임을 물으러 오던 중 좌초된 프랑스 군함 2척에서 회수한 병기를 토대로 1860년도에 제작한 신형 대포였습니다. 루이 14세 시대에 강력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프랑스는 아시아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포교권에 도전하게 됩니다. 이 결과로 1687~1773년에는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예수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수적으로 우세하였습니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예수회 신부들로부터 입수한 카시니(Cassini)의 역법은 1744년부터 한국이 역서를 만드는 데 도입되었는데, 이는 최초의 한-불 과학 교류였습니다. 신역법 도입이 과학분야의 교류라고 한다면 1860년에 이뤄진 새로운 대포 제작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술분야 한-불 교류의 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문명이 앞섰던 프랑스는 여러 분야에서 한국을 연구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생물학 분야에는 레빌르(H. Leveille) 박사의 <한국과 일본의 식물>(1904), 의학 분야로서는 셰발(J. Cheval) 박사의 <한ㆍ일ㆍ중의 민간요법>(1868), 그리고 홍종우와 셰발리에(H. Chevalier)의 <한국의 점성술에 관한 안내서>(1897) 등입니다.
20세기 말까지 과학기술 분야의 한-불 교류사를 살펴보면 오랜 시기 문명이 선진화되었던 프랑스에 의하여 선도적으로 실행되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부터는 한국인이 프랑스에서 활동하기 위하여 프랑스로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필자가 기억하고 있는 최초의 과학자는 대한민국 여권번호 16번이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직후 정부요원 15명이 유엔사절단으로 떠났으니, 미루어 짐작컨대 민간인으로는 최초의 해외 출국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소르본(Sorbonne) 대학에서 입자물리를 전공하였고, 나중에 낭트(Nantes)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많은 한국인이 프랑스로 건너갔고, 과학기술 분야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한인들은 1976년부터 과학기술자협회를 결성하여 한국과 프랑스 간 과학기술협력을 위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주한 프랑스대사관의 통계에 따르면 2007년까지, 1,349명의 한국인이 정부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프랑스 정부 장학생 이외에 자비로 프랑스 유학을 한 과학기술 분야 종사자는 정부 장학생의 3배 정도라고 추정하고, 여기에 STAR 프로그램을 통하여 프랑스와 협력한 한국 과학기술자, 이공계 대학의 교환학생 등 프랑스의 과학기술을 접할 기회를 가진 한국인은 3,000명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사람을 중시합니다. 모든 일은 사람에 의해서 계획되고 실천되는 것이니까요. 한-불 간 과학기술 교류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3,000명의 한국 과학기술계 사람들이 프랑스의 과학기술과 접했습니다. 3,000이라는 숫자 자체는 많은 것 같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프랑스 과학기술은 추억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실제로 교류를 하고 있거나, 하려는 과학자들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을 것입니다.
이러한 교류역사와 상황에 바탕을 두는 한편 양국의 과학기술정책 내지는 성향을 감안하여 필자는 한-불 간 과학기술 증진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자 합니다.



1. 인적 교류의 증대
위에서 보았듯이 수치상으로 너무나 적은 인원이 한-불 간 과학기술 교류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 숫자는 미국ㆍ일본ㆍ독일ㆍ영국 등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너무 적으며 효과적인 기술교류를 유발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입니다. 교류증진은 여러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쌍방향이어야 합니다. 3,000명이라는 추산 숫자는 한국의 경우지만 프랑스의 경우는 이 숫자가 정말로 한 줌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효과적인 교류증진을 도모하기는 힘들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기초-응용과학의 혼합적 교류가 필요
필자의 생각으로 한국은 예부터 과학보다는 실용성 있는 기술을 중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도 수출입국이라는 환경으로 인하여 기초과학보다는 응용기술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프랑스는 엔지니어링 분야보다는 기초과학 분야를 중시해왔습니다. 국민적 성향 또한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교류협력은 같은 분야, 같은 수준의 상대를 우선적 교류 대상자로 생각하는 데 비하여 상호보완적일 수 있는 기초-응용의 융합교류는 상대적으로 생각지 않은 경향이 있으므로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초과학은 새로운 응용기술로 발전시키고, 이를 통하여 기초과학을 새롭게 발전시키는 교류협력 형태를 창출해야 할 것입니다.

3. 전문 분야를 넘는 교류협력
전대까지는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학문을 세분화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기술개발 분야에서 이종 간 학문을 접합시켜서 종합적인 기술로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융합기술이라고 명명할 수 있으며, 한-불 간 교류를 증대하는 방안의 하나로 한국과 프랑스가 가지고 있는 우수 분야를 접목시켜 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즉 문화과학기술의 개발로 프랑스 문화를 한국의 정보통신 기술과 융합시키는 한 개의 클러스터 협력방안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