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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건축의 새로운 경향

지난 4월 16일에 스미소니언 프리어갤러리에서 한국 현대건축에 관한 강연이 펼쳐졌다. 강연을 맡은 황두진(황두진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한국 현대건축의 새로운 경향과 한옥의 다양성 그리고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해서 열띤 강연을 펼쳤다.



TradINNOVAtion
이것은 내가 전통과 창의라는 두 개의 영어 단어를 합성한 새로운 용어다. 사실 논의 자체로 보면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미 1960년대 김수근 선생의 부여박물관 논쟁 당시부터 소위 ‘전통건축의 현대화’는 한국 건축계를 지속적으로 관통해왔던, 그러나 별다른 합의적 결론 없이 그냥 용도 폐기 되고 말았던 주제다. 그러나 나는 건축가로서 이 형식적 진부함의 이면에 숨겨진 새로운 가능성에 집중해왔다. 그것은 결국 실천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문제였다.
나는 우리 시대의 현대건축가들이 좀처럼 넘으려 하지 않았던 금단의 영역인 한옥의 세계로 그야말로 나를 ‘밀어 넣었다.’ 그것이 한국건축가로서 어떤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것은 기본적으로 나의 이야기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국 현대건축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계기
나에게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우선 학생 시절의 체험이다. 지금도 나에게는 대학생 시절 가회동 일대의 한옥들을 조사했던 당시의 기록들이 남아 있다. 숟가락, 젓가락까지 다 헤아리는, 다소 편집증적인 이 조사 과정을 통해 나는 한옥에 대해 나름대로 견해를 갖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는 것이었다. 그 미학적 가치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종래의 한옥을 넘어서는 요구를 해오고 있었다.
다음의 기회는 거의 20년 후, 그러니까 내가 본격적으로 건축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무렵에 찾아왔다. 어떤 지인의 부탁으로 그가 구입한 가회동의 한옥을 고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 일이 아니다’라고 거절했으나 오히려 그쪽에서 열심이었다. “건축가들은 누구나 한옥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누구도 이를 직접하려고 하지 않는데, 그러다 보니 한옥은 진화를 멈추고 그냥 옛것이 되고 말았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결국 나는 이 일을 시작했고 새로운 세계에 들어섰다.



방법론의 다양성
나는 다양성을 믿는다. 나의 한옥 내지는 이와 연관된 건축 작업도 이런 생각에 기초한다. 나의 작업은 네 가지 정도의 방법론을 택하는데 물론 이들은 서로 상보적이다. 동시 선택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우선 내가 ‘창조적 복원’이라고 부르는 방법론이 있다. 주로 이전에 있었던 한옥을 고치거나 원형을 중시하며 새로 지을 때 적용하는 방식이다. 보존하거나 복원해야 할 대상과 과감히 개선할 부분을 구별하되, 전체적으로는 전통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 최초의 한옥 작업인 ‘무무헌’ 이후 주로 서울 북촌 지역에서 다뤄왔던 일련의 한옥 작업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그 다음은 소위 ‘추상화’다. 재료나 구법, 형태는 자유롭게 현대건축의 영역에서 선택하되 전통적 방식에 기초한 개념들을 도입하는 것이다. ‘열린 책들’ 사옥의 깊은 처마나 마당, 경사진 골목길을 재현한 계단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청운동주택’이나 ‘문사원’ 등에서 시도한 자연 풍광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 또한 그렇다.
세 번째는 내가 ‘재구성’이라고 부르는 방식이다. 건축의 기능과 형태 사이에 존재하는 전통적 관계를 해체하여 다시 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탈리언 레스토랑이라는 기능을 한옥에 담은 ‘가회헌’이나, 약을 달이는 탕전실을 외부로 공개해 새로운 개념적 가치를 담은 한의원을 만들었던 ‘춘원당’ 등이 그런 예다.
마지막으로 ‘진화된 구축술’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종래의 한옥 짓기 방식을 진화시킨 것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나의 작업은 다양한 한옥을만들어내는 것에 있다. 따라서 나는 전통적 의미의 한옥 전문가가 아니다. 나는 현대건축가의 입장에서 한옥을 현대건축의 하나로 다루고자할 뿐이다. 이 네 번째 범주에 드는 작업으로서는 ‘이천골프장 게스트하우스’를 들 수 있다. 여러 동으로 구성된 이 건물에서 골조는 전통한옥이되, 지붕은 유리로 지은 새로운 방식을 시도했다.

한옥을 넘어서
나의 건축 작업의 목표가 한옥 그 자체는 아니다. 나는 한국 현대건축의 지평을 확장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의외로 가까운 곳에 오랫동안 존재해왔던 한옥을 ‘발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건축가로서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그래서 내 주변 가까운 곳에서부터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는 큰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한옥’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에게 무의미해지는 날이 올 수도 있다고 믿는다. 여정은 시작되었고 나는 뒤돌아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