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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봄, 한국의 문화 향기에 흠뻑 취하다

올해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체한연구펠로로 선정되어 난생 처음 한국 땅을 디딘 필자로서는 한국의 모든 것이 새롭기만 하다. 국제화된 대도시 서울에서는 IT 등 정보기술산업으로 세계를 리드해 나가는 한국의 현대화된 분위기를 만끽하는 한편, 전통문화의 넋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는 지방의 여러 문화축제를 두루 구경하면서 그 속에 스며있는 민족적 정서를 세심히 음미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정말 행운이 아닐 수가 없다. 지난 월드컵을 통해 한민족의 기량과 단결을 아낌없이 세계인에 과시했던 한국의 이곳 저곳에서 숨쉬고 있는 민족문화의 세례를 받으면 받을수록 필자는 이 땅이 점점 더 사랑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이러한 미묘한 느낌은 벚꽃이 흐드러지는 지난 4월 초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성황리에 개최된 ‘2003년 왕인문화축제’에 참가하면서 절정에 오르게 되었다.

전통문화의 체험, 따뜻한 마음의 교류
영암 왕인문화축제의 주인공인 왕인박사는 BC 4세기경에 응신(應神)천황의 초청을 받고 「논어」10권과「천자문」1권을 가지고 영암에서 도해하여 일본의 아스카문화를 꽃피운 유명 학자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왕인박사유적지’는 왕인 박사가 새롭게 조명되면서 후세 사람들이 그 자취를 복원해 놓은 곳이라 한다. 축제 책임자의 말에 의하면 영암군 구림마을에서는 해마다 왕인박사의 정신을 기리는 춘향대제(春享大祭)를 시작으로 향토성 짙은 민속예술 공연과 도포제·줄다리기·정동우물제 등으로 구성된 축제 한마당을 성대히 펼쳐 외국인들의 발길을 모은다고 한다. 그 중 영암군의 특별 초청으로 이번 왕인문화축제에 참가하게 된 우리 외국인들로서는 이 행사가 한국의 민속문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다채로운 왕인문화축제의 프로그램 중에서 특히 전통적인 민속놀이인 길놀이에는 참가자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어 색다른 풍취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반갑습니다. 자원봉사자인데, 옷을 바꿔 입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현장 진행자의 상냥한 말씨에 끌려 체격이 우람한 외국인들도 너도나도 늠름한 양복을 벗고 백제 시기의 상징적 복장으로 갈아 입는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전통문화의 실감나는 체험인지라 엉거주춤했던 필자도 재빨리 옷을 갈아 입었다).

왕인박사가 도일하는 과정을 백제시대의 의상을 입고 왕인박사가 탄행한 곳에서부터 배를 타고 떠났던 상대포구까지 행진하며 재연하고 있다.이윽고 축제가 시작되면서 행렬에서 울려 나오는 꽹과리·북·나팔소리가 하늘을 진동시키는 가운데, 구림마을을 누비는 방대한 축제행렬의 끝에서는 서로 다른 피부색의 외국인들로 이루어진 팀이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우리들이 길 양켠에 선 구경꾼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위 ‘민속춤’을 춘다고 뛰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덩실덩실 춤을 추는 우리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주는 그들의 환한 얼굴에서 따뜻한 마음을 느꼈다. 다양한 의상을 갖춘 우리 행렬은 열띤 축제 분위기와 완전히 하나로 융합된 듯 시종 활기가 넘쳤다. 또한 길 양켠에는 아름드리 벚꽃들이 늘어서 꽃터널을 이루면서 상춘객들을 맞이하는데, 길놀이에 한창인 우리들도 이 한 폭의 ‘풍경화’에 흠뻑 매료되고 말았다.

상포대에서 문산재까지, 박사의 자취마다 탄복이 절로
축제행렬은 우리의 목적지요,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난 곳이었던 상대포(上臺浦)에 이르렀다. 이번 축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가 바로 상대포에서 왕인박사를 배에 띄워 일본으로 보내는 성대한 행사를 재연하는 것이었다. 비록 상대포의 작은 호숫가에서 1600여 년 전의 역사적행사를 상징적으로 다시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백제왕이 신하들을 이끌고 왕인박사를 바래다주는 비장한 장면 속에서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과감히 문명의 씨앗을 전달하고자 했던 왕인박사의 드넓은 도량과 포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영원한 문화 전도사인 왕인박사의 넋을 길이 전하고자 일본인들도 이곳을 찾아와 합동추모제를 올리는가 하면, 박사의 묘지가 있는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枚方市)에서 구간절(음력 9월 9일)에 왕인추모제와 함께 왕인축제를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길놀이를 끝마친 우리 일행은 월출산(月出山)에 왕인박사와 인연 깊은 문산재(文山齋)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한의 금강산’이란 별명을 지닌 월출산은 ‘영암의 얼굴’이라고도 하는데, 월출산의 문산재로 향하는 오솔길을 돌아 오르며 우리는 왕인박사의 자취를 더듬어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죽정마을의 월출산 문필봉 중턱에 있는 문산재는 왕인박사가 공부했던 서당터라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다시 서당을 열고 문산재라 칭하였는데, 이 곳에서 큰 인물들이 많이 나와 그 소문을 듣고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며, 너무 많은 학생들로 장소가 협소해지자 그 옆에 다시 양사재(養士齋)를 짓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진정한 ‘선비’가 되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문산재와 양사재 앞에서 옛 문인다운 포즈를 취하며 너도 나도 기념사진을 남기는 것이 우리들의 필수적인 절차가 되었다.

문산재! 왕인박사는 이 같은 험한 환경도 마다 않고 월출산의 비좁고도 음침한 책굴(冊窟)에서 도를 닦는 데 전념하였다니 탄복이 앞선다. 한·일 양국에 수많은 문화재를 남겨놓아 화젯거리를 만든 왕인박사, 우리 일행은 책굴 앞에 우뚝 서있는 그의 석상을 보면서 자연히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소탈해서 더 정겨운 한국의 사람들

월출산 책굴 위의 암석에 올라서니 영암군이 한눈에 들어왔다. 월출산 아래의 군읍을 신령스러운 바위가 있는 곳이라 하여 ‘영암’이라 부르듯이, 영암은 영기(靈氣)를 한 몸에 듬뿍 안은 천혜의 고장이었다. 영암에서는 왕인박사, 그리고 고찰 도갑사를 창건하여 풍수지리학의 시조로 일컬어진 도선국사와 같은 인물들이 나왔는가 하면 유서 깊은 문화유산들도 수없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 중 구림도기(특히 옹관)는 한국의 도기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자랑거리이다. 이에 구림마을의 영암도기문화센터에서 우리들도 전문가의 시범 하에 갖가지 모양의 도자기를 성심껏 만들어 보았다. 아마추어인 우리들이 날이 저무는 줄 모르고 만든 ‘걸작’들은 다소 모자란 듯 보였지만 그래도 길놀이에서처럼 참가 그 자체가 더욱 뜻 깊은 것이었다.

폐막식의 불꽃놀이날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왕인문화축제의 들뜬 분위기에 축포 소리가 어우러지며 구림마을의 밤이 뜨거운 열정으로 피어났다. 특별히 축제를 위해 마련된 갈낙탕 · 낙지구이 · 짱둥어탕 · 장어구이 등 영암만의 별미들이 서로 맛을 뽐내는 가운데 소주잔을 부딪치며 우정을 나누는 관광객들로 마을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리고 한창 열기가 오른 왕인문화축제쇼는 벚꽃거리를 드라이브하는 사람들과 하나가 돼 또다른 낭만의 꽃을 피워냈다. 무대 아래에서 리듬에 맞춰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너울너울 춤추는 아저씨·아줌마, 고향 땅의 풍요로움을 세상에 자랑하면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기려는 그들의 소박하고도 소탈한 모습에서 왕인 후예들의 밝은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우리의 행사는 점점 깊어가는 밤과 함께 마침내 막을 내렸다. 아쉬움을 뒤로 한 우리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 주는 것은 가로등에 비춰진 벚꽃뿐, 그 아름다운 황홀경은 우리들을 무아지경으로 이끌고 필자 또한 만개한 벚꽃의 그윽한 향기에 도취되었으나, 왕인 후예들의 삶과 전통이 녹아 있는 이 땅의 문화 향기에 더더욱 만취되었다.

편집자 주: YU Cheng Yun은 2003년 2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10개월간 재단의 체한연구펠로십 지원으로 ‘명청시기 료서 강녀사(姜女祠)와 한국문인들과의 인연관계’를 주제로 방한연구를 진행중이다. 왕인문화축제는 영암군과 영암군향토축제추진위원회 주관 하에 1997년이래 현재까지 진행되어오고 있으며, 필자는 재단 소개로 4월 4-5일에 이 행사에 참여하였다. 왕인문화축제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웹사이트(www.wangin. org)를 참고 바란다.